고향으로 가는 마산 길에 거기 해산물을 안주로 술 마시는 일이 빠질 수 없다. 여러 일정 가운데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술맛을 익힌 이래 서울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줄창 술을 마셔왔지만, 고향에서 마시는 술만큼 맛난 적은 기억 속에 별로 없다.
바다를 낀 마산은 예로부터 풍부한 해산물이 술안주의 대종을 이루어왔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나 봐라하는 식으로 술을 마셨지만, 기실 그 연원은 그보다 훨씬 깊다.
어릴 적, 집에 담가놓은 포도주 찌꺼기를 마셔 조그만 놈이 벌개 진 얼굴로 아버지 말씀에 ‘대꾸’하던 것도 그렇고,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있던, 정종을 주조하는 술 공장의 담 벽 초롱으로 흘러내리는 술 찌꺼기를 동무들과 함께 홀짝거리며 마시고는 비틀거리며 아침 햇살이 눈에 버거워 반쯤 감긴 눈으로 길을 헤집어 집으로 숨어들어오던 것도 그렇다. 또 추운 한 겨울, 아버지가 먹고 마시다 남겨놓은 말린 대구로 정종을 몰래 홀짝거리기도 했으니 그렇지 아니한가.
(마산 어시장 입구. 이 근처 어딘가에 옛 '홍콩빠'가 있었을 것이다)
대학생이 되니 어릴 적의 그 酒歷이 ‘빛’을 발했다고나 할까, 공공연한 酒貪으로 마산 선창가를 들락거렸다. 당시 남성동 선창가에 바람 정도만 막을 수 있는 얼기설기한 천막으로 들어선 술집들이 있었다. 안주는 해삼 아니면 멍게, 그리고 생선회 한 두 어 점에 굵은 소금. 컴컴한 바다 쪽을 향해 앉아 마시는 그 정취가 또한 금상의 안주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들은 그 선창가 술집거리에 호칭을 하나 붙여주었다. ‘홍콩빠’라고.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무렵 마산서 술 좀 마셨다고 자부하는 자들 가운데 서로 자기가 지었다고 저마다 한 소리들을 한다. 하도 주변에서 그러니 가끔 헛갈릴 때가 있는데 단언 코 그 호칭은 우리들 70학번이 지었다. 왜 ‘홍콩빠’인가. 술값 추렴을 하다 나오는 “홍콩서 배 들어 온다”는 말에서 유래됐을 것이다. 홍콩에서 라이타 돌을 싣고 배가 들어오면 돈이 생긴다는 뜻으로 호기를 부리다, 그 돈으로 술을 마시는 곳이니까 ‘홍콩빠’로 하자 그랬을 것이다.
선창가 ‘홍콩빠’는 당시 유명세를 탔다. 서울서 학생운동하다 도망 다니던 양반들이 마산을 많이 찾았다. 반정부 활동과 반체제 시로 유명한 한 시인이 마산결핵요양소에 연금 당해있었던 것도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네들이 ‘홍콩빠’를 많이 찾으면서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물론 이제는 ‘홍콩빠’는 없다. 선창가 앞바다가 매립이 되면서 지형도 많이 바뀌어서 어쩌다 한번 씩 추억에 젖어 찾아볼라치면 그 때의 위치도 가물거린다.
고향 떠난 지 오래됐다. 이제는 그곳에 피붙이와 몸 누일만한 곳은 없다. 옛 친구들만 있다. 그러니 어쩌다 마산을 가면 마음이 바쁘다. 만날 사람들이 많은데, 누구를 만나고 어디서 한 잔을 하고, 어디서 몸을 누일 것인가를 궁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궁리가 깊어질 때가 많다. 누구를 만나기는 하는데, 어디로가 한 잔 할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값싸고 맛있고 좀 만만하게 마실만한 곳이어야 하는데 ‘홍콩빠’가 없어진 대신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통술집’이다. 술꾼들에게 이제는 마산하면 ‘통술집’이고 이 주점들이 마산의 술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고들 한다. ‘통술집’은 그 유래가 갖가지 재료들로 한 상 가득 잘 차려진 술상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한 자리에서 술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물론 그 재료들이란 싱싱한 해물들이고 예전에 고깃배를 타고나가 만선을 이루고 돌아온 어부들이 남성동이나 오동동의 술집에서 그런 식으로 마신 것에서 그렇게 된 것 같다.
‘통술집’에서는 안주 값을 따로 받지 않는다. 술값만 받고 안주는 ‘무료’로 제공된다. 이 게 술꾼들로부터 환영받는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는 술집들이 경남지역에 제각각의 지역적인 특색과 함께 술 문화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통영의 ‘다찌’, 진주와 사천지역의 ‘실비집’들이 그것이다. 이들 주점에서도 술값만 받고 안주는 무료다.
