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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절 정조(正祖)의 거둥길
○ 1. 서
○ 2. 현륭원 전배
○ 3. 현륭원 거둥노정
▣ 1. 서(緖)
‘거둥길’이란 한자어 거동(擧動)에 ‘길’이 합성된 ‘거동길’에서 연유한 듯 하나, 실제로는 거동과는 달리 ‘임금님의 행차나 나들이’를 뜻하는 고유어로 쓰여 왔다. 따라서 ‘정조의 거둥길’은 정조(正祖) 재위 24년 간(1777∼1800) 거둥길을 포괄하는 의미로 보겠으나, 특별히 여기서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후에 장헌세자로 追上)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拜峯山) 영우원(永祐園)에서 수원(水原) 화산(花山) 현륭원(顯隆園)으로 천봉한 정조 13년(1789) 10월 이후 신원인 현륭원 참배길의 거둥길만을 뜻한다.
정조는 현륭원 천봉에 앞서 13년(1789) 9월에 『원행정례(園行定例)』를 편찬하여 바치도록 비변사(備邊司)에 명하였고, 이듬해인 14년(1790) 1월 5일 『원행정례』의 편찬을 완료하고 정조의 재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원행정례』 는 원행에 수행하는 백관·이예(吏隸), 군병 수를 비롯하여 노정 등 원행 전반에 관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 책으로(원본은 서울대 규장각 소장으로 1987년 9월 현 시흥시 향토사료실 상임위원인 이승언(李承彦)씨에 의해 경인일보에 발굴·소개된 바 있다) 목록 2장(張) 본문 123장으로 되어 있는데, 능행에 관한 정조의 전교를 비롯하여 능행시 따라가는 문무백관·병졸·하인의 숫자, 노정, 행궁의 진설 규모와 배설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원행정례』에 나타난 원행에 수행하는 인원수는 ① 배종백관원수(陪從百官員數), 각사이예총수(各司吏隸摠數) 1,100명, 설과시(設科時) 가종(加從) 35명 ② 수가각영장졸총수(隨駕各營將卒摠數) 5,004명 ③ 병조각차비봉대 급 부연대위군역인총수(兵曹各差備奉待及富輦隊衛軍驛人摠數) 86명으로, 즉 정조대왕의 현륭원행 거둥길에는 배종하는 백관과 각사 이예 1,100명, 수가(임금님 거둥시 임금을 모시고 따라 가는 것)하는 각 군영의 군병 5,004명 및 병조의 차비군 86명 등 총 6,230명이 참가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인원 중에서 실제로 참가한 인원이라 볼 수 없는 훈련도감 54명, 원소와, 수원참의 주참관(主站官)인 과천현감·시흥현령 휘하의 군졸, 광주유수 휘하의 당상대령군(塘上待令軍) 등 합계 113명을 제외시킨다고 해도 6,117명이 된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왕의 재가를 받아 약간명을 증감할 수 있는 부서도 있고 과거가 설행될 때에는 이조, 병조 등에서 위의 인원에 들지 않았던 새로운 인원 35명이 더 참가하므로 고정불변의 인원수는 아니나, 대략 6,100여 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戰卜馬 1,317필·四僕待馬 100필 계 1,417필)이 동원된 거대한 거둥길이었음을 실감케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다음에 현륭원 전배와 원행시와 노정인 과천작로(果川作路)와 시흥로(始興路)의 노정기를 중심하여 당시 노정의 구체적 지명과 오늘날의 그것들과 비교하며 살핌으로서 원행 전반의 거둥길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사진】원행정례
▣ 2.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묘소를 양주 배봉산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 현륭원으로 천봉한 일정은 다음과 같다.
정조 13년(1789) 7월 구원(舊園) 영우원의 천봉문제가 결정되어 신원(新園)의 산역(山役)이 곧바로 7일부터 시작되고, 8일에는 신원의 원호(園號)를 현륭(顯隆)으로 정하게 되고, 10월 1일 천원일이 임박하게 되어 구원의 산역을 정조가 친히 감독하고, 10월 2일 재궁(梓宮: 왕이나 왕비의 관)을 봉출하여 빈전으로 옮긴 후, 영여(靈轝: 상여)가 양주 구원을 출발하게 된 것은 10월 4일 밤10시 경이었다. 뚝섬나루의 주교(舟橋)를 거쳐 상여는 5일 과천에서 지내고, 6일 수원 신읍에 주정(晝停)하였다가 신원소(新園所)에 도착하였다.
7일 현궁(玄宮) 천전(遷奠: 왕의 관을 광중에 옮겨 하관하는 것)은 밤 10시 경에 거행되었다. 정조는 이 때 상여가 구원을 출발하여 뚝섬나루 단교를 무사히 건너자 곡을 하여 작별을 고하고 환궁하여 모친 혜경궁을 위로하였으며, 6일 상여가 수원 신원소에 도착하였을 때 출발하여 과천에서 주정하고, 7일 신원소에 도착하여 대례를 무사히 마치고, 8일 현륭원을 하직하는 제사를 지낸 후 환궁길에 올라 과천행궁에서 경숙한 후 환궁하였다. 현륭원 마무리 산역은 10월 17일에 끝냈는데, 현륭원 천봉 경비 총액은 돈 184,600량, 쌀 6,236석, 무명 279동, 베 14동이었다.
정조의 현륭원 전배는 천봉 이듬해인 정조 14년(1790)에서 시작하여 24년(1800)까지 11년간 전후 12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사진】정조 어진
정조 초상화는 본래 단원 김홍도 작품으로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소재 화령전에 봉안되었다. 일제 때 분실되어 최근 수원시가 지지대 고개에 효행공원을 조성하면서 수원출신 화가 이길범(호: 우당)에게 의뢰 제작한 것이다.
○ 1) 과천로를 통한 현륭원 거둥길
○ 2) 시흥로를 통한 현륭원 거둥길
▣ 1) 과천로(果川路)를 통한 현륭원(顯隆園) 거둥길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영우원(永祐園)에서 수원 현륭원(顯隆園)으로 천봉한 후 신원인 현륭원(顯隆園) 원행에 취한 거둥길(‘임금님의 행차’란 뜻)은 처음 1차에서 5차까지는 과천로(果川路)이었다. 그 이후 시흥로(始興路)가 거둥길의 노정이 되어 과천로 거둥길은 현륭원 전배를 위해서는 제5차까지와 제11차 원행하향(園幸下向)길로 마감됐다.
과천로는 『원행정례』 중 도로교량(道路橋梁)조 과천작로(果川作路)에 나타나 있는데, 이 노정은 궁궐에서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숭례문, 노량주교(鷺梁舟橋), 용양봉저정(龍쵃鳳?亭: 현 노량진 장로교회 옆에 위치하고 있음)까지는 후에 개설된 시흥로 노정과 같으나, 그 다음 만안현(萬安峴)에서 금불암(金佛菴), 금불현(金佛峴), 사당리(社堂里), 남태령(南泰嶺), 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 냉정점(冷井店)을 거쳐 인덕원천교(仁德院川橋), 갈산점(葛山店), 원동점(院洞店)까지는 시흥로와 다르고 사근평(肆覲坪: 沙斤川)행궁에 이르러야 과천로와 시흥시가 만나 한 노정이 된다. 처음 5차까지 거둥길은 다음과 같다.
