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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지털한자 원문보기 글쓴이: meetl
논개의 구국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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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사당이 진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두어군데 더 있는 줄 이제 알았다.
내가 방문한 곳은
전북 장수군에 있는
사당이었다.
사당을 그 규모가
약 5만명평이라고 하는데
그 땅을 희사한 분을 알게 되어서
함께 방문하게 되어서
방문 의도가
좀 남달랐다.
그런데 그곳을 다녀와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논개의 정식이름이
성은 주씨요. 이름은 논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장과정과 일대기를
읽어보면, 의문이 남는다.
*논개연보
1574년 9월 3일(음), 전북 장수군 대곡리 주촌에서 부친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이 사망하고 숙부 주달무에게 의탁하였다.
1578년, 숙부 주달무가 김풍헌의 모자라는 아들과 혼인을 약속하고 민며느리( 여자가 남자 집에 미리 가서 살다가 결혼하는 제도. 여자 나이 10세 가량 되었을 때 약혼하고 신랑집에서 머물다가 성인이 되면 여자는 집으로 갔다가 다시 맞아들이는 풍습)로 돈을 받고 팔아넘겼다. 그러나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논개의 모친은 논개를 데리고 친정인 함양군 안의면 봉전마을로 피신하였다.
이에 김풍헌이 주달무와 논개의 모친을 혼인빙자 사기 혐의로 장수현 관아에 고소하였다. 이때 장수현감이 최경회였다.
최경회[1532∼1593] 1567년(선조 즉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영해군수(寧海郡守)가 되었다.
1579년, 장수현감 최경회가 도망 간 주달무를 잡지못하고 박씨를 잡아서 재판이 열었다.
*1)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최경회에게 의탁하였다. <--- 논개 중심
*2)유죄를 선고 받고 모친 박씨가 관비(관기)가 되었다. <---박씨 중심
이때 이후, 최경회가 1580년 영해군수(寧海郡守)로 자리를 옮기자 따라감
*3)이후, 최경회가 모친의 상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시묘살이를 할 동안 이들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1590년, 논개가 최경회의 부실이 되었다.
*위의 1)에서 이어지면, 최경회에 의탁해서 자라서 성인이 되는 17세에 부실(후처)이 되었다. 이때 최경회가 59세에 였다.
*2)에서 모친 박씨가 관비가 되어 딸인 논개(관비의 딸로서 대를 잇는 관기 신분으로 '논개'였는지 아니면 본래부터 성명이 '주논개'였는지가 불분명하다.
1592년, 최경회가 전쟁이 발발하자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에 와서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을 할 때에 논개가 뒷바라지를 하였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6월 24일
이때 변보(邊報)가 매우 위급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서 6월 24일 진주로 달려 들어갔고,
충청 병사 황진(黃進)이 7백 명,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가 5백 명,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가 4백 명,
부장(副將) 장윤(張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이 1백여 명,
의병장 변사정(邊士禎)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이 2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미 먼저 와서 본부 목사(本府牧使) 서예원(徐禮元)과 김준민(金浚民)ㆍ이종인(李宗仁) 등과 수성(守城)을 의논하고 있었다.
며칠 전, 6월 19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홍계남(洪季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보고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가서 내면(內面)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하자,
김천일이 강력히 저지하였으나 선거이와 홍계남 등은 성을 나가 전북 남원 운봉(雲峰)에 진을 쳤다.
6월 21일에 적 2백여 기(騎)가 동북 산상(山上)에 출몰(出沒)하였고, 22일 진시(辰時)에 적 5백여 기가 북산(北山)에 올라 열진(列陣)하고서 병위(兵威)를 과시하였으나, 성 안에서 출동하지 않자 사시(巳時)에는 적의 대부대(大部隊)가 뒤이어 와서 2기(起)로 나누어 1기는 개경원(開慶院)의 산 허리에 진을 치고, 1기는 향교(鄕校) 앞길에 진을 쳤다.
