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을을 내 집처럼 : 처인마을(處仁)
용호마을 정류장에 내려서 배낭을 메려는데 compass는 없고
끈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 않은가.
혹 버스 안에 떨어졌나 해서 장소리 정류장에 머물러 성전까지
갔다 돌아오는 버스를 세웠지만 허사였다.
찜질방에서 어찌 되었나?
귀한 물건은 아니라 해도 대간과 9정맥에서 수시로 길라잡이가
되어 주면서 정이 담뿍 든 놈이라 아쉬운 것이리라.
첫 군계(郡界)인 제안고개 길가 소공원이 황폐해 가고 있다.
신(新)국도로 인해 관리 부재가 된 구도로의 신세가 이러하다.
한 때는 오가는 행인들의 고마운 휴식처였을 텐데 면목 없게 된
'愛鄕' 돌비(石碑)가 겸연쩍어 보였다.
같은 13번 구도로인데도 우슬재비가 서있는 옥천의 가로공원은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더구먼.
제안고개 마루의 '愛鄕'碑
이제는 보아주는 이도 거의 없어 쓸쓸하겠다.
잡초가 무성해 가도 백일홍은 아랑곳 없다는 듯 붉게 피어난다.
길손이 쉬다 가던 벤치가 숲속에서 버림받은 신세다.
그런데 길을 걸으면서도 여전히 山인가.
땅끝기맥(岐脈)을 짜른 제안고개를 넘었을 때 한 눈에 들어오는
벌매산~흑석산~가학산으로 뻗은 영산남기맥, 우측의 국립공원
월출산 암봉군이 늙은 이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는 듯 했다.
다잡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는가.
이제부터라도 확실하게 다스려 오직 길만 보리라.
해남군(계곡면)을 뒤로 하고 들어선 강진군 성전면(城田).
성전은 석제원(石梯院)이 있던 곳이니까 옛날에는 꽤 붐볐을 것.
이조시대에는 10리 간격으로 원(院)을 두고 30리마다 역(驛)을
세웠단다(經國大典))
사람이 10리(4㎞)쯤 걷고 난 뒤 쉬고, 한참 달린(30리쯤) 말에게
꼴을 먹이기 위해서 였다니까 잘 배려했던 셈이다.
목포~장흥간 고속도로(공사중)와 2번, 신13번 국도가 멀찌막이
떨어져 있어 모처럼 한가로운 시골 들녁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에 더하여 마을 표석이 늙은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내 마을을 내 집처럼,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자!"
뒷면에 새긴 슬로건(slogan)은 현대판 향약(鄕約)이라 하겠는데
이 늙은 이가 반해버린 것.
늙은 길손을 흐뭇하게 한 처인마을 표석
들판을 관망하는 觀野亭(사진에는 정자 이름이 안보이지만)
어찌 들판 뿐이겠는가.
인생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거겠지.
이런 마을이야 말로 이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아니겠는가.
천국이나 극락이라 해서 이보다 더 좋은 분위기일 수 있겠는가.
비온 다음 날 아침인데도 정자마루가 어찌나 깨끗한지 양말까지
벗고 발랑 드러누웠다.
이 평안한 곳에 좀 더 있고 싶어 아직 시장하지 않은데도 새벽에
산 김밥을 먹기도 했다.
마을 사정을 좀 더 알고 싶었으나 나다니는 이가 없으니 물을 수
없고 나 또한 길 떠나야 하니 어이 한다?
인턴넷으로 강진군청과 성전면을 뒤져도 여느 자치단체에 비해
자료가 턱 없이 모자라 알 수가 없으니 더욱 궁금했다.
여러 시도 끝에 처인마을 이장(김순기.51)과의 통화가 이뤄졌다.
인(仁)이 있는 곳(處), 즉 處仁은 마치 달관 경지에 오른 이들의
공동체인양 정자 역시 들(野)을 바라본다(觀)는 觀野亭이다.
초기에는 김해김씨 120 여호의 집성촌이었단다.
그러나 씨족 혹은 지역 공동체(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에서
이익사회(게젤샤프트Gesellschaft)로의 전이에 씨족이나 지역의
힘(結集力)은 무력했다 할까.
게다가 산업사회는 도시집중화를 조장해서 지금은 반(半) 이하로
작아진 혼성(混姓)마을로 변해 있단다.
어찌 됐건 마을 구성원 전체가 그 표어의 실천에 혼연 일체란다.
참으로 부러운 이 마을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삼남대로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내게 이미 충분한 보상을 한 것이다.
160자 지하에서 길어 올린 생수
그렇다 해도 나는 아무 데나 마구 주저 앉아야 했다.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아득한 천리 밖 한양땅에 어찌 해 이른단 말인가.