【사진】주교도(『원행정례』)
제1차 전배는 정조 14년 2월 9일에 거행되었다. 정조는 천봉 후 첫 신정(新正)을 맞이하여 부친을 사모하는 정이 더욱 새로워 장헌세자(사도세자) 탄신일(1월 21일)에 작헌례(酌獻禮)를 현륭원에서 드리기로 했으나, 신병으로 예정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2월 8일에 궁궐을 출발하여 수원부에서 경숙하고 9일 현륭원에 이르러 작헌례를 드렸다. 제사를 드린 후 도보로 원상(園上)에 이르러 원소 좌우 언덕 기슭 등을 두루 살핀 다음 수원부로 환어하여 수원부 동헌을 장남헌(壯南軒), 내사(內舍)를 복내당(福內堂), 사정(射亭)을 득중정(得中亭)이라 명명하고 친히 그 편액을 썼다. 10일 정조는 수원 남쪽의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거둥하여 장대에 들리고 이어 운주당(運籌堂)에 임어하여 산성 부로(父老)들을 소견하고 위로했다. 또 진남루(鎭南樓)에 이르러 활쏘기를 하여 네 화살을 연거푸 적중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수원행궁으로 환어한 정조는 득중정에서 각신(閣臣), 장신(將臣)들과 더불어 활쏘기를 하여 다섯 발 중 네 발이 명중되자 오늘 활쏘기가 과거 세자가 독성산성에서 네 발을 맞혔던 고사와 부합되니 마땅히 그 뜻을 표시하겠다고 말하고, 수원부사 조심태(趙心泰)에게 갑옷 1구를 하사했다. 11일, 문무과 별시(別試)를 설행하여 이덕승(李德升) 등 5인을 뽑고 회환하는 중에 과천현에 이르러서, 과천 동헌을 ‘부림헌(富林軒)’, 내사를 ‘온온사(穩穩舍)’라고 명명하고 친히 편액을 썼다. 11일은 이 곳에서 경숙하고 12일 관왕묘(關王廟)에 역임했다가 환궁하였다. 현재 과천시 중앙동 사무소 옆에 있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00호(1980년 6월 2일 지정)로 지정된 ‘온온사’의 현판은 이 때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정조의 제2차 현륭원 전배는 정조 15년(1791) 1월 17일에 거행되었다. 정조는 현륭원 전배 거둥길에 앞서 연로 수치(修治)에 태만했던 과천현감 홍대영(洪大榮)의 이름을 관리명부에서 삭제하도록 하고 금천(시흥)현감 김동현(金東賢)을 파직시켰으며, 1월 16일 거둥길에 수원행궁에 이르러 수치 성적이 좋은 수원부사 조심태를 승지로 승차시키는 동시에 김사목(金思穆)을 새 부사로 임명하였다.
제3차 현륭원 전배는 정조 16년(1792) 1월 25일에 거행되었다. 24일에 궁을 출발한 정조는 갈현(葛峴: 현 과천 갈현동)에서 말을 내려 그곳 부로들을 소견하고 질고를 순문하고, 수원행궁에 이르러 강무당(講武堂)에서 활쏘기를 하는 한편, 무장과 병조판서에게도 활을 쏘도록 했다. 25일, 정조는 현륭원에 이르러 전배를 마친 후 여러 신하들에게 현륭원의 좋은 형국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원을 이 곳에 모시게 된 것은 실로 하늘에서 내린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장헌세자의 옛일을 생각할 때 슬픔과 기쁨이 교차된다고 했다. 이날 정조는 어진(御眞: 정조의 초상화)을 재전(齋殿)에 봉안하여 원소를 우러러 의지하는 마음을 나타내게 하였다.
정조가 24일 궁궐을 떠날 때 이미 규장각 신하에게 미리 가서 봉안하게 했던 것이다. 그 후 정조는 수원행궁으로 돌아와 득중정에서 수원부 유생 및 무사들을 시취(試取)하여 유생으로서 장원한 진사 임후상(任厚常)과 무사 가운데 세 발 이상을 맞힌 사람을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했다. 다음 26일 환궁하였는데, 환궁길에 사근현(沙斤峴: 현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인 지지대고개)에 들러 잠시 쉬었다. 이 때 신하들에게 자기는 본래 가슴 속에 막히는 증세가 있어서 궁궐을 떠날 때 그 증세로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제 전배를 마치고 나니 조금은 사모하는 정도 펼 수 있고 가슴막히는 증세도 호전되었다고 했다. 또한 이 곳은 수원의 경계인데 말에서 내려 경들을 소견하는 것은 돌아가는 자기의 걸음이 차마 발을 속히 뗄 수 없는 심정이므로 더디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라고 애틋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 때 그 곳을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사진】지지대
‘지지대’란 말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면서 “더디고 더디구나, 나의 발길이여”하면서 차마 떠날 수 없는 발걸음을 더디게 하여 부모(父母)의 나라를 떠났다는 고사(夫子遲遲去 父母之國)에서 취한 것이다. 그후 마지막 원행(정조 24년)을 마치고 환궁길에 이 지지대에서 멀리 화산 현륭원을 바라보며 “새벽에 (화성을) 떠나와서 뒤돌아보니 (현륭원)은 아득한데 지지대 위에서 또 더디고 더디구나”(明發回道遠 遲遲臺上又遲遲)라는 시를 친히 읊기도 했다.
정조는 26일 환궁길에 거둥길 연로 각읍 농민들의 금년 가을 환곡 이자를 특별히 면제하도록 명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치도하는 데 수고가 많았던 연로민들을 효유하게 했다. 환궁 후 정조는 현륭원 재전을 어진봉안각(御眞奉安閣)으로 칭하게 하고 예조로 하여금 수직(守直)·봉심(奉審)·수리(修理) 등의 절목을 성안하여 재가를 받아, 수직관은 매 5일 봉심하고, 수원부사는 매월 삭망 간에 1차 봉심하며, 경기도관찰사는 한 차례씩 봉심하고, 규장각 벼슬아치들은 춘추로 봉심하되 수원부사와 경기도 감사도 함께 동행하여 봉심토록 했다.
【사진】정조 화성행차도 1
【사진】정조 화성행차도 2
【동영상】과천 거둥길
1. 漢江丹橋還御圖 노량진(옛 과천현 상북면 노량진리) 한강에 배로 다리를 가설하고 능행시 왕래함. 이 그림은 수원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참 배후 입궁하는 그림.
2. 隆陵行幸班次圖: 정조의 부왕(사도세자)의 묘(융능. 처음엔 수은묘→영우원→현륭원)를 정조가 참배하는 그림.
3. 洛南軒養老宴圖: 정조가 1795년 어머니(혜경궁홍씨)회갑연을 구 경기도립병원에서 거행하면서 수원거주 노인에게 잔치를 베푸는 그림. 낙남헌은 현재 신풍국교 교정에 있음.
4. 西將臺城操圖
5. 洛南軒放榜圖
6. 華城行宮動駕圖: 정조가 현륭원 참배시 화성행궁(현 수원경찰서 신풍국교 구 경기도립병원)에 해차하는 모습.
7. 文聖王(孔子)廟謁聖圖: 서울 성균관에 있는 공자의 묘를 찾는 정조.
8. 奉壽堂進饌圖: 1795년 정조의 어머니(혜경궁홍씨)회갑연도(봉수당은 구 경기도립 병원자리).
제4차 현륭원 전배는 정조 17년(1793) 1월 13일에 거행되었다. 12일 궁궐을 출발하여 거둥길에 임하게 되는데, 이 때의 거둥길에 과천에서 주정하였다. 그리고 인덕원평(仁德院坪)을 지날 때 부근의 부로들을 소견하고 그들 노고를 위로한 후 수원행궁에 도착하였다.
