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기(駕洛國記)
(文廟朝 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문종조 대강년간 금관지주사 문인 이 기록한 것을 여기에 간략 하게 옮겨 놓는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수장(首長)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백 호 에 7만 5천 명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 광무제(世祖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42) 3월 상사일(上巳日)에 그들이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과 마을 사람들 2,3백 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그 모습은 안 보이고 소리만 났다.
“여기 누가 있느냐”
구간들은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이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래서 내려왔다. 너회들은 이 산 꼭대기를 파고 흙을 집으면서 "신이여, 신이여, 수로(首露)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라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그 말을 따라 마을 사람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글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놀랍기도 하고 기뻐서 함께 수없이 절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탑(榻) 위에 두고 무리들은 모두 흩어졌다.
12일 이 지난 그 다음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금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어린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덩실하니 컸으며, 이내 평상에 앉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삼가 절을 올리고는 극진히 공경했다.
어린이는 나날이 자라 십수일이 지나니 키가 9척임은 은나라 천을(天乙) 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龍顔)임은 한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겹눈동자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라 하거나 수릉(首陵) 이라 했다.
나라 이름은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거나 또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했으니 곧 여섯 가야국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국으로 돌아가서 임금이 되었다. 여섯 가야국은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으로써 경계를 삼았고, 남쪽이 나라의 끝이 되었다.
임시 궁궐을 세우게 하여 거처했는데, 특히 질박하고 검소하여 짚의 이엉 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 계단은 겨우 석 자였다.
즉위 2년 계묘(43) 봄 정월에 왕 은 말했다.
“내가 도읍을 정하려고 한다.”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 에 가서 산악을 두루 바라보고 가까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이 땅이 여뀌잎처럼 협소하기는 하나, 산천이 기이하게 빼어나니 16나한 이 살 만한 곳이오. 하물며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매 칠성(聖) 이 살 곳으로도 이곳이 적합한데, 이 땅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 이 되었다”
이에 1천5백 보 둘레의 외성(外城)과 궁궐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고(武庫), 창고를 지을 장소를 마련한 후 일이 끝나자 궁궐로 돌아왔다.
널리 나라 안의 장정·인부·공장(工匠)들을 불러모아 그 달 정월 20일에 성곽 일을 시작하니, 3월 10일에 이르러 역사가 일단 끝났다. 궁궐과 옥사(屋舍)만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그해 10월에 시작하여 갑진년(44) 2월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으로 옮아가서, 대정(大政) 을 보살피고 서무(庶務)에도 부지런하였다.
완하국(琓夏國) 함달파왕의 부인이 임신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다.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으로 오니 그의 키는 다섯 자였고 머리의 둘레는 한 자나 되었다. 흔연히 대궐에 나아가서 왕에게 말하였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왕은 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고, 나는 장차 나라 안 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 나는 감히 천명(天命)을 어기어 왕위를 남에게 줄 수 없으며, 또 감히 우리 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그렇다면 기술(奇術)로써 승부를 결정하자.”
“좋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그 동안이 촌음(寸陰)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에 탈해가 본모습대로 돌아오니 왕도 또한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이에 엎드려 항복했다.
“제가 기술을 다투는 장면에서 매가 독수리에게서, 참새가 새매에게서 죽음을 면함은 아마 성인께서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仁德)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툰다 해도 이기기는 진실로 어렵겠습니다.”
곧 탈해는 하직하고 나갔다. 인교(麟郊) 변두리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 배가 와서 대는 뱃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슬그머니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반란을 꾸밀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을 실은 배 5백 척을 보내어 그를 쫓았다.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도망하니,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건무(建武) 24년 무신(48) 7월 27일에 구간 등이 왕을 조알(朝謁)할 때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 을 아직 얻지 못하셨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 뽑아 들여 왕비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왕은 말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이다. 내게 짝지어 왕후로 삼게 함도 또한 하늘이 명령할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령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 으로 가게 했다. 갑자기 한 척의 배가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빛의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하여 오는 것이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육지에 내려와서 뛰어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와 그 사실을 아뢰니 이 말을 듣고 왕은 기뻐했다.
곧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木蓮) 의 키를 바로잡고 계목의 노 를 들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배 안에 탔던 왕후는 말했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가겠느냐?”
