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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열도 원정
<개천 배달>
옛날에 한님이 있었는데, 서자 한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주어 그 곳을 다스리라고 보내었다.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한웅이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묘,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고 한다.
한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비롯한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고 하니, 이 분을 한웅천왕이라고 한다. 한웅은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고 또한 문자를 만들었으니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만든 녹도문이 그것이다. 이렇게 배달 문화의 기초를 닦아 세상을 다스리는 때에 곰족과 호랑이족이 같은 굴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한웅에게 기원하여 한족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한웅이 쑥과 마늘을 주어 시험을 하였더니 어리석으나 참을성 있는 곰은 잘 견뎌 한족이 되었으나, 잔인하고 탐욕 많은 호랑이 무리는 참지 못하고 굴을 뛰쳐나가니 한웅이 그들을 사해 밖으로 쫓아버렸다.
배달국의 후예로서 비범함이 커 천왕이 그들로 하여금 비국을 개척케 하니 태호 복희, 여와, 염제 신농, 황제 헌원 등이 그들이다. 태호 복희는 태우의 천왕의 막내 아들로서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직책을 맡다가 천부인의 원리를 발전시켜 역(복희 8괘, 한역)을 만드니 음양오행설의 기원이 된다. 여와는 태호 복희의 누이(아내)로서 황토를 반죽하여 사람을 만들었다. 염제 신농은 배달국 우가 고시씨의 후손으로서 인신우수의 별칭을 갖고 있다. 중원으로 진출하여 하늘나라 배달국의 도움으로 의농을 관장하였다. 황제 헌원은 소전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이다. 소전은 염제 신농의 아버지이며 그 갈라진 후 손 중에 공손씨가 있으니 그가 황제 헌원의 조상이다. 헌원은 자신의 군대를 운사라고 불렀으며, 창힐 등과 청구구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삼황내문을 받고 배달국의 신선 도교를 배웠다.
배달국의 말기에 자오지 천왕이 있었으니 중원으로 진출하여 산동성 일대에 나라를 세워, 한웅 천왕의 배달국에 대하여 국호를 청구국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민족 최고의 전쟁신으로 추앙되어 각종 신화는 물론 종교의 모델이 되기도 하는 천왕이다.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그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 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원래 옛 천자의 이름이며 속되게는 우뢰와 비가 많이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
하나 기자와 아나운서
1.
규호는 일왕을 비롯한 일본 우경화의 책임자들을 질타하고자 그들과 관련된 사이트에 글을 싣는 한편,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 고양을 위하여 관련 홈페이지에 경계의 글을 올린다. 그 후, 규호는 게시판의 꼬리글들과 격려의 메일을 받는 것은 물론, 방송국과 언론 등으로부터 독도에 관한 자신의 글을 요청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한결 같이 강조하는 바, 국가라는 공간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자위권의 저력을 확보함에 한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으로부터 짧은 메시지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당신의 견해에 공감하는 바 적지 않소. 그러나, 국가간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역사를 있게 한 모태가 되지만 미래의 역사는 현존하는 국가의 총체적 활동에 좌우되는 것이오."
발신자의 이름이 없었다. 그 후로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의문의 전보를 곰곰이 생각하곤 했는데, 발신인에 대한 궁금증과 그 자의 의중을 캐고자하면 할수록 미로속에서 원점을 맴도는 절망감을 느끼곤 하였다. 이따금 다나까의 얼굴이 밀려와서는 사라지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간다.
2.
봄의 체취가 물씬 풍겨 나는 3월의 교정을 나선지 얼마 후, 체육관의 문이 열리고 운동복 차림의 규호가 러닝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들어선다. 후배들의 인사를 받으며 관장실에 들어서자 유 관장과 이 기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규호를 맞이한다.
"배 선수, 오랜만이오. 새해 아침에 좋은 꿈이라도 꾸셨소?"
"네,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저 왔습니다."
규호의 인사를 받으며 유 관장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곧 입을 뗀다.
"규호야, 동양 타이틀전이 성사됐다. 일본의 가토가 우리 도전을 받아 주겠다는구나."
"배 선수 꾸지람을 듣고 일본이 열받은 것은 아닐까?“
이 태경 기자의 농담 섞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규호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한다.“알겠습니다."
관장실을 나선 규호가 운동을 준비한다. 로프 스키핑으로 몸을 푸는 규호의 모습을 창 밖으로 바라보던 이 기자가 규호의 탄력 있는 푸트워크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유 관장을 쳐다보며 입을 뗀다.
"관장님, 동경에서의 시합이 괜찮을까요?"
"......"
무거운 표정의 유 관장에게 이 기자가 숨돌릴 겨를 없이 말을 잇는다.
"이제 배 선수라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텐데 적의 심장부로 들어간다는 것이 너무 무모한 일은 아닐까요?"
유 관장이 여전히 입을 다물고 한 쪽으로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 녀석들이 만일 시합 전후에 테러라도 가한다면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유 관장의 시선이 천정으로 옮겨간다. 유 관장은 규호의 독도 발언 파문이 예기치 않은 파장을 일으키자 자중하지 못한 제자를 신랄하게 꾸짖기도 하였었다.
“챔프로서의 국위선양이 결코 그보다 못하지 않을 터, 정상을 향하여 그렇게 단속을 하였건만......”
유 관장은 불현듯 스치는 영상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토해낸다.
이따금씩 본 적이 있는 규호의 범키 어려운 사색과 깊은 눈동자...
“이것이 천재 복서의 한계인가...?”
창문 밖으로 바라본 규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훈련속으로 맹렬히 몰입해 들어간다.
“관장님, 아무래도 재고의 여지가 있는 일 아닐까요? 독도 문제와 챔피언 측의 일방적 통고......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무겁게 입을 닫고 있던 관장이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럴 공산이 큽니다. 그런 만큼 이번 경기는 엄청난 모험이 될 수도 있어요.”
유 관장의 공감에 이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유 관장의 어조가 커지자 이 기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라본다.
"규호가 복서로서 성공할 녀석이라면 마땅히 넘어야 할 벽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계적 복서로서 성장할 녀석이라면 어웨이 경기에서 그 정도의 정신적 열세는 극복할 수 있는 패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기자가 수긍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런 무리한 생각을?”
이 기자의 근심을 해소할 듯 유 관장의 말투가 바뀌지 않는다.
"규호는 독도 문제를 통해 한일 양국은 물론 관심 있는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규호의 동경전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일본 정부는 이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테러에 대비한 치안 유지에 홍역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 수긍을 하면서도 이 기자는 여전히 근심된 표정을 비치며 유 관장을 바라본다.
"그 상황에서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테러가 발생한다면 일본의 국제적 위신은 추락하는 것입니다. 복서 한 명의 운명과 바꾸기에는 손실이 너무 크지 않을까요?"
유 관장의 눈빛이 서서히 비장감으로 물들어간다.
"그리고 또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들의 타이틀전 제의를 거부했을 경우의 후유증입니다.”
기자의 눈빛이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말로 물러설 곳 없는 배수의 진이다. 한반도와 열도의 비난은 아마도 선수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인격마저 땅에 묻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좋은 경기를 치르기 위한 준비밖에 없군요?”
관장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색하여 기자를 바라본다.
"이번 게임에서 이 기자의 역할이 큽니다. 많이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 이 기자를 향하여 유 관장이 말을 잇는다.
"보다 안전한 규호의 신변 보장을 위해 이 기자께서 이번 게임을 대서특필해 주셔야겠습니다. 국내외에 경기 사실이 알려져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이죠."
이 기자가 선뜻 대답을 하고 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관장을 바라본다.
“관장님, 그렇다면 세계 정상까지의 순조로운 도전을 위한 계획은 없던 것이 되는 겁니까?”
관장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요. 저 녀석이 이렇게 일을 저질러 놓았으니...”
“하지만 배 선수가 이 경기만 이기면 동양챔피언이 되고 그러면 세계 랭커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난다면 기간을 훨씬 단축시킬 수도 있는 일입니다만......”
관장의 대답을 흘려 들으며 이 기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의미 심장한 민완 기자의 눈빛이 배규호의 뒷 모습에 꽂힌다.
3.
방송국 입구에서 수위로부터 보도국 스포츠 부서의 방향을 안내 받은 규호가 막 현관을 들어서면서 마침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던 안지원 아나운서와 눈길을 마주친다.
"어머! 안녕하세요, 배규호 선수?"
