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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n Paul Jobs(1955~2011)
스티븐 폴 잡스(영어: Steven Paul Jobs,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애플의 창립자이자 세계 최초의 PC 개발자이다.
그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했다.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하였다. 또한, GUI와 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와 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였다. 1985년 경영분쟁에 의해 애플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창업하여 새로운 개념의 운영 체제를 개발했다. 1996년 애플이 NeXT를 인수하게 되면서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7년에는 임시 CEO로 애플을 다시 이끌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금 애플이 혁신과 시장에서의 성공을 거두게끔 이끌었다.
잡스는 《인크레더블》과 《토이 스토리》 등을 제작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의 소유주이자 CEO였다. 월트 디즈니 회사는 최근 74억 달러어치의 자사 주식으로 이 회사를 구입하였다. 2006년 6월 이 거래가 완료되어 잡스는 이 거래를 통해 디즈니 지분의 7%를 소유한, 최대의 개인 주주이며 디즈니 사의 이사회의 이사가 되었다. 2011년 8월 24일 애플은 성명을 통해 스티브 잡스가 최고경영책임자(CEO)를 사임하고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이 새로운 CEO를 맡는다고 밝혔다. 잡스는 CEO직에서 물러나지만 이사회 의장직은 유지키로 했다. 그러나 사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2011년 10월 5일에 만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출생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위스콘신 대학교의 대학원생 동거 커플인 미국인 어머니 조앤 캐럴 시블(심슨)과 시리아 출신 무슬림 이민자인 아버지 압둘파타 존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심슨의 아버지가 아랍계 남성과 결혼하는 걸 반대해 커플이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스티브 잡스가 태어난 지 1주일 후에, 대학원생이던 그의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에 사는 폴/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양부모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미국서부의 농부였다. 그의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인이 되었으며 캘리포니아 주 해안경비대에 들어가 경비정 기관사로 근무했었다. 전역 후 클라라와 결혼하였고 자동차 정비, 할부금 수금원 등의 직업을 가졌고 아이가 없자 스티브 잡스를 입양하였다. 잡스를 입양한 부부는 그에게 스티브 폴 잡스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잡스를 입양시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슨의 친정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친부모인 잔달리와 심슨은 극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딸 모나 심슨을 낳아 시리아로 떠났다. 그 후 부모는 결국에 이혼하고 말았다.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과 잡스는 어른이 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잡스는 성인이 되어서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알고 작가로 활동하는 모나 심프슨이라는 여동생과 대화 치료사였던 어머니와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겼다. 잡스는 "양부모"라는 단어를 싫어했는데, 그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를 유일한 부모로 여겼다.
2. 성장기
스티브 잡스가 3살 되던해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자동차 영업, 부동산 중계)을 따라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의 산업단지에 들어선 주택가로 이주하였고 주변 전자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성장하였다. 이때 전자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동년배 빌 페르난데스, 5살이 많았던 스티븐 워즈니악(Steve Wozniak)을 만나 교류했으며 스티브 잡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학교에서는 낙제생이자 독선적인 외톨이였지만 전자적인 지식과 집념 그리고 유쾌한 성격은 비슷했다. 이당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미국 히피문화에 흠뻑 젖어있었다고 회고한다.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는 비행청소년이였다. 담임선생님이 돈과 사탕으로 구슬리는 것으로 겨우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는 순간 인생의 전환점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이 덕분에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동안 그는 팔로 알토의 휴렛 패커드사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으며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휴렛 패커드사에서 여름 동안 임시 채용되기도 했다.
1972년 고등학교에서 졸업한 잡스는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리드 대학교에 등록하여 마약을 중단하고 새로운 이상을 찾아 동양철학을 공부하였으나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하였다. 대학을 중퇴한 잡스는 세계 최초의 비디오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입사했다.
1974년 가을 잡스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왔고 Homebrew Computer Clubs이라는 클럽에 나가게 된다. 거기서 친구인 빌 페르난데즈를 통해 빌 페르난데즈의 친구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을 알게된다. 그는 워즈니악에게 아타리(Atari)로부터 받은 게임 관련 프로젝트(Breakout 이라는 게임)를 소개해주게 되고 워즈니악은 불과 4일만에 게임을 프로그램해냈다. 그러나 잡스는 아타리로부터 댓가로 700달러를 받았다며 워즈니악에게는 350달러만 주고 만다. 그러나 실제로 잡스는 아타리로부터 5,000달러를 받았던 걸로 알려졌다.