유천간들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그렇게 여겨 유사(有司)를 거느리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 산 변두리에 장막의 궁전을 설치하여 기다렸다. 왕후도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서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그것을 폐백 삼아 산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이 외에 시종(侍從)해온 잉신 (臣) 두 사람은 이름을 신보(申輔)·조광(趙匡)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며, 노비 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錦繡)·능라(綾羅)와 옷·필단(疋緞)이며 금은·주옥과 경구(瓊玖)의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왕후가 점점 행궁(行宮) 으로 다가가니 왕은 나와서 그녀를 맞이하여 함께 장막의 궁전에 들어갔다. 잉신 이하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로 나아가서 임금을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령하여 잉신의 부부를 인도하게 하며 말했다.
“잉신은 사람마다 각방에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의 노비들은 한 방에 대여섯 명씩 있게 하라.”
왕은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었다.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 재웠으며, 의복·필단·보화도 주었다. 그리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지키게 했다.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國) 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라 하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올 5월달에 부왕(父王)과 모후(母后)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내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오니,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 에 오르게 했으니 신성한 분이란 이 사람이며,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 가락국을 향해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 를 찾고, 하늘로 가서 멀리 반도(蟠桃) 를 찾아, 지금 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 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말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으로부터 올 것을 먼저 알았으므로 신하들에게서 왕비를 맞이하자는 청이 있었으나 굳이 듣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 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오.”
드디어 혼인 하여 이틀 밤과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는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각각 쌀 열 섬과 베 서른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잉신 부처도 나란히 수레를 탔다. 중국의 각종 물품도 모두 실어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시각 은 오정이 되려 했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처와 그들의 노비들에게는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게 했다. 나머지 종자들에게도 스무 칸이 넘는 빈관(賓) 한 채를 주어 사람수를 보아 적당히 나누어 있게 하고, 매일 주는 물품은 풍부했다. 그리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보물은 내고(內庫)에 간직해두어 왕후의 사시 비용으로 쓰게 했다.
제도의 정돈과 허왕후의 내조의 공
어느 날 왕이 신하에게 말했다.
“구간들이 모두 여러 벼슬아치의 으뜸이지만, 그 직위와 명칭이 다 소인·농부의 칭호이며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니 만약 외국에 전해지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드디어 아도(我刀)를 고쳐 아궁(我躬)으로 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하고,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하고,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했다.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명칭은 윗글자는 바꾸지 아니하고 아랫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하고,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치고, 신귀(神鬼)의 음은 바꾸지 아니하고 그 훈만 고쳐 신귀(臣貴)로 했다.
왕은 신라의 직제를 채용하여 각간·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었고, 그 이하의 관료는 주나라의 제도와 한나라의 법도로써 나누어 정했다. 이것은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한 방법이었다.
이제야 나라와 집안을 잘 다스리고 인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급(嚴急)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혹(嚴酷)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하는 삶을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 대하여 땅이 있고, 해에 대하여 달이 있고, 양에 대하여 음이 있음과 같음에랴! 그 내조의 공은 도산(塗山) 씨가 하나라 우왕(禹王)을 돕고, 당원(唐媛) 이 순임금을 도와 요(姚)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 왕후는 곰의 몽조(夢兆) 를 얻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189)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백쉰일곱 살이었다.
나랏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고,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백성을 사랑하던 왕후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왕후가 처음 배에서 내려 닻을 내린 나루터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고 하였다. 또한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등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만에 각자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가 1,2년이 지나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밖에 노비들은 온 지 7,8년에 아직 자녀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고향 을 생각하다가 죽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관(賓) 은 텅 비어버렸다.
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에 의지한 채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다. 10년을 지낸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199)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백쉰여덟 살이었다.
나랏사람들은 마치 부모 를 잃은 듯했으며, 슬퍼함이 왕후가 돌아가던 때보다 더했다. 마침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다. 높이는 한 발이요 둘레는 3백 보인데, 그곳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그 아들 거등왕(居登王) 으로부터 9대손 구형왕(仇衡王) 까지 이 묘(廟)에 배향했다. 매년 정월 3일·7일과 5월 5일, 8월 5일·15일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奠)으로 제사지냈는데,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문무왕)은 용삭 원년 신유(661) 3월 어느 날에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 나라에 항복할 때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 의 아들이 솔우공(率友公)이요, 그 아들 서운(서현) 잡간(庶云.잡간) 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았다. 때문에 시조 수로왕은 나 에게 있어서 15대의 시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했으나 그 묘는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제사를 계속하게 하겠다.”
