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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삼성과 롯데의 명승부는 17년 뒤 똑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당시 7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선발과 강타선의 팀' 롯데와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불펜과 경험의 팀' 삼성이 17년 뒤에도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마저 같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사진=삼성) |
‘때가 왔다.’ 타석에 들어선 삼성 김용철(현 경찰청 감독)이 롯데 더그아웃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1988년 이후 이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그였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타석에 들어선 김용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롯데 윤학길(현 히어로즈 코치)이 로진백을 쥐며 다짐한 말은 그랬다. 1986년 프로 데뷔 뒤 처음으로 밟는 가을 무대를 여기서 끝낼 순 없었다.
1991년 9월 26일 대구구장. 준플레이오프 4차전 6회말에 만난 두 선수의 각오는 서로의 유니폼 색깔만큼이나 달랐다. 그해 가을 ‘영남의 라이벌’ 삼성과 롯데의 준플레이오프가 야구사에 기억될 명승부가 되리라곤 양팀 선수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영남의 라이벌, 삼성과 롯데
1991년 9월 22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이 열리는 이날은 공교롭게도 추석이었다. 한동안 관중이 뜸했던 대구구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이해 삼성은 김성근을 새로운 감독으로 맞아들이며 팀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구단 수뇌부는 프로출범 이후 호화진용을 갖췄으나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번번이 떨어진 팀의 최대 문제점을 정신력 부족으로 봤다. 따라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했던 김 감독의 강도 높은 훈련과 정신력 강조가 꽤 유용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정규시즌 내내 삼성은 비틀거렸다. 이종두, 유중일,강기웅,김성래 등 팀의 주축타자들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고 에이스 김상엽이 전시즌 무리한 투구와 신변문제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김 감독의 리더십과 재일동포 잠수함 투수 김성길의 호투로 팀 성적은 겨우 4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나 당시 35살의 김성길은 52경기에 등판, 16승12패18세이브를 거두며 부실한 삼성 선발진을 대신해 고군분투했다.
다행히 후반기 들어 주축선수들이 부상에서 회복하며 삼성은 정규시즌 3위로 준플레이프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삼성의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새 감독을 받아들이긴 롯데도 마찬가지였다. 1984년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강병철 감독을 다시 4년 만에 사령탑에 앉혔다. 강 감독은 구단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했다.
불펜보단 선발을 중시했던 강 감독의 지론이 빛을 낸 까닭일까. 부산고 출신의 신인 김태형(11승)을 비롯해 윤학길(17승), 박동희(14승), 김청수(10승) 등 선발투수 4명이 모두 10승 이상을 거두며 리그 최강의 선발진을 구축했다.
당시 강 감독은 마무리투수의 부재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켜줬는데 이 덕분에 롯데는 시즌 중반 이후 마운드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전례를 피할 수 있었다.
선발투수진만 좋았던 건 아니었다. 타선도 괜찮았다. 신인야수 박정태와 전준호는 데뷔하자마자 각각 주전 2루수와 중견수를 꿰찼다. 타자전향 3년째를 맞은 김응국은 3할 타율로 꾸준한 활약을 보여 중심타자 위치를 굳혔으며 1989년 삼성에서 이적한 뒤 특별한 활약을 하지 못했던 장효조는 3할4푼7리의 높은 타율로 전해 처음 3할에 미달했던 부진을 털고 타격2위에 오르는 부활을 연출했다.
투타의 안정된 전력을 바탕으로 롯데는 결국 정규시즌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당시 부산을 대표하는 지역신문인 <부산일보> 스포츠면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떴다. '7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롯데' 어디서 많이 보던 문구 아닌가.
피를 말린 22이닝 사투
정규시즌 성적은 삼성이 롯데를 12승1무5패로 압도했기 때문에 자신감이나 승산은 삼성 쪽에 있었다.
대구구장에서 열린 1차전 삼성은 성준, 롯데는 박동희를 선발로 내세우며 전의를 불태웠다. 경기초반은 롯데가 근소한 차로 리드해 나갔다. 그러나 삼성 타선은 5, 6회 진가를 발휘했다. 2-3으로 뒤지고 있던 5회말 선두 김종갑이 좌중간 2루타로 출루한 뒤 김용국과 신경식이 각각 3. 2루타를 치며 3연속 장타로 박동희를 두들겨 4-3으로 전세를 뒤집은 것이다.
강 감독은 급히 김태형과 김정수를 투입하며 삼성의 기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2사 뒤 김용철이 또다시 좌전안타를 때리며 1점을 보태 5-3으로 점수 차가 더 벌어졌다.
4회부터 성준을 구원한 김성길이 5 2/3이닝 동안 3안타로 롯데의 공격을 억제하고 있는 동안 삼성타선은 6회말 유중일의 솔로 홈런과 장태수의 2타점 좌전안타로 3점을 보태 추석임에도 구장을 가득 메운 홈팬들을 즐겁게 했다.
부산에서 펼쳐진 2차전은 롯데의 완승이었다. 롯데 선발 윤학길은 8회까지 단 3안타로 삼성타선을 완벽하게 막으며 에이스다운 역투를 펼쳤다. 타선도 다르지 않았다. 1회말 10타자가 나서 5안타, 2볼넷으로 대거 5점을 뽑는 등 2루타 4개를 포함한 15안타로 삼성 마운드를 두들겨 10점이나 냈다.
9회초 유중일이 좌월 2점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면 삼성은 완봉패의 수모를 당할 뻔 했다. 결국 2차전은 10-2로 롯데가 승리를 거두며 양팀의 전적은 1승1패가 됐다.