이 때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개칭하여 친필 편액(널판지 위에 글씨를 쓴 액자)을 장남헌(壯南軒)에 걸게 하고 부사를 높혀 유수(留守) 겸 장용외사(壯勇外使)·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로 삼고 판관(判官) 한 명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으며, 정경(正卿: 정2품 이상 벼슬)으로 화성유수를 임명하여, 후일 좌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을 화성유수로, 전 수원부사 이경무(李敬懋)를 형조판서로 임명하였다. 13일 현륭원에서 작헌례를 거행하고 화성행궁으로 환어하였는데, 이날 비변사에서 상계하기를 수원에 유수부와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한 후 모든 조치가 크게 달라졌으므로 안산군(安山郡)을 화성에 이속시키도록 청하여 윤허하였다. 14일 정조는,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과천행궁에 주정한 후 환궁하였다. 따라서 제4차 현륭원 거둥길에서는 왕복 거둥길에 모두 과천에서 주정하였던 것이다.
제5차 현륭원 전배는 전배는 정조 18년(1794) 1월 13일에 거행되었다. 정조는 12일 왕궁을 떠나 거둥길에 오르는데 관왕묘에 역임한 후 망해정(望海亭)에서 잠시 쉬고 과천행궁에 이르러 이날 이 곳에서 경숙하였는데, 이것이 현륭원 거둥길 중 과천행정의 거둥길의 마지막이 되었다. 제5차 거둥길을 끝으로 과천행로(果川行路)는 더 이상 택하지 않고 제6차 거둥길부터는 시흥로(당시 금천로라 칭했으나 곧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바꿔짐에 따라 시흥로라 칭하게 됨)를 새로이 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5차 거둥길 출발일에 과천행궁에서 경숙하며 자신이 늘 걱정하는 것이 하민들의 농사인데 금년을 당하여 그 일념의 뜻을 표시하겠다고 말하고 각 도의 오래된 환곡 1년조를 탕감하여 주었다. 이튿날(13일) 첫닭이 울 때 과천행궁을 출발하여 사근천행궁에서 잠시 쉬었다가 현륭원에 이르러 작헌례를 드렸는데, 정조는 향이 오르자 오열을 참으며 겨우 제사를 마치고 원상에 이르러 봉심하는 중 더욱 슬픔에 잠겨 신하들이 화성행궁으로 환어하기를 청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정조는 오후에 국내(國內) 여러 곳을 살피고 저문 후에 재전으로 환어하였다. 이튿날(14일) 화성행궁으로 환어하여 화성부의 선비와 무사들을 시취하고 장원한 유생 민영조와 무사 송복동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 시험보는 자격을 줌)하게 했다.
15일 화성읍터를 돌아보고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장차 성 쌓을 터를 살펴보고 성의 명칭을 화성이라 칭하겠다고 했다. 화성이란 명칭은 현륭원을 천봉한 화산에서 유래되었다. 즉 정조가 “현륭원 자리는 화산(花山)이며 수원부는 유천(柳川)인데 화산사람들이 성인을 축하한다는 뜻(華人祝聖之意)으로 이 성을 화성(華城)이라 칭하며 화(花)와 화(華)는 통하며 화산이라는 의미는 대개 800개의 산봉우리들이 한 개의 묏부리를 둘러싸서 보호하는 형상이므로 마치 화판(花瓣: 꽃잎)을 일컫는 것과 같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날 미륵당현(지지대고개)과 사천행궁(沙川行宮) 또는 사근행궁에서 잠시 쉰 후 노량진 망해정에 임하였다. 환궁하니 늦은 밤이 되었다.
▣ 2) 시흥로(始興路)를 통한 현륭원(顯隆園) 거둥길
제5차 현륭원 전배 이후 정조 18년(1794) 4월 광화문에서 수원 화산 현륭원에 이르는 시흥로가 경기감사 서용보(徐龍輔)에 의해 개설되었는데, 새로이 시흥로가 개설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원행 연로지방 중 과천 지역 경내에는 고갯길이 험준하고(특히 남태령로) 또 교량이 많아 매년 거둥길(‘임금님의 행차’란 뜻)마다 노정이 어렵고 또 길을 만들 때 연로민들의 노고와 힘이 배나 들었기 때문에 정조는 그 폐단에 깊이 진념하여 그 편부(便否)를 헤아리라는 하명을 내렸다. 그럴 때 도신(道臣)들이 한결같이 금천로(衿川路: 始興路)가 편리하다는 뜻을 진언한 바 있어, 경기감사 서용보가 그 노정을 살폈더니 거리의 원근은 과천로와 별반 차이가 없으나 과천로에 비하여 금천로(시흥로)는 땅의 고저가 고르며 길 또한 평평하고 넓어 이 곳 길을 새로 택하기로 마음을 굳혀 정조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선 관서(關西)의 남당성(南塘城) 축조공사 때 남은 13,000량을 빌어 도로의 제치(除治)와 아사(衙舍)수리에 착수하여 그 해(정조 18년, 1794) 당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정조는 제6차 거둥길에 앞서 정조 19년(1995) 윤 2월 1일자로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금천현의 읍호를 옛이름인 시흥현으로 환원시켰으므로 자연히 금천로는 시흥로로 불려지게 되고, 금천의 행궁 또한 시흥행궁이라 하였다.
이 시흥로의 노정은 과천로와 노량주교로 한강을 건너 용양봉저정까지는 같은 노정이나 그 다음부터 갈라져 지금의 사육신(死六臣) 묘소 못미친 노량 본동입구 고개인 장안현(長安峴)을 거쳐 장생현(長生峴: 현 장승백이)·도화참발소전로(桃花站撥所前路)·번대방천교(蕃大坊川橋)·번대방형(蕃大坊坪)·마장천교(馬場川橋)·문성동전로(文星洞前路)·수천참발소전로(壽川站撥所前路)·부장천교(富壯川橋)·시흥행궁(始興行宮)·대박산전평(大博山前坪)·염불교(念佛橋)·만안교(萬安橋)·안양참발소전로(安養站撥所前路)·장산우(長山隅)·군포천교(軍浦川橋)·서원천교(書院川橋)·청천평(淸川坪)·서면천교(西面川橋)·원동천(院洞川)·사근평(肆覲坪)·사근참발소전로(肆覲站撥所前路)에 이르고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에서 과천로 노정과 합로(合路)하게 된다.