"안녕하십니까?"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하는 지원의 모습에 규호도 정중하게 답례의 인사를 건넨다. 휴게실에서 한편 커피를 마시고 다른 한편 담배를 피우면서 제각기 무리지어 대화에 열중이던 사람들이 규호를 보자 놀란 듯 술렁이기 시작한다. 분위기를 의식한 지원이 규호의 거북함을 들어주려고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건넨다. 그러나 주변에 개의치 않는 규호가 지원의 건넴을 정중하게 사양한다.
"저는 커피를 즐기지 않습니다."
"참! 그렇겠네요! 운동선수이시니까..."
그리고 곧장 잔돈을 꺼내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으며 규호에게 묻는다.
"우유는 괜찮으시죠?"
"예, 좋아합니다."
자판기로부터 컵을 집어 들던 지원이 문득 생각난 듯 규호를 바라보며 묻는다.
"방송국엔 무슨 일이시죠?"
지원의 내미는 우유 잔을 받아 들며 규호가 대답한다.
"예, 이 기자님과 방송 약속이 있습니다."
“네, 그러세요?“
"동양 타이틀전과 관련해서 대담 프로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네~!"
고개를 끄덕이던 지원이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괜찮을까요, 규호 씨? 독도 문제로 일본 열도가 들썩일텐데요?"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불의의 발언을 그들이 먼저 했고 저는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을 뿐인데요."
지원의 눈빛이 맑게 빛난다.
"제가 아니면 우리 나라 국민 중 누구라도 했을 일 아닌가요? 자위권의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행했을 뿐입니다."
대한 청년 배규호의 애국심에 지원은 몸속으로부터 잔잔한 감동을 느끼기 시작한다. 안지원 아나운서는 체육관에 취재를 갔을 때도 규호를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운동선수로서 스포츠의 한 분야에서 유망주로서 정상의 꿈을 키워 가는 스포츠인으로서, 취재 대상으로 밖에 별다른 인상은 받지 못했었다. 운동선수로서 훤칠한 키에 조각한 듯 균형 잡힌 몸매를 제외하고는 지원이 만난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런 지원에게 다나까의 독도 망언에 이어 터뜨린 규호의 독도 파문은 배규호를 또다른 사람으로 생각케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원은 오늘 규호를 만나서 잠깐의 대화로도 그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일본 원정길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자세를 보면서 대한 남아의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꿈을 안고 대한의 혼을 심은 독립 운동가들의 현신을 대하는 숙연함으로까지 안지원 아나운서는 느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두 사람의 어색한 정적 사이에 끼어 든 한 남자가 휴게실 내 좌중을 둘러보며 박수와 함께 주목의 소리를 외친다.
"여러분, 대한민국 극동의 영토, 독도의 수호자이신 배규호 씨가 여기 와 계십니다." 라고 소리 지르며 박수를 유도한다.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오고 규호는 가볍게 몸을 숙여 인사를 한다. 지원이 그들 중 규호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라는 뿌듯한 기쁨을 가슴에 담고 너볏한 사내를 둘러싼 상황 전개에 기대의 눈빛을 보낸다. 브라운관을 통해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개그맨은 특유의 코믹한 억양으로 좌중을 휘어 잡으며 규호의 행동과 정신을 구구절절이 칭찬한다. 그리고 일본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다짐의 말을 하면서 규호의 선전을 바라는 큰 박수를 유도해 낸다.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은 지원의 안내로 이 기자가 기다리는 방 앞에 선다.
“규호 씨, 저녁에 시간 있죠?”
인사치레의 질문인 듯 규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원이 한 장의 티켓을 건넨다. 지원이 돌아가고 규호가 이 기자와 약속된 방으로 들어간다.
4.
몰려드는 입장객의 인파를 헤쳐 나온 두 사람은 예술의 전당을 뒤로 하고 헤드라이트가 물결치는 어둠의 도로 속으로 미끄러진다. 두 사람의 차는 일군(一群)의 헤드라이트 야경의 한 동점(動點)이 되어 일방(一方)을 향해 달려나간다. 6.3 빌딩에서 멈춘 승용차는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한강의 야경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두 사람은, 다정한 눈길을 줄곧 보내는 지원과 어색하지만 싫지는 않은 규호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어우러져 넓은 레스토랑의 작은 배경이 되어 창가에 자리하고 있다. 오디오의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잔잔한 올드 팝송의 멜로디가 둘의 조화로움을 도와주려는 듯 좌석을 맴돌며 춤을 추다가 이내 두 사람 앞에 놓인 하얀 식탁보에 내려앉는다.
"음악 좋지요? 클래식한 식당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평소에도 좋아하지만 오늘은 한결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군요."
"어머! 저랑 함께 있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지원이 밉지 않게 샐쭉거린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간다.
"지원 씨같이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사회적 저명 여성과 함께 있자니 제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옳을까 고민이 많이 되는군요, 하하"
규호의 추켜 세움에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지원이 애교의 눈길을 슬쩍 규호에게 전한다.
"설마 그러시려구요?"
규호의 의중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은근한 말을 던진다.
"하하,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규호의 대답에 지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에 웃음을 짓는다. 그의 눈동자 속에 그녀의 동공이 춤추며 머문다. 운동선수이면서 패기 넘친 청년 애국자인 것은 확인했지만 그런 사람에게서 상대방의 기분을 맞출 줄 아는 배려와 무드있는 로맨티스트의 자질까지 발견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규호 씨, 여자 친구 있으세요?"
지원의 질문에 문득 대학 시절, 깊게 혹은 얕게 그를 스쳐 지나간 여자들이 그의 뇌리를 파노라마로 지나간다. 그녀들은 모두 규호의 입대와 함께, 자신들의 졸업과 함께 그와의 인연을 부정하며 그를 떠나가고 지금은 단지 글러브와 함께 홀로 서울 땅을 밟고 서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아니요, 없습니다."
가슴 속으로 번지는 싸늘한 냉기를 느끼며 규호가 심중의 외로움을 애써 미소로 숨긴다.
“어머나! 그럴리가요?"
지원이 의외라는 듯 기쁨을 감춘 의뭉스러움을 표정 짓는다.
"규호 씨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나라 젊은 여자들 남자 보는 눈이 멀었나 봐요?"
지원이 슬며시 규호의 마음을 떠보자 막 요리되어 식탁에 차려지는 음식을 바라보던 규호가 공허한 미소로 화답한다.
"지원 씨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보죠?"
규호의 질문에 지원은 다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규호를 바라본다.
"없는가 보군요?, 지고지순한 미혼 여성을 홀로 내버려두다니 우리 나라 남성들도 만만찮은데요? 하하"
규호의 말에 두 사람은 맑은 웃음을 교환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 양팔을 들어서 먹음직한 비프 커틀릿으로 손을 가져간다.
"규호 씨, 오늘 공연 감상은 어땠어요?"
"즐거웠습니다. 지원 씨 덕분에 그간 묵직하게 억눌린 두통과 스트레스가 말끔히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독도 사건으로 규호 씨가 많은 괴로움을 가졌겠구나!"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히려는 지원의 감상을 깨트리며 규호가 덧붙여 나간다.
"공연장이 아닌 다른 곳에 갔더라도 지원 씨와 함께였다면 아마 같은 기분이었을 걸요."
규호의 공치사에 지원이 수줍게 얼굴을 숙이며 포크를 들어 가지런히 잘린 음식으로 손을 가져간다.
"이번 시합에 응원 오셔야죠?"
"네?!"
깜짝 놀라는 지원을 바라보며 규호가 웃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규호의 장난기 어린 모습을 초점 흐리게 바라보던 지원의 가슴 한 켠에 아쉬움이 자리 잡는다.
"초청만 한다면 당장 승낙하고 그의 투혼에 작은 불길이라도 되어 도움이 되고 싶은데..."
여느 아나운서들과 달리 투철한 의식의 소유자로서 학생 운동과 시민 운동의 전력이 있는 그 녀로서는 국가관은 물론 인류애의 큰 마음을 지닌 규호의 의로움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눈길을 깔면서 포크를 내려놓는 지원이 정색을 하며 규호를 바라본다.
"저, 그날 시합장에 가고 싶어요. 규호 씨만 좋으시다면요."