1차 교전>
처음으로 교전(交戰)할 때 성 안에서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적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진격해 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성 안에서는 적이 오려 한다는 것을 듣고서, 성남(城南)은 촉석(矗石)과 남강(南江)이 매우 위험하므로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니 서북에 호(壕)를 파야 한다고 여겨 해자를 파서 그 곳에 물을 담아 두었으므로 적이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동편뿐이었다. 그런데 이 때에 적이 그 해자를 파내어 물을 빼고서 다 마른 뒤에 흙을 운반해다가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2차 교전>
23일 낮에 세 차례 공격해 온 것을 세 번 물리쳤고 밤에 또 네 차례 공격해 온 것을 네 번 물리쳤는데, 적이 밤을 이용하여 일시에 크게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 안에서 어지럽게 쏘아대니 맞아 죽은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4일에 적의 증원군(增援軍) 5~6천 명이 와서 마현(馬峴)에 진을 치고 또 5~6백 명의 증원군이 와서 동편에 진을 쳤다.
3차 교전>
25일에 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토옥(土屋)을 세워 성 안을 내려다 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충청 병사 황진도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전복(戰服)과 전립(戰笠)을 다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남녀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해 축조(築造)를 도왔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현자 총통(玄字銃筒)을 쏘아 적굴(賊窟)을 파괴하였으나 적은 즉시 개수(改修)하였다.
이날 세 차례 진격해 온 것을 세 차례 다 물리쳤고 또 밤에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격퇴하였다.
4차 교전>
26일에 적이 나무로 궤짝을 만들어 생가죽을 씌워 각자 그 궤짝을 가지고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와서 성을 헐므로 성 안에서 큰 돌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적이 물러갔다.
적이 또 동문(東門) 밖에 큰 나무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판옥(板屋)을 만들어 놓고는 그 위에서 많은 화전(火箭)을 성 안으로 쏘아대니 성 안의 초가집이 일시에 연달아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뻗쳐올랐다.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겁을 먹고서 당황하니, 김천일(金千鎰)이 의병 부장(義兵副將) 장윤(張潤)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았다. 이때 날씨가 크게 궂어 궁시(弓矢)가 모두 느슨하게 풀리고 병력도 매우 지쳤다. 적이 ‘대국(大國)의 군대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어찌 감히 항거하는가.’ 하는 내용의 글을 성 안으로 쏘아 보내왔다. 성 안에서도 ‘우리 나라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明軍)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여 남김 없이 섬멸하려는 데 있어서이겠는가.’ 하는 내용의 글로 답하니, 적이 이 글을 보고서 옷을 걷고 볼기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당장(唐將)은 이미 다 물러갔다.’ 하였다.
이날 낮에 세 번 싸움을 하여 세 번 다 물리쳤으며, 밤에 또 네 번 싸워 네 번 다 물리쳤다.
5차 교전>
27일에 적이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언덕을 축조(築造)하고 그 위에 대나무를 엮고 붕(棚)을 만들어 놓고서 성 안을 내려다 보고 탄환을 쏘아대니 성 안에 죽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큰 궤짝으로 사륜거(四輪車)를 만들어 적 수십 명이 각각 철갑(鐵甲)을 입고 궤를 옹위(擁衛)하고 나와서 철추(鐵錐)로 성을 뚫으려 했다. 이때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의 힘이 군중(軍中)에서 으뜸이었는데 종인이 연거푸 5명의 적을 죽이니 나머지 적이 모두 도주하였다.
성 안의 사람들도 기름을 부은 횃불을 계속 던지니 왜적들이 다 타 죽었다. 초저녁에 적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으로 침범해 왔는데 종인이 그 수하(手下)와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많은 적을 죽이자 적이 물러갔다.
6차 교전> 황진 전사
28일 여명(黎明)에 이종인이 지키던 성비(城陴)로 돌아가 보니 전날 밤에 서예원(徐禮元)이 야간 경비(夜間警備)를 소홀하게 하여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었으므로 성이 무너지려 하였다.
이종인이 크게 노하여 서예원을 꾸짖었다. 적이 성 밑까지 바싹 다가 왔는데 성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죽은 적이 매우 많았으며, 그 중에 적추(賊酋) 하나가 탄환을 맞고 죽자 뭇 적이 그 시체를 끌고 물러갔다.