삼성의 재일동포 투수 김성길의 역투 장면(사진=삼성) |
대구구장에서 치른 마지막 3차전. 양팀은 13회까지 3-3 팽팽한 동점을 이루며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이 경기에서 팀의 실질적인 에이스였던 김성길과 박동희 두 투수의 역투가 빛이 났다.
김성길은 1회초 선발 성준이 김민호에게 2점 홈런을 맞은 직후 구원 등판해 12 1/3이닝을 9안타 1실점으로 롯데의 강타선을 막았다.
박동희 역시 2-1로 앞선 2회말 1사3루 에서 선발 김태형을 구원해 10 2/3이닝 동안 무려 15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5안타 1실점으로 삼성 타선을 봉쇄했다.
롯데는 김민호의 1회 선제홈런,8회초 조성옥의 동점 솔로홈런 등 장단 12안타를 터뜨렸으나 수비실책과 희생번트 실패로,삼성은 중심타선의 불발로 4시간37분 동안 진땀만 흘리고 말았다.
이튿날 치러진 운명의 4차에서 양팀은 총력전을 펼쳤다. 경기초반만 해도 행운의 여신은 롯데로 기우는 듯했다. 롯데가 5회까지 2-1로 이기고 있는데다 롯데 투수들의 공이 좋아 삼성 타자들이 맥을 못 춘 까닭이었다. 그러나 6회말 1사2루 김용철이 타석에 들어서며 조금씩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김용철은 원래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김용희와 함께 롯데의 3, 4번을 맡았다. 언론에선 이들을 ‘용용 브라더스’로 불렀다. 그도 그럴 게 1982년 초대 올스타전에서 김용철은 3경기 연속을 홈런을, 김용희는 3차전에서 3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야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1987년 프로야구 ‘선수회’ 문제가 불거지면서 주동자격이었던 김용철은 최동원과 함께 삼성으로 트레이드되는 보복을 당했다. 김용철이 타석에서 롯데 더그아웃을 보며 가슴에서 칼을 갈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한때 한솥밥을 먹던 선참의 복수심을 후배 윤학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1986년 롯데에 입단한 뒤 6년 만에 처음으로 맞는 포스트시즌을 윤학길은 이대로 마치고 싶지 않았다. 지난 6년 동안 4번이나 한시즌 200이닝 이상을 투구한 건 바로 가을에도 야구를 계속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학길은 의지와는 다르게 어깨에 힘이 없었다. 이유가 있었다. “2차전 선발 완투승을 거둔 뒤 이틀을 쉬고 다시 등판했다. 그 탓일까. 이상하게 팔에 힘이 없었다.” 윤학길의 회고다.
그해 윤학길은 34경기에 출전해 17승 11패 평균자책 3.25를 거뒀다. 17승 가운데 완투승이 무려 11번이나 됐다. 어쩌면 이해 완투능력이 퇴색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1988, 1989년에 각각 거둔 17, 18 완투승을 거둔 그였으니까.
체인지업 같았던 직구
이 믿을 수 없는 오른팔을 가진 에이스에게도 그러나 포스트시즌 구원투수는 어려운 보직이었고 가을 무대는 떨렸다. 연신 로진백을 만지작거리던 윤학길은 그러나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 뒤 마운드에 발을 올렸다.
초구는 볼이었다. 이윽고 포수 사인을 바라보던 윤학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쪽 직구라면 자신 있었다.
윤학길의 와인드업과 함께 배트를 쥔 김용철의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포수의 요구대로 공은 정확히 몸쪽을 향해 날아오고.
“딱!” 둔탁한 굉음이 대기를 갈랐다.
17년이 지난 가을 김용철은 당시 윤학길의 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몸쪽 체인지업이었다.”
정규시즌 11번의 완투승을 거둔 철완 윤학길의 어깨도 거듭되는 호투에 진이 빠져 있었다. 그가 던진 몸쪽 직구가 타자에겐 체인지업으로 보일 만큼 구속이 하락해 있었다.
결과는 역전 2점 홈런이었다. 이 홈런을 시작으로 삼성 타선은 불을 뿜기 시작했고 결국 경기는 10-2 삼성 승리로 끝이 났다. 7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롯데의 가을은 첫사랑의 입맞춤처럼 그렇듯 짧게 끝을 맺었다.
삼성이 승리할 수 있던 배경은 김용철의 한방뿐만이 아니었다. 김성길의 호투와 유중일 공· 수 맹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 삼성은 준플레이오프 팀타율 2할3푼4리로 롯데의 2할8푼7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빈타에 허덕였다. 이만수는 1할에도 미치지 못했고 신경식은 1할8푼8리로 존재감이 희박했다. 선발진 역시 롯데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차전 2-2이던 4회초 1사 l루에서 성준을 구원한 뒤 5 2/3이닝 동안 롯데타선을 3안타로 봉쇄하고, 1승1패로 막판에 몰린 3차전에서도 선발 성준을 1회 2사부터 구원해 무려 12 1/3이닝 동안 공 1백80개를 던지며 단 1실점으로 막는 투혼을 발휘한 김성길이 팀을 벼랑에서 살렸다.
유중일 역시 준플레이오프 사상 처음으로 4경기 연속홈런을 치며 다른 주축 타자들의 부진을 비웃었다. 수비에서도 결정적 실책을 2차례나 범한 롯데 유격수 공필성과 한눈에 비교될 만큼 안정적 수비를 펼쳤다.
유중일의 준플레이오프 성적은 18타수 7안타, 타율 3할8푼9리, 4홈런, 6타점, 2도루였다. 그의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