말을 맺은 지원의 눈빛에 강한 기운이 맴돈다. 투명한 사랑을 호소하는 그녀의 시선을 성스럽게 느끼면서 규호는 그녀의 눈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의 눈빛은 이성간의 사랑을 구애하는 그런 흔한 정염의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밑바닥에는 존경과 연민, 동지애의 결합으로 파생된 이성의 감정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녀의 주된 정서는 국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필마 단기로 적진에 뛰어드는 애국혼 충만한 우국지사를 보필한다는 작은 동포애를 표징하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정적의 긴 터널을 지나던 두 사람은 규호가 긴 한숨과 함께 마음을 추스르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지원 씨의 말씀은 고맙지만 이번 동경 대전(東京對戰)은 제 복싱 인생뿐만 아니라 어쩌면 제 평생의 사활이 걸린 경기입니다."
지원의 진솔한 심정을 전달받은 규호는 자신도 솔직해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며 이번 타이틀전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이번 시합을 일본인들은 저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자존심과 용기를 시험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원이 규호의 동공에 빠져 버린 듯 시선을 바꾸지 않는다. 잠시 말을 끊은 규호가 쥬스를 한 모금 들이킨다.
"지원 씨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셨겠지만 제가 일본에 가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원도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힘이 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세계가 일본의 행동을 지켜보는 만큼 지나친 기우일 수도 있지만 테러의 가능성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맞은편 식탁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던 지원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깊은 눈동자를 규호의 눈동자에 맞춘다. 규호가 무언의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을 이어간다.
"지원 씨가 오시면 위험해요!"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행보를,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적진 행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규호를 바라보며 지원은 문득 옛날을 떠올린다. 임진왜란 후 조선의 사절로 가서 일본인들의 사악한 시험을 받았던 사명대사의 일본 체류 일화를......
5.
여의도 KBC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도로가,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어둠 한가운데 하얀 승용차가 다가와 서서히 멈추어 선다.
"어떻게 집까지 가시려고 그러세요?"
"하하, 택시 타고 가죠. 오늘 출연료도 받았는데요."
규호의 말에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지원이 규호를 올려 보며 묻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요?"
"예, 족히 한시간은 걸릴 겁니다. 아마"
"그런데 그렇게 고집을 피우세요? 배웅해 드린다니까...?"
지원의 정감 가득한 힐난을 들으며 규호가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한다.
"지원 씨가 안전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제가 일찍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것보다 마음 편할 것 같아서 그랬죠. 하하"
지원이 눈웃음을 머금으며 가볍게 규호를 흘겨본다. 규호가 그녀의 눈길에 잠시 머물더니 아쉬움을 뒤로 하며, 지원에게 안부를 전하고 승용차에서 내린다. 지원이 바쁘게 따라 내리며 규호가 있는 보도 블록으로 올라서서 오렌지색 바바리의 깃 사이로 하얀 입김을 토해 낸다. 건장한 체구의 규호가 지원의 행동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지원의 여린 이미지가 바뀌면서 어느새 온 얼굴을 비장의 아름다움으로 가꾸어 간다. 바바리의 호주머니 깊이 손을 찔러 넣고 규호를 그렇게 진한 슬픔으로 바라보던 지원이 천천히 그녀의 손을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낸다. 지원의 눈빛을 받아들이며 우뚝이 서 있는 규호 앞으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하얀 손이 다가온다. 진실의 힘 앞에 어떤 거부의 기운도 못 느끼는 규호가 자신의 차가워진 손으로 가녀린 여인을 맞이한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두터움 속에서 포근히 자리잡아 따스한 땀방울이 촉촉이 맺힐 때까지 규호는 그녀를 감싸고 놓을 줄을 모른다. 지금 이 순간만은 온전히 규호를 향해 절대적인 사랑을 보내고 있는 지원의 맑고 깊은 눈동자의 흔들림을 감당하기 힘겹게 마주하던 규호가 정신을 가다듬은 듯 그녀의 심안(深眼)의 호수로 무언의 의사를 전달한다.
"당신을 안고 싶어요..."
규호의 마음을 받은 지원이 기꺼운 눈빛으로 은은한 미소를 머금어 대답한다. 그녀와 순결한 사랑의 눈 얘기를 나누며 규호가 한 걸음 다가서 그녀의 잡은 손을 자신의 품으로 당겨 넣는다. 그와 함께 규호의 코 아래로 청순한 단발머리의 지원이 다가와 바람에 실린 맑은 여심을 향기로 전한다. 단정한 얼굴 아래, 양 어깨에 자리 한 바바리의 두 깃은 마치 붉은 장미의 가시와도 같이, 고결한 여인을 보필하는 기사와 같이 각자의 위치에서 좌우 대칭으로 오똑하게 각을 지어 하늘을 찌를 듯 바라보고 있기를, 그 모양이 마치 지고지순한 여인의 자존심을 상징하듯 차가운 아름다움으로 어우러져 있다. 규호는 고결한 바바리의 양 깃 너머 연약한 수직의 등줄기를 포근한 부드러움으로 감싸 자신의 열린 파카 안으로 지원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다. 지원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몸 안으로 숨겨 버릴 듯, 한 손을 들어 지원의 머리 뒷 부분을 자신의 가슴 윗 부분, 저으기 들린 턱 아래로 가늣 잡아 당긴다. 그리고 포근한 정을 담아 살포시 어루만진다. 지원이 미동도 없이, 단지 자신의 가쁜 호흡만을 규호의 가슴 위로 얹힌 두 손 사이로 벅차게 내어 뿜고, 뽀송한 우유빛 손길에 전해오는 사내의 두터운 가슴을 접하여 여인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흔들린다. 혼돈과 두려움에 빠진 여인의 심경을 아는지 사내는 두터운 손길에 온화함을 얹어 애틋하게 여인을 보듬어 마음을 안정시킨다. 여인의 머리에 얹힌 손을 어깨 너머로 가져 간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옆으로 젖혀 자신의 품에서 데워진 여인의 따뜻한 입김을 좇아 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생전에 겪어 보지도, 맡아보지도 못했던 사내의 차가운 입김을 받으며 첫사랑의 현기증에 깊숙이 빠져든 여인은 얇은 꽃봉오리의 작은 떨림을 사내에게 전하고 이어 느껴지는 사내의 그윽한 애무에 여체는 간단없는 전율의 경이로움으로 환상적 순결의 사랑을 체험해 나간다. 이른 봄 한밤중에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는 봄비가 얇은 바람의 파도에 얹혀 가늘게 휘날리며 연인의 몸으로 날아와 앉는다.
둘 적과의 승부
1.
선수 대기실에서 규호가 새도우 복싱으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다. 그의 주위로 유 관장의 눈빛이 규호의 그것만큼 비장함을 띄우고 봉오는 낮은 구령으로 규호의 워엄업을 도와주고 있다. 이호건 기자 역시 적진에 뛰어든 장수의 결의를 눈빛으로 발하며 촬영 중인 카메라맨의 옆에서 규호를 주시하며 생각에 잠긴다. 이틀 전 오후, 현지에 도착한 일행이 공항 출구에서 처음 마주한 일본 극우 주의자와 혐한 주의자들로 이루어진 한 무리의 규탄 대회를 보면서 규호의 독도 파문을 생생히 체감할 수가 있었다. 하얀 현수막에 빨간 페인트로 쓰여진 갖가지 규탄 문구와 구호를 보고 들으면서 이 기자는 처음에 느낀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가슴속으로 끓어오르는 증오를 느꼈었다.
"제 놈들의 조상들이 우리 민족을 어떻게 괴롭혀 왔고 제놈들 또한 제 조상들과 같이 후안무치의 악업을 여전히 행하고 있음을 인식치 못하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국제적 입지를 고려한 듯 공항 내 외부에 배치되어 평화 시위를 유도하는 경찰 병력 또한 규호 일행에 대한 시선만은 곱지않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기자의 외신 보도의 영향인 듯 관심을 가진 수개 국의 취재진들이 배규호 일행의 일본 입국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다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기자회견장으로 따라 들어간다. 동양 타이틀전의 비중으로는 공항에서의 기자 회견이 언감생심 기대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다나까 전 총리와 배규호의 독도 발언의 파장으로 야기된 한-일 양국의 향후 행보를 세계는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신 기자단이 일본 당국에 요청을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기하고 있던 통역인을 통해서 배규호와 기자단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배규호 씨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전 일본 총리의 국제적 발언을 비난하고 공격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정부를 통할 수 있지 않았나?"
"내가 민간인이면 다나까 또한 민간인이다. 그는 전직 일본 총리이지 현역 총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 민간인의 발언에 대해서 일국의 정부가 공식적 입장을 밝히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정부를 통한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고 보는가?"