【사진】『원행정례』도로교량조
이 시흥로가 개설되어 제6차 이후 정조는 현륭원행을 이 노정에 따라 거둥하였다. 그런데 정조가 과천로를 계속 택하지 않고 시흥로를 택한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험준한 남태령 고갯길과 도로를 수치하는 민력이 배가되어 연로민의 노고를 덜기 위함이었다고 기술되고 있으나, 한편 간접적인 구전 전설로는 장헌세자 처벌에 간여하였던 김상로(金尙魯)와 관계된다는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서 장헌세자 처벌에 적극 가세하여 영조의 동의를 얻었으나 후에 영조가 이를 후회하여 청주에 귀양보냈다가 곧 소환하여 봉조하(奉朝賀: 전직 관원을 대우하여 종2품 벼슬아치가 물러난 후 특별히 주는 벼슬)를 삼았던 사람이다. 김상로에 대하여 정조의 행장(行狀)에는 “적신 김상로가 영상(領相)이 되어 문숙의(文淑儀)의 동생 문성국(文聖國)과 결탁하고 양궁 사이를 이간하여 화를 부르도록 꾸몄다”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김상로의 관작은 추탈(追奪)되고 아들들은 귀양보냈으며, 손자는 종으로 만들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상로의 묘가 과천에 있기 때문에 그 묘 앞을 통과하지 않으려는 데서 시흥로를 개설하게 되었다고 하나 실제 과천시 갈현동(찬우물)에 있는 묘는 김상로의 형 김약로(金若魯: 1694∼1753)의 무덤이고, 김상로의 묘는 화성군 우정면 조암리에 있다 하니, 좀 와전되었거나 아니면 전설대로 정조가 냉정리 고개에서 쉬고 있을 때 저것이 누구의 묘냐고 하문하자 신하가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입니다” 이에 정조가 이르기를 “김약로야 허물이 없지마는 그래도 보기가 싫으니 노정을 바꾸라”고 하명하였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이 얼마나 있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아무튼 정조는 제6차 현릉원 전배 때는 과천로를 버리고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시흥로를 택하여 거둥길에 오르게 된다. 단, 11차 때는 헌릉 전배에 이어 현륭원 전배를 거행하는 거둥이었으므로 과천로를 택했다.
제6차 현륭원 전배는 정조 19년(1795) 윤2월 12일에 거행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전배 중 가장 뜻 깊은 거둥길이었다. 정조 18년(1794) 2월 28일 현륭원 공호(拱護)를 더욱 근밀(謹密)하게 하기 위해 화성축조공사를 착수하고, 이와 함께 같은 해(1794) 새로운 시흥로 개설이 완성되어 이 새길을 따라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전배하고 화성(수원) 현지에서 혜경궁의 회갑연을 베풀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조 19년(1795)은 정조의 부친 장헌세자와 모친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周甲年)이었다. 혜경궁은 영조 11년(1735)에 탄생하여 16세 때 (영조 20년, 1744)에 장헌세자빈으로 간택되어 2남 2녀를 낳았으나 28세(영조 38년, 1762) 때에 장헌세자가 졸지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열살 미만의 3남매(원자는 요절함)를 거느리고 홀몸이 되었는데, 그 후 둘째 아들인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다가 혜경궁의 회갑을 맞이하여 장헌세자의 원침이 있는 화성에서 회갑연을 베풀게 했던 것이다. 정조는 이 해 정월에 장헌세자의 존호를 추상하고 동시에 혜경궁의 존호를 가상(加上)하기도 했다.
정조는 제6차 거둥길에 오르기 전 하교하기를 이번 자가(慈駕: 혜경궁의 가마)를 모시고 화성까지 이르는 도정이 거의 백리길에 달하고 왕복하는 데 8일이나 걸리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하여 각 참의 수라(水剌)·방돌(房쪊)·점화(點火)·진찬(進饌)·배설(排設) 등을 각각 분별하여 신칙한 대로 방심말고 어김없이 거행하도록 하명했다.
정조는 윤2월 9일 혜경궁의 가마를 모시고 왕궁을 출발하여 거둥길에 올라 숭례문을 거쳐 노량주교에 이르러서 문후를 드리고 주교를 무사히 건너자 먼저 용양봉저정에 이르러 혜경궁이 드실 방돌과 수라, 찬품 등을 친히 점검한 후 혜경궁을 맞이해 방에 들어가 정리사(整理使: 임금이 거둥할 때 행궁의 수리, 기타 모든 것을 받아보던 벼슬)가 드린 점심 수라[午膳]를 친히 점검한 후 들게 하였다. 정조는 각 참의 중로에서 혜경궁의 가마를 잠시 쉬게 하고 미음(米飮) 다반(茶盤)을 드렸는데, 각 참 도착 시에는 반드시 먼저 그 곳에 이르러서 두루 점검하였으며 진선(進膳) 시에는 친히 간심한 후에야 드시게 하는 것이 한결 같았다.
용양봉저정을 출발하여 만안현을 거쳐 문성동전로를 지나 시흥행궁에 이르러 이 곳에서 9일 경숙하고 10일 이른 아침에 화성행궁을 향해 출발했다. 행차는 안양주필소(安養駐킞所: 安養行宮)을 지나 사근참행궁(沙近川을 정조 19년 윤2월 1일자로 肆近川으로 고쳤음)에 이르러 어머니의 가마를 맞이하여 행궁안으로 들게 한 후 점심수라를 들게 하였다. 이날 아침부터 찌푸리던 날이 비가 내려 정조는 새로 건조된 사근참행궁이 허술하여 혜경궁을 모시고 경숙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백관과 군병 등의 옷이 노천에서 모두 젖어 있어 이 곳에서 경숙할 수 없다고 하고 출발을 재촉하였다. 사근참행궁을 출발하여 미륵현(사근현(沙近峴)을 같은 날자에 彌勒峴으로 고침)에 이르렀을때, 정조는 하마하여 혜경궁 가마 앞에 이르러서 어의가 비에 젖는 것도 잊은 채 문후를 드렸다. 다음 괴목정(槐木亭)·진목정(眞木亭)·장안문(長安門)·종가(鍾街)·좌우군영전로(左右軍營前路)·신풍루(新豊樓)·좌익문(左翊門)·중양문(中陽門)을 거쳐 화성행궁·봉수당(奉壽堂)에서 하마하여 혜경궁을 장락당(長樂堂)으로 들게 한 후 저녁 수라를 올리게 하고 10일을 화성행궁에서 경숙하였다. 11일에는 화성성묘(華城聖廟)를 배알하고 새로 인출(印出)한 사서삼경과 노비를 하사하였고 간화관(干華館)에서 화성·광주·시흥·과천 4읍 유생에게 과거를 시행하여 최지성(崔之聖) 등 5인을 뽑았으며 낙남헌(洛南軒)에서 4읍 무사에게 과거를 시행하여 김관(金寬) 등 56인을 뽑았다.
12일 화성행궁을 출발해 팔달문을 지나 유천점(三巨里店幕을 정조 19년 윤2월 1일자로 上柳川店幕으로 고쳤음), 대황교(大皇橋: 黃橋를 위와 같은 날자에 고침), 유첨(?瞻: 鵲峴을 유첨현으로 고침), 유첨교(?瞻橋: 士成橋를 ?瞻橋로 고침), 만년제(萬年堤: 防築藪를 만년제로 위와 같은 날자에 고침)를 지나 동구(洞口)에 이르렀다. 정조는 먼저 재실 밖 장막에 이르러 어머니를 맞이하여 재실로 들어가 친히 삼령차(蔘쫢茶)를 드렸고 정리사는 미음을 드렸다. 정조는 장막으로 돌아와서 작은 가마를 타고, 혜경궁께는 지붕있는 작은 가마를 타게 하고 원상(園上)에 이르러 12일 제6차 현륭원 전배를 거행했다. 이 때 혜경궁이 장막 안에 들어설 때부터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흐느끼는 소리가 장막 밖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 후 정조는 혜경궁 가마를 모시고 홍살문 밖에 이르러 가마를 멈추게 하고 원상을 우러러 본 후 현륭원을 하직하며 회환 거둥길에 올라 화성행궁으로 돌아왔다.
