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빈 수레의 요란함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들이 그 이면에 담고 있는 의미를 또 한 번 확인해야 한다는 씁쓸한 마음에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강남에 위치한 씨네 하우스로 들어섰다. 모든 것에서 최고라는 요란한 선전 문구로 채워진 광고를 신문을 통해 보고 있노라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랬다. 분명 난 지금까지 심사 숙고하여 선택한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설레임과 기대감 으로써가 아니라 많은 네티즌들의 서로 엇갈린 무사에 대한 평들을 나름대로 확인을 해 보자는 사명감(?)어린 호기심에 의한 발걸음이었으나 그 안에는 자발적인 내킴이 없었다. 영화를 선택하는 내 취향에는 약간의 삐딱함(?)이 있는데 그 것은 요란한 선전으로 관객들에게 必一覽을 은근히 강권(?)하는 예를 들어 '쉬리' '친구'등의 영화에는 별 관심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영화들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비디오를 통해 보지만 대 부분의 경우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테이프를 꺼내고 만다. 그러한 영화들은 나에게 '혹시나' 하는 뒤늦은 기대가 '역시나'로 이어지는 순간 내 '삐딱한 취향'의 신통함을 스스로 또 한 번 확인하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나는 결코 7000원이라는 투자가 결코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서로 엇갈린 칭찬과 비난이 나름대로 그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으나 결론적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라면 모르지만 '너무' 산만하다거나 지루하지는 않았다. 재미있었느냐는 질문에는 끄덕이는 고개짓을 그에 대한 대답으로 대신하고 싶다. 어느 감독은 오랜 영화 기획과정과 준비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영화촬영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에 찬 행보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제한된 여건의 한계를 의식하고 과연 어느 시점에서 포기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포기의 시점을 찾는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강박에 의한 의욕과잉이 이 영화에 대해 수많은 엇갈린 평들을 낳게 하지는 않았을까?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에게는 적어도 3가지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중 한가지는 본전(?)에 대한 강박. 한국 영화로서는 그야말로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 졌고 무사의 여정을 우리 영화사에 새로운 이정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합심된 의욕이 혹독한 산고를 치루며 탄생시킨 결과물인 '무사', 그 본전에 대한 강박. 정말로 세계 어느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액션장면, 우리 영화에서 이제는 표준으로 제시될 그 액션 장면들을 가급적 많이 살리고 싶다는 본전에 대한 강박이 결과적으로 영화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관객들을 지치게 만든다. '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이 경우에 잘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 이 영화는 120분 이내로 족한 영화였다. 만약 그랬더라면 감독의 본전에 대한 강박으로 인한 상실감이 오히려 관객들에게는 압축과 생략으로 인한 산뜻한 충격과 감동으로 이어 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적어도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구해질 것"이라는 말은 그럴 수 있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구하겠다는 그 집착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나는 이따금 영화란 과연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대해 곰곰 생각을 해 본다. 나로 하여금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후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루고 장면 하나 하나, 대화 한 마디 한마디를 떠올리며 많은 상념에 잠기도록 만드는 그 영화란? 수많은 쇼트들이 시이퀀스로 통합되어 2차적 평면위로 화려하게 펼쳐지는 영화를 보며 우리는 그 위에 놓여지는 영상과 그 안에서 많은 인물들이 엮어 가는 이야기들을 입체적으로 느끼는 순간, 희노애락이라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정의 선상으로 어느덧 올려져 그 흐름에 내맡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차적 평면의 영화라는 허구 공간이 3차적 입체라는 현실 공간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그 안의 인물들에 의해 표현되는 성격들이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느껴 질 때 우리는 공감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의 감동으로 이어 질 수 가 있다. 영화는 이를 위해 흔히 사실주의라는 기법을 차용하게 된다. 