이내 사자(使者)2를 그 옛 궁전 터에 보내어 묘에 가까이 있는 가장 좋은 밭 30경(頃) 을 바쳐 제사를 마련할 토지로 삼은 후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 위토(位土)에 부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 급간 (世級 .급간)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그 제전(祭田)을 주관하여 매년 명절마다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밥·차·과자 따위의 많은 제물로써 제사를 지냈으며 매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제일(祭日)도 거등왕이 정했던 연중 다섯 날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향기로운 제사는 그제야 우리에게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에 편방(便房) 을 두고부터 내려와 구형왕 말기에 이르기까지 3백30년 동안에 묘의 제사는 영구히 변함이 없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 원년 신유(661)에 이르기까지의 120여 년 사이에는 이 묘의 제사를 간혹 빠뜨리기도 했던 것이다.
문무왕 은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구나.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 다시 이를 행하였다
신라 말기에 충지 잡간(忠至.잡간)이란 자가 있었다. 금관성(金官城)을 쳐서 뺏은 뒤 성주장군(城主將軍) 이 되자 그 부하 영규 아간(英規阿干)이란 자가 장군의 위세를 빌려 묘의 제향(祭享)을 빼앗아 제사를 참람히 행하더니 단오날에 사당에 제사지내던 중,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부러져 영규가 깔려 죽었다. 이에 장군 충지 잡간은 혼자말을 했다.
“다행히 전세의 인연으로 외람되이 성왕(聖王)2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전을 올리게 되었다. 나는 마땅히 그 진영(眞影)을 그려 모시고 향과 등으로 받들어 신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
마침내 교견(鮫絹) 석 자에 진영을 그려서 벽 위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켜서 경건히 받들었다. 사흘도 채 안 되어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 위에 고였는데 그것이 거의 한 말 가량이나 되었다. 장군은 너무 두려워서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가서 불살라버리고는 즉시 수로왕의 직계손인 규림(圭林)을 불러 말했다.
“어제도 불상사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날 수 있는가? 이는 정녕 묘의 위령(威靈)이 내가 화상을 그려 공양함이 불손하다고 크게 노하신 것 같다. 영규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매우 괴이히 생각되고 두려워서, 화상을 불살라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손이니 그전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합당하겠다.”
규림은 선대(先代)를 이어 제사를 받들더니 나이 여든여덟 살에 죽었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아버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다.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가 일어나 사당에 와서 간원이 차려둔 제물을 치우게 하고 자기의 제물을 차려서 지내더니 삼헌(三獻) 이 채 끝나지 않아서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그런데 옛사람의 말에 “참람하게 지내는 제사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했는데 전에는 영규의 일이 있었고, 후에는 준필의 일이 있었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이른 말인가.
또 도적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 하여 와서는 그것을 훔쳐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도적들이 오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먹인 용사 한 사람이 사당 안으로부터 나와 화살을 사면으로 빗발처럼 쏘아서 일고여덟 명을 맞추어 죽이니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에 다시 오니 큰 구렁이가 나타났는데, 길이는 서른 자가 넘고 눈빛은 번개 같았다. 사당 곁에서 나와 여덟아홉 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죽음을 면한 자들도 모두 엎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러므로 능원의 안팎에는 틀림없이 신물(神物)이 보호하고 있음을 알겠다.
건안 4년에 처음으로 사당을 세운 때로부터 현재 고려 문종 즉위 31년인 대강 2년 병진(1076)에 이르기까지 대개 8백78년이나 되었는데, 제단을 쌓은 깨끗한 흙이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었던 좋은 나무도 시들어 죽지 않았다. 더구나 그곳에 벌여놓은 많은 옥조각도 또한 부서진 것이 없다.
이로써 본다면 신체부(辛替否) 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멸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 했지만, 다만 이 가락국만은 예전에 멸망한 점은 신체부의 말이 들어맞았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점은 신체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여기에 또 놀이로서 수로왕을 사모하는 일이 있다. 매년 7월 29일에 이 지방의 인민과 서리(胥吏)·군졸들은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으로써 즐기고 떠들면서 동서편으로 서로 눈짓하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 망산도(望山島)로부터 말발굽은 빨리 육지로 달리고 뱃머리 는 둥실거리며 물 위에서 서로 밀면서 북으로 고포(古浦)로 향해 달아난다. 대개 이는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들이 허황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수로왕에게 급히 아뢰었던 옛 자취다.