"만일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독도의 일본령을 주장하고 나온다면 한반도와 세계는 그것을 전쟁을 불사하는 일본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것이다. 2차 대전 후 세계를 향해 군비 제한의 약속으로 용서받은 일본 정부가 그런 무리수를 두지는 않겠지만 현실의 세계와 동북아 국제 관계에 있어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할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아시아가 일본 전범들의 총칼과 포화 앞에 폐허의 참담함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들이 살아 숨쉬는 아시아에서 과연 어느 나라가 일본의 선전포고를 용인하겠는가? 또한 그럴 경우 남한과 북한은 일시적이나마 일본을 향해 공동전선을 형성할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제국주의적 망상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일본은 비군사적 방법으로,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수십 년간 수명의 전직 고관을 통해 야욕의 독도 망언을 행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그들은 영향력 있는 입김을 행사하지만 정계나 관계를 은퇴하거나 요직에서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므로 우리 정부가 공식 창구로 그들에게 따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만행에 맞추어 우리 나라의 전직 각료를 내세우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일본은 전직 관료뿐만 아니라 현직 관료의 영유권 주장이 있었다. 지난 1996년 이케다 외상은 독도의 일본령을 주장한 바 있다. 이 점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일본의 공식적 입장이야말로 대일 관계에 관한 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위에 있어 바라던 사안이다. 후대까지 지속적인 장기적 포석을 깔고 시대적인 한일 관계의 외교적 문제에 독도 문제를 포함시켜 외교상 우위와 이점을 취해 오던 일본은 현직 각료의 공식적 입장 표명과 외무성 발간지인 외교청서 등을 통해 당면한 국가간 단일 사안의 외교 문제로 국제무대에 제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2차 대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강대국 일본의 억지에 세계는 우려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국제적 분쟁지로서의 독도 문제에 관한 여론 형성에만 노력하던 음흉한 속셈의 일본이 독도 부두의 접안 시설 공사를 행하던 대한민국의 강경한 의지의 표명에 수십, 수백 년간 공들여 온 야욕의 탑이 무너지는 위기의식에서 드러낸 비이성적 행위의 치명적인 실수로서 독도를 바라보는 세계의 판단에 보다 더 올바른 지표를 제공한 사건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일본은 독도 문제에 관한 한 공식적으로 정부가 책임을 지는 신중한 태도로서 임해야 할 것이다."
"일본 현직 관료의 발언이 귀국에 유리한 입지를 제공했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제국주의의 핍박을 기억하며 대일 감정이 사그러들지 않은 이때, 국민의 영토에 대한 애착이 강렬하고 세계의 여론이 아직은 일본을 주시하며 견제 가능한 시기에 독도 문제의 공식적 제기는 우리에게 무조건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2차 대전 전범국으로서의 제재에서 자유로워지는 일본의 군사력이 경제력을 좇아 초강대국의 지위가 확고해지는 미래의 외교 문제로 미루어 두는 것보다는 지금이 올바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그들의 대한(對韓) 외교 첨병으로서의 역할과 구실에 잘 활용되는 독도의 현재로부터 불확정한 미래까지의 장기적 포석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한다."
"아까 배규호 씨는 독도 문제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남북이 공동 전선을 형성하여 일본의 군사력에 대응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럴 경우 남북이 연합하여 양국의 군사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현재의 세계 정세상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지만 우리의 국력이 과거의 어두웠던 시절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말이다.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남북의 공식 전력과 함께 과거 식민지 국민으로 끌어들여 노예화로 부려먹은 수십만 재일 한국인들의 비공식 전력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외부의 적보다 내홍의 게릴라들로 자중지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려면 아마도 대외적 국제 정세의 전환과 대내적 재일 한국인의 완전한 일본화가 이루어진 후에나 가능하지 않겠는가?"
"일본이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 아닌가? 한국의 역사 또한 피침의 역사로 반만년을 이어왔고, 그 중 일본의 침략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현재 일본의 군사력은 경제력 못지않은 강대국이라고 알고 있다. 특히 일본의 해군력은 막강해서 이지스함대의 위용은 인접한 해양 국가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고 보는데,,,당신이 생각은 어떤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일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객관적, 물리적 관점에서만 볼 수가 없는 정신의 문제, 혼의 전쟁이 될 것이다. 일본은 앞에서 말한 객관적 환경과 물리적인 한반도의 국력과 한께 한민족의 혼을 의식하여야 할 것이다."
"한-일 양국의 분쟁지인 독도를 국제사법법원에 제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정당한 조건으로 ICJ에 제소되어 재판을 받는다면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판결받을 것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과 동일 사안이라도 각국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미묘한 국제 환경을 생각하면 강대국 일본의 로비를 감안하여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이다. 여러분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약자의 정의가 구현되는 계기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는 않다."
"일본의 지식인들을 만나 보면 가끔씩 듣는 이야기인데 한국을 침략한 국가나 민족은 숱하게 많은데 왜 유독 일본을 그렇게 미워하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듣곤 한다. 배규호 씨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대일관(對日觀)을 짐작할 것 같다. 거기에 대한 견해를 밝힐 수 있는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반도 유사이래 외세의 침략을 받은 횟수는 무수히 많아 가히 세계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인들의 말과 같이 수많은 민족으로부터 숱한 침략을 받아 왔다. 일본은 그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침략 횟수는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통틀어 비교할 정도로 남부와 동부 지방, 심지어 서부 지방까지 무수히 침략하고 약탈해 갔다. 크고 작은 반도의 피 침략사 중에서 한민족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민족의 침략으로 몽고(원)의 고려 지배기와 일제의 조선 강점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의 조선 침탈기도 한반도에 끼친 악영향은 상당히 컸다. 네 번의 큰 외침을 비교해도 북방의 몽고족과 여진족이 한 번씩, 동방의 일본이 두 번으로 그 횟수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러하므로 현대인의 주관적 고통 체감을 떠나서 역사의 객관적 관점으로 논하더라도 일본 민족에 대한 증오와 경계심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대적으로도 일제 강점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실제 겪은 일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라, 수백 년 전 치욕의 역사를 책 등을 통해 간접 체험하는 객관적 시각과 그런 상황을 실제 겪어서 한을 짊어지고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의 증오심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날지를...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중국을 일본보다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의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통일된 대륙이지만 과거 우리를 침략했던 민족들은 북방의 오랑캐라 불리던 거란, 여진, 몽고 등의 민족으로 대륙의 흥망성쇠의 역사 중에 일시적 흥기와 함께 한반도와의 교린을 구실로 침략해 왔었다. 물론 대륙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던 한족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와 함께 말이다. 과거 한족의 국가들과 상호 교린의 관계를 유지했던 우리 선조들이 비록 사대주의의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 놓은 과오는 있을지라도 중국이 우리 나라에 끼친 문화적 영향은 지대했고 긴 역사 속에 양 민족은 상호 선린 관계를 꾸준히 유지해 왔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로 한족의 중국을 미워할 명분은 일본에 비해 크게 없다. 굳이 들라면 현대에 와서 남북간 6.25사변에 개입해 남북통일을 방해한 과오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대립국으로서의 경계를 늦출 수도 없음이다. 그리고 반도를 침략했던 북방의 오랑캐들은 몽고를 제외하고는 지금은 흔적 찾기도 힘들 정도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해 한족에 융화되어 버렸으니 어디를 보고 원망을 하겠는가? 장구의 세월을 통틀어 한 민족이 그토록 일방적으로 집요한 침략의 역사를 가진 예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과거의 세월을 다 접어 두더라도 그들을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그들의 침략사에 대한 적극적인 왜곡과 만행의 합리화에 기인함이 상당히 크다. 일례를 들자면, 일제시대 일본은 제국 건설의 기반으로 식민지에 세운 각종 산업 시설을 식민지 국가의 개발 목적과 발전에의 기여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침략으로 초토화된 폐허의 나라에 진솔한 사죄의 마음으로 정당한 배상을 함이 마땅한데도 그들은 정부간 형식적인 배상을 빌미로 계속 드러나는 피해의 사례들을 무시하고 적반하장의 논리로 피해 국민들을 백안시한다는 점이 그들의 잠재된 침략주의의 아시아 관을 시사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 즉, 배규호 당신이 일본인이라는 가정 하에서 지리적, 역사적 한일 관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기자의 질문은 한국과 일본의 입장을 바꿔서 한-일 관계를 고려해 보라는 뜻인 듯한데 그런 역지사지의 적용은 일방적 선과 악의 대립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인 악의 행사를 하는 자가 그 악을 당하는 자에게 역지사지를 적용하려는 것은 현실적인 악의 행사를 합리화, 정당화하고자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역지사지의 적용은 정당하고 건전한 일대일의 대립, 선의의 급부와 반대급부의 관계에서 적용됨이 올바르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영토 문제에 있어서 일본과의 독도 분쟁 이외에 다른 나라와의 분쟁은 없는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우리 나라의 영토로서 인접국과 분쟁 요인을 갖고 있는 곳은 동해의 독도와 현재로서는 북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간도를 들 수 있다. 독도가 일본의 억측에 의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반면 간도는 현재 중국의 영토가 되어 북한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독도와 달리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만큼 우리의 영토임을 중국에 대하여 주장하여야 함이 당연하지만 이념과 체제의 문제를 갖고 있는 북한은 이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아마도 통일 한국의 숙제로 남을 듯하다. 간도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 중국과 확정된 국경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나라가 다름 아닌 일본이란 나라이다. 구 한말 19세기를 전후해서 열강들의 아시아 침략기에 한반도에도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 미국과 구주(歐洲) 열강이 각종 이권을 두고 쟁탈이 심하였는데 조선은 간도 문제로 청, 러와 영토 분쟁이 잦아지고 이에 편승한 일본이 만주 대륙 진출을 위해 청과의 거래 대상으로 간도를 청국의 영토로 묵인하는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독도, 간도와 함께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곳은 과거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을 물리친 유서깊은 우리의 영토인데 청과 러시아의 북경조약에 따라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자, 여러분, 약소국의 영토에서 제국주의간에 맺은 이 체결이 과연 유효한 것인가? 또한 이 천인공노할 일본과 청나라의 행위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 한반도의 외교 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나라로 미국을 거론하는데 이견이 없을 줄 안다. 일본, 중국과의 영토 문제 이외로 대한민국의 주권과 관련, 미국에 대한 견해가 있는가?"