우리가 두발로 딛으며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우리의 보편 정서로써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으로써의 사실주의가 작금의 상황에서는 이상스레 다소는 황당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선을 보이는데 시종일관 험한 욕으로만 일관하는 주인공을 통해 밑바닥 인생이 제대로 표현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그 감독이 지닌 역량의 한계라고 보고 싶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사실주의라면 우리는 굳이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영화관을 찾을 필요가 없다. 현실 그대로가 영화이기 때문에....실제로 비열한 행동을 일삼으며 살고 있는 사람도 영화를 통해서는 비열한 행동을 일삼는 등장인물에게 호감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자기 기만적 모순을 영화는 꿰뚫어 보고 보는 이들에게 대리 만족에 의한 즐거움을 제공해야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쓰여진 책들은 이미 수없이 많이 출판이 되어 있고 그 안에는 인간을 여러 각도로 분석을 하고 여러 의미로써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을 어느 성격 하나로 특정 지운다는 것은 그 시도조차도 무의미한 것이다. 이렇게 상충하는 의미들의 통합은 필연적으로 모순이라는 연결고리를 필요로 하며 그 통합체로서의 인간은 그래서 많은 모순들을 함장하고 있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복잡 다단한 성격을 지닌 입체적 인간으로서,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모순들이 부딪치는 그 경계를 꿰뚫어 보면서 관객들에게 기만적 대리 만족을 적절히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음욕을 품고 있는 자가 매춘부에게 돌을 던질 수 있고 스스로 결백하다고 부르짖는 자가 바로 죄인이라는 역설이 지니는 의미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자신의 음욕을 돌에 담아 던지는 기만적 자기 부정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매춘부를 보며 느끼는 야릇한 쾌감, 그 모순적 상황의 의미를 영화는 꿰뚫고 있어야한다. 바로 여기에서 영화가 차용하는 사실주의라는 기법의 진정한 의미가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 영화가 어떤 장르로 만들어지든 또 어떤 형식으로 표현이 되든 그 내용은 인간인 우리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고 그 이야기 내용 또한 인간의 서로 다른 욕망이 얽히고 설켜지면서 만들어 내는 갈등의 구조 내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서 빚어지는, 그들의 심리 내에 다층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모순된 성격들에 의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진 이야기들을 로드무비라는 형식으로써 풀어 나가는 영화'무사'를 보고 난 후 나름대로의 감상기를 적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영화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겠다는 생각이 아닌 어떻게든 내 삐딱한 취향의 신통함을 다시금 확인해 보자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그 화려한 비쥬얼에 비해 끌어 나가는 이야기의 구조가 다소 허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그 허술함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위에서 이미 언급한 느낌을 상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영화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며 만들어진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과잉된 기대가 서로 엇갈린 수많은 평들을 낳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무사의 여정은 우리 영화가 가야 할 길 위에 이정표를 새롭게 세울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특히 생생한 전투장면은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이었고 이것은 우리 영화의 액션부분에서 큰 획을 그으며 명실공히 하나의 표준으로 그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고려 말, 원명 교체기의 혼란이 중국 대륙을 뒤흔들고 있을 때 명에서 고려로 보낸 사신일행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여 이에 대한 해명과 사죄를 위해 파견된 사신일행을 호위하는 무사들과 노비들이 그 들이다. 명 나라 수도에 도착한 그들은 한마디의 해명조차도 못해 본 채 귀양에 처해 지게 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명나라 군사들에게 이끌려 귀양지로 가는 도중, 원나라 군사들에게 기습 공격을 받아 호송하던 명의 군사들은 전멸 당하고 무사일행만이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지게 된다. 그 때부터 그들은 고려로 돌아가려는 험난한 여정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길고 험한 여정을 계속하도록 내몰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오로지 고려로 무사히 돌아가 그리던 가족들을 품에 안는 것! '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동물들도 자기가 태어난 곳을 못 잊어 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야.....귀소하려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이다. 