얼마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스티브 잡스는 히피차림으로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수개월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일대를 여행하였지만 그가 기대했던 내면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지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 아타리사에 복직하였다. 그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으며 이때 다시 워즈니악과 친분을 쌓았고 전자분야의 지식이 해박했던 그의 도움을 받았다. 사업적인 수완과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스티브 잡스는 천부적인 전자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했고 각각의 장점을 합쳐 두사람은 1976년 컴퓨터(회로기판)를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창업을 하였다. 당시 회사이름은 스티브 잡스가 오리건 주의 선불교 수행을 하던 장소였던 사과농장을 연상하여 애플(Apple)이라고 지었다.
한편 잡스는 부모님들이 비싼 학비를 내는 데 대해 부담스러웠다고 리드 대학교를 중퇴한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중퇴하기는 했어도 그 후 18개월 동안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강좌를 들었으며, 특히 타이포그래피(글자를 다루는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이다. 출판계에서는 책의 주제를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있는 글씨로 요약하여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표지 디자인에 응용한다.) 수업은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하였다.
1973년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교 철학과를 1학기만 다니고서 중퇴한 잡스는, 오리건 주 올인원팜(All in one farm)이라는 사과농장에서 히피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기거하던 일본 선불교 승려인 코분치노 오토가와를 만나 선불교에 입문했다.
1974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입사한 잡스는, 같은 해 입사한 직후에 장기간의 인도 히말라야 여행을 통해 불교를 더욱 깊게 공부했다. 상당한 경지까지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잡스는 "이것(불교를 접한)이야 말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아이팟 등의 단순한 디자인이 참선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잡스의 결혼식 주례도 일본인 선불교 비구니가 했다. 그 이후, 회사가 잘 안 되자, 잡스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고민했었다. 그 이후에도 코분치노 오토가와가 2002년 사망할 때까지, 잡스는 항상 그를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애플이란 회사명, 애플 제품의 매우 단순한 디자인, 사과농장, 선불교는 매우 큰 관계가 있다.
3. 일화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견과류와 물만 섭취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펩시에 계약차 들렀을 때 펩시 음료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애플 초기, 펩시콜라의 사장인 존 스컬리를 영입하려 했으나, 대기업의 사장자리를 버리고 신생기업으로 가기를 망설이던 스컬리에게 "남은 일생 동안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실 겁니까?"(Do you want to sell sugar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라고 하자 존 스컬리는 망설임 없이 애플로 이적했다고 한다. 딸인 리사가 태어났을 때 부친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받아들였고, 애플 리사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연봉이 1달러인 최고경영자로 유명한데 이는 연봉을 한 푼도 받지 않을 경우에 노동법상 고용관계가 유지될 수 없기에 최소한도로 정해 놓은 액수이다. 그는 실제로 연봉 1달러 외에도 스톡 옵션이나 여러 가지 성과급 형태로 보상받고 있다. 하지만 애플은 주주배당이 적기 때문에 실제 그의 소득은 디즈니 주식의 배당인 연 500억원 정도이다.
4 사업
그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으로 애플 컴퓨터를 설립했다. 홈브루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회로기판만 있는 퍼스널컴퓨터)을 공개했다. 애플1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다. 당시 퍼스널컴퓨터 시장이 주목받게 되자 곧 새로운 컴퓨터 플랫폼인 애플Ⅱ를 만들어 냈다. 확장슬롯으로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획기적인 운영체계를 적용하여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영세한 업체로서는 사업여건이 불리했다. 스티브는 이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 믿는 비전을 열정적으로 설득해나갔다. 마침내 그들이 만든 퍼스널컴퓨터는 시장에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최고 부자 대열에 합류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오랜동안 연인관계였던 크리스 앤과 사이에서 리사(Lisa)라는 딸을 두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친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친자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이후 리사가 친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모순된 성격과 인색함으로 어려운 시기에 힘이 되었던 친구들에게서 외면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이상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회사내에서는 매킨토시와 리사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애플사의 핵심 엔지니어와 경영진 사이에 반목이 심해졌고,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화를 조화롭게 리드하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 자신이 주도했던 리사 프로젝트에서 밀려나자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를 믿고 따랐던 매킨토시 프로젝트 담당 엔지니어들은 노력에 비해 형편없는 연봉을 받고 있다는 불만이 고조되었고 스티브 잡스에 대한 배신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애플 리사를 내놓았다. 그러나 회사 내부에서는 실패한 리사 프로젝트팀과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실패하였고, 또 매킨토시 프로젝트가 경쟁사 IBM에 비해 가격이 비싸기도 했다. 그리고 응용 소프트웨어 또한 부족하자 또 다시 실패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PC를 사용하게 된 큰 사건이었다.