황진이 성 안을 굽어보며 ‘오늘 싸움에서 죽은 적이 1천여 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밑에 잠복하고 있던 적이 위로 대고 철환(鐵丸)을 쏘았다.
그 철환이 목판(木板)에 비껴 맞고 퉁겨나와서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이때 황진과 장윤(張潤)의 역전(力戰)이 제장(諸將) 중에서 으뜸이라고 칭해졌기 때문에 온 성 안이 그에 의지하여 중히 여겼으므로 황진이 탄환을 맞고 죽자 【혹자는 황진이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고 성이 함몰(陷沒)될 때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온 성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7차 교전> 장윤 전사
29일에 서예원으로 황진을 대신하여 순성장(巡城將)을 삼았는데, 예원은 겁을 먹고 전립(戰笠)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눈물을 흘리며 순행하니, 병사 최경회(崔慶會)가 예원이 군정(軍情)을 경동(驚動)시킨다고 하여 참(斬)하려 하다가 그만두고서 장윤으로 대신 순성장을 삼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미시(未時)에 비로 인하여 동문쪽의 성이 무너져서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오자 종인이 수하(手下)의 병사들과 더불어 궁시(弓矢)는 놓아두고 창과 칼을 들고서 상대해 육박전을 하여 쳐죽인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니 적이 물러갔다.
또 서북문에서 적이 고함을 치며 돌진해 오자 창의사 김천일의 군사가 궤산(潰散)하여 모두 촉석루(矗石樓)로 모였다.
이종인 전사>
적이 성으로 올라와서 칼을 휘두르며 날뛰자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니 제군(諸軍)이 일시에 궤산되고 이종인도 탄환을 맞아 죽었다.
김천일 투신 전사>
좌우가 김천일을 부축해 일으켜서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김천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더불어 서로 끌어안고서 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적이 본성(本城)을 무찔러 평지(平地)를 만들었는데 성 안에 죽은 자가 6만여 인이었다. 【어떤 이는 8만여 인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3만여 인이라고 한다.
뒤에 감사 김늑(金玏)이 사근 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을 시켜 조사하게 하였는데 성 안에 쌓인 시체가 1천여 구(軀)이고,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의 북안(北岸)까지 쌓인 시체가 서로 겹쳤으며, 청천강(菁川江)에서부터 옥봉리(玉峯里)ㆍ천오리(遷五里)까지 죽은 시체가 강 가득히 떠내려갔다.】 성이 함락된 뒤 적은 군대를 몇 기(起)로 나누어 1기는 단성(丹城)ㆍ산음(山陰)을 향해 출발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가고, 1기는 바로 본주(本州) 서면(西面)으로 나아가서 지리산으로 간 적과 합세하여 구례(求禮)ㆍ광양(光陽)ㆍ남원(南原)ㆍ순천(順天) 등지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을을 노략질하였다.
이때 낙 참장(駱參將)은 남원에 있으면서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여 죽음으로 지킬 계획을 하고, 포수(砲手) 3백 명을 파견하여 취성(鷲城)에 진을 친 다음 영상(嶺上)에 기치(旗幟)를 많이 벌여 놓고서 불을 들어 호응하게 하였다.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내려가다가 적의 선봉(先鋒)을 만나 길에서 적을 공격하여 수십 리를 가며 싸우다가 구례(求禮)ㆍ광양(光陽)에 이르러 오랫동안 크게 싸우니 적이 물러갔다. 1기는 사천(泗川)ㆍ고성(固城)으로 향해 가서 분탕질을 했고, 1기는 삼가(三嘉)ㆍ의령(宜寧)으로 향해 가서 공사(公私)의 가옥(家屋)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함안(咸安)ㆍ창원(昌原) 등지에 주둔하였으며, 1기는 포로로 잡은 남녀와 복물(卜物)을 싣고 김해(金海)를 향해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최경회의 소식은 없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7월 22일에 보고되었다.
7월 22일
경상우도 관찰사 김늑(金玏)을 치계하였다.