그러므로 그 들의 귀향의 의지는 필연이라는 구조 내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하겠다. 혹자는 플롯이 방사형구조로 인해 산만하다 하나 대개의 영화가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이라는 2원적 대립 구조에서 각각의 인물들에게 전형성을 부여하고 그들에 의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게하고 있으나 '무사'라는 영화에서는 2원적 대립 구조라는 영화 문법을 발견 할 수가 없다. 주연이 조연 같고 조연이 주연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각 개인에게 할당된 캐릭터를 각 개인들에 의해 한껏 발휘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상투성에 의한 진부함을 덜 느끼게 하는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오히려 산만하다는 느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느꼈던 어색하다는 느낌은 그들의 연기와 말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상영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화면위로 펼쳐지는 그 허구의 세계가 현실세계처럼 생생하게 느껴 질 수 있는 것은 등장하는 각 인물들이 개개의 성격을 사실적이고도 역동적이게 표현해 냄으로써 가능한 일인데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는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TV연속 사극에서도 나름대로 고증을 거쳐 당시의 말과 말투를 씀으로써 사실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하물며 영화에서 더구나 막대한 물량을 투자한 영화'무사'에서는 바로 이 점이 간과되어 있다. 갑옷과 칼만이 이 영화에서 역사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 영화에서는 전형적 성격을 지닌 주동과 반동이라는 상반 된 성격의 갈등 구조에 무게를 실으면서 엮어 가는 이야기가 아닌 세상에 살고 있는 보편적 인간들이 가지는 보편적 성격을 등장 인물들에게 한껏 드러내게 하고,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는 각 성격의 대립과 화해 그리고는 관용과 포용이라는 상투적 이야기 전개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구조가 영화 전체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영화 전체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들고 말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개개인의 성격들이
창출해 내는 그 갈등의 모습들이 너무 작위적이라는 점이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개연성이
희박하여 관객들의 마음에 설득력 있게 와 닿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 인물이며 가장 복잡한 성격을 표현해 내야 하는 최정의 모습은 우리가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극히 보편적 인물일 수 있다. 젊디젊은 나이에 사신단을 호위하는 급기야는 불가피하게 일행의 귀향을 책임져야만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 안게 된 그가 영화에서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은 사실과 가장 근사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월과 함께 깊어 가는 연륜에 의한 행동이 아니고 젊은 혈기에 의한 무모한 자기 과시적 판단과 그로 인해 외부로 표출되는 행동들은 나중에 그가 고백하듯이 용기가 부족했다는 자의식에 대한 방어기제에 의해 오히려 과장되어 독선적이고 위압적 태도로 일관하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모든 이의
신망을 잃고 지휘권마저 진립이라는 하급 무사에게 넘겨주고 말지만 그러한 모습은 충분히 사실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최다 관객 수를 확보해야하고 그들에게 최대 공약수적 재미를 안겨 주기 위한 상업적 의도 하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위에서 말한 모순의 상투적 공식에 대입을 했어야만 했다. 우리에겐 각각의 이미지에 대한 원형이 있다. 살아가는 현실을 통해 최정이라는 인물의 모습이 개연성을 지닌다 할지라도 영화를
통해서는 바로 우리가 품고 있는 장군이라는 이미지의 원형을 보고 싶어한다. 관객들의 대다수가 그저 필부에 지니지 않는 까닭에 불의를 보고서도 입을 막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마는 그들에게 영화는 초인적 힘을 부여받은 주인공을 통해 불의를 멋지게 쳐부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리 만족이라는 즐거움을 적당히 안겨 주어야한다. 보호받는 공권력이
