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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동화책>
1990년 6월에 나는 동화책 《우리 동네 아이들》을 냈다. 내가 쓴 동화는 이것 뿐이라서 ‘우리교육’에서
‘지은이가 들려주는 나의 책 이야기’란에 글을 써 달라 부탁했을 때 처음엔 부끄러워 마다했다. 그러다가 책읽는 이들을 위해 이보다 더 필요한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부끄럽지만 용기를 냈다.
가)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아직 동화를 써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어느 날 ‘창비아동문고’에서 일하는 김이구 님이 ‘산골 마을 아이들 이야기’를 써 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보내왔다. 그때, 사실 김이구 님은 내가 탄광 마을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곳을 떠나 산골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정과 아직 동화를 써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부러 꾸민 것만 아니라면 어느 곳 얘기라도 좋다며 한 번 써 보라고 권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나는 그 동안 보고 들었던 것을 밑바탕 삼아 이야기들을 써서 보냈다. 그 원고가 출판사에서 네 해쯤 묵었다가 비로소 책으로 나왔다.
나) ‘동화’아닌‘이야기들’
보통은 《우리 동네 아이들》을 ‘동화책’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냥 ‘이야기책’이라 여긴다. ‘동화’라 하면 어딘지 꾸민 듯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화란 시대가 바뀌어도 쓸 수 있지만, ‘이야기’는 그때가 아니면 쓰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탓이다.
나는 내가 쓴 이야기들을 통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보겠다는 욕심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시골에서 살아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지금 우리 농촌 어른과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아가는 가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곳곳의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넓은 생각을 갖기를 바랬다.
말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쓴 이야기들도 하나의 역사라 여겼다. 나는 역사책에 나오는 큰 사건들도 중요하나 이에 못지 않게 그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름없는 사람들이 가꾸어 나가는 정서 또한 중요한 역사로 대접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이 책 속 아이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이 아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이 아이들과 함께 꾸릴 세상을 꿈꿔 보았으면 했다.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우리 둘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쓰라 이른다. 사람 사는 일이라서 앞에 것이 뒤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또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어릴 때 놀던 모습과 지금 아이들이 놀던 모습을 빗대보아도 곧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수도 없이 얼레와 연을 만들었는데, 지금 아이들은 문방구에서 허술하게 만들어 파는 걸 연이라고 사서 날린다. 그나마 이젠 아이들이 연날릴 만한 터조차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일찍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오덕 선생님한테 편지를 드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쓴《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일하는 아이들》《시정신과 유희정신》같은 책들을 읽고서 아이들 글집을 만들 때였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아이들이 써놓은 글들을 읽노라면, 나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져 유리창 앞으로 달려가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탄마을 사북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학기 초 저는 4학년 10반을 맡았는데, 선생님 한 분이 모자라는 바람에 제가 5학년으로 올라오고, 아이들을 나누어 다른 반으로 보내는 소동이 있었읍니다. 그게 지난 달 26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아이들은 글을 썼는데, 그 아이들의 글을 모아 문집을 냈습니다. 약속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인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받아보는 이들에게 여간 미안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 나름대로 그렇게 글짓기를 하다 보니 생각되는 게, 정직한 아이들의 글 속에는 ‘역사성’이 그대로 담긴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제 욕심이 지나친 것일까요?
저는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너무 외곬이라는 말을 듣는데, 이를테면 저희 반 아이들 글 속엔 꿈 같은 게 들여다뵈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모두 소외감을 갖지 않고 즐겁게 쓸 수 있고, 어려서부터 정직한 마음을 내보이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글짓기’라는 말을 굳이 마다하고 ‘글쓰기’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글짓기’는 어른들이 하는 거라는 생각을 깊이 해 보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각에 어떤 위험성은 없는지요? 1981. 4. 22
열다섯 해 전에 쓴 글로 끝말이 지금 우리가 쓰는‘씁니다’대신 ‘읍니다’로 되어 있다. 또 지금은 ‘글짓기’란 말과 함께 ‘글쓰기’란 말도 널리 쓰이는데, 그때는 ‘글쓰기’란 말이 갓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렇듯 아무리 하찮아 뵈는 이야기라도 백 년이 지난 뒤엔 백 년 전 이야기가 되고, 천 년 뒤엔 천 년 전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내 책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역사성과 우리 정서는 무엇일까?