"복서로서 외교에 대해서 지식이 짧은 것을 이해해 달라. 내가 독도 문제를 제기한 것은 지식이 풍부하다거나 혹은 국제 정치에 박학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주권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현재 국제 구도에서 당연한 나의 권리, 나의 영토에 대해 타국의 강탈을 경계한 것일 뿐이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과 관련하여 간단히 나의 소견을 밝히자면 현재 분단 한국에서는 그들의 명분이 나름대로 공감을 받는 바가 없지 않지만 한반도 통일 후 과연 그들은 철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명분을 내세워 주둔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주둔을 고집 한다면 분단 상황에서의 그들의 명분은 거짓으로 드러나고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주요 국가 정책은 중국과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경계하는 교두보로서, 그리고 미, 일, 중,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의 장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한반도의 전략 기지화가 될 것이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최대한의 국익 확보가 그들의 의도하는 바가 될 것이다. 구 한말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막기 위하여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열강의 틈바구니에 있는 한반도가 깊이 인식하여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에 응해 주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다. 다나까의 제의가 있다면 그를 만날 용의가 있는가?"
"나는 복서로서 동양 타이틀을 차지하러 왔다. 시합 후라면 만날 용의가 있다. 단, 사죄를 조건으로 한 만남이라야 한다."
규호의 폭탄선언을 들으며 이 기자는 진정한 한국인의 얼을 목격하는 감격으로 규호를 바라보았고 지금은 라커 룸에서 복서로서의 직업에 충실하는 배 선수에게 기특해 마지않는 눈길을 보낸다.
2.
선수 대기실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도전자의 입장을 알리는 장내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가 일본인 특유의 악센트로 흘러나온다. 이방인임을 실감시키는 일본어의 여음(餘音)이 라커 룸을 비장하게 바꾸어 간다. 유 관장의 눈짓을 받은 봉오가 나갈 준비를 하는 규호에게 준비한 태극 마크 띠를 이마에 매어 주고 파이팅의 주먹을 힘껏 쥐어 보인다. 밴디지를 감은 주먹을 봉오의 팔에 걸면서 필승의 완력을 가한다. 파이팅을 외치는 이 기자와 눈빛을 교차한 규호는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외국 기자들의 플래시를 한 몸에 받으며 링을 향해 나아간다. 신변 보호를 위해 배치되어 도열한 일본 경찰들 사이로 태극 띠를 매고 태극 마크와 무궁화로 장식한 가운을 걸친 배규호 선수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선 봉오의 뒤를 따라 유 관장의 어깨를 잡고 가벼운 스텝을 옮기며 쫓아간다. 규호의 좌우, 후미로 체육관 후배들 역시 태극 띠를 이마에 매고 규호를 둘러싸고 있다. 체육관 전체가 단 한 명의 한국 복서를 향해 일제히 야유의 함성을 질러 대고 사방 곳곳에서 폭죽을 터뜨려 댄다.
"펑!펑!펑!"
"퍼퍼퍽!"
"팡!팡!팡!"
"와~! 우우우! 빌어먹을 강고꾸징, 죽여라!!!"
준비된 각본인지 규탄의 아우성 속에서 갑자기 캔과 유리병이 규호 쪽으로 날아들면서 규호의 옆을 가드하던 후배의 등과 머리로 떨어진다. 낮은 비명과 함께 이마를 감싸쥔 후배가 선수 보호의 책임은 잊지 않은 듯 규호 옆으로 더 가까이 밀착해 다가선다. 이마를 두른 태극 띠 안으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자 이를 쳐다보던 규호가 끓어오르는 붉은 피의 분출로 몸을 벌떡 일으켜 흉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분노의 눈길을 쏘아 보낸다. 이때, 다른 후배들이 몰려들어 규호와 상처난 후배를 밀착으로 감싸며 주위를 경계한다. 규호가 가운의 벨트를 빼내 후배의 상처난 이마를 감싸고 지혈을 위해 상처 부위에 힘을 가한다. 장내에 배치되어 있던 의료진들의 응급 처치로 후배가 몸을 추스르는 동안 경찰이 폭행범들을 잡아 밖으로 끌고가고 장내 아나운서의 자중을 요구하는 협조 멘트가 소란의 장내를 조금씩 진정시켜 나간다. 그러나 규호를 규탄하고 가토의 필승을 부르짖는 현수막을 곳곳에 세운 일본 응원단들의 기세는 잦아들지를 않는다. 사태를 수습한 도전자의 대형 태극기가 링 위에 올라 휘날리고 유 관장이 등으로 로프를 받쳐 넓어진 사이로 규호가 가볍게 빠져 들어가더니 링 중앙에 서 있는 링 아나운서의 외곽으로 현란한 푸트 워크와 스피드를 보이며 링을 한 바퀴 돌아 나온다. 꺾이지 않는 대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며 관중을 둘러보던 규호는 재일 교포 응원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든다.
"혹시 일본 과격분자들에게 테러를 당한 건 아닐까?"
그런 우려의 눈빛으로 유 관장을 바라보자 규호의 마음을 읽은 관장도 우려의 공감을 하면서 분발을 촉구하는 듯 이빨을 물면서 격려의 눈빛을 보낸다.
"공항까지 영접나와 그토록 기쁜 표정으로 우리 일행의 매사를 배려해 주던 분들이었는데..."
일본과의 음식차로 컨디션이라도 떨어질까 한국 음식과 반찬들을 직접 차려 와서는 열성적으로 권하며 시합 날에는 대규모 응원단을 구성해서 응원 오겠다고 두 손을 잡고 다짐하던 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규호는 석연찮은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링 주변의 일본인들에게 증오의 눈길을 쏘아 붓는다. 일본의 전, 현 세계 챔피언들이 규호를 주눅이라도 들일 듯이 나란히 앉아 냉담한 눈길을 던진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빛과 교차하며 극일의 눈빛을 강렬하게 전하던 규호가 유 관장과 봉오 등 세컨드들을 멀찌감치 물리치고 한-일 방송단과 내외신 기자단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자신의 모습을 클로오즈업 해 달라는 사인을 보낸다. 카메라가 돌아 규호를 향하고 플래시가 터지면서 규호는 청코너의 말뚝을 향해 가드를 올리며 자세를 잡는다. 야유와 비난의 함성으로 일관하던 관중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규호의 모습을 바라본다. 소란과 함성의 도가니가 일순 정적으로 변하더니 한 사람의 복서에게 하나의 시선이 되어 집중되는 순간이다. 경량급의 푸트 워크로 스피디하게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던 규호는 이어서 사이드 스텝과 위빙, 더킹의 순발력과 유연성을 선보이더니 코너의 말뚝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마치 겨울방학에 팔공산에서 털보의 그림이 새겨진 샌드백을 터뜨려 털보의 얼굴을 피로 물들여 짓이겨 버리듯이...