아니라 공권력에 대한 일방적 피해 의식에 젖어 살수밖에 없는 소시민에 불과한 대다수의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한 개인에 의하여 그 공권력이 철저히 우롱당하는 역설적 상황을 보고 오히려 마음속에서 쾌재를 불러일으키는 모순을 영화는 꿰뚫어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의 두 번째 강박을 지적하고 싶다. 그 강박이란 안성기와 정우성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감독은 그 두 배우에게 무게를 담고싶은데 그 누구도 장군의 이미지와 거리감이 있다. 국민 배우 안성기의 캐릭터는 이미 많은 영화에서 그 중에서도 '태백산맥' '축제' '구멍'이라는 영화를 통해 확고히 우리의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우성의 캐릭터는 반항적이다. 그래서 사신 단을 이끄는 장군 역으로는 걸맞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안성기를 진립이라는 하위무사로 정 우성은 여솔이라는 노비로 캐스팅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장군의 역을 맡아야 했던 비교적 신인 배우인 주진모가 이 두 인물과 대립해야 하는 최정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적절히 표현해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험난한 여정의 주요 모티브는 자신들의 귀향이라는 것 이외에 명나라 공주인 부용을 구해 무사히 귀국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별로 무리하지 않는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어차피 영화라는 것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 원의 군사들에 의해 끌려가는 아름다운 공주에게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많은 희생을 무릅쓰며 그녀를 구해 동행 길에 오른다는 설정은 자연스럽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들이 가고자 했던 명나라의 공주가 아닌가? 역사상 중국이라는 광대한 대륙을 지배하는 나라에 하나의 속국의 지위로 만족해야만 했던 고려라는 나라의 무사 신분으로 왕이 부여한 임무를 이유야 어쨌든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만약 일본의 사무라이들이라면 그 자리에서 할복해야할 상황에 처한 그들에게는 부용을 구해 명의 수도로 무사히 귀환시켜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귀향이라는 명분보다 상위에 있는 명분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애초의 맡겨진 임무를 완수할 수 있고 그런 연후에 명의 도움으로 고려의 귀환이 오히려 용이할 수 있다는 판단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용공주가 그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 상황에서 고집스럽게 가마에 앉아 가기를 원하는 모습은 오만이 아닌 억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가마가 험난한 여정으로 인해 이미 탈진해 있는 무사들의 어깨에 걸리는 그 무게만큼 관객들을 지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에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 상황에서 고집스럽게 가마를 타고 가야한다고 고집하는 부용을 통해 감독은 관객들에게 과연 무엇을 보여 주려 했을까? 공주의 오만함?
그러한 공주가 느닷없이 나타나는 피난민 무리들, 절대 왕권 앞에 한낱 잡초에 불과했던 일반 백성들, 그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그 중 한 명은 실성한 노인) , 부녀자들로 구성된 그 무리들을 자기 백성이라는 이유로 그 험난한 여정 속에 끼어 들게 한 것은 그 명분이 너무나 어줍고 따라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것은 아마도 감독의 마지막 3 번째 강박에서 연출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지난날에 보았던 영화들을 통해서 인상깊게 마음에 각인된 이미지들을 되살리고 싶다는 강박. 폭력적이고 사실적인 액션 장면과 그 안에서 인간 군상의 고뇌와 갈등을 진지하게 잡아내었던 샘 페킨파의 영화들, '알라모 요새의 전투'라는 영화의 마지막 전투장면에서 보여 주는 신사적이고 짙은 인간애가 담긴 장면들을 표현해 내고 싶다는 그의 강박은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인과 관계의 충실한 적용에서 관객들에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그럴 수 있다는 필연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로 이어질 때 비로소 일련의 사건들은 관객들에게 설득력을 지닌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영화 전반부에 여솔이 자신의 주인인 부사의 시신을 끌고 자신의 몸조차 운신하기 힘든 그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에서 감독이 의도했었는지도 모를 뭉클한 감동을 전해 받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자연스럽지 못하다.
차라리 삭막하고 고립된 이미지의 사막 한 가운데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황혼의 붉은 빛을 받으며 부사의 시신을 모래 밑으로 파묻고 홀로 처연히 서있는 여솔의 모습을 줌아웃으로 처리를 했더라면 그 장면이 오히려 관객들의 마음에 더욱 파고들었을 텐데... 그 억지스러운 행위는 나중에 부사의 시신에 침을 뱉는 아랍 상인의 머리를 창으로 멋지게(?) 날려 버리는 장면을 위해 기를 쓰고 끌고 왔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여솔의 성격은 너무나 평면적이었다. 지나치게 멋(?)을 의식한 돌출 행동으로 점철되는 그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고려 중기 "장상(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을까 보냐.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외치며 반란을 꾀한 노비 만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에서 나름대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그의 계급에 대한 적대의식이 설득력 있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그 눈빛만으로도 영화가 요구하는 성격을 충분히 표현 할 수 있었다. 그에겐 말이 필요 없었다. 오히려 벙어리 여솔이었으면 그 행위에는 어느 정도 개연성을 담을 수 있었을 텐데....장쯔이라는 배우의 성격도 정우성과 같이 너무 단선적이다.