혜경궁의 회갑연은 다음날 윤2월 13일에 화성행궁 봉수당(奉壽堂)에서 거행되었다. 다음 14일에 정조는 신풍루에 임어하여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고 기민(饑民)에게는 죽을 나누어 주었는데, 사민 539명에게 하사한 쌀이 198석 10두이고 주린 백성 4,813명에게 하사한 쌀이 169석 9두 7승에 소금이 12석 12두 9승 9홉이고 죽미(粥米)가 9석 9두 2승에 미역이 925립, 간장이 1석 12두 7승 4홉이었다. 그리고 낙남헌에 임어하여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수가(隨駕: 임금 거둥시 임금을 모시고 따라 다님) 노인으로 영의정 홍낙성 등 15인과 화성부의 사서(士庶) 전참의 이석조 등 384인이었다.
15일에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귀경길 거둥에 올랐다. 진목정교, 미륵현을 거쳐 사근행궁에 먼저 이른 정조는 장막에 들어서 각무차사원(各務差使員)과 광주부윤 서미수(徐美修), 시흥현령 홍경후(洪景厚), 과천현감 김이유(金履裕) 등을 들게 하여 읍폐민막(邑弊民퐊)을 두루 하문하고 혜경궁 가마가 이르자 맞이하여 행궁에 들게 하고 점심 수라를 드렸다. 그 후 안양주필소, 대박산전평을 거쳐 시흥행궁에서 혜경궁을 맞이하여 저녁 수라를 들게 하였다.
다음날 16일 시흥행궁을 출발하여 문성동 앞길을 지날 때 시흥현령 홍경후가 현민들을 거느리고 노좌(路左)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정조는 말을 멈추어 시흥행궁에서 두 차례나 경숙하고 무사히 회환길에 오르는 데 대해 시혜의 방도를 생각하여 연기된 지난해 환곡을 모두 탕감하게 하고 학악(鶴嶽: 관악산)을 가리키며 연주대(戀主臺)가 어디냐고 하문하기도 했다. 이어 번대평, 만안현(素沙峴을 萬安峴으로 동일에 고침)을 거쳐 노량진 용양봉저정에 먼저 이르러 혜경궁의 가마를 맞이하여 들게 하고 점심수라를 들게 했다. 여기서 주교도청 이홍운(李鴻雲)에게 혜경궁이 내리는 비단 한 필을 하사하고, 사격(沙格: 沙工과 水夫)에게 각각 차등있게 시상하고, 노량 별장(別將)에게는 찬탁(饌卓)을 하사하고, 주교당상(舟橋堂上) 서용보(徐龍輔)에서 하교하여 사격배(沙格輩)들이 8일 간이나 등대(等待)하는 데 노고가 많았다고 하고 각각 쌀을 분급하여 해산하게 하였다. 잠시 후 주교를 건너 숭례문을 거쳐 환궁하여 8일간의 거둥길을 마쳤다.
제7차 정조의 현륭원 전배는 정조 20년(1796) 장헌세자 탄신일인 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20일 왕궁을 출발한 거둥길의 정조는 화성 교구정(交龜亭: 현 조기정방죽옆)에 이르러 좌의정 윤시동(尹蓍東)에 이르기를 이 곳에 못을 판지 불과 1년 미만에 앞들의 수확이 1,000석에 다달았으니 실로 관개의 이로움이[灌漑之利] 크다 했다. 그리하여 이 곳 정자 이름을 영화(迎華)라 하고, 들을 관길(觀吉), 벌판을 대유(大有), 못을 만석(萬石)이라 이름하여 비를 세우도록 하교하고, 화성행궁에 이르러 경숙하고, 다음 21일 현륭원을 전배하고 작헌례를 거행했다. 이날 정조는 헌작을 마치자 부복하여 전년은 세자의 주갑이고 오늘은 탄신일이니 더욱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며 오열했다. 저녁 무렵 화성행궁에 환어하여 경숙하였다. 22일 화성 동장대(東將臺)에 임어하여 시예(試藝), 열무(閱武)하고 매화포(埋火砲)를 관람한 후 군용(軍容)이 숙엄한 것을 가상히 여겨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말을 하사하였다. 또 장용사(壯勇使) 김지묵(金持默)의 나이 73세임에도 활쏘기에서 과녁을 맞추었으므로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23일 비가 내려 예정대로 환궁 못하고 화성행궁에서 경숙하고 24일에 출발하여 지지대에 주가하였다가 시흥행궁에서 주정한 후 환도하였는데, 이미 도성문이 닫혀 노방(路傍)에 주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성문경폐사건(城門徑閉事件)으로 수궁승지(守宮承旨) 신기(申耆)·이경운(李庚運), 수궁대장(守宮大將) 정호인(鄭好仁) 등이 파직되고 그외 관계 벼슬아치들이 각각 찬배, 삭직되기도 했다.
정조 21년(1797)에는 정조의 현륭원행이 두 차례 있었다. 제8차 전배가 1월 30일에 춘행(春幸)으로 거행되고, 제9차는 8월 17일 추행(秋幸)으로 거행되었다.
제8차 현륭한 전배를 위한 거둥길에서 정조는 1월 29일 왕궁을 출발하여 시흥행궁에 주정하였다가 화성행궁에 이르러 전년(정조 20, 1796) 9월 10일 완축된 화성축성을 두루 돌아 보았다. 밤에 화성행궁으로 돌아 온 정조는 화성축조에 공로가 큰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전(田)과 민(民)을 하사하고 성첩(城堞)이 완공된 지금의 가장 큰 목표는 호호부실 인인화락 (戶戶富實 人人和樂) 8자에 있다고 하며 부의 방도는 바야흐로 묘당 제신들이 강구 마련 중이나 견혜(줃惠: 세금 등을 탕감해 주는 일) 방안으로 성내에 사는 백성들의 당년 향곡(餉穀)과 환곡 이자를 감면토록 했다.
30일 정조는 현륭원에서 작헌례를 거행하고, 성황산(城隍山) 밑에 장막을 쳐 여러 신하들에게 식사를 베푼 후 화성행궁으로 돌아와 경숙하였다. 앞서 심상규(沈象奎)·여준영(呂駿永)·정만석(鄭晩錫) 등을 화성·광주·과천·시흥읍 어사로 임명하여 연로의 폐막을 염찰케 하였다. 2월 1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장안문 안에서 성내 부로들을 초치하여 위로하고, 영화역(迎華驛) 앞길에서 찰방 이오진(李五鎭)을 소견하고 역관이 완성되고 민호가 즐비한 것이 그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하여 수령으로 제수토록 하고, 지지대에서 잠시 쉬었다가 사근행궁, 안양참발소를 거쳐 시흥행궁에 주정한 후 환궁했다.
같은 해 정조는 8월 15일 김포 장릉(章陵: 仁祖의 생부 元宗의 능)을 전배하고 곧 이어 9차의 현륭원 전배를 위한 거둥길에 올랐다. 정조는 이 때 “지금 장능(章陵) 전배로 말미암아 다행스럽게도 1년 중에 현륭원을 두 번 배알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장능 전배를 마치고 김포행궁에서 경숙한 정조가 16일 김포행궁을 떠나 능곡리(能谷里)를 거쳐 부평(富平)행궁에 주정(晝停)하고 인천경(仁川境)을 지나 안산행궁(安山行宮: 시흥시 수암동 256일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중이었다. 17일에 안산행궁을 출발하여 구포(鷗浦)에 주정한 후 수원 신읍 화성행궁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서문로를 거쳐 현륭원에 이르러 작헌례를 드렸다. 18일에는 낙남헌에서 본부 무사들을 시사(試射)하게 하고 득중정에 임어하여 활쏘기를 하고, 이튿날 19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지지대에서 쉬었다가 시흥행궁에 주정한 후 용양봉저정, 주교를 거쳐 환궁하였다.