‘정말 바보일까요?’에 나오는 ‘윤재석’아저씨는 이름도 같은 마을 분이다. 더 빼거나 보탤 게 없는 그런 분인데, 나는 이 뒤에 태어난 아이들이 ‘먼 옛날 우리 농사꾼 가운데엔 이런 멋진 분도 있었구나!’하고 생각해 주길 바라며 이 이야기를 썼다.
‘들꽃 아이에’나오는 ‘보선’이도 실제 아이다. 이름 또한 그대로 썼다. 다만 내가 가르친 아이가 아니고 옆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였다. 예전엔 보선이처럼 먼 데서 걸어 학교에 다닌 아이들이 많았다. 이야기 끝쪽을 너무 성급히 맺는 바람에 이야기 맛이 줄고 말았지만, 지금 아이들이 보선이가 걸었던 길을 잃어버렸다는 게 안타까워 이 이야기를 썼다. 이런 길을 잃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꿈을 잃어버린 거나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퉁이집 할머니’한테 올해도 우리는 할머니가 손수 뜯어말린 고사리와 도라지를 샀다. 전화로 부탁을 하고 할머니는 그걸 소포로 부쳐 주었다. “세상이 어떻게 학대하든 할머니는 지금 그걸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다.”는 말로 밖엔 할머니 삶을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선한 할머니들에게 이렇게 아픈 삶을 살도록 한 사람들이 누구였는가가 언젠가는 가려지리라 본다. 그래서 역사는 정직하다는 걸 아이들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랬다.
‘명자와 버스비’에 나오는 아이는 이름만 바뀐 내 제자 아이 이야기다. 이젠 버스 안내양을 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도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순미와 연우’는 우리 식구가 겪은 일을 밑바탕으로 하여 쓴 이야기다. 늦가을이면 아내와 함께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걸핏하면 해를 떨구곤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찬 방에서 우리를 기다리다 지쳐 잠들어 있곤 했다. 도회지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어떤 생각을 떠올릴지 무척 궁금한데, 이제 산녘 마을 집집마다 기름보일러를 돌리고 있으니 내가 읽어도 이 글은 아스라히 먼 얘기가 되어 버렸다.
‘일요일’‘순이 삼촌’‘선희가 쓴 편지’모두 어렵기만 한 우리 농촌 모습을 드러낸 이야기들이다. 갑자기 천대를 받는 농삿일이 되어버렸지만, 언젠가는 다시 이 농삿일이 가장 대접받을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쓴 것들인데,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얼마만큼 이해할는지는 알 수 없다.
3부에 나오는 이야기 세 편은 내가 이런저런 까닭에 맘 속으로 더 아끼는 이야기들이다.
‘검정 고무신’에 나오는 주인공 기남이와 기담이는 내가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만난 형제들이다. 공부를 못 한다고 기남이를 많이 때려주곤 했는데 늘 잊히지 않는 아이들이다. 그때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니던 기남이가, 스무 해쯤 지난 지금엔 무슨 신을 신고 어느 길을 걷고 있을지 궁금하다. “너, 숲 속에서 자다 일어났을 때 무섭지 않던?”하고 묻자, “아니요!”하며,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 대답하던 기남이의 조그만 입과 둥그런 눈을 나는 지금도 그대로 그려볼 수 있다.
‘정아의 농번기’는 일요일과 가정실습 때, 마을 어른들 틈에 끼어 그분들과 똑같이 모내기를 하면서 살핀 이야기이다. 꺾어질 것만 같은 허리를 가누며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곤 했다.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한켠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이른 말을 떠올리며 나는 가까스로 하루를 버텨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커피 한 잔 값”이 “쌀 한 되 값”보다 못하다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멧돼지’이야기를 들려주던 동길이 아버지는 내가 “일꾼”이라 생각하는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었다. 굵은 팔뚝, 천천히 말을 하던 두툼한 입술, 거기에 무엇보다도 나에겐 그분이 쓰던 말이 더없이 소중했다. 아주 외딴 산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옛 산골 어른들이 쓰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위세소리’‘자국받이’‘붉돝’같은 말들이며, 나중에 백석이 쓴 시에서 볼 수 있었지만 ‘마가리집’같은 말이 스스럼없이 동길이 아버지의 입 밖으로 나오는 걸 들으면 나는 신이 났다. 그래서 나는 그 뜻을 묻고 또 물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부터 우리들이 이런 분들의 귀한 삶을 업수이 여기게 하고, 쓰잘 데 없는 교과서 외우기를 아이들한테 시켜 왔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 얼마 뒤 동길이 아버지, 어머니가 농사를 지어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도회지에 나가 밤을 낮삼아 김밥과 술을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랬다. 그래서 어느 날 마산 버스 정류장 가까이서 일하고 있다는 이 분들을 찾아갔다. 장사를 하지만 마음은 늘 고향 산 속?있다고 했다. 이 다음 역사가들은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마음 부수며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 시대를 어떻게 적어나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다) 모자란 점
‘우리 말법에 맞는 깨끗한 우리말로!’
