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모함으로 옥고를 치른 후, 선조 30년(정유:1597) 4월 초1일에 옥문을 나와 백의종군의 남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초3일에 길을 떠나 수원·평택을 거쳐 초5일에는 아산의 집에 들렸다.
19일에는 어머니의 상중임에도 남행을 계속하여 공주·은원(논산)·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를 거쳐 29일에는 순천에 도착했다.
다음 달에는 초계에 있는 도원수 권율의 진중으로 가기 위해 우중임에도 길을 떠났는데, 이 행로 중 하동을 두 번 지났는 바 그의『난중일기』에서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5월 26일에는 석주관(石柱關,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171, 지금의 7의사 묘역)을 거쳐 악양의 이정란(李庭鸞) 집에서 유숙하고, 5월 27일에는 악양을 "늦게 떠나 두치(豆恥)의 최춘룡(崔春龍)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후 8월 초3일에는 水谷의 손경례(孫景禮) 집에서 겸삼도수군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의 교서를 받고 "곧 길을 떠나 바로 두치(豆恥) 가는 길로 들어섰다. 오후 8시께 행보역(行步驛, 횡천면 여의리 대덕마을)에 이르러 말을 쉰 다음, 자정이 넘어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먼동이 트려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에 세 번 등장하는 두치(豆恥)는 지금의 어느 곳일까.
1.『진양지』귄지 1「속현」조를 보면, 진주목 서면 진답리(陳沓里)에 속한 11개 마을의 첫머리에 두치촌(豆恥村)이 있다. 여기의 두치촌은 뒤의 두곡촌(豆谷村)이다. 따라서 두치촌은 숙종28년(임오 : 1702)에 진답리가 하동현으로 내속된 후 진답리는 진답면으로, 두치촌은 두곡촌으로 개칭되었다.
2. 그리고 다음의 사료에서 보듯, 당시의 두치촌 및 뒤의 두곡촌은 지금의 두곡(豆谷) 마을과 해량동(解良洞) 일대를 일컬은 것이다.
3. 영조 때의『해동지도』상「하동부」지도를 보면, 지금의 두곡마을과 해량동 앞 쯤으로 보이는 섬진강변에는 두치진(豆恥津)이 있는데, 여기의 두치진은 섬진강 건너편의 섬진을 경유하여 광양으로 통하는 나루터였다.
4. 같은『해동지도』상의「광양현」지도를 보면, 지금의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 쯤과 만지들 사이의 섬진강에는 "중도(中島)" 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만지들에 편입된 지역이다. 그리고 섬진마을 쯤의 아래에는 두치진이 있는데, 여기의 두치진은 하동부의 두치진과 통한다(뒤의 7·8항 참조). 따라서 이은상박사가『난중일기』를 번역하면서 두치를 "광양군 다압면 섬진리"라고 역주한 것은, 바로 여기의 두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5.『경상도읍지』상 순조 31년(1831)에 편찬된「하동부읍지」의 하동부 연혁을 보면, "계미년(숙종 29년:1703)에 읍을 섬진강변의 진답면 두곡으로 옭겼다"고 하였다. 따라서 두곡은 숙종 29년(계미:1703)부터 영조 6년(경술:1730)까지 27년간 하동도호부의 읍기였는데, 여기의 두곡은 지금의 해량동이다. 그리고 지금의 해량동을 구읍내라고 말하는 유래는 이에 연유한 것이다.
6. 또 같은『하동부읍지』상의 장시(場市) 조를 보면 "재부서(在府西)"의 "두치장(豆置場)"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의 두치장은 지금의 해량동에서 개시(開市)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의 장시는 2·7일 장이었는데, 그 후 2일장은 영조 49년(1773)에 부내(府內, 지금의 邑內)로 이설하고, 7일장은 그대로 존치되어 오다가 뒤에 이마저 부내 시장으로 합해진 것이다.
그리고 2·7일의 두치장은 모두 부내로 이설 되었지만, 해량동 선창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해상을 통한 시장으로서 상거래가 성행했던 곳이다. 예컨대 1930년에 발간된『조선지리풍속』하권에는 수 십척의 선박들이 정박되어 있는 해량동 선창의 사진을 싫고(섬진강에서 찰영), 그 아래에는 하동해안의 파지장(河東海岸의 波止場:はとぼ:부두)이라고 소개한 다음 "하동은 진주 서부의 섬진강에 임한 교통의 요지로서 부근 물산의 집산지로 번영되어 왔다. 여기의 시장은 경남도 중 부산시장(釜山市場) 다음가는 제2위로서 연중 거래는 120만원(농산물 38만원, 직물·수산물 순위)에 이른다"고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7. 고종 1년(1864)에 완성된 김정호(金正浩)의『대동지지』상 하동 편 진도(津渡) 조를 보면 "두치진(豆治津, 府의) 서쪽 3리, 광양으로 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옛 군청 터에서 보면 지금의 해량동은 서쪽에 해당된다. 그리고『하동부읍지』등을 보면 화개·악양 및 두치진·두치장은 모두 "재부서"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의 두치진(豆治津)도 역시 두치진(豆恥津)으로서 지금의 해양동이다.
8. 또 같은『대동지지』상 광양 편 진도(津渡) 조를 보면, "섬진 : 동쪽 60리, 즉 하동 두치진"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의 섬진은 광양군 다압면 도사리에 속한 마을이므로, 이 말은 즉 "섬진은 하동 두치진(豆治津)과 통한다"는 뜻이다.
9. 따라서 조선조 후기까지 일컬은 두치(豆恥)·두치(豆置)·두치(豆治) 및 두곡(豆谷)은 지금의 豆谷 마을과 해량동을 통칭한 것이다. 그리고 해량동이라는 지명은 광무 10년(1906)에 진답면을 덕양면(德陽面)으로 개칭하면서 비로소 붙여진 지명이다. 다시 말해 두곡을 두곡동과 해량동으로 나눈 것이다.
10. 그러므로『남중일기』상의 두치(豆恥, 일명 豆置·豆治)는 뒤의 두곡(豆谷)이니, 이 곳은 지금의 하동읍을 통과함에 있어 반드시 지나쳐야할 경로일 뿐 더러, 더욱이 두곡은 숙종·영조 연간의 하동도호부 읍기였던 점을 고려할 때 당시의 두치는 지금의 두곡과 해량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