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연 폭포
삼부연 폭포는 가장위가 노귀탕, 중간치의 솥탕, 큰 가마탕이있는데 여기에 따른 전설은 다음과 같다.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철원에 도읍을 정할무렵 삼부연 계곡에는 도를 닦던 수백년 묵은 이무기 네마리가 있었다.그중 세마리가 도를 통해 용의 몸을 받아 승천하는데 그 세마리 용이 기암절벽을 치고 올라가면서 바위구멍 세개가 생겼는데 여기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된후 삼부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폭포의 상류에 있는 마을은 용화동이며 그 앞의 저수지는 용화저수지이다.
그리고 이때 용이되지 못한 이무기 한 마리가 비를 못 오게 해 가뭄이 들면 이곳에 단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삼부연 폭포는 겸재 정선에게는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겸재 정선의 스승인 김창흡(1653-1722)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가족을 이끌고 은거해 살게 된다.
김창흡은 여기서 주역연구에 몰두하여 진경문화 창달을 모색하게 되니 세상에서는 그를 삼연(三淵) 선생이라 일컷는다. 삼연은 삼부연을 상징하는 별호다.
이렇듯 삼부연이 진경문화의 요람이 되고 보니 이후 진경문화계의 중추를 이루던 삼연의 제자들이 삼부연을 찾아 시로 읊고 그림으로 그려 이를 기리게 된다.
겸재의 (삼부연도)도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다. 겸재는 36세때 금강산에 가면서 스승이 거쳐하던 삼부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곳에 들러 그 장관을 화폭에 옮기니,
스승 삼연 또한 그 그림에 제화시를 붙인다.
"거대한 절벽 검은 못에, 삼급(三級)으로 폭포를 이루었구나//
용은 아래에 숨고, 선비는 위에 깃들었네//
그 덕을 같이해야 하련만, 끝내그 이름만 훔쳤을 뿐인가// [삼연집三淵集]卷二十五, "三釜淵"
이에 겸재의 친구로 진경시의 일인자인 사천 이병연(1671˜1751)도 제사를 읊조린다.
"윗가마 가운데로 떨어지니, 파도는 아랫가마에 걸린다//
올려다보면 전체 한 가지 절벽일 뿐, 누구라 세 못이 뚫렸다 하랴//
태초에 용이 움켰던가, 천 년을 물이 뚫었네//
조화를 물을 길 없어, 지팡이 의지하고 망연히 홀로 서 있다.// - 사천시초 상권 삼부연-
안타까운 것은 초기의 삼부연도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72세에 다시 그린 [해악천신첩] 속에 그림이 들어있고 삼연의 제사와 사천의 제시가 다시 베껴져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겸재 만년기의 호방장쾌한 필법이 거침없이 구사된 걸작이다. 화면중앙으로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돌기둥 모양의 고립 암봉과 그 맞은편 암벽을 쓸어내린 부벽찰법(도끼로 쪼갠 단면처럼 수직으로 보이도록 붓으로 쓸어내려 절벽을 나타내는 먹칠법), 봉우리 끝과 시냇가를 따라 울창하게 들어선 소나무숲의 흥건한 먹칠법이 보이는 강렬한 대비와 조화는 겸재 그림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예이다. 폭포아래 너럭바위에 서서 폭포를 바라보는 네명의 선비와 두 동자는 겸재 일행이었던 모양이고, 등성이 너머로 나있는 산길은 삼연이 은거한 용화촌으로 가는 길인듯 하다.
지금은 굴이 뚫려 있어 고갯마루를 넘지 않아도 된다.
이상 -이연섭지은 한탄강에서 인용-
삼부연 폭포와 용화동은 이렇듯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후기 문화의 근간이된 진경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삼부연 폭포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은거하러 가면서 들러서 나라잃은 설움에 한 없이 울었다고한 곳이고 궁예의 한이 서린곳이다. |
첫댓글 좋은글 암기하고 감니다 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