제10차 정조의 현륭원 전배는 정조 22년(1798) 2월 4일에 거행되었다. 정조는 이 거둥길에 앞서 사람을 보내어 연로 민인들의 치도 소설(掃雪)하는 고초를 살펴보게 했는데, 보고에 의하면 눈이 내릴 때마다 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연로민 모두가 나와 눈을 쓸고 길을 닦고 있다고 하여 정조는 자기만이 따뜻하게 지내는 것이 편치 않다고 말하고 부엌에 공급되는 땔나무의 양을 줄이도록 하는 한편, 연로민의 민전(民田) 10보에 복호 1부씩을 급여하도록 하였다.
현륭원 전배를 위해 2월 1일 왕궁을 출발하여 시흥로를 거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으나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예정대로 전배할 수 없어 좌의정 채제공이 전배를 퇴행하여 회환하도록 청하였으나, 정조는 매년 현륭원 전배시 무병(無病)하게 왕래한 적이 있었느냐고 대답하고 화성행궁에 그대로 머물며 조섭했다. 4일에 정조의 환후가 약간 회복되어 현륭원에 거둥하여 친히 전배를 거행하고 원상을 봉심하고 화성행궁으로 환어하였다. 그리고 5일 환궁하였다.
제11차 정조의 현륭원 전배는 정조 23년(1799) 8월 20일 추행으로 거행되었다. 그 해에 춘행을 하지 못한 이유는 모친 혜경궁의 환후 때문이었다. 혜경궁은 전년 12월부터 그 해 2월까지 40여 일 간 환후가 있어 정조가 친히 시약(侍藥)하였던 까닭으로 현륭원 전배도 퇴행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더구나 가장 신임하던 판중추부사 체제공이 1월에 사망하였으므로 춘행의 전배를 할 겨를이 없었다. 정조의 제11차 현륭원 전배는 광주군 대왕면에 위치한 헌릉(獻陵: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의 능)전배를 마친 후 이어 거행되었다. 정조는 8월 19일 왕궁을 출발하여 주교를 건너 과천행궁에 이르렀다. 그 때가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는데, 날이 밝은 후 헌능에 이르러 작헌례를 드리고 과천행궁으로 환어했다.
20일 과천행궁을 출발하여 사근행궁에 주정했다가 화성행궁을 거쳐 현륭원에 이르러 제11차 전배식을 거행하고 화성행궁으로 환어하여 경숙하고 21일 환궁하였다. 제6차 이후 시흥로를 택했으나 제11차 현륭원 전배식은 헌릉 전배를 마친 후 이어 거행되었기 때문에 과천로를 통하여 거둥길에 올랐을 뿐 아니라 헌릉 전배를 마치고 과천행궁에 환어하여 경숙하였는데, 정조의 거둥길에서 과천행궁과의 인연은 19일이 마지막이 된 셈이다. 20일 과천행궁을 떠나 현륭원에 전배 후 21일 환궁할 때는 시흥로를 택하여 환궁하였기 때문이다.
정조 24년(1800) 1월 16일에 제12차 현륭원 전배가 거행되었는데, 이것이 정조의 현륭원 전배의 마지막 거둥길이 되었다. 이 해(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절후(癤候: 부스럼병)로 춘추 49세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이 제12차 현륭원 전배의 거둥길은 이 해 정월 왕세자(순조)가 책봉되었기에 이에 대한 경사를 고하는 원행이기도 했다. 정조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는 소생이 없고 의빈(宜嬪) 성씨 몸에서 탄생한 문효(文孝) 세자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2남인 순조는 수빈(綏嬪) 박씨 소생으로 정조 14년(1790) 6월 18일 탄생하여 이 해(1800) 정월 왕세자로 책봉되고 2월에 책봉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정조는 1월 16일 거둥길을 결행하고 새벽에 출발하여 이날 현륭원에 도착하여 친히 제사를 지내고 원상에 이르러 두루 살펴보다가 엎드려 땅을 치며 경례(慶禮: 왕세자 책봉례)가 있는 금년은 각별하여 아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다 하며 애통해 하였다. 이날 현륭원을 떠나 화성 행궁에서 경숙하고, 17일 화성행궁을 떠나 환궁의 거둥길에 올랐다. 회환길에 지지대에서 여느 때처럼 멀리 현륭원을 바라보며 “새벽에 화성을 떠나와서 뒤돌아보니 (현륭원) 아득한데 지지대 위에서 또 더디고 더디고나(明發華城回首遠 遲遲臺上又遲遲)”라는 시을 읊었다. 이 지지대에서 잠시 쉬고 시흥행궁에 주정한 후 환궁하였는데, 결국 이것이 정조의 현륭원 거둥길 마지막 원행이 되었다.
▣ 3. 현륭원(顯隆園) 거둥노정(路程)
위 현륭원 거둥길에 간간이 나타나 보이는 노정의 이름은 『원행정래』목록 차례 중 20째 순서에 해당하는 「도로교량(道路橋梁)」에 구체적인 차례가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창덕궁 돈화문에서 시작하여 수원 현륭원 원소재실까지의 도로 노정과 행궁·교량명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의 소문자로 지역 경계나 지역 간 거리를 명기해 놓았다. 따라서 전 노정의 길이는 실제로 “以上 合道八十三里 橋梁二十四處”라고 끝에 마무리하여 밝혀 놓았다. 이것은 노량주교를 건너 지금의 장승백이, 대방도, 시흥, 안양, 군포천을 지나 수원에 이르는 시흥로의 경우이다.
이와는 달리 과천을 경유하여 수원에 이르는 과천로의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에 대하여는 「도로교랑」 목록 다음 차례에 보이는 「과천작로(果川作路)」에 밝혀져 있는데, 노량의 용양봉저정까지는 시흥로와 일치하고 그 다음 지명은 만안현부터 다르므로 이 노정부터 밝혀 열거하여 사당리와 과천을 거쳐 군보천점(軍堡川店)을 지나 원동점(院洞店)싸지만 열거하고 ‘(上下見上)’이라 하여, 그 이하는 전자의 시흥로 노정과 동일함을 말하고 “以上 合道路 八十五里 橋梁二十一處”로 마무리 했다. 그러므로 과천을 경유하는 원행길이 지금과는 달리 시흥, 안양을 경유하는 시흥로의 그것보다 전시적으로 2리가 더 멀고 교량수로는 3개가 오히려 적은 셈이 된다. 이제 다음에 시흥로와 과천로의 노정을 『원행정례』에 나타난 그대로 들고 그 현재의 위치를 대략 더듬어 보아 정조의 거둥길의 노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술의 편의상 시흥경유로와 과천경유로로 구분하고 그 순서를 번호를 붙여 열거하기로 한다.