상대의 안면에 적중한 가공할 원투 스트레이트는 로프에 걸려 뒤집혀 넘어갈 듯 젖혀져서 사각의 링이 청코너만 예각의 마름모를 이루고, 복부에 찍히면서 안면으로 연결되는 좌우 더블 펀치는 해일을 만난 돛단배 마냥 한껏 춤을 춘다. 상대의 가슴에 파묻히며 힘차게 허리를 뒤틀어 1그램의 오차도 없이 온 체중을 실어 찍어 올리는 어퍼 커트를 턱에 찍힌 말뚝은 다른 세 개의 말뚝과 달리 혼자 하늘로 치솟아 쭈욱 늘어나더니 탄력의 끝에서 힘찬 반동으로 내려앉으며 엄청난 속도의 진동을 반복한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로 돌아선 규호가 카메라의 초점을 향하여 양손을 들어올리면서 승리의 제스처를 취한다. 복서 자세로 양팔을 모아 가던 규호가 왼 주먹을 내뻗어 일본이 자랑하는 링사이드의 챔프들을 향한다. 규호의 펀치와 테크닉에 경악한 무표정 무초점의 상대들을 한 명씩 가리키며 눈빛으로 뿜어내는 절대 강자의 기로써 그들을 꺾어 나간다. 잠시 후 링 아나운서의 멘트가 경악과 공포로 감도는 정적의 체육관을 환기시킨다.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대 일본국의 총리 대신을 역임하시고 현재 후진 양성에 정진하고 계시는 다나까 선생께서 입장하십니다. 다 같이 힘찬 박수와 환호로써 맞이합시다!"
수많은 관중들이 일거에 기립하면서 체육관이 떠나갈 듯이, 규호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환호성을 올리며 "다나까!"를 연호한다. 멀리 출구로부터 일본 고유 의상을 차려입은 깡마른 몸매의 노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뱀의 찢어진 눈이 서서히 형체를 키워 오면서 규호에게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검은 사무라이의 무사복에 장검을 허리에 찬, 온 몸으로 고수의 강렬한 기를 내뿜는 두 명의 무사를 좌우에 거느린 다나까가 연약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거인의 기를 규호에게 전하는 것이다. 관중의 환호에 가벼운 답례를 하며 링사이드 중앙에 멈추어 선 다나까가 일광(一光)의 눈빛을 규호에게 번쩍이더니 뭇 관중의 착석을 유도하며 자리에 앉는다. 규호가 다나까를 의식한 듯 봉오로부터 받아 든 태극기를 흔들며 링사이드를 힘차게 돌아 나온다. 방송사의 카메라와 내 외신 기자들의 플래시가 두 적수의 상봉을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을 초점으로 잡아 정신없이 돌아가며 불빛을 발한다.
3.
사각의 링 위에서 마주한 가토는 미들급 복서치고는 키가 작은 편이지만 상당히 다부진 몸을 갖고 있었다. 작은 키에 얼굴은 넓적한 돌덩이마냥 큰 두상(頭相)에 사각의 턱이 쭉 삐어져 나와 있다. 다나까를 연상시키는 실같이 가늘게 찢어져 위로 치켜진 눈초리는 신경전만으로는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만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25전 24승 22KO 1패" 동양 챔프로서의 전적으로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화려한 전적이다. 1패도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흑인 챔피언과 다운을 주고받는 혈투 끝에 역전 KO를 당했던 것이다.
가토의 경기를 몇 번 본 적이 있던 규호로서는 그를 상당한 강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녀석의 터프한 모습은 가히 미들급의 타이슨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펀치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스피드는 떨어지지만 가드를 올리고 상체를 웅크려 돌덩이같이 상대의 가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서 굵은 팔뚝을 휘두르면 거의 모든 선수들이 한 두 방에 다 나가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미들급의 중량으로 전 라운드를 경쾌한 푸트 워크로 가토의 주먹을 피하기는 힘든 것이었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유 관장은 규호에게 가토와의 대전에 대비한 전략으로 두 가지 안을 제시했었다. 하나는 규호의 스피디한 몸놀림으로 가토를 견제하면서 초반을 넘겨 중반 이후에 승부를 건다는 안(案)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초반부터 난타전을 벌여서 승패를 가름하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시합 전날 유 관장이 규호에게 자중을 당부하면서 중반 이후를 노리도록 지시했고 규호는 긍정의 표시인지 아니면 자신의 각오를 다짐하는 결의의 표시인지 눈을 아래로 깔고 고개만 끄덕였다.
4.
링 아나운서가 두 선수를 불러모아 주의 사항을 전달한다. 가토가 규호의 코밑으로 얹힌 자기의 두상을 들이밀며 찢어진 두 눈을 모아 규호를 노려본다. 마치 어떤 강자에게도 눈빛만은 지지 않는 늪속의 악어처럼. 규호는 녀석의 눈빛을 읽으며 굳이 눈동자에 힘을 실어 기력을 소모할 필요성을 못 느끼며 눈길을 거두어 상대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진다. 언뜻 그를 노려보는 섬뜩한 기운이 규호의 몸을 휘감아 돈다. 거기에는 더 큰 적, 다나까가 규호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
1라운드 공이 울리면서 가토가 초반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예의 그의 주특기인 인파이팅으로 도전자를 향해 돌진해 온다. 탐색전은 필요도 없다는 듯, 너같은 버르장머리없는 애숭이는 대 일본 제국의 국민을 대신해서 처절한 초반 KO를 이끌어 내 버리겠다는 듯이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들 듯 달려온다. 순간 규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폭발해 녀석을 한방에 캔버스에 눕혀 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입을 악물고 참는다.
토머스 헌즈와의 1차전에서 물찬 제비의 모습으로 링사이드를 날아다니던 레너드의 몸짓과 같이, 나비같이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아웃 복서의 신화를 만들어 낸 무하마드 알리의 경쾌함으로 규호는 가토의 돌진을 가벼운 사이드 스텝으로 돌아 나가며 무산시킨다. 레프트 훅을 날리며 선공을 가해 오던 가토는 허공을 가른 자신의 손이 쑥스러운 듯 가슴으로 잡아당기며 등 뒤로 사라져 버린 상대를 돌아본다.
규호는 일본 관중의 경탄의 한숨을 들으며 다시 쫓아 들어오는 가토를 기다린다. 느린 스피드에 주먹만 믿고 들어오는 헛점투성이의 가토를 바라보면서 규호는 성급한 마음이 가슴 속에서 불끈 솟아난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오늘의 기회를 위해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마나 긴 세월을 묵묵히 참으며 실력 배양에 힘을 쏟았는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동경 대전에서 나는 내 기량의 100퍼센트를 모두 선보여야 한다. 그것도 1라운드 안에...!" 규호의 눈빛이 섬광을 발하며 강력한 의지의 불꽃으로 이글거린다. 러닝하듯 규호에게 쫓아오던 가토는 맞받아 칠 의도인 듯, 스탠스를 벌려서 자세를 안정시키고 슈우즈를 바닥에 붙여 기다리고 있는 규호를 보더니 가드를 올려 얼굴을 방어하면서 파고든다.
"한 수 아래의 애송이라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녀석의 펀치도 만만하지 않다." 라고 생각한 가토는 규호의 11전 11KO의 전적을 떠올리며 조금 신중한 자세로 도전자를 향한다. 주먹도 주먹이지만 방금 전의 스피드를 생각하니 예삿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도 드는 것이다.
지난해 깜둥이 챔프에게 도전했을 때 그 녀석의 스피드는 정말 놀라웠다. 가토가 워낙 터프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나마 다운도 시키며 중반까지 우세를 지켜 나갔지만 그 여세를 몰아 초반 KO를 노린 나머지 너무 무리를 해서 중반 이후 체력 안배의 실패로 역전 KO당했던 것이다. 주먹은 별로였지만 전광석화같은 연타를 속수무책으로 안면에 허용하면서 흰자위를 드러낸 눈으로, 세사(細絲)의 잔 바람이 한데 엉긴 태풍 덩어리가 휘두르는 포착 불능의 무수한 연타에 무너지는 거대 입석의 모양으로 캔버스에 나뒹군 것이다. 흐려지는 의식 속으로 챔피언 벨트만이 또렷이 떠오르다가 사라지던 그때, 패배의 허망함을 비참하게 절감했던 가토는 규호의 놀라운 스피드를 보면서 불쾌한 연상을 했던 것이다.