막막해질 때는 F. Sinatra의 My Way로 달래며 일어서곤 한다.
The record shows I tooked the blows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이제껏 역경을 피하려 하지 않고 부딪쳐 뜷고 온 것이
내 이력이고 내가 사는 방식 아니었던가.
기승부리는 더위를 이기지 못해 휴게소에서 캔맥주 하나 마시는
동안에 백두대간 매요리 노파의 당부가 또 떠올랐으나 이번에는
시장 때문은 아니었기에 미안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 수록 아스팔트 위의 발이 마치 불덩이 같아졌다.
샌들(sandal)로 갈아신으려고 신풍리(新豊) 노변 정자로 갔다.
두여원(斗如院)이 있던 곳이라니 성전에서 10리쯤 왔다는 건가.
옛날에도 쉬어 가던 곳이고 이름(笑談亭)처럼 편안하게 우스갯
소리나 하다 가면 되겠다.
소담정 마루가 그리도 시원했던 것은 저 앞(오른 쪽) 노녀의 마음
씀 덕이리라
오른 쪽이 바로 그 주인공
어느 새 성전장(1, 6일이 장날이라고)에 다녀온다는 노파들이 코
앞에 집 두고도 정자에서 피서하며 소담하다 가고 적적해가는데
"연만하신 영감님이 이 뙤약 볕에 웬 고생을 하신다요?"
비교적 곱게 늙어가는 듯한 중로의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한양까지 갈 것이라는 대답에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내 아픈 몸을 알았다면 기절할 지도 모를 일이다.
"잠간만 쉬고 계셔요"
한 마디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녀는 한참만에 물이
가득 담긴 2L들이 패트병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160m 지하에서 길어 올린 생수여요"
차갑고 물맛도 그만이니까 많이 마시고 가지고 가시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무더위에 찬 생수 주는 것보다 더한 적선이 어디 있겠는가.
처인마을 표석에 흐뭇했던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신풍리 노녀의
인정에 늙은 이의 기가 살아나는 듯 했다.
여느 집들처럼 자녀들이 다 도시로 가고 없단다.
그래도 영감은 아직 생존하시겠지.
그래야 늙은 가시버시 덜 외로울 것이니까.
누릿재와 풀치
월남원이 있었다는 월남(月南) 마을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 폭서에 가시와 덩굴로 뒤덮힌 칙칙한 풀숲을 헤쳐 나갈 만한
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길 없는 정맥들에서 할퀴고 찢겨 피범벅 되기 다반사였던 늙은
이가 고작 230m 높이의 누릿재 앞에서 이리 몸사리고 있다니.
갑자기 서글퍼졌다.
다음을 기약하고 풀치로 올라섰다.
그런데 버릇이 도지는가.
누릿재가 누리령, 황치, 심지어 노루재로 쓰이고 있다.
풀치는 불치, 불치재, 불티, 불티재, 화치, 풀치재, 풋치재, 초령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도 모른척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간과 정맥들에서도 마구 불러대는 지명들을 바로잡느라 무척
애를 먹었는데 그 버릇 어디 갔겠는가.
누릿재는 황치(黃峙)를 풀어 쓴 말이다.
누리령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으로 가는 길목인 누릿재를
넘을 때의 심정을 그린 시에 나오는데 그의 독특한 시어(詩語)일
뿐이다(耽津村謠15수중 제1수)
樓犁嶺上石漸漸 長得行人淚灑沾
莫向月南瞻月出 峯峯都似道峯尖
다산(茶山)은 아마도 누릿재에 통한의 눈물을 뿌렸을 것이다.
어찌 다산의 한(恨), 다산의 눈물 뿐이었겠는가.
사시사철 마를 날이 없도록 적셨을 눈물이라면 말이다.
그리움이 오죽이나 절절하였으면 도봉산과 흡사하다는 이유로
월출산을 보지 않으려 했을까.
참으로 황당하게도 노루재로 둔갑한 것은 어느 분의 산행기다.
산을 타는 이들이 종종 이런 얼토당토 않은 우(愚)를 범한다.
풀치터널(야후 웹에서 전재) / 풀치재터널이 아니다.
풀치재의 '재'는 불필요한 겹말일 뿐이다.
'풀치'는 근자에 결정한 통일된 이름이란다.
'풀치터널'이라는 터널명이 국토관리청에서 터널 개통에 맞춰
재 양편인 영암군, 강진군과 협의해서 결정한 이름이라니까.
풀치는 아마 초령(草嶺)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풀치재의 재는 치의 겹말일 뿐이고.(역전 앞, 처가 집 처럼)
풀티재의 티는 치의 변음이고 풋치재는 구전과정의 오류리라.
불치재, 불티재 역시 화치(火峙)의 풀어 쓴 이름일 텐데 화치의
비중이 약했던 것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