가락국이 망한 후에 대대로 이곳의 칭호는 일정하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
이 즉위한 개요 원년 신사(681)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백59년에 우리 태조가 후삼국을 통합한 후로는 여러 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고 하여 배안사(排岸使)를 두어 48년간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 또는 김해부(金海府)라 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27년간을 지냈다.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64년간을 지냈다.
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 보고했다.
“수로왕 능묘(陵廟)에 딸린 땅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結)로써 그전대로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 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관 관서(官署)에서 그 장계(狀啓)를 전해 아뢰니 그때 조정에서 지령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변해서 성군이 되었고, 왕위에 계시어 나이 백쉰여덟 살이나 누렸으니, 저 삼황 이후로 이에 견줄 이가 적다. 수로왕이 세상을 떠난 후 선대로부터 묘에 딸렸던 전답을 지금 줄임은 참으로 의구스러운 일이므로 허락하지 않는다.”
양전사가 또 거듭 아뢰니 조정에서도 이를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아니하고 절반은 향인(鄕人)의 역정에게 나누어주게 했다.
절사(節使) 는 조정의 명령을 받아 이에 절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절반은 부(府)에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지급했다. 거의 이 일이 끝날 무렵에 이르러 양전사는 몹시 피곤함을 느끼더니 갑자기 어느 날 밤 꿈에 일고여덟 명의 귀신을 보았는데,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너에게 큰 죄악 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아프다고 하면서 놀라 깨었다. 이내 병이 나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쳤는데, 병이 낫지 않으므로 관문(關門)을 지나서 죽었다.
이런 까닭으로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조정의 명을 받은 사자가 와서 그 밭을 검사해보았더니 11결·12부(負)·9속(束) 으로 모자라는 것이 3결 87부 1속이었다. 이에 모자라는 밭의 가로챈 것을 조사해서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모자라는 것을 능묘에 주게 했으니 또한 고금에 이와 같이 탄식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시조 수로왕의 8대손 김(금)왕(金 王)은 부지런히 정치를 했고, 또 매우 도(道)를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하여 원가(元嘉) 29년 임진(452)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결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액자(額子)에 왕후사(王后寺) 라 했다.
사자를 보내어 절 근방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고 불·법·승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 이 절이 생기고부터 5백 년 후에 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절에 바친 전지와 채초지(採樵地)가 모두 3백 결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은 왕후사를 없애고 장사(莊舍)로 만들어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슬프도다. 시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했다. 사적을 새긴 문구는 이러하다.
혼돈이 처음 열리자 해와 달 이 밝게 되었다. 인륜이 비록 생겼으나,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벌써 여러 대를 지냈으나 동국(東國)에서는 아직 서울이 갈려 있었다. 신라는 먼저 정해지고 가락은 후에 경영(經營)되었다.
세상에 통할할 사람이 없으면 누가 인민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들을 돌보았다.
부명(符命)을 주어 정령(精靈)을 특히 보내었다. 산중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 속에 형체를 감추었다.
안도 오히려 아득하고, 밖도 또한 캄캄했다. 바라보니 형상은 없는 듯했으나, 들으면 곧 소리가 있었다.
군중들은 노래로써 아뢰고, 무리들은 춤을 추었다. 이레가 지난 후에는 한때 안정되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자 푸른 하늘이 터져나왔다. 여섯 개의 둥근 알이 한 가닥 자주색 끈에 매여 내려왔다.
낯설은 지방에 가옥이 연잇게 되었다. 구경꾼은 담에우듯 하고 쳐다보는 이는 우글거렸다.
다섯 분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한 분만이 성에 남아 있었다. 같은 때 같이한 자취는 아우와 형과 같았다.
실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지으셨다. 왕위에 처음 오르자 세상은 곧 맑고 밝아지려 했다.
궁전은 옛 제도를 따랐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다. 큰 정사에 힘쓰고 서정(庶政)을 보살폈다.
편파(偏頗)함과 편의(偏倚)함이 없으니 순일(純一)하고 정수(精粹)할 뿐이었다. 길손은 길을 서로 양보하고, 농부는 농토를 서로 사양했다.
사방은 모두 안정되고 만민이 태평을 맞이했다. 갑자기 풀잎의 이슬 처럼 대춘(大椿) 같은 수명 을 보전하지 못했다.