마우드피스 속 이빨과 입술을 굳게 물어서 지랄같은 기억을 지우며 악어의 눈빛에 전의의 불길을 더 태운다. 도전자가 조롱의 미소를 씽긋 지으며 라이트 잽을 가토의 안면을 가린 글러브 위로 툭툭 던진다. 순간,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오른손이 빠져나와 비어 있는 규호의 오른쪽 안면으로 가토의 묵직한 팔뚝이 레프트 훅으로 변해 규호의 팔 위를 스치며 날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까지 규호가 상대의 동작을 읽으면서 주춤하고 있던 가토를 자극해서 상대의 공격을 유도한 함정이었다. 규호의 오른팔이 스쳐 오르는 상대의 레프트 관절 상완 부위를 툭 밀치면서 패팅을 시켜 버리자 가토의 솟아오르던 몸이 왼쪽으로 휘청거리며 자세를 잃어버린다. 그와 동시에 규호가 의도적으로 가벼운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가토의 얼굴에 얹자 균형을 잃은 가토가 어설픈 자세로 캔버스에 넘어진다. 중립 코너를 가리키는 주심의 손짓을 받으며 뉴우트럴 코너로 뛰어간 규호가 링사이드의 일본 복싱 관계자들을 둘러본다. 일반 관중들과 달리 시합 전의 모습과 함께 지금까지의 경기 과정만으로도 이미 규호의 실력을 알아차린 그들은 놀라움과 함께 패배의 예견으로 침통한 시선을 링으로 보내고 있다.
"원..., 투...,"
주심의 카운트를 들으며 링 주위를 돌아가던 규호의 눈길이 다나까와 마주친다. 본국 선수의 다운으로 충격을 받았음직한데도 다나까는 여전히 냉담의 눈으로 규호를 쏘아보고 있다.
좌우의 사무라이들도 각각 오른손과 왼손으로 칼집을 세워잡은 채 시커먼 몸에서 뿜어 나오는 무인(武人)의 기를 눈으로 모아 차갑게 규호를 바라본다.
5.
다나까는 자신의 기자 회견 후 무명의 한국인이 정부 홈페이지에 올린 엄청난 굴욕의 글을읽고 격노의 감정을 삭일 방법이 없었다. 자신만 받아볼 수 있는 편지도 아니고 사이트에 올린 글인지라 이 일은 세찬 파장을 일으켜 전 세계의 관심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줄곧 내 외신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려야했던 것도 물론이다. 그럴 때마다 입장 표명의 가치를 못 느낀다는 제스처로 일일이 대응을 피해 왔지만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는 어떻게 터뜨려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던 것이다.
"국정 수행시에도 이토록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심지가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라고 생각하던 다나까는 일단 배규호의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즉시 자신의 수행 비서를 시켜 배규호의 프로필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나이 설흔에 석사 과정의 체육학과 학생인 현역 프로 복서..."
읽어 내려가던 다나까는 잠시 천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배규호가 게시판에서 추상같은 질책으로 꾸짖어 적시(摘示)했던 이토 총리대신과 안중근을 떠올리며 다나까는 자신과 배규호를 비교해 본다.
"일본의 개방과 선진 문물 도입으로 대 일본 제국 주의의 초석을 다져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분을 그토록 모욕하다니...미미한 조선의 마적 같은 놈에게 흉탄을 맞아 뜻을 못다 이룬 것도 일본의 크나 큰 한으로 남아 있건만..."
거기까지 생각을 하며 시선을 바로잡은 다나까는 이빨을 물어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대 일본제국 식민지의 후손 놈이 감히 총리 대신을 역임한 대 일본국의 원로에게 이토록 치욕의 글을 보내다니...! 그것도 모자라 대 일본국 황실의 지존이신 천황 폐하께까지...!"
응징의 결의를 한 다나까는 비서를 시켜 일본 권투 협회로 전화를 걸었고 협회 전무를 통해 배규호와의 동경 대전을 계획했던 것이다. 한국 권투 위원회에 조회를 해서 배규호의 전력을 전해들은 전무는 숨겨진 규호의 실력을 모른 채 다나까에게 가토의 일방적인 승리를 장담하였다. 일본 선수의 필승을 확인한 다나까는 시합 추진을 지시했고 그렇게해서 유 관장은 일방적인 제의를 당황스럽게 받은 것이다. 다나까는 여론몰이를 통해 일본 국민의 혐한 감정을 더욱 불붙였고 특히 배규호 특정인을 부각시켰다. 그래서 다나까 자신도 배규호의 일본 체류시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일본 국민들의 혐한 의식은 깊어져만 갔다. 관계자들을 주의시켜 동경 주재 외신 기자들에게는 보안을 잘 유지하였는데 그만 생각지도 않게 한국의 기자가 막후 활동을 벌여 시합 전 기자회견을 주선해 버린 것이다. 또다시 세계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뜻밖에 또다시 배규호와 함께 세계의 주목을 받게된 다나까는 뱀눈이 일그러질 정도로 분통을 터뜨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자국 선수의 주먹 앞에 배규호의 참패만으로나 위로를 삼을 작정을 하였다. 다나까는 혹시 배규호 테러 사태로 세계 여론의 질타의 도마에 오르지 않도록 치안 유지를 권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시합 당일 다나까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의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 일본 제일의 사무라이 두 명을 보디가드로해서 링사이드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다나까의 눈에 배규호는 시합 전부터 당당한 모습이었고 공이 울림과 동시에 다운되는 가토를 보며 맞은 편에 앉아있는 협회 전무를 노려보자 얼굴에 패배의 어두운 빛이 역력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링사이드 권투 관계자들의 기색을 찬찬히 살펴 나간다. 전무와 다름없이 링 위의 상황을 경외와 경악의 혼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을 살펴 나가던 다나까는 어쩌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를 자신의 계획과 시합 후 굴욕의 입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표정의 얼굴로 내심을 숨긴 다나까가 얼굴을 들어올려 눈길을 링 위로 던지는 순간, 중립 코너에서 링사이드를 둘러보던 규호와 눈이 마주친다. 규호의 자부심 가득한 미소 속으로 다나까는 냉담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6.
카운트 식스와 함께 자세를 바로잡은 가토가 주심에게 파이팅 의사를 보인다.
"복스!"
주심의 시합 재개 사인을 받고 천천히 중앙으로 발길을 돌리는 규호에게 가토는 미스 매치를 절감한 듯이 마음을 비운 체념의 표정이었지만 규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거의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직 중립 코너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규호에게 커버링을 단단히 한 가토가 맹렬하게 쫓아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규호가 슬쩍 자신의 코너를 바라보니 봉오가 사인을 보낸다. 1라운드 종료가 1분 30초 남았다는 신호였다. 규호는 시합 전 봉오에게 라운드 후반 30초마다 콜을 해줄 것을 당부해 놓았기 때문에 규호가 얼굴을 돌려 봉오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즉각적인 신호를 주었던 것이다. 다운과 함께 카운트를 하면서 벌써 1라운드의 반이 지난 것이다. 규호가 제자리에 서서 가토의 대시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세계에 강한 어필을 하기에는 이것으로 부족하다. 조금 더 끌어야겠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던 가토가 좌우 훅을 해머와 같이 휘둘러 댄다. 가토가 세계 타이틀전에서 흑인 챔피언의 관자놀이를 맞추며 첫 다운을 얻어낼 때도 라이트 훅 한방이 주효했던 것이다. 규호는 상대를 정확하게 노려보며 주먹의 흐름을 읽어 나간다. 비스듬히 공중을 향해 날아드는 레프트 훅을 가벼운 더킹으로 바라보며 이어 터지는 가토의 주무기인 라이트 훅은 머리만 살짝 뒤로 젖히며 흘려 보낸다. 규호의 상체가 뒤로 젖혀지는 것을 보면서 가토가 왼쪽으로 쏠린 상체를 바로하려고 허리를 틀면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규호의 턱으로 날리며 몸을 던진다. 마치 개구리가 점프하는 모습으로 날아오는 스트레이트를 내려보던 규호가 오른쪽으로 슬쩍 머리를 숙여 버린다. 도전자의 청코너로 몸이 던져진 가토가 고개를 돌려 규호 쪽으로 자세를 잡을 때까지 규호는 주먹을 안면에 고정시킨 채 지켜만 보고 있다. 헛점투성이의 가토를 향해 한방의 주먹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상황이 그 짧은 순간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링사이드에서 지켜보던 한-일 양국의 복싱 관계자들과 외신 기자들의 소감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강펀치를 날려 시합을 빨리 끝내지 않는 규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국 측과 현격한 실력 차로 일본의 짓밟히는 자존심을 억누르지 못해 이지러지는 일본측, 그리고 현란한 스피드와 테크닉으로 슈거 레이 레너드를 연상시키는 배규호의 모습을 보면서 좀 더 오래 감상하고 싶어하는 3국의 관계자들 모습이 3색의 어울림으로 나타난다. 연속되는 가토의 럭키 주먹을 제자리에서 유연한 허리와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며 위빙, 더킹, 패팅으로 피하는 규호가 자유자재의 공간을 가토에게 제공한다. 세컨드를 보던 봉오의 볼멘소리가 청코너 말뚝을 넘어 생생하게 날아든다. 펀치마저 허공만을 가르는 체육관의 정적을 찢어버릴 듯이 규호의 귀로 쏟아진다.