○ 1) 시흥경유로 노정
○ 2) 과천경유로 노정
▣ 1) 시흥경유로(始興經由路) 노정(路程)
(1) 돈화문(敦化門) (42)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
(2) 돈령부전로(敦寧府前路) (43) 지지현(遲遲峴)
(3) 파자전교(把子廛橋) (44) 지지대(遲遲臺)
(4) 통운교(通運橋) (45) 괴목정교(槐木亭橋)
(5) 종루전로(鐘樓前路) (46) 용두전로(龍頭前路)
(6) 대광통교(大廣通橋) (47) 목욕동교(沐浴洞橋)
(7) 소광통교(小廣通橋) (48) 여의교(如意橋)
(8) 동현병문전로(銅峴屛門前路) (49) 만석거(萬石渠)
(9) 송현(松峴) (50) 여의경(如意坰)
(10) 수각교(水閣橋) (51) 영화정(迎華亭)
(11) 숭례문(崇禮門) (52) 대유평(大有坪)
(12) 도저동전로(桃楮洞前路) (53) 관고야(觀吉野)
(13) 청파교(靑坡橋) (54) 장안문(長安門)
(14) 석우(石隅) (55) 종가(鍾街)
(15) 율원현(栗園峴) (56) 화성참발소전로(華城站撥所前路)
(16) 나업산전로(羅業山前路) (57) 좌우군영전로(左右軍營前路)
(17) 만천(蔓川) (58) 신풍루전교(新豊樓前橋)
(18) 노량주교(鷺梁舟橋) (59) 신풍루(新豊樓)
(19) 용양봉저정(龍쵃鳳?亭) (60) 화성부행궁(華城府行宮)
(20) 장안현(長安峴) (61) 신풍루(新風樓)
(21) 장생현(長生峴) (62) 신풍루전교(新豊樓前橋)
(22) 도화참발소전로(桃花站撥所前路)(63) 좌우군영전로(左右軍營前路)
(23) 번대방천교(蕃大坊川橋) (64) 팔달문(八達門)
(24) 번대방평(蕃大坊坪) (65)매교(梅橋)
(25) 마장천교(馬場川橋) (66) 상류천점(上柳川店)
(26) 문성동전로(文星洞前路) (67) 건장동(健壯洞)
(27) 수천참발소전로(壽川站撥所前路)(68) 황교(皇橋)
(28) 부장천교(富壯川橋) (69) 옹봉(甕峯)
(29) 시흥현행궁(始興縣行宮) (70) 대황교(大皇橋)
(30) 대박산전평(大博山前坪) (71) 유첨현(瞻峴)
(31) 염불교(念不橋) (72) 안녕리(安寧里)
(32) 만안교(萬安橋) (73) 유근교(覲橋)
(33) 안양참발소전로(安養站撥所前路)(74) 만년제(萬年堤)
(34) 장산우(長山隅) (75) 원소동구(園所洞口)
(35) 군포천교(軍浦川橋) (76) 원소제실(園所齋室)
(36) 서원천교(書院川橋)
(37) 청천평(淸川坪)
(38) 서면천교(西面川橋)
(39) 원동천(院洞川)
(40) 사근평(肆覲坪)
(41) 사근참발전소로(肆覲站撥所前路)
以上 合道路八十三里 橋梁二十四處
○ 시흥경유로 노정 [1]
○ 시흥경유로 노정 [2]
○ 시흥경유로 노정 [3]
○ 시흥경유로 노정 [4]
○ 시흥경유로 노정 [5]
○ 시흥경유로 노정 [6]
▣ 2) 과천경유로(果川經由路) 노정(路程)
용양봉저정(龍쵃鳳?亭)[以下見上]
(1) 만안현(萬安峴) (10) 은행정(銀杏亭)
(2) 금불암(金佛菴) (11) 인덕원점후천교(仁德院店後川橋)
(3) 금불현(金佛峴) (12) 인덕원천교(仁德院川橋)
(4) 사당리(社堂里) (13) 독박지(禿朴只)
(5) 상암천교(裳巖川橋) (14) 갈산점(葛山店)
(6) 남태령(南泰嶺) (15) 독동현(禿洞峴)
(7) 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 (16) 군포천점(軍浦川店)
(8) 읍내전천교(邑內前川橋) (17) 자잔동(自棧洞)
(9) 냉정점(冷井店) (18) 원동점(院洞店)
以上合道路 八十五里 橋梁二十一處
용양봉저정 다음에 ‘以上 見上’이라고 한 것은 시흥로의 노정과 이상은 동일함을 뜻하며 (18)원동점 다음의 ‘以下見上’은 시흥경유 노정의 (20)장안현에서 (38)서면천교까지 노정까지는 다르고 (39)원동천에서부터는 시흥로 노정과 같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에 대한 구체적 노정을 다음에 하나 하나 순서대로 들고 현재의 지명이나 노정을 밝혀 정조의 거둥길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동영상】과천 거둥길
○ 과천경유로 노정 [1]
○ 과천경유로 노정 [2]
▣ 과천경유로(果川經由路) 노정(路程) [1]
정조의 수원 화산 현륭원 거둥길 노정은『원행정례(園行定例)』(1789) 목록 차례 중 20째 순서에 해당하는 「도로교량(道路橋梁)」에 구체적인 차례가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창덕궁 돈화문에서 시작하여 수원 현륭원 원소재실까지의 도로 노정과 행궁·교량명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의 소문자로 지역 경계나 지역 간 거리를 명기해 놓았다. 또한, 전 노정의 길이를 “以上 合道八十三里 橋梁二十四處”라고 끝에 마무리하여 밝혀 놓았다. 이것은 노량주교를 건너 지금의 장승백이, 대방동, 시흥, 안양, 군포천을 지나 수원에 이르는 시흥로의 경우이다.
과천을 경유하여 수원에 이르는 과천로의 경우는 「도로교량」 목록 다음 차례에 보이는 「과천작로」(果川作路)에 밝혀져 있는데, 노량의 용양봉저정까지는 시흥로와 일치하고 그 다음 지명은 만안현부터 다르므로 이 노정부터 밝혀 열거하여 사당리와 과천을 거쳐 군보천점(軍堡川店)을 지나 원동점(院洞店)까지만 열거하고 ‘(以下見上)’이라 하여, 그 이하는 전자의 시흥로 노정과 동일함을 말하고 “以上 合道路 八十五里 橋梁二十一處”로 마무리 했다. 그러므로 과천을 경유하는 원행길이 시흥, 안양을 경유하는 시흥로의 그것보다 거리로는 2리가 더 멀고 교량수로는 3개가 오히려 적은 셈이 된다.
이 노정은 용양봉저정 다음 노정부터 시흥 노정과 갈리게 된다.
(1) 만안현(萬安峴)
이 고개는 현 상도터널 입구를 지나 노량진 본동 입구에서 서남쪽으로 매봉산을 향해 올라가 다시 상도동 대림아파트 쪽으로 넘는 고개로 흔히 ‘만냥고개’로 불려지고 있는 고개인데, 원명은 소사현(素沙峴)이었으나 정조의 현륭원 능행시 개명된 이름이다. 즉 ‘만안교’·‘만년제’·‘만석거’ 등에서 보듯 접두사적 기능의 만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만안현(상도터널 부근 언덕)
(2) 금불암(金佛菴) (3) 금불현(金佛峴)
‘금불암’ 은 상도터널을 지나 상도동 고개, 일명 살피고개로 갈 때, 현 숭실대학교에 이르기 전 중간쯤 되는 동쪽편 언덕에 있던 암자라 하는데, 이 지역이 개발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금불현’은 금불암에서 현 숭실대학교 편으로 넘는 고개를 가리킨다.
【사진】금불현(상도터널에서 숭실대학교 중간의 언덕)
(4) 사당리(社堂里)
현 동작구 사당동을 가리킨다.
