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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탈춤은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강령리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으로서,육이오 때 월남한 놀이꾼들에 의해 복원되어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서울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 보존회사무실을 두고 있다.
강령탈춤은 해서탈춤 가운데 해주탈춤형에 속한다. 봉산탈춤과 함께 해서탈춤을 대표한다. 원래 놀이꾼은 농어민이었다. 강령은 작은 읍으로서 19세기말 이전에는 보잘것이 없었다. 가면극이 전래했어도 그다지 주목받지못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당시 유명한 기생이던 김금옥(金錦玉)이 고향인 강령으로 돌아가자, 해주감영의 통인청(通引廳)을 중심으로 집결되었던 탈놀이꾼들이 해산하면서, 그 일부가 김금옥을 따라 강령으로 모여들어 가면극이 성행했다. 그리고 현청에 속해 있었던 악사들의 지원이 있었고, 십 리 거리의 강천리에 재인마을이 있어 악사를 초청하기가 쉬웠던 점도 강령탈춤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강령탈춤은 1939년 10월 서울 부민관(富民館)에서의 공연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1943년 임석재가 강령 현지에서 채록한 대본이 남아 있다.강령탈춤은 1950년 단오날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현지에서의 전승은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강령탈춤은 해서탈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단오날의 행사로 거행되었다. 음력 5월 6일에서 8일까지는 해주감영에서 벌어진 해서탈춤의 경연에도 참가했다. 놀이 후에는 가면을 태워 버렸다.
세시풍속인 단오놀이 중 대표적인 놀이가 가면극이었다. 매년 단오에는 주민들의 지원과 호응을 받아 가면극을 놀았다. 음력 5월 4일에는 길놀이를 했으며, 5일과 6일에는 저녁부터 새벽 무렵까지 밤새도록 가면극을 놀았다. 놀이마당으로는 주로 공청(公廳)의 앞마당(미곡시장)이 이용되었다.
놀이내용은 제1과장 사자춤, 제2과장 말뚝이 곤장춤, 제3과장 먹중춤, 제4과장 상좌춤, 제5과장 양반춤, 제6과장 먹중춤, 제7과장 노승춤(제1경 팔먹중춤, 제2경 취발이춤), 제8과장 영감,할미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