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부흥은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 대부흥을 통해 한국교회는 비로소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를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부흥 이전에는 기독교 입교의 동기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보다는 정치 사회적인 요인들이 많았다.
주한 공사관의 비서관이던 샌즈(William F. Sands)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한국인들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기독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다.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인간적인 윤리적 삶의 모범으로, 여러 나라에 호소했던 정치적 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리고 당장 필요로 하였던 서구 생활의 지식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종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동양인들은 종교하면 어떤 신비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들이 민족주의나 철도, 전화나 정치적인 이론들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하지만 대부흥을 겪으면서 한국인 신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졌다. 대부흥을 통해 한국인들은 진정한 회개를 경험했을 뿐 아니라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체험했다. 이에 대해 노블(Mattie Noble) 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슬프게도 대부분의 한국 신자들이 머리의 회개(head conversion)는 이루었으나 마음의 회개(heart conversion)는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마음의 회개를 이루었으며, 이것을 이룬 사람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자 애쓰고 있다.”
대부흥을 통해 한국인 신자들은 기독교를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경험으로써 체득케 된 것이다.
이러한 대부흥은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서 촉발되었다. 그리고 그 제단의 첫 제물은 미국 남감리교선교부의 하디(Robert A. Hardie) 선교사였다. 수려한 미항이었던 원산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해 주는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개화기 초부터 서구열강은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했다. 그 결과 원산은 1880년 5월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개항장이 되었다.
또한 원산은 이러한 여건으로 여러 선교회가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던 지역으로 비교적 일찍 기독교가 유입되었다. 원산과 기독교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892년 4월 북장로교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을 통해서이다. 원산의 지역적 중요성을 알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선교부에서 게일을 개척 선교사로 파송했던 것이다. 이는 서울과 부산보다는 늦었지만 평양과는 거의 같은 시기였다.
하디 선교사가 원산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도 같은 해였다. 그는 토론토 의대 YMCA로부터 “최소한 8년간의 복무보장”을 받고 독립선교사의 자격으로 1890년 9월에 내한했다. 잠시 부산과 서울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그는 캐나다 출신인 게일과 펜윅(Malcolm C. Fenwick)이 사역하고 있는 원산으로 선교거점을 옮겼다. 그리고 이후 8년간의 복무 약속이 끝나자 그는 1898년 남감리교 선교부로 적을 옮기고 원산에서 사역을 계속했다.
하디 선교사는 원산에서 최선을 다해 의술을 베풀며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원산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느낀 것은 영적 폐허였다. 신자들은 주일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았으며 성적으로도 방종했다. 또한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게 성찬을 금하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제명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집회소에서는 놀랍게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당굿을 하려고까지 했다.
하디 선교사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그는 한국 교인들에게서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보기 원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하고 지속적인 회개의 구체적인 예’를 보지 못했다. 하디는 이 모든 원인이 성령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악한 세력이 자신을 넘어뜨리려고 궤계를 부리는데 자신은 그것을 이길 힘이 없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영적 상황을 “마치 악령의 세력들이 연합하여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확신도, 이미 이루어 놓았다고 생각했던 사업도 파괴하려고 덤벼들었다. 내가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나의 사역에 결과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내 안에 있는 장애물을 분명히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점점 더 뚜렷하게 영적인 능력의 결핍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그는 오랫동안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고 있었다. 마침 하디는 1903년 여름 남감리교 여선교사 모임에서 성경공부 및 기도회를 인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모임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여선교사 화이트(M. C. White)가 의화단사건을 피해 내한한 것을 계기로 마련된 것이었다. 의화단사건은 1899년 산동성 서북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반기독교 운동이었다.
하디는 그 모임을 인도하던 중 먼저 “네 자신이 회개해야 한다”는 성령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하디는 이렇게 고백했다.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성령께서 제게 첫 번째로 요구하신 것은 제가 교인들 앞에서 내 과거의 실패와 그 원인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수치와 체면 손상을 무릅쓰고 자신의 죄악들을 고백했다. 자신의 교만, 닫힌 마음, 신앙의 결핍, 그리고 이런 것들이 가져오는 수많은 죄악들…. 그러자 하디는 “성령의 임재를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놀라운 평화와 기쁨을” 경험했다.