*치계 : 진주성의 수성 절차, 사망자, 패전 후 상황을 보고하다
“신이 처음 진주의 사태가 급하다는 것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모든 수성(守城) 절차와 사망한 경외(京外)의 장사(將士)와 군인의 수를 탐문하게 하였더니,
본주(本州)의 군사가 2천 4명,
본도 병사(兵使)의 군사가 4백 20명,
충청 병사의 군사가 97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가 60명,
복수 의병장(復讐義兵將) 전사의(全士義)의 군사가 50명,
적개 부장(敵愾副將) 이잠(李潛)의 군사가 50명,
표의병(彪義兵) 이계년(李桂年)의 군사가 30명,
웅의 대장(熊義代將) 정원한(鄭元漢)의 군사가 11명,
영광 의병(靈光義兵) 심우신(沈友信)의 군사가 12명,
분의장(奮義將) 강희열(姜姬悅)의 군사가 50명,
방의 대장(方義大將) 강희보(姜姬輔)의 군사가 30명,
현웅군 대장(玄雄軍代將) 정충훈(丁忠訓)의 군사가 20명,
채의 대장(蔡義代將) 정운호(丁雲湖)의 군사가 1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를 전해 들은 것일 뿐입니다.
본주의 군사가 이 수에 그칠 뿐이 아니고 또 계속하여 입성(入城)한 사람들도 매우 많았는데 성이 함락될 당시 빠져나온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상인(常人)의 무리들은 성을 뛰어 넘거나 혹은 헤엄을 쳐서 탈출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지금 며칠이 지났는데도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의 거처를 알 수 없으니 매우 걱정이 됩니다.
본도의 적세는 손을 쓸 곳도 없을 정도로 적이 사경(四境)을 포위하고 있는데 잔졸(殘卒)마저 다 도망가고 없으니 비록 이(李)ㆍ곽(郭)이 이런 일을 당한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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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의 거처를 알게 된 것은
8월 4일(을유)의 보고에 기록되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될 때 싸우다가 죽은 문무(文武) 제장(諸將)들에게 서둘러 포상(褒賞)의 전례(典禮)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온 성이 다 도륙되어 한 사람도 살아난 자가 없고 우리 나라의 제군(諸軍)도 감히 가까이 간 자가 없어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서 말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진실된 보고를 기다리고자 하여 감히 계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근자에 전후의 장계를 상고하고 계문을 참고해 보건대,
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은 몸소 성을 순행하면서 눈물로 사졸들을 위무하였고 성이 함락될 때 좌우가 부축해 일으켜서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김천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채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너희들이나 피하라.’ 하고서
***최영회(崔永會)와 더불어 촉석루(矗石樓) 위에서 통곡을 하고는 이내 스스로 벼랑 밑으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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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적장 살해>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여기서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순국했다고 하면, 너무 그의 죽음을 낮게 평가한 것이다.
*논개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통한 적장을 죽이는 전투를 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또 진주성의 6장수들을 포상할 때를 보면, 신분은 엄청 중요하다. 포상을 건의할 때에 비변사와 선조의 입장이 달라서 비겁한 선조는 신분을 중요시하여 전사한 장졸들과 그 가족들을 제대로 위무하지 못했다. 그 역사적인 기록은 실록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러므로 논개는 최경회의 '부실'이었나 아니면 그에게 속한 '관기'였느냐 하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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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가 임란초기 전투와 진주성 함락에서 승리의 주역을 담당하여 일본에서는 이순신처럼 추앙을 받는 적장(게야무라 로쿠스케)을 물에 빠뜨려 살해한 공은 만고의 전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지만, 최경회 장군의 부인으로서 적장을 죽인 것과 관기로서 적장을 살해한 것을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도 이등방문을 총으로 쏘아죽였을 때에 개인의 원한이 아니라 대한독립군 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했다고 했었다.
논개에게 죽은 그 장수(게야무라 로쿠스케)의 후손들은 지금 논개를 오히려 왜군 장수의 부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거의 국가 수준으로 숭모행사를 벌리고 있다.
이제는 저 역사를 왜곡하는 재주를 가진 그 왜놈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구국의 영웅 논개여, 당신을 위하여 땅 5만평을 희사한 분과는 달리
이 땅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바꾸려는 무리들이 당신을 관기로 평가하지 않을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