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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기도
(리차드 포스터)
그 당시에는 하늘의 권능에 의해서 많은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팔을 드러내셨고, 그의 권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놀라웁게도 그 치유의 힘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질병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
<조지 폭스(George Fox)>
치유의 기도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일부이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 내에 있는 어떤 다른 사역보다 과대평가되어도 안 되고 또한 과소평가되어도 안 된다. 오히려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이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믿음의 인간적인 본질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혼을 돌보시는 것만큼 육신도 돌보시며, 영을 돌보시는 것만큼 감정도 돌보신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은 전인격적인 것으로 인격의 모든 면, 즉 육신과 혼과 의지와 감정 및 영까지도 포함한다.
무한한 다양성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시려고 무한히 다양한 방법을 즐거이 사용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들인 의사들이 있어서 기쁘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술과 동정심으로 우리의 신체가 질병과 아픔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발전이 있어서 기쁘다. 왜냐하면 보다 좋은 방법들이 발전되어 심층 심리 치료가 증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남녀노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음을 기뻐하며 축하 한다.
더 나아가, 치유를 위하여 여러 분야에서 함께 협력하는 모든 노력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목회자와 심리학자와 내과 의사의 구별은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전에는 육신의 의사와 마음의 의사와 영혼의 의사가 똑같은 사람이었다. 특히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을 하나의 통합체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영혼에 대한 사역을 하지 아니하고 육신에 대한 사역만 한다든지, 혹은 육신에 대한 사역은 하지 아니하고 육신에 대한 사역만 한다든지, 혹은 육신에 대한 사역은 하지 아니하고 영혼에 대한 사역만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세 오경을보면 질병이 의심스러울 때마다 제사장에게 가 보라는 규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레13장 이하). 예수님도 사역하실 때 기원 1세기 당시에 잘 알려진 의료기술을 사용하셨다(막7:33, 요9:6 등). 오늘날의 많은 ‘원시적인’ 문화에서도 의사와 사제는 하나이며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기능별로 구분하려는 이교적인 경향을 없애는 것을 열정적으로 환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병 고침을 위해서 기도에만 의지하라고 요청하실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칙이 아니라 예외적인 일이다. 치유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의학적인 수단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믿음의 태도일 수도 있으나, 영적 교만의 모습이 되기가 더 쉽다.
물론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잘못할 가능성도 똑같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의학적인 수단에만 의지하다가 모든 가능한 의학 기술이 실패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기도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 생각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유물론에 기초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기도의 도움과 의학의 도움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고, 일반적으로 기도의 도움과 의학의 도움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고, 우리는 거기에 똑같은 강도로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처음에 치유의 기도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신체적인 치유가 아니라 정서적인 치유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나는 한 가정 상담 센터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을 정서적인 질병과 관계하여 사용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을 심각하게 깨달았다. 내가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심리학적 방법론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기술밖에 안되었다. 그런 전문적인 도구들을 거부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지만, 나는 치유의 기도가 내가 목표하고 있는 바람직한 결과를 크게 고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나의 첫 경험은 28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두려움과 쓰라림으로 살아온 어떤 남자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밤중에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그는 계속되는 우울증으로 시달렸다. 부인의 말대로라면 그의 상태는 수년 동안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는 나에게 수년에 걸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그런 깊은 슬픔에 잠겨 살아가기 전의 일이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에 있었는데 서른세 명의 특공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적군의 포화 속에 갇히게 되었다. 깊은 시름에 잠긴 눈빛으로 이 사람은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위기 가운데서 건져주시기를 얼마나 결사적으로 기도했는지 그가 말했다. 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둘씩둘씩 내보내야만 했고 그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결국 이른 아침 시간에 그는 여섯 명의 부하와 함께 탈출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네 명은 중상을 입은 체였다. 그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은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했다. 분명히 그의 마음은 분노와 쓰라림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 영원한 나라에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그 쓰라린 추억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고쳐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나는 괜찮다면 그를 위해 기도해 주겠노라고 하면서, 그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믿음을 갖겠노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다시 28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님께서 그날의 이 착한 사람과 함께 동행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또한 나는 이렇게 간구했다. “주님, 제발 그 상처와 그 미움과 그 슬픔을 몰아내 주시고 그를 자유케 하옵소서,”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고 또 기도하기를 이 치료의 한 증거로 그 사람이 평안하게 잠잘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왜냐하면 그가 그 긴 세월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멘”.