이 사건 이후 하디의 삶은 놀랍게 달라졌으며, 그의 사역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다. 더 이상 이전의 하디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붙잡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러한 붙잡힘 보다 아름다운 붙잡힘이 어디에 있겠는가!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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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의 회개고백이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져
1904년 ‘부흥회’ 등장, 서울 평양 등 주요도시 확산
△ 두 명의 무명 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기도회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온 여 선교사 화이트와 카나다 장로교 출신 여선교사 맥컬리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회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기도회에 합류하였고 이들은 의료 선교사 하디에게 강의를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하디가 강의를 준비하다 말씀과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 사역의 실패와 한국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선교사 하디
명문 토론토대학, 그것도 그 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입국한 하디는 그 내면에 학력에 대한 교만함,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함, 영국시민이라는 백인우월주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디 선교사의 1902년 선교보고를 살펴보면 자신의 신앙에 대한 좌절로 가득했다. 그러나 1903년 보고에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1904년 보고에는 확신에 가득찬다. 더 구체적으로, 1902년 보고가 한국인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로 가득차 있다면, 1903년 보고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고 1904년 보고에는 성령의 임재로 이뤄진 내적 변화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차 있다. 실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좌절이 감사로 변하는 감격의 생활을 가능케 만든 요인은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 기인한다. 이 운동은 원산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 초기 한국 부흥운동의 출발점이다.
△ 하디의 고백으로 인한 회개 운동
이미 기도회 시작하기 전부터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하디는 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통회했다. 하디 자신이 고백했듯이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그는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 창전감리교회 예배 때 하디는 자신이 맡고 있는 회중들 앞에서 또 다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의 교만과 성령 충만하지 못함과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편견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디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1903년 8월 이후 계속되었다.
△ 원산서 일어나기 시작한 회개운동을 통한 부흥운동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 프란손이 원산을 방문하여 인도한 장감침 연합사경회 동안에도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났다. 그 후 하디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젊은이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최종손 강태수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얼마 후 로스 선교사의 어학 선생 진천수가 주일 예배가 끝나자마자 회중 앞에 일어서더니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한국인들만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 하디를 통해 동료 선교사들도 원산부흥운동을 경험했다. 같은 캐나다 출신 업아력(A. F. Robb) 선교사가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게 거듭났다.
△ 집회마다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
하디를 통해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은혜를 받은 후 하디의 성품이 완전히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후 하디의 성품과 인격과 삶은 이전과 확실히 달랐다. 하디는 자신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자 자신을 부흥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에게 그토록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지경터로 향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그곳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경터 근처 새 술막에 도착한 하디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가 인도한 12일의 지경터 집회 동안 1903년 8월에 있었던 것처럼 놀라운 성령의 역사,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하디가 자신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사경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결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하디가 고백한 대로 성령께서 하디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디는 이어 개성, 서울로 향했다. 주님은 예외 없이 이곳 집회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다.
△ 1903년 일어난 부흥운동이 서울, 제물포와 평양으로 확산
배재학당 학생들이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부흥의 열기에 힘입어 1904년 6월에 들어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10월에 서울과 제물포와 평양 세 곳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이들 집회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하디가 안식년을 떠난 후 1905년에 접어들어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각성이 계속되었다. 1905년 9월 장로교 4개 선교회와 감리교 2개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 영적부흥이라고 확신하고 1906년 신년 들어 신년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새로운 신자의 영입보다 기성 신자가 먼저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성신자들이 은혜를 받으면 전도는 저절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06년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열린 신년부흥회를 통해 영적각성의 움직임은 한층 강화되었다.
한국교회 100년사 - 1. 평양대부흥운동의 기원 원산부흥운동
http://www.holybusan.org/cgi/technote/read.cgi?board=holybusan_news&y_number=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