'집으로 가는 길' '와호장룡' 에서 보여 주었던 그 이미지들에 내 자신이 깊이 중독되어 있는 탓인지는 몰라도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들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 주었던 각각의 이미지들을 십분 활용하여 공주 본연의 모습에선 '와호장룡'의 장쯔이로, 여솔에게 호감을 느끼는 모습에선 '집으로 가는 길'에서의 장쯔이로 표현을 하였더라면 그 '모순된 당찬 이미지'와 '상큼한 내숭'이 영화를 보는 재미를 가일층 돋구어 주었을 텐데...또 둘 사이의 로맨스적 요소를 보다 더 살려냈더라면 가령 자신을 위해 싸우던 여솔이 부상당했을 때 그의 곁을 지키며 극진히 간호를 해주는 모습을 영화가 보여 주었더라면 마지막에 그녀에게 날아오는 창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받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그의 그러한 행위의 개연성과 그 희생에 뭉클한 감동을 안겨 주었을 텐데... 이러한 내 나름대로의 설정이 너무 상투적이고 멜로적인가? 상투적이라 함은 보편인들에게 보편적 설득력으로 접근 할 수 있는 바로 그 보편성을 의미함이고 멜로적이라 함은 영화가 요구하는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의 기복 선상 위로 자신을 올려놓고 그 흐름에 마치 흘러가는 물위의 부목처럼 자연스럽게 내 맡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상업영화가 앞으로 끊임없이 안고 가야할 영원한 주제인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등장 인물 중 가장 아쉬움이 남는 인물은 지산이라는 스님이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무사일행을 구한 지산의 역할이 너무 미미하였다. 이 영화가 내수용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외국으로도 수출해 흥행을 두고 한판의 승부수를 걸어볼 요량이었다면 힘든 여정을 계속해야만 하는 그 무리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에 보다
심도 있는 비중을 실었으면 좋았을 텐데... '와호장룡'이라는 영화가 미국 내에서 어느 정도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리무바이라는 무당파 고수의 무예가 아니라 그가 몸 전체로 뿜어내는 동양의 오묘하고 신비스런 이미지를 최대한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말 유학사상에 젖어 불교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는 통문관 주명이라는 영리한 기회주의자와 어설픈 논리로 나누는 유,불의 대화, 유란에게 접근하려는 주명에게 기독교의 사도 바울적 훈계를 늘어놓는 극히 제한된 지산의 역할에 정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주된 역할이란 죽은 자들을 위해 염불을 외워 주는 것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아쉽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칭찬이라는 하나의 소리로써만 내어질 수 있는 완전한 영화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비판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함이 오히려 발전이라는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BE'가 아니라 'BEING' 이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힘든 여정이기에 그 여정에는 언젠가는 집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내재하고 있을 때 비로소 가야만 한다는 명제가 필연이라는 구조 내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이 이치는 영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비판은 단지 비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내일을 진심으로 바라는 애정 어린 비판이었을 때 그 비판은 비로소 존재해야할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비판이 이러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 가능성이 보다 나은 모습으로 體現되기 위해 그 비판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요구될 것이다.
우리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동시에 그 한 마리의 제비가 완연한 봄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한 마리의 제비에게서 봄이 오고 있다는 희망의 소식을 전해 받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그 한 마리 제비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것은 과욕에 의한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까? 그 험난하고 피와 땀으로 점철된 '무사'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향을 한 모든 이 들에게 진심으로 애정 어린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사의 험난한 여정은 우리 영화에 새로운 이정으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가슴 뿌듯함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두 인물이 오래도록 머리 속에 남는다. 최정의 부관인 가남( 박 정학 )과 원의 장수 람불화(우 영광)가 그들인데, 그 들의 본분에 충실하면서 고뇌하는 모습이 인간적이었고 그 점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 들의 연기가 이 영화의 불투명한 톤을 그나마 어느 정도 살려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창술이 뛰어난 여솔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며 그를 살려 주려고 하는 모습에서, 마지막 토성 안 전투에서 부용에게 창을 겨누며 '너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생명을 잃어야 했다'는 람불화의 인간적 고뇌가 담긴 말이 인상 깊게 남는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원의 시운이 이미 기울어 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부하들에게 이 전투를 마치면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서도 귀향이라는 귀소 본능이 마음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모습에는 깊은 우수와 고뇌가 서려 있다.
길을 떠난 자만이 볼 수 있는 고향으로 향하는 아득한 길에
가득히 서려 있는 그 우수와 고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