그 다음 주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환한 표정으로 내게 왔다.
“매일 밤 아주 잘 잤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마음에 찬송을 떠올리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제 전 행복합니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의 아내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 일은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멋진 일은 비록 그 사람이 그때 이후 일상적인 삶의 기복을 겪긴 했지만 그를 괴롭혔던 옛 슬픔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완전히, 그리고 즉각적으로 고침을 받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 사건은 내게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전인격적인 치유와 관련되어 잇다는 것이며, 따라서 육체적 치유에 대한 나의 편견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병자들을 위한 기도의 나의 초기 경험들은 씁쓸한 실패들이었다. 처음에 나는 암 환자를 위해 기도했으나 그는 죽었다. 그 다음에는 관절염으로 심하게 다리를 저는 어떤 아주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그분은 계속 다리를 절었다.
내가 배워야할 것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에게 가르쳐 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며칠 뒤 한 노부인을 통해 응답이 왔다. 그분은 나를 알지도 못했고 내 문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분은 우리 모임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처음 치유를 위한 기도를 배우려면 암이나 관절염과 같이 너무 어려운 질병으로 시작하지 마시고, 좀 더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거의 미끄러져 내릴 뻔했다. 그것은 분명 근본적인 것이 있다. 나는 이 진보의 원리를 다른 모든 분야의 노력에 실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영적인 생활에는 적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초보적인 가르침으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작은 것들, 에를 들면 귀가 아프다든지 머리가 아프다든지 감기에 걸렸다든지, 가족과 친구들 중에서 어떤 필요가 생기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천천히 나는 치유 기도의 방법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오늘도 내가 기도하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고침을 받고 있다. 특히 내가 팀을 이루어 기도 한다든지, 사랑하는 공동체 내에서 기도할 경우 많은 사람들이 치유된다.
당혹스러운 질문
그런데 기도를 받는 사람이 모두 다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이것을 하나의 ‘사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조금만 관찰해 보아도 “저희 병을 고치셨다”(마12:15)는 말씀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슴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다 고침을 받지는 않는다. 여러분도 나와 똑같ㅇㄴ 체험을 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때때로 처음 능력의 결핍은 신앙의 진짜 위기를 재촉하는 극적인 차원까지 드러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 당혹스러운 질문에 대한 가장 직선적인 대답은 “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치유의 기도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즉각적으로 완전히 고침을 받기를 원한다. 정말 결사적으로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고침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비록 완전한 치유는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점점 나아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그들 나름대로 능력을 받아 효과적인 치유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만성적인 어떤 신체적 질병으로 인해 그들 자신은 불구로 지내는 사람도 알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치유의 기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해서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의미에서는 너무나 복잡해서 인간과 하나님, 마음과 육신, 혼과 영, 그리고 악귀적인 것과 천사적인 것 등이 뒤엉킨 상호 작용이 내포되어 있다. 케네스 스완슨(Kenneth Swanson)은 우링게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모두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는 질병과 고통과 괴로움이 존재라는 직물의 일부로 섞여있다.”
때로는 우리가 문제를 잘못 진단하는 수도 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치유인데 신체적인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 예다. 어떤 때는 식이 요법이나 운동이나 수면과 같은 자연적인 건강 요법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의 의약을 무시할 때도 있다. 충분히 명확하게 기도하지 않거나 근본적인 문제까지 내려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흘러가는 적절한 통로가 되지 못하여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긍휴 ㄹ이 아직까지 충분히 개발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기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미로와 같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기도했는데 아직도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대면할 때가 종종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해서는 안 될 일을 마하고자 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도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 때문이라든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든지, 그 들 속에 어떤 죄가 있어서 기도를 방해한다든지, 아니면 그와 유사한 것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그들이 져야 할 짐을 배가시키게 될 뿐이다. 그들이 우리를 찾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어딘가 나무랄 점이 있다면 기도해 주는 우리 자신들을 자책하자. 왜냐하면 바로 우리의 믿음의 결여나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역사가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사실상 책임 소재의 문제는 정작 중요한 게 아니다. 제자들이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 이오니이까 그 부모 오니이까?” 하고 물으며 책임 소재를 따지고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본질과 무관한 것으로 일축해 버리셨다(요9:1-12).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치유의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함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때때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치유의 기도를 시도하다가 실패했다(막9:14-29 참조).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언제나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는 말을 자주 언급했다. 어떤 기사를 보면,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고쳐 주기를 간청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바라보시고 마음이 감동되어 불쌍히 여기 셨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어근은 ‘내장’ 을 가리킨다. 그래서 옛 킹 제임스 역본은 그것을 가리켜 ‘자비의 창자’ 라고 불렀다. 그것은 ‘자궁’ 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문둥병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고쳐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뱃속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에게 가까이 갖 않으시고도 병이 나으라고 명령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만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만지신 것은 우리가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붙잡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안수기도
불쌍히 여겨 만지는 것을 이야기 한 지금, 안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시기 적절할 듯하다. 안수는 성경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재정하신 근거가 확실한 사역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접촉과 전염의 율법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지혜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나 필요로 하는 것,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을 나누어 주시는 수단이다. 그것은 복음의 초보적인 문제 중 하나로, 그것이 없으면 성숙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히6:1-6).
