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황량함과 노스탤지어에 매료되다. 링 오브 케리
Irish Natural Beauty, Ring Of Kerry
순수하고 정결한 창조주의 마음을 담고 있는 링 오브 케리 지역은 청정한 해안선과 초록의 산지, 순박한 양떼가 한 데 어우러진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자연유산이다. 구수한 향기로 잔잔히 피어오르는 전통 문화 속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가 넘쳐 흐른다.
런던이나 파리의 도심 관광이 빠른 시간 안에 맛있게 완성되는 인스턴트 음식이라고 한다면 아일랜드 여행은 도자기 빚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여야 제 맛이 난다. 조물주가 빚어 만든 아일랜드의 대자연을 차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의 묘미를 아는 몇몇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축복이다.
아일랜드 경치는 렌트카로 둘러보는 게 제 맛
한국에서 아일랜드로 가기 위해 먼저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아일랜드 국적기인 라이언에어(Ryanair)로 갈아타야 했다. 갈아탄 비행기는 이륙 후 2시간만에 아일랜드 남서부 케리 공항에 도착했다. 얼른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에이비스(Avis) 렌트카 회사의 니산 미크라(1.0cc)라는 마티즈 크기 만한 소형차를 픽업해 드라이빙에 나섰다.
원시적 초록공간인 아일랜드의 해안선과 자연경관을 보기 위해서는 렌트카가 필수적이다. 그렇다. 렌트카로 해안선 따라 일주하기. 이곳에선 절대 환영이다! 단, 운전 경력은 필히 2년 이상이어야 한다. 길이 좁은 데다가 차량의 핸들이 오른쪽에 있고 좌측통행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여행은 문학과 음악에, 대자연이 어우러져야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 (가끔 기네스 맥주에 아일리쉬 위스키를 섞어야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고 외치는 무서운(?) 친구들이 있다.) 1993년 그리고 2004년. 11년 만에 아일랜드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제임스 조이스나 조나단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로 대변되는 내노라하는 작가들의 문학 도시를 찾아서가 아닌 아일랜드의 빼어난 풍광을 직접 확인하기 위한 여행이다. 예전엔 더블린만 보고 황급히 지나갔었다.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한 격이었다. 이번 아일랜드 여행 일정은 1주일. 일정도 예전보다 느릿하게 잡았다. 이 시간동안 나는 남김없이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꼼꼼히 시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링 오브 케리가 드라마 <아일랜드>의 로케이션이었다면
서론이 좀 길었다. 이곳에 소개할 링 오브 케리(Ring of Kerry)는 1등 짜리 설레임과 감동이 있는 경치를 자랑하는 아일랜드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설악산이나 제주도 쯤. 링 오브 케리는 아이베라그(Iveragh) 반도를 둘러싸고 있다. 케리는 이 지방의 명칭이고, 링은 원을 이루는 도로 내지는 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이 원형 도로를 따라 아이베라그 반도를 둘러보게 된다. 황량함과 산뜻함이 교차된 링 오브 케리의 자연경관은 그야말로 때묻지 않은 순백의 자연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유럽이나 북미 등지에서 하이킹이나 사이클링을 즐기러 오는 여행자들이 많다.
요즘 한국에서는 얼마 전부터 <아일랜드>란 드라마가 크고 작은 이슈를 던지며 방영 중에 있다. 그 드라마 속에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아일랜드의 자연풍광을 보면서 왜 좀 더 자세히 소개해주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마도 필자가 드라마 <아일랜드>의 메가폰을 잡은 연출자였다면 이곳 링 오브 케리에서 올로케이션 촬영을 했을 것이다. 제작비를 무시하고서라도 말이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현빈(강국 역)'이 제2의 욘사마가 될지 누가 알 수 있으랴. <러브레터>식 서정적 연애 장소로 링 오브 케리 지역이 사용된다면 10%대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 드라마의 저조한 시청률 올리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암튼 <링 오브 케리>가 뒷받침해주는 드라마 <아일랜드>는 적어도 <겨울연가>에 우세승을 거둘 것이 분명하다. 늦게라도, 스스로를 싸이코라 자칭한 극작가와 더불어 드라마 <아일랜드>의 골수팬들이 사절단을 만들어서라도 한번 이곳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선한 분위기로 여행자들을 동화시키는 목가적 풍경이 가득
드라마 이야기로 괜히 좀 흥분한 거 같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여행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링 오브 케리 일주의 첫 출발점은 킬라니(Killarney)라는 도시이다. 개성과 자유로움이 거리를 활보하는 이 도시에서 필요한 것은 지도 한 장과 삼단 우산 하나 정도. 링 오브 케리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에 쇼핑할 아이템도 많고, 구경할 만한 아일리쉬 펍들도 즐비하다. 무엇보다 이 도시가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인근에 세 군데의 호수와 킬라니 국립공원이 백그라운드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랄까.