천지가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다. 금바탕 같은 그 발자취요, 옥소리 같은 그 명성이었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영묘(靈廟)의 제전(祭奠) 이 깨끗했다. 세월은 비록 흘렀으나 그 규범만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거등왕(居登王):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다. 건안 4년 기묘(199) 3월 13일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39년, 가평(嘉平) 5년 계유(253)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며,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 에서는 성은 김씨니 대개 시조가 금알에서 난 까닭에 금을 성으로 삼았다 고 했다.
마품왕(麻品王):혹은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다. 가평 5년 계유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39년, 영평(永平) 원년 신해(291)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 조광의 손녀 호구(好仇)이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혹은 금물(今勿)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다. 영평 원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59년, 영화(永和) 2년 병오(346)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궁 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며,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성은 김씨다. 영화 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62년, 의희(義熙)(84) 3년 정미(407)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에 왕위에 올랐다.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벼슬아치로 삼았으므로 국내가 소란스러웠다. 신라가 꾀로써 가락국을 치려 했다. 이때 가락국에 박원도(朴元道)란 신하가 있었는데, 좌지왕에게 간했다.
“유초(遺草)를 열람해도 또한 털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입니까! 질서가 문란해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되겠습니까. 또 복사(卜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점괘의 말에 ‘소인을 제거하면 군자인 벗이 와서 합심할 것이다’ 했으니 임금님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왕은 사과했다.
“그 말이 옳다.”
용녀를 물리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그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나라를 다스리기 15년, 영초(永初) 2년 신유(421) 5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도령 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질가(叱嘉)라고도 한다. 영초 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31년, 원가(元嘉) 28년 신묘(451) 2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진사 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이며, 왕자 질지(叱知) 를 낳았다.
지왕 (知王):김(금)왕(金 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시조의 비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가 처음 시조와 결혼했던 곳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하고 밭 10결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했다. 나라를 다스리기 42년, 영명(永明) 10년 임신(492) 10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금상 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금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30년, 정광(正光) 2년 신축(521) 4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출충 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성은 김씨다. 정광 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42년, 중대통 4년 임자(532)에 신사 제23대 법흥왕 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내 왕은 동기 탈지잇금(脫知爾叱今)을 보내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해서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며,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 각간(世宗角干)이요, 둘째는 무도 각간(茂刀角干)이며, 셋째는 무득 각간(茂得角干)이었다.
개황록(開皇錄) 에서는.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에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했다 고 한다.
흥무대왕 김유신(金庾信)
김수로왕의 13세손인 김유신(金庾信)은 진평왕 17년 충북 진천에서 서현(舒玄)장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격하게 혈통을 따지는 신라 귀족사회에서 위험과 고난을 자진하여 도맡아 헌신적이고 비장한 자세로 모진 고난과 풍상속에서 삼국통일의 원훈이된 공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그를 따르는 낭도를 용화햔도라 한다.
17세때 고구려,백제의 잦은 침략을 보고서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진천군 이월면에있는 속칭 장수굴이라 불리는 중악산 석굴속에 들어가 목욕재개하고 경건하게 비법 체득을 하늘에 빌었다.
4일만에 드디어 한 노인이 나타나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은곳인데 귀한 소년이 어찌 홀로 왔느냐'라고 하자, 김유신은 '저는 신라 사람인데 나라의 원수를 보고 마음이 아파 여기 와서 신(神)의 도움을 얻고자 이렇게 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노인은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을 칭찬하며 방술의 비결이 담긴 책과 청룡검을 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이 보검에 영기가 서렸다고 기술하고 있으며,이 보검으로 바위를 갈랐다고 한다.
단석산(斷石山)이란 바로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월성군 서면 금척리 남산에 있으며, 당시 용화 향도들이 화랑정신으로 심신을 수련하던 영험한 지역이라 한다
이와 같이 비상한 수련과 고초를 딛고 우뚝선 김유신에게는 여러가지 일화가 많다.
어느날, 백석이란 고구려 자객이 김유신을 죽이고자 화랑의 무리속에 끼어들어 젊은 김유신을 유인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음모를 알아차린 김유신이 백석을 문초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고구려)의 군신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의 도사 추남(秋南)의 화신이다. 국경에 물이 거꾸로 흐르므로 왕이 그를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추남이 말하되 대와으이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므로 그 표정이 이와 같다 하매, 대왕이 놀라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크게 분노하여 다른일로 다시 시험하여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자고 제안했다.
