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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향의 인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소설가 : 박완서 (청교면 묵송리 박적동(골)
소설가 박완서 씨의 고향인 우리 청교면 묵송리 박적동(골)은 박완서 씨의 대표적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글 중에서 박완서 씨는 70여 년 전(1930년대 말∼40년대)의 박적골 마을의 자연환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는데 그 당시의 우리고향의 농촌마을들은 대부분 박적골과 비슷한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진 마을들이라 볼 수 있다. 박적골에는 25가구가 거주하였는데 남양홍씨의 집성촌으로서 남양 홍씨가 22가구 번남 박씨가 2가구 최씨가 1가구가 거주하였던 농촌마을로 모두가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은
바위라고는 하나도 없이 능선이 부드럽고밋밋한 동산이 두 팔을 벌려 얼싸안 듯 한 동네는 탁 트이고 벌이 넓었다. 넓은 벌 한가운데를 개울이 흐르고, 정지용의 시 말마따나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아무 데나 있었다. 우리 집에서 뒷간에 가려도 실개천을 건너야 했다. 실개천은 흐르다가 논을 만나면 곧잘 웅덩이를 만들곤 했는데 우리는 그걸 군 우물이라고 해서 먹는 우물과 구별했다. 지금 생각하니 소규모의 저수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거의흉년이 들지 않는 넓은 농지는 다 우리 마을 사람들 소유였다. 땅을 독차지한 집도 땅을 못 가진 집도 없었다. 다들 일 년 먹을 양식 걱정은안 해도 될 자작농들이었고 부지런했다. 그런 고장에서 여덟 살까지 자라는 동안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이가 따로 있다는 걸 알 기회가 없었다. 동무들과 손잡고 딴 동네를 가 볼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넓은 앞벌로는 아무리 멀리 나가도 딴 마을이나 오지 않았다. 뒷동산을 넘어야만 이웃마을이 나왔고, 이웃마을의 풍경도별로 신기할 게 없었다. 옆구리에 텃밭을 낀 집들이 산기슭에 안겨 있었고, 넓은 벌을 풍성한 치맛자락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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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에 내려오는 뒷간 얘기는 다 도깨비 얘기였지만 무서운 도깨비는 아니고 조금은 못나고 유쾌한 도깨비였다. 코가 막혀 냄새를 못 맡는 도깨비가 뒷간에서 밤새도록 똥으로 조찰떡을 빚는다고 했다. 재를 콩고물이나 팥고물인 줄 알고 맵시 있게 빚은 조찰떡을 재에다 굴리기를 되풀이하면서도 아까워서 한 입도 맛을 안 보다가 새벽녘에 다 빚고 나서 비로소 맛을 보고는 퉤퉤, 욕지기 하면서 홧김에 원상대로 휘젓고 간다는 것이다. 만일 한창 그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기침을 안 하고 뒷간 문을 열면 도깨비는 들킨 게 무안해서 얼른 "조찰떡 한 개만 잡수." 하면서 그중에서 제일 큰 걸 내놓는데 안 먹으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도깨비 얘기 말고 이런 것도 있었다. 동짓날 팥죽을 맛있게 쑨 며느리가한 그릇 먹는 것만으로는 감질이 나서 식구 몰래 한 그릇을 더 퍼가지고 뒷간으로 갔더란다. 며느리보다 앞서서 팥죽을 몰래 먹으려고 뒷간에 와있던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들이닥치자 놀라서 팥죽 그릇을 얼른 머리에 다 썼다고 한다. 며느리 또한 임기응변으로 "아버님 팥죽 잡수세요." 하면서 가져온 팥죽 대접을 앞으로 내밀자 시아버지 왈 "얘야, 난 팥죽을 안 먹어도 이렇게 팥죽 같은 땀이 흐르는구나." 했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 다 뒷간에 갈 때는 반드시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라는 걸 훈계하기 위해 어른들이 흔히 해 주던 얘기였다. 시골 뒷간에 대해 공포감부터 갖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구역질이 날 소리지만 실제로 우리 고장 뒷간은 팥죽을 먹어도 좋을 만큼 청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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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려서부터 삼시 밥 외의 군것질거리와 소일거리를 스스로 산과 들에서 구했다. 삘기, 찔레 순, 산딸기, 칡뿌리, 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가 지천이었고, 궁금한 입맛뿐 아니라 어른을 기쁘게 하는 일거리도 많았다. 산나물이나 벗이 그러했다. 특히 항아리버섯이나 싸리버섯은 어찌나 빨리 돋아나는지 우리가 돌아서면 땅 밑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쏘옥 밀어 올리는 것 같았다.
마을 도처에 흐르는 실개천에서 물장구치며 놀 때도 누가 해진 체 하나만 가지고 나오면 오도 방정떨기 선수인 보리새우를 얼마든지 건져 올려 저녁의 된장국을 구수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었다. 가지고 놀 것도 다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왕개미의 새큼한 똥구멍을 핥아 보다가 불개미 떼들한테 종아리를 뜯어 먹히기도 했고, 잠자리를 잡아서 날씬한 꽁지를 자르고 대신 더 긴 밀짚 고갱이를 꽂아서 날려 보내기도 했다. 풀로 각시를 만들어 쪽찌어 시집보낼 때, 게딱지로 솥을 걸로 솔잎으로 국수 말고 새금풀로 김치를 담갔다. 마지막으로 쇠비름 뿌리를 뽑아 열심히 "신랑 방에 불 켜라. 각시방에 불 켜라." 주문을 외면서 손가 락으로 비벼서 새빨갛게 만들어서 등불을 밝혀 주었다. 가지고 놀 것은 무궁무진했고 우리는 한 번 도 어제 놀던 걸 오늘 또 가지고 놀 필요 가없었다. 뙤약볕에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까지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을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행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하나.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죽자꾸나. 뛴다.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웅성대던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무나 피마자 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환희 뿐 아니라 비애도 자연으로부터 왔다. 내가 최초로 맛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 인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 업혔으니 다섯 살 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 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전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때,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 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그때만 해도 엄마 등에 업혔을 때하고는 달리 서러움을 적당히 고조 시키고싶어 꾀까지 썼다. 어떡하면 저 수수이삭을 건들댐이 더 슬프고 쓸쓸하게 보일까, 그 적당한 시점을 잡느라 키를 낮춰보기도 하고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보기도 하다가 풀숲에 아예 누워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가슴에 고인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흐르길 가만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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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사랑이 서당이 되었다. 숙부들이 사 년제 소학교를 나온 걸 인근에서는 신학문을 한 걸로 쳐 줄 만큼 개화가 더딘 고장이었기 때문에 한문을 진서라고 믿고 숭상하는 풍조가 남아 있었다. 한글은 언문이라고 해서 낮게 쳤는데 배우기가 쉽다는 것도 업신여기는 까닭 중의 하나였다. 할아버지의 서당은 잘 되었다. 박적골 사람들 뿐 아니라 고개 너머마을에서도 아들들을 우리 서당으로 보냈다. 사랑에선 온종일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괜히 잘난척 할 때보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대하는 태도도 훨씬 달라졌다
박완서 님의 대표적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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