【사진】사당리 부근(사당동 사거리 부근)
(5) 상암천교(裳巖川橋)
사당 전철역에서 과천으로 한 200m가 지나면 우측에 채석장이 보이는데, 이 곳을 ‘치마바위’라 칭하고, 그 곳을 조금 지나면 관악산 계곡에서 흘러오는 내가 길을 가로 질러 흐르는데, 이 곳의 다리를 ‘치마바위다리’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지조사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노정의 정리로 보면 이 다리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사진】상암천(사당동에서 남태령 중간의 채석장 부근)
(6) 남태령(南泰嶺)
사당동에서 과천을 넘는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에 있는 큰 고개로 오래된 문헌과 『청구도(靑邱圖)』에는 ‘호현(狐峴)’ 즉 ‘여우고개’로 나타나 있다.
【사진】남태령
(7) 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
현 과천 10단지 과천 성당에서 관악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중앙동 사무소가 있는데, 이 곳 부근이 행궁터이며, 아직도 어필 현판인 ‘온온사(穩穩舍)’가 남아 전한다. 이 편액은 정조가 제1차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환궁길인 정조 14년(1790) 2월 11일 이 곳에서 경숙하며 과천동헌을 부림헌(富林軒), 내사(內舍)를 온온사(穩穩舍)라 명명하고 친히 써 준 것이다.
(8) 읍내전천교(邑內前川橋) (9) 냉정점(冷井店)
과천시로 개발되기 전에는 현재 10단지를 거쳐 전화국 앞으로 이어지는 구도로가 있었으며 전화국 앞길을 따라 정부제2종합청사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과 그 단지 뒤 청계산 기슭에서 흘러 들어오는 내가 합쳐 공수천을 이루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복개되었다. 전화국 앞에 놓여진 다리가 읍내전천교이며, 이 다리를 건너 2단지 쪽으로 돌아 ‘찬우물’동네로 도로가 이어졌는데, 여기의 냉정점(冷井店)은 ‘찬우물’가기 전의 전화국 부근에 있던 ‘새술막’(일명 밧술막)이라고 보아야 읍내전천교와 같은 거리에 위치한 점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두 노정이 모두 과천현행궁에서 2리라고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음 노정인 은행정(銀杏亭)과의 거리가 냉정점에서 3리에 있다고 한 것도 참고가 된다. 실제 찬우물 동네와 은행정의 거리는 1리 정도에 불과하므로 ‘찬우물’의 이름을 원용하여 새술막 주막을 냉정점으로 기록해 둔 것 같다.
(10) 은행정(銀杏亭)
현 과천시 갈현동 ‘찬우물’ 동네에서 낮은 언덕을 넘어 부대 입구 쯤 되는 곳에 ‘은행나무정’이라는 고목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 확장으로 옛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름마저 잊혀져 가는 실정이다.
【사진】은행정(찬우물마을에서 부대앞쪽 부근)
▣ 과천경유로(果川經由路) 노정(路程) [2]
(11) 인덕원점후천교(仁德院店後川橋)
현 안양시 평촌동(平村洞)과 의왕시 포일동(浦一洞) 및 과천시 경계가 되는 인덕원 네거리는 옛부터 주막거리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 네거리 북동쪽인 안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던 다리다.
(12) 인덕원천교(仁德院川橋)
인덕원 네거리에서 군포 쪽으로 가다가 동일방직에 못미친 곳에 있는 큰 다리를 말한다. 밑에는 안양천의 한 지류인 학의천(鶴儀川)이 흐른다.
【사진】인덕원천교(인덕원 네거리 아래 학의천 다리)
(13) 독박지(禿朴只)
평촌동을 지나 포일 아파트단지 못미처서 구 의왕읍(儀旺邑) 동부출장소 입구의 마을을 ‘민배기’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화한 표기다. ‘독’은 석독하여 ‘민-’으로 읽어 ‘민박기’로 나타낸 것이다.
【사진】독박지(동부출장소 입구 마을)
(14) 갈산점(葛山店)
현 의왕읍 내손리의 ‘갈내주막거리’를 나타낸다. 계원예술고등학교 입구 동네 어귀에 주막이 있었다.
【사진】갈산점(계원여고 입구 동네)
(15) 독동현(禿洞峴)
갈미를 지나 예비군 훈련장 입구 지역에 낮은 언덕 고개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을 ‘덕굴고개’ 또는 줄여서 한자어화한 것이다.
【사진】독동현(호계동 예비군 훈련장 부근)
(16) 군포천점(軍浦川店)
안양시 호계동 군포 신사거리 근처에 있던 ‘군포내주막’을 가리킨다. 이 당시는 길가 주막이 몇 곳에 있었던 듯 한데, 이 주막은 현 안양교도소 부근인 것 같다. 왜냐하면 다음 노정이 ‘자잔동(自棧洞)’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군포천점(안양교도소 뒤편 길)
(17) 자잔동(自棧洞)
속칭 ‘자진골’로 일컬어지는데, 현 안양교도소 뒤에서 성나자로원 동네로 가는 구도로길에 위치한 지역을 뜻한다. 좀더 정확히는 의왕시 오전 6동에 해당되는 곳으로 지금은 민가가 들어섰고 부근에 호성국민학교가 있다.지금은 공항석유주요소에서 교도소 뒤쪽으로 길이 나 있어 이 길만을 이용하나 본 문헌을 상고하면 군포 신사거리 주막에서 교도소 영내인 지역으로 이어진 옛길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곳은 길이 한적하고 산기슭이 잦은 듯 가라 앉아 도둑이 대낮에도 길손을 괴롭혔다 한다. ‘자잔동’은 ‘자진골(잦진골)’을 나타낸 한자어 지명임을 간파할 수 있다.
【사진】자잔동(호성초등학교 부근)
(18) 원동점(院洞店)
현 성나자로원 입구길과 자진골에서 이어지는 교차점 지점 부근의 ‘원골주막’을 ‘원동점’이라 표기한 것이다. 이 노정은 현 고려병원 입구 지점에서 시흥 경유 노정과 만나므로 다음 사근평 노정부터 원소재실까지 생략한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과천 경유 노정은 총 길이가 85리로 시흥 경유로보다 2리가 더 추가될 뿐 아니라 남태령의 험로가 있어 전술한 바와 같이 새로운 시흥로의 개설을 촉진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흥로의 개설과 함께 노정명의 두드러진 특징은 정조 19년(1795) 윤2월 12일 제6차 현륭원 전배를 혜경궁을 모시고 거행하게 되었으므로 그 달인 윤2월 1일자로 노정명을 되도록 미화시키거나 의미를 가미하여 개정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를 테면 소사현을 만안현, 삼거리점막을 유천점으로, 황교를 대황교로, 작현을 유첨현으로, 사성교를 유근교로, 방축수를 만년제로, 사근현을 미륵현으로 개명한 예가 그것이다.
【사진】원동점(성나자로원 입구)
【사진】율릉 능소 입구
【사진】융릉 재실
【사진】융릉
【사진】복원해 놓은 대황교
【사진】용주사(현륭원의 원찰)
【사진】건릉(정조의 능)
【사진】건릉 재실
【사진】건릉의 석물
【사진】건릉의 본 앞 뜰
【사진】구 남태령길 부근
【사진】지지대(현재의 모습)
【사진】지지대 비각 앞 하마비
【집필자】 李明奎
【참고문헌】
本稿는『園幸定例』·『華城城役儀軌』·『大東輿地圖原圖』등의 문헌자료를 근거로 작성하고 『始興郡誌』(1988), 『安養市誌』(1992)「春香傳 異本의 路程記考察」(李明奎, 1988)「大東輿地圖의 讀圖」(李祐炯, 1990) 등을 참고하여 작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