메킨토시 발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맥(Ma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판매는 급속하게 줄었다. 스티브 잡스의 독특한 스타일과 분위기와 함께 매킨토시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이제 불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1월 19일 워즈니악과 함께 백악관에 초빙되어 레이건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가기술훈장을 받았지만 워즈니악은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마침내 스티브는 현실성없는 망상가이자 회사를 도탄에 빠뜨린 인사로 지목되어 1985년 5월 경영 일선에서 쫓겨났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사를 세워 세계 최초의 객체 지향 운영 체제인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1986년 이혼 문제 때문에 자금이 필요한 조지 루카스 감독의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하였다. 차세대 운영체제를 갖춘 그래픽 전용 컴퓨터를 개발하여 의료업계에 판매하려고 시도했으나 두 회사 모두 수익을 내지 못하고 스티브 잡스를 위기로 몰았다. 잡스는 회사 이름을 픽사로 바꾸고 하드웨어 사업을 포기하고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면서 회생의 기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1991년 3월 18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로렌 파월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2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는 결혼과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를 두고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과 확신을 가지지 못했지만 예전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변해있었다. 가정은 행복했지만 그의 사업은 점점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미국의 거부 로스 페로와 일본 캐논(Canon)사를 통해 투자를 받으며 겨우 버텨나가고 있었고 회생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픽사의 존 레스터가 감독한 '토이스토리(Toy story)'의 원형이 되는 '틴토이(Tin Toy)'를 만들어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회사 매출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잡스는 픽사를 인수한 것에 후회하고 있었다. 1996년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운영체계를 원했던 애플이 넥스트 사(社)를 인수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13년만에 다시 애플로 복귀하여 경영 컨설턴트로 역할하며 4억달러 흑자를 내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픽사에 10년간 6천만달러를 투자하여 할리우드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픽사는 여러 번 단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받았으며 최초의 장편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의 대대적인 성공에 맞추어 상장하여 거의 빈털털이에 내몰렸던 스티브 잡스를 단번에 억만장자에 올려놓았다. 2006년에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잡스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다. 그 후 1997년 넥스트는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는 애플로 돌아왔다. 그 해 7월 애플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였으며,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낸 애플을 한 해만에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를 내게 만들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로 복귀한 2년 동안 애플은 자본이 2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픽사는 연이은 흥행 성공으로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화사로 기록되고 있었다. 한층 여유로워진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과 접목한 새로운 제품개발에 눈을 돌렸으며 그 대상은 음악이었다. 그는 항상 제품의 모양과 색깔을 결정하는 디자인에 매우 중시했다. 아이튠즈 개발에 이어 아이포드라는 MP3플레이어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히트상품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제 사업가에서 세상을 바꾸는 인물로 인지되고 있었다. 많은 청중들 앞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은 바뀌어가는 세상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로 각인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만든 제품에 열광했다. 2007년 맥월드에서 아이폰이 발표되고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애플은 약 500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특히 아이폰은 통신업계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고 문화적인 파급효과도 지대했다. 또한 2010년 발표된 아이패드라는 태블릿 컴퓨터를 발표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주도하는 변화는 가속화 되었다.
이와 같은 스티브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2011년 8월 24일 스티브 잡스는 애플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사임을 하였다.
5. 건강문제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가운데 애플 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그러나 2009년 6월 간 이식 수술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호르몬 이상으로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줄어 2009년부터 호르몬 치료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건강 이상설에 따라서 주가가 무려 6%씩이나 등락하는 등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애플이 너무 스티브 잡스에만 기대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2011년 1월에는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병가를 냈다. 이에 따라 애플의 주가는 6.5% 급락했다. 스티브 잡스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나오던 가운데 잡스는 백악관에서 만찬을 가졌고 사진도 공개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후 파파라치가 찍은 스티브 잡스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어서 췌장암 악화로 인한 6주 시한부설이 사실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기 위해서 스티브 잡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잡스는 언론에 보도된 것 보다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으나, 이후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애플 CEO직을 사임하고, 투병 끝에 결국 2011년 10월 5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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