객지생활을 하다 찾은 고향에서 나는 객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친구나 지인들이 끄는 곳으로 군말없이 따라가야 한다. 향하는 그 십중팔구가 ‘통술집’이다. 오동동이나 옛 마산극장 부근에는 그 집들로 거리를 이룬 곳이 있어, 주로 그곳으로 간다. 그 집들마다 나름대로 특색을 갖추고 있다. 어떤 집은 구이가 맛있고, 어떤 집은 생선회가 좋고, 어떤 집은 마담의 인심과 분위기가 좋고 하는 그런 식이다. 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다 갖추고 있는 집도 있겠지만, 영 실망스런 곳도 있을 것이다.
마산 친구들이 가는 곳은 그들 나름대로의 취향이라든가 셈법에 의한 것이다. 안주가 무료라고 해서 술값이 저렴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술꾼 나름의 셈법이 있게 마련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마산엘 갔더니 친구들 사이에 나오는 말인즉슨 ‘통술집’ 술값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세 명 정도가면 돈 십만 원 나오는 건 여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잘 골라간다는 것이다.
얼마 전 고향신문을 검색하다 재미있는 기사를 봤다. ‘통술집’과 관련 있는 기사인데, 마산의 ‘통술집 랭킹’을 매긴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베스트 통술집’의 옥호를 보니 한번쯤은 가본적인 있는 곳이다. 그 가운데 1등과 2등 집을 챙겨, 어느 날 마산으로 향했다. 마산의 친구들과 선배들도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일등 집을 갔다. 그 집의 장기는 갈치구이를 잘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전에 왔을 때도 갈치를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은 갈치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안주들로 마셨는데 썩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차라리 랭킹을 몰랐다면 옛 마산극장 위 골목에 있는 집에서 잘 하는 호래기 회나 먹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저께 또 마산을 갔다. 동행한 선배가 갈만한 집을 골라놓으라고 해 찾아놓은 곳이 대구 장자젓갈이 좋다는 오동동 사거리의 어떤 집이었다. 마산 가기 전 어떤 고향지인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집엔 가지 못했다. 마산 사는 후배가 한사코 고집한 집 때문이다. 깡통골목에 있는 집이었는데, 내심 좀 그랬다. 원래 잘 알면서 안면 터놓고 지내는 술집에서는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없지 않은가.
술상에 안주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미역줄기 무침 등 몇 가지는 어디서든 나오는 것이고 계란탕도 그런 것이어서 기대를 접자는 내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안주를 겸한 반찬이 계속 나온다. 거기다 막 무친 취나물이 향기가 짙다. 어라 싶었다. 돔 구이는 부드럽고 풍성하다. 술이 좀 들어가면서 주인아주머니와 말을 좀 텄다. 맛있는 것 숨겨놓지 말고 좀 주소. 그랬더니 살포시 웃으며 내 놓는 회심의 안주가 있었다. 바로 대구 장자젓갈이다. 음식이 깔끔하고 깨끗하다. 술판이 무르익을 무렵 후배가 당부해놓은 게 있었다. 도다리쑥국이다. 후배가 당부한대로 맛있게 끓인 도다리쑥국이었다. 많이 먹고 많이 마셨다. 그리고 대취했다.
결국 다음 날도 우리는 그 집으로 갔다. 전날 나온 차림과 비슷했지만, 생선구이가 돔에서 조기로 바뀌었다. 심심한 맛이 좋았다. 싱싱한 굴 무침, 시래기된장도 별미였다. 이틀을 내리 한 ‘통술집’에서 먹기는 처음이다. 즉석에서 만들어 내놓는 음식에 성의가 담뿍 담겨있었다. 누이동생이 오빠를 위해 마련한 음식이라고나 할까.
2박3일 마산에서의 먹고 마실 거리의 대미는 선창가식당에서 찍었다. 이른 아침부터 ‘통술집’이 문을 열리도 만무할 것이니 그랬을 것이지만, 취기가 좀 버걱대는 와중이라 그런지 깡통골목 그 ‘통술집’이 다시 생각난 건 사실이다. 선창가 그 식당은 1월에 와서 역시 이른 아침에 학꽁치 회를 맛있게 먹은 집이다. 아침 횟 거리로 싱싱한 호래기가 있다고 했다. 그걸 한 접시 썰어 내놓는다. 한 점을 초장 약간 묻혀 입에 넣고 씹으니 단내가 난다. 그 맛을 차마 놓을 수가 없다. 소주 두 병이 게눈 감춰지듯 후딱 날라 갔다. 그리고 잡어 매운탕. 나의 취기와 그로인한 엉뚱함을 잘 아는 선배가 재촉을 한다. 빨리 일나자. 궁딩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