"규호야! 30초!"
"10초만에 캔버스에 눕혀야 한다!"
주심이 카운터 텐을 셀 여유 20초를 빼고 나면 10초안에 상대를 KO시켜야 했기 때문에 규호는 승부의 드라마 제작을 서둘러 나간다. 규호가 조금씩 뒷걸음질치며 가토를 유인한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던 가토가 기세가 오른 듯 더욱 펀치에 힘을 실어 날려 댄다. 코너를 벗어나 청코너와 중립 코너를 잇고 있는 네 줄의 로프 옆에 다다른 규호는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 보고 있는 다나까의 존재를 인식하고 즉각 결단의 눈빛을 뿜어낸다. 결정의 순간도 눈치채지 못하고 레프트 훅을 날리며 들어오는 가토의 주먹이 둘 사이의 공간에 머무는 순간 규호가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돌리면서 강력한 라이트 어퍼 커트를, 텅 비어 넓적이 쭉 삐져나온 가토의 턱에 찍어 올린다.
"쩍!"
"끄~ㄱ!"
오직 한방, 소나기같이 퍼붓는 주먹의 그물망에 도전자의 안면이 걸려주기만 바라며 휘둘러대던 가토가 레프트 훅을 던지며 공중에 떠오른 채 규호의 섬광같은 해머 펀치를 맞으며 쏟아내는 2음절의 파열음이 링을 빠져나가며 고요의 체육관 천정을 울린다. 고깃덩이같이 무너져 내리는 가토의 왼쪽 관자놀이에 타이밍을 놓칠세라 라이트 더블의 제 2탄이 숏 훅의 핵탄두로 날아가 꽂힌다. 첫 방만으로도 혼절해 의식을 잃은 가토는 2탄의 피폭(被爆)으로 캔버스를 향하던 몸뚱이가 로프에 걸쳐져 마치 슬로우비데오의 영상처럼 천천히 튕겨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무너져내리는 일본을 바라보며 규호는 문득 다나까의 망언과 동경 대전의 계략, 교만한 일본인들의 규탄 대회, 후배의 린치 사건, 동포 응원단 부재의 의문 등을 떠올리며 분노의 주먹에 힘을 다하여 자신의 앞으로 고개를 떨구며 천천히 바닥을 향하던 가토의 가슴을 레프트 어퍼 커트로 걷어올려서 대한의 울분을 자신의 주무기인 레프트에 모두 실어 순간에 발산할 극한의 에너지를 응집하여 번개같은 스트레이트로 가토의 안면을 날려 버린다.
"쾅!"
살인 펀치를 맞은 가토는 로프의 윗부분 두 줄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참혹의 광경을 지켜보던 다나까의 탁자 앞으로 날아가 떨어진다. 규호가 글러브를 낀 두 손으로 로프를 잡고 참상을 받아들이는 다나까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응시한다.
"늙은이가 잔머리를 굴려 빚어진 집단주의의 참패를 맛 봄이 어떠하냐?"라는 꾸짖음의 눈길을 지긋하게 보내는 것이다.
순간, 다나까의 양 옆으로 보좌하며 앉아 있던 두 명의 사무라이가 장검을 쥔 손에 핏줄을 드러내며 일어선다. 시커먼 무사 복장과 단정히 묶어 뒤로 넘긴 장발의 음험함 사이로 회색의 건조한 얼굴에 차가운 냉기를 흘리며 혈기를 쏘아 보내는 두 명의 사무라이를 인식한 규호가 의연한 눈빛으로 그들의 살기를 받아들인다. 일촉즉발의 순간을 1대2의 안광으로 기력을 다투던 세 사람 사이로 주심이 끼어 든다. 양팔을 교차해서 흔들며 시합 종료를 알리는 것이다. 미동도 없이 벌어진 입 사이로 흥건한 혈액과 타액을 쏟아내는 가토를 향하여 급히 쫓아온 의료진이 응급 진료를 하더니 곧장 들것에 실어 장내를 벗어난다.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 동경 참패를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으로 4월의 사꾸라와 배꽃 의상으로 물결을 이룬 체육관내 일본의 집단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주심이 규호의 손을 들어 승리를 확인시키고 링 아나운서는 무감각의 연속적인 진행으로 규호에게 동양 챔피언 벨트를 채워 주고 인정서를 낭독한다. 신속한 진행으로 공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링을 내려가려는 규호 앞을 두 명의 사무라이가 막아선다. 글러브를 벗겨낸 후의 상쾌한 느낌을 뒤로하며 규호가 밴디지 낀 두 주먹을 지긋이 감아쥐면서 꽉 조인 밀착감으로 전의(戰意)를 무장한다. 링 주변에 몰려들어 세 사람의 긴장을 증언하는 외신 기자의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이때, 두 명의 사무라이를 좌우로 밀어내며 앙상한 노구의 다나까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에 무표정의 얼굴로 규호를 노려본다. 규호 역시 다나까에게 무감각의 눈빛을 전하며 주먹을 펴 밴디지를 풀기 시작한다.
"배규호 선수, 당신의 승리를 축하하며 지극한 용기에 경의의 예를 표하는 바입니다."
수십 년 쌓인 정치적인 쇼맨십과도 같이 세계의 카메라 앞에서 가식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나까는 깡마른 손을 규호에게 내민다.
그러나 규호는 다나까의 화해의 제스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활한 일본의 늙은이는 세계를 향하여 큰 나라 일본의 총리 대신을 역임한 자로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어리광부리던 어린 아이를 다루는 모습으로 일본과 한국을 각인시키고자하는 외교적 제스처일 뿐, 결코 진실한 화해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나까의 낯빛이 하얗게 변해가고 뒤에 있던 사무라이들이 동시에 장검을 뽑아든다.
"스겅!"
주변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링을 빠져나가고 차가운 회색의 사무라이들이 한 발씩 규호 앞으로 다가선다. 규호가 움직임없이 가볍게 복서 자세를 취하며 사무라이들의 동작을 주시한다. 작은 호흡을 들이마시며 공격의 순간을 가늠하던 왼쪽의 사무라이가 서서히 칼을 들어올려 휘황한 불빛에 반사되어 번득이는 살기를 드러낸다. 사무라이의 스텝이 앞으로 옮겨 지려는 찰나, 뒤에서 굴욕의 분을 다스리고 있던 다나까가 찢어지는 소리를 지르며 사무라이들을 꾸짖어 사태를 진정시킨다. 링 위를 비추는 대형 라이트의 불빛과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 검광을 번득이던 진검을 칼집에 밀어 넣으며 노려보는 사무라이와 참담하게 격정을 억누르는 다나까의 독기서린 눈빛을 뒤로 하고 배규호는 태연하게 링을 내려와 초조하게 바라보던 유 관장과 이 기자 등의 일행들과 함께 패배의 참담함으로 창백한 일본 관중의 숲을 지나 라커 룸으로 빠져나간다. 링 위의 모든 사건을 생생히 취재한 수많은 내 외신 기자들이 새로운 동양 챔피언과의 인터뷰를 위해 바쁘게 규호 일행을 쫓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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