킬라니에서 본격적인 링 오브 케리 도로를 타려면 이 도시에서 20km 서쪽으로 벗어나 있는
킬로그린(Killoglin)에서부터 액셀레이터를 밟아야 한다. 아일랜드 여행에 대한 기대치가 아무리 높더라도 하나의 적수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예상치 못하는 날씨>이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어두워지면 곧 소름이 돋을 만큼 매섭게 바람이 불고 엄청난 소낙비가 퍼부어진다. 다행하게도 이곳을 일주하는 동안에는 간간이 맑은 햇살이 비춰주어 눈부신 경치를 카메라의 프레임에 가두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사실 킬라니에서 포트마기(PortMagee)까지 이어지는 100km 거리의 아이베라그 반도 북부쪽의 풍치는 별로 건질 게 없을 정도로 단조로웠고 날씨도 우울했다. 하지만 포트마기와 브릿지로 연결된 발렌티아 섬(Valentia Island)으로 핸들을 돌렸을 때, '우와'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머릿속에 상상했던 전형적인 아일랜드의 목가적 풍경이 시야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꽃과 나무, 그리고 시원한 그늘이 섬 안에 가득하였다. 거대한 풀밭 위에 누런 소 떼들이 자유롭게 각자 가장 편한 포즈로 누워있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때문에 나른해진 소들이 졸고 있는 듯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갔던 제주도의 목장 풍경이 떠올랐다. 갈대 숲을 지나 파도 출렁이는 해안을 따라 걸었던 목장길. 이곳에 오니 소소한 추억의 향수들이 마구마구 되살아났다.
다시 섬을 나와 차를 몰고 질주한다. 황량한 풍광도 나오고 거친 들판도 나온다. 바위투성이인 해안가가 눈에 익숙하지 않다. 잠시 딴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운전대를 잡고 달리면서 힐끔힐끔 쳐다보다 <우연히 포착된 자연>이 유달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험상궂게 생긴 바위 위에 거친 파도 소리 요란했던 세인트 피난스 베이(St Finan's Bay)를 지나 색색의 빌라들이 촘촘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워터빌(Waterville)이라는 작은 휴양지 타운에 도달하니 어느새 하늘이 먹구름으로 덮이는가 싶더니 조금 있다가 추적추적 비를 뿌린다.
다음날 아침 일찍 워터빌을 출발하여 천혜의 절경을 자랑한다는 데리나인 국립공원(Derrynane National Park)의 전망대로 향했다. 이제야 링 오브 케리의 반환점을 돈 셈이다. 밝은 햇살이 푸른 물결 위에 넘실대는 해안선을 따라 흥겨운 빌리 조엘의 <My Life>를 들으며 드라이빙을 즐긴다. 저 먼발치의 대서양 바다 속에서 돌고래를 타고나올 법한 아틀란틱 소녀를 상상해본다.
어느덧 들어선 전망대에는 수 십대의 차량과 관광버스가 몰려있었다. 지금까지 오면서 이렇게 많은 인파를 보진 못했었다. 끝없이 이어진 해안절벽의 앙상블을 감상하는 대열에 나도 곧 동참했다. 아 얼마 만이지? 나 역시 가슴 가득히 감동의 밀물이 밀려들었다. 모두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풍경을 보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창조주의 섭리가 담긴 대자연의 고고한 기품을 바라보았다.