왕이 왕비의 제안을 받아들여 쥐 한마리를 함속에 감추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쥐인데 그 수가 8마리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말이 틀린다 하여 죽이려하니 추남이 맹세해 말하기를, '내가 죽은뒤에 대장이 되어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했다. 곧 그의 목을 베고 함을 열어 쥐의 배를 가르니 새끼가 일곱마리 있었다. 그제야 추남의 말이 옳은겄을 알았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속에 들어가는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백석을 보내 김유신을 죽이려 했다' 는것이다.
이처럼 김유신은 이미 화랑에 있던 때에도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에서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 고종이 백제,고구려를 멸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신라를 합병하지 못한것을 크게 꾸짖으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오나 그 왕은 영명하고 김유신 같은 충용한 장군이 있어 온 국민이 굳게 단결하여 가벼이 도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는<<삼국사기>>에도 전해 오고있다.
김유신은 효용이 절륜한 무인이기도 하지만 국가관과 민족관이 뚜렷하여 당나라의 영토적 집착을 단호히 물리치고 감언이설을 일축했다.
김유신은 일찍이 가풍을 형성하고 그 가훈을 엄하게 지켰으며, 이를 신라 국민정신과 화랑정신으로 승화시킨 일세의경륜가였다. 가훈을 어긴 아들 원술을 끝내 용서치 않고 부자의 연을 끊어 버리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자신과 가정에 대해 엄격한 그의 성품이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수있다.
김유신은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차례로 멸하여 삼국을 통일한 후 태대각간의 직위를 받고 673년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 후 162년 만인 42대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니, 인신으로서 대왕에까지 오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김해김씨의 갈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해김씨를 가락계 김수로왕의 후손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고 4갈래(동성동본이족)임을 밝힌다.
1. 가락계 김해김씨(선김); 시조 김수로왕의 후예,
13世 김유신장군; 태대각간, 동해군, 흥무왕(서거후 162년되어 신라 흥덕왕이 추봉했음)
유래; 고려 충선왕시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서 가락왕의 후손들은 본관
을 김해로함.
파; 142파이며 경파가 제일 많고 사군파와 삼현파가 주를 이루고 있다.
경파 중에는 안경공파(대중, 종필)가 제일 많다.
김해김씨 족보 또는 가락의 역사와 왕손에는
김씨 7본; 함창(6알중 하나), 함안, 고령, 성주, 벽진,거성(6알중 끝), 진주(유신 아들 원술계)
허씨 7본(수로왕이 2남 3남에게 허씨 줌),
인천 이씨; 허씨에서 갈림.
양산 이씨; 인천 이씨에서 갈림.
알지계 김해김씨 족보에는; 가락김씨 11본; 김해, 함안, 고성, 웅신, 합천, 함창, 무장, 남 양, 고령, 성주, 금릉.
2. 신라계 김해김씨(후김); 김렴 김시흥의 후손들이다. 이조 헌종 15년 이전에는 신라계 김해김씨 즉 김렴 김시흥의 후손은 대개가 김해김씨로 불렀다. 이조말까지 김렴 김시흥 후손도 김해김씨로 호칭되어 왔다. 이로 혼란되어 이조 헌종시 김주성 김치수 등이 상소하여 헌종 15년에 신라계 김해김씨는 김녕김씨로 호칭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부 김렴 김시흥의 후손은 그대로 김해김씨의 일파를 이루어 후 김해김씨(후김)로 불리고 있다.
3. 사성김해김씨(후김)=우록김씨; 시조 김충선金忠善.
세거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4. 사성김해김씨(후김)=구라동김씨; 시조 김성인金誠仁.
세거지;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
※ 일본 사람으로서 귀화한 김해김씨는 2김(3, 4항)인데 임진왜란시 모하당 김충선(사야가)은 부하 3000명을 거느리고 김응서(경서; 가락계 김해인) 장군의 망료(지휘관을 보좌하는 장교)로 들어가 주로 경상도 전라도에서 왜군과 싸웠다. 선조왕은 김응서의 성을 따라 모하당에게 김해김씨로 사성하고 충선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 때 그와 함께 귀순한 부장 사여묘 등은 김성인 김계충 등으로 사성명을 받았다.
※ 참고문헌; 가락의 역사와 왕손 3권,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 총론,
한국성씨보감.
