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음악의 날개위에 <13> 어느 대학교수 이야기 공학도 출신 독학으로 실용음악계 대부 되다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삽화=권용훈 |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 밤잠을 깨우고 / 돌아누웠나…"
지난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부산대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박철홍 작사·작곡)라는 노래다. 서정적인 가사에 다양한 음악적 변화(박자, 리듬과 템포, 조성)가 돋보이는 이곡은 당대와 후대의 젊은 층 사이에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만든 이는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오랫동안 그는 '썰물'에 밀려 차츰 익명화(匿名化)되었기 때문이다.
박철홍(동아대 음악문화학과 교수)은 오늘날 적어도 부산에서 '실용음악계의 대부'로 통한다. 26년 동안 줄곧 현실사회가 요청하는 음악을 적재적소에 제공해 왔던 까닭이다. 그 결과 그는 지금까지 무용·연극·방송음악 등 5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다.
그렇지만 어느 분야나 그러하듯, 명망가(名望家)의 심중에는 으레 남모르는 설움과 아픔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71년 그는 부산대 고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고교시절 이미 그룹사운드에서 음악의 꿈을 키웠으나, 가난한 현실이 그를 그 길로 내몰았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며, 그는 가톨릭 계통의 예벗중창단과 그레고리오합창단에서 음악활동을 유지했다.
80년 혼례를 치른 그는 불현듯 직장을 그만 두고,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벌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려면 최소한의 생계비는 벌어야 하므로 기타학원을 열고, YMCA 기타교실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손님은 거의 없었다. 방학 때 몇몇 학생 손님들이 겨우 기타를 배우러 오는 정도였다. 그마저 그들은 당시 유행한 '꽃반지 끼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발라드의 코드 짚는 법 정도를 배우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생계비는커녕 자신의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다.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서 그는 83년부터 3년간 하얄리아부대의 교회에 나가 성가대원으로 참여했다. 그곳에서는 그래도 한 끼 정도 느끈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대 내 교회에 굴러다니던 영문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잡지 뒷면에 컴퓨터 사진이 실려 있고, 그 아래에는 "혼자서도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라는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연주', '오케스트라'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뒤에 알았지만, 그것은 컴퓨터로 전자악기를 제어하는 미디 광고였다.
이후 7, 8년 동안 그는 전자악기를 사기 위해 일본을 오가면서 '보따리 장사'를 했다. 어떤 때는 코끼리표 전자밥통 안에 카메라를 숨겨 세관을 겨우 통과하기도 했다. 여기서 남긴 차액과 곗돈을 깨서 악기를 사들였다. 막상 악기가 생기자, 그 운용방법을 일러 줄 선생이 없었다. 부득불 그는 밤낮없이 여기에 매달렸다. 이 무렵 독학은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법열(法悅)을 안겨주었다.
가난과 궁핍은 계속되었다. 연극동네에 적잖은 음악을 만들어 주었으나, 그 동네 역시 가난했던 터에 거의 무일푼으로 봉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런 까닭에 문현동 산동네 사글세 방에는 아이가 앓고, 쌀통은 즐겨 비어 있었다. 한겨울 새끼줄에 매단 연탄 두 장을 들고 휘청휘청 귀가하던 모습이 꿈결처럼 아득하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도 볕은 들었다. 89년 MBC 다큐음악 '갈대'로 대한민국 방송대상, 90년대 전국연극제 출품작 '칠산리'의 음악상을 받으면서 그는 폭증하는 음악수요에 시달릴 정도였다. 더구나 40대 중반의 늦깎이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흔히 말하듯 그는 체계적인 정규음악교육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나 온 삶의 역정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아포리즘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음악평론가 kcw66@chol.com 2006.10.09 ⓒ 국제신문(www.kookj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