오! 이런! 수많은 관광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서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가운데 한 무대기로 몰려온 수학여행단 아이들이 저마다 카메라폰을 높이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거대한 원시적 공룡 앞에 21세기의 파워 디지털의 위력을 펼쳐 보이려고 깝죽대며 서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한마디하고 지나갔을 듯 싶다.
지성과 낭만의 분위기가 곳곳에 스며있는 스님과 켄메어
링 오브 케리를 삼분의 일 통과한 지점에 스님(Sneem)이라 불리는 인구300명의 단촐하면서도 귀엽고 깜찍한 타운이 하나 서있었다. 이 타운의 중심에는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그 위에 오래된 석조다리가 하나 놓여 있어 이곳만의 고고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관광객들이 오가는 곳이기에 아일리쉬 펍이 중심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낮 시간인데도 술기운에 젖은 행인들도 간혹 보였다. 실제로 아일랜드인들은 낮이건 밤이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맥주를 즐긴다. 심지어 화장실 안에서도 맥주를 마시는 사람을 보았다. 단,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음주 운전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다는 점. 실제로 이 나라에서 1주일동안 운전하며 다니는 동안 음주단속을 하는 모습을 단 한차례도 본 적이 없었다.
아일랜드인들이 즐기는 맥주는 잘 알다시피 그 유명한 기네스 맥주다. 기네스는 새까만 맥주 위에 하얀 거품이 두껍게 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재미있게 생긴 맥주다. 누군가 언제부터 기네스의 거품만 마시면 살이 찐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아마도 거품이 크림 같아 보여 그런 말을 했나보다. 아일랜드 특유의 양조기술이 만든 주류로는 기네스 맥주 말고도 아일리쉬 위스키가 있다. 스카치 위스키보다 부드러운 맛을 낸다는 아일리쉬 위스키는 스카치 위스키보다 한번 더 증류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맛과 느낌의 차이를 지닌다고 한다.
다시 스님을 떠나 링 오브 케리 일주의 마지막 종착역인 켄메어(Kenmare)로 향했다. 켄메어는 인구 천 명의 작은 타운이지만 관광지로서의 편의시설을 훌륭히 갖춘 곳이다. 링 오브 케리 지역을 반대방향으로 일주하는 베이스 캠프가 되는 곳이기도 하여 이 작은 규모의 타운에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이곳에는 아일랜드가 낳은 위대한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1865-1939)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1856-1950)가 들러 휴가를 보낸 에클레스 호텔(Eccles Hotel)이 있다. 옛 문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많은 아일랜드 문학예찬론자들이 호텔 커피숍에 들러 커피나 홍차를 마신다. 또한 이 호텔은 오늘날 이 주변 일대를 관광하는 투어버스가 반드시 들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캔메어의 중심가에는 라이브 음악의 향연을 펼치는 펍들이 즐비하다. 거리를 걷다 잠시 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귀를 기울여본다. 아일리쉬 음악은 뭐랄까? 기교보다는 풍부한 감성 표현에 중점을 두는 음악인 것 같다. 바이올린 비슷한 악기인 피들(Fiddle)이 내는 째지는 듯한 소리는 처음엔 익숙하지 않은 음색이지만 계속 들으면 나름대로 친숙해진다. 다양한 악기들이 펼쳐내는 언밸런스의 하모니는 아일리쉬 음악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이러한 음악적 요소가 주위를 생동감 넘치게 하나보다. 맑고 탁하지 않은 정갈한 멜로디는 비 오는 오후에 나른함과 우울증을 없애주기에 그야말로 딱이다.
켄메어에서의 첫날을 시내 구경과 휴식으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아침식사를 전문으로 하는 어느 레스토랑에 들렀다. 아일리쉬 블랙퍼스트의 맛은 어떨까? 베이컨, 로스트 햄, 에그 프라이, 케찹에 버무린 콩 따위가 하얀 접시 위에서 그림 같은 식단을 이루어 있었다. 따끈한 토스트에 블랙 티(Black Tea) 한 잔.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오. 단순한 메뉴일지 모르지만 현지인들과 함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른 아침부터 식사를 함께 즐긴다는 것은 하루를 상쾌하게 여는 색다른 체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