참고; 동성동본이족同姓同本異族
1. 金海金氏; 先金 가락 수로왕계
後金 신라 알지계
〃 귀화한 일본 慕夏堂 忠善계(우록김씨)
〃 귀화한 일본 誠仁계(구라동김씨) 4金
2. 安東金氏; 先金 구안동김씨 叔承계(중조 方慶)
後金 신안동김씨 宣平계 2金
3. 晋州金氏; 가락 유신 아들 元述계, 신라 敬順王계. 2金
4. 咸昌金氏; 고령가야계(시조 2人), 신라 알지계. 3金
5. 善山(一善)金氏; 시조 宣弓계, 시조 錘계. 2金
6. 洪州金氏; 경순왕계, 토족계. 2金
7. 大邱金氏; 평안도계, 함경도(알지)계, 시조 浩堅계. 3金
8. 海州金氏; 시조 士廉계, 신라 알지(시조 孟)계. 2金
9. 河陰(江華)金氏; 경순왕계, 강화의 토족계. 2金
10. 杜陵杜氏; 시조 慶寧계, 시조 預계. 2杜
11. 慶州薛氏; 중국계, 신라(순창)계. 2薛
12. 新平宋氏; 시조 2人. 2宋
13. 原州李氏; 舊李 시조 椿桂계,
新李 시조 申佑(경주이씨에서 분적)계. 2李
14. 河東鄭氏; 遜位계 應계 道正계 3鄭
15. 江陵崔氏; 시조 3人. 3崔
16. 尙州崔氏; 崔致遠계, 김알지계. 2崔
17. 全州崔氏; 시조 4人. 4崔
18. 洪川皮氏; 주나라계, 원나라계. 2皮
19. 晋陽河氏; 시조 3人. 3河
20. 南陽洪氏; 唐洪 시조 殷悅계(당나라에서 옴) 2洪
土洪 시조 先幸계.
※ 참고문헌; 1. 한국인의 족보
2. 가락의 역사와 왕손
김씨성중에 김해김씨(가락계).경주김씨.일본김씨.신안동김씨.네 계통이 있으며
그중 김해김씨(가락계) .경주김씨 이 두 계통이 주류를 이룬다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어느 성이 인구가 많은지 한번 비교 해보세요
口. 경주김씨(김알지)에서 분파 가 된 김씨성은 다음과 같다
가평 .감천. 강동 .강릉 .강서. 강진. 강화 .개성. 경산(京山)
결성. 경산(慶山) .경주 .계림 .고령. 고부 .고산. 고성. 고양
공주. 광산. 광양. 광주. 괴산. 교하 .구례 ..금릉. 금산 .금화
김녕(김시흥.후김해). 김제 .김천. 김해(법흥.김염). 김화
간성. 강양. 강음. 개령. 금성. 금산(金山). 금천(衿川). 금포
금천(錦川) . 나주. 낙안. 남양. 남포. 능주. 남원. 남평. 남해
당악(해남)당악(唐岳) .대구. 덕수. 도강. 동래 .등주
무장(가락계도 있음) 문화 .밀양. 만경. 문소
백천. 보령. 부안. 보은. 봉주. 부평. 분성
사천. 삼척. 상산(상주). 서흥 .선산. 설성. 수안. 수원. 순천
신천. 삼화. 상음 .서산 .서주 .성주. 승평 .시흥. 신평
아산. 안로 .안동(구) . 안산. 안성 .안악. 야성
양근. 양산. 양주. 양택. 언양 .여주. 연기. 연안. 연주. 영광
영덕. 영동. 영산(靈山). 영암 .영양. 영월 .영천 .영해 .예안
예천. 오천 .옥과 .옥천.옥성 옥천(玉川) 옹진 온양
용궁 .용담. 용성 .우록 .우봉. 울산. 울진 .웅천. 원주 .월성
은률. 은진. 의성. 의주. 이천 .익산. 인동. 임실. 임피.
장연. 장단. 적성. 정주(貞州). 전주. 정주(定州). 정선 .정산
제주. 직산. 진도. 진위. 진잠 .진주(가락계도있음) 진천.
창원. 창평. 천안. 철원. 청거. 청산. 청송. 청양. 청도. 청주
청풍 .초계. 춘양. 충주. 칠원. 토산. 태원 .통천
파평. 평양. 평산. 평해. 풍기 .풍덕. 풍산. 풍천(영유). 풍해
하동. 하양. 하음. 한남 .함안. 함평. 함창(가락계도있음) 함흥. 해남. 해주
해평. 해풍 .홍산 .홍원. 홍주. 화개 .화순 .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