내가 요즘 편지 한 줄을 쓸 때라도 잊지 않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보니 여기저기에 흠이 드러났다. 몇 군데 보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새너울이라 불리는 : 새너울이라는 (정말 바보일까요?)
2. 두 분은 마침 식사 중이었다. : 두 분은 마침 저녁을 들고 있었다. (선희가 쓴 편지)
3. 용석이는 적이 실망이 되었다. : 용석이는 자못 실망을 했다. (일요일)
4. 이리로 온 것이었다. : 이리로 오게 되었다. (순이 삼촌)
라) 맺음
위에 든 것 같은 잘못 말고도, 워낙 짜임 같은 걸 생각지 않고 쓴 글이라 앞뒤가 맞지 않기도 하고 엉성한 대목도 눈에 띈다. 그런 걸 이해하면서도 내 이야기를 좋게 보아주는 이들이 있다면 나는 그분들께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스스로 내 얘기를 정리하다 보니 앞으로 좋은 이야기를 써야겠구나 하는 욕심이 생긴다. (1994. 4)
《하늘숨을 쉬는 아이들》에서 발췌
- 출처 : (사) 어린이도서연구회 -
임길택 선생님(1952.3.1∼1997.12.11)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누가 울 때, 왜 우는지 궁금해합니다. 아이가 울 땐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를 울게 하는 것처럼 나쁜 일이 이 세상엔 없을 거라 여깁니다.
짐승이나 나무, 풀 같은 것들이 우는 까닭도 알고 싶은데,
만일 그 날이 나에게 온다면,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아직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우는 것들의 동무가 되어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아이, 어른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쓰려 합니다.(1995년 12월 임길택)
-《할아버지 요강》에서
임길택 선생님이 살아온 길
1952년 3월 1일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송산리(솔뫼)에서 태어났다.
1960년 무안군 삼향면 삼향동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66년 목포 중학교에 입학했다.
1969년 목포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74년 목포 교육대학을 졸업했다.
1976년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 초등 군대 분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 뒤 열네 해 동안 강원도 탄광 마을과 산골 마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79년 정선군 사북읍 사북 초등학교로 옮기고, 채진숙 씨와 결혼했다.
1980년 딸 울밑이 태어났다.
1980년 학급 문집 〈나도 광부가 되겠지〉를 사북 초등학교에서 펴냈다.
1981년 아들 빛이랑이 태어났다.
1983년 한국글쓰기연구회 창립 때부터 회원으로 활동했다.
1984년 방송통신 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1984년 정선군 임계면 반천 초등 봉정 분교로 옮겨 학급 문집 〈물또래〉를 펴내고, 종로서적에서 출판했다.
1988년 정선군 고한읍 대성 초등학교로 옮겼다.
1990년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중유 초등학교로 옮기고, 거창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시집 《탄광 마을 아이들》을 실천문학사에서 펴내고, 동화집 《우리 동네 아이들》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냈다.
1992년 거창군 거창읍 거창 초등학교로 옮겼다.
1994년 동화집 《느릅골 아이들》을 산하출판사에서 펴냈다.
1995년 시집 《할아버지 요강》을 보리출판사에서 펴냈다.
1996년 산문집 《하늘 숨을 쉬는 아이들》을 종로서적에서 펴냈다.
1997년 3월 거창군 위천면 위천 초등학교로 옮기고, 장편 동화 《탄광 마을에 뜨는 달》을 다솜출판사에서 펴냈다. 4월에 폐암 선고를 받고 요양하다가, 12월 11일에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무너미에서 마흔여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강원도 정선군 동면 태백산 두리봉 어우실에 묻혔다.
1998년 12월 12일에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주관으로 서울 아람유치원에서 임길택 선생님 추모 1주기 문학의 밤이 열렸다. 세상을 떠난 뒤 《똥 누고 가는 새》가 실천문학사에서, 동화집 《수경이》가 우리교육에서 나왔다. 동화집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산골 마을 아이들》로 제목이 바뀌어 창작과비평사에서 다시 나왔다.
2001년 10월 21일에 무덤이 있는 태백산 두리봉 어우실에 시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