안수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자손에게 축복을 해준다든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든가, 은사들을 나누어 준다든가 하는 일에 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용도 중의 하나는 치유의 기도에 쓰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병자들에게 안수하셔서 그들을 고치셨다(막6:5). 벳새다 에서는 눈먼 사람에게 두 번 안수하여 그가 완전히 시력을 되찾게 되었다(막8:22-25). 멜리데 섬에서 사도 바울은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행28:7-10). 마가복음의 끝부분인 긴 사본에 의하면 일반 신자들은 이 안수 사역을 통해 격려를 받는다(막16:18).
안수 그 자체로는 병자들을 고치지 못한다. 병자들을 고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안수는 우리의 믿음을 촉진시키고 하나님께 치유의 기회를 드리는 순종의 행위일 뿐이다. 야고보서 5:14에서 권유하는 것처럼 안수 외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도 겸하여 시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안수하며 기도할 때에 이따금씩 어떤 힘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곤 했다. 나는 하늘의 생명력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도 없지만 막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권능이 어떤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기를 지향하거나 거부하면, 안수를 멈출 것이다. 또한 미움이나 원한의 마음을 품으면 생명력의 흐름이 즉시 멈춘다. 안수를 받는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 역시 걸림돌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손상시키지 아니하고 존중해 준다면,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이 일은 경솔히 하거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아무에게나 손을 덥석덥석 얹어며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바울도 사람들에게 분별없이 안수하는 일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다(딤전5:22). 왜냐하면 무분별한 안수는 사람들에게 미처 준비되지 않은 일들을 야기 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화된 상식으로 보면 어떤 주어진 시간에 무엇이 적절한지를 깨닫게 된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사실은 우리 어른들이 안수 문제로 갈등하는 동안 어린이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병이든 악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어느 가정에 초대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아기의 네 살 난 오빠가 마침 방안에 있어서, 그에게 동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말에 기뻐하였고 나 역시 그의 도움을 얻게 되어 기뻤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기도는 종종 놀라운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의자 위에 오라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우리 작은 놀이 하나 할까?” 하고는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아니까, 예수님이 저 맞은편 의자에 앉아계신다고 생각하자. 예수님은 우리가 오로지 예수님께만 관심을 쏟기를 참고 기다리신단다. 우리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눈동자에 어려 있는 사랑을 보면, 그 순간 줄리 가 얼마나 아픈가 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지, 예수님은 웃으며 일어나서 우리에게로 오실거야, 바로 그때 우리들이 줄리 에게 손을 얹는 거야.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우리 손 바로 위에 그 손을 얹어 주신단다. 우리 몸속에 들어가 예수님은 나쁜 세균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 세균과 군인들처럼 싸우신단다. 싸우는 한 때의 군인들처럼 바로 네 동생의 몸을 낫게 하는 빛을 비춰 주시면서 말야, 알겠니?” 그 아이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내가 이야기해준 그대로 함께 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 데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멘.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나의 기도의 짝이 특별한 믿음을 행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줄리는 완전히 다 나았다. 지금에 와서 나는 우리가 한 직은 기도 게임이 줄리를 낫게 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입증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줄 리가 고침을 받았고 그것만이 내가 알아야 할 전부라는 사실이다.
네 가지 단계
이 글을 읽는 사람 누구나가 대강당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치유사역을 행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치유의 빛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기회는 일상생활 중에 우리 모두에게 수 없이 많이 생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치유의 기도에 대한 간단한 접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라기는 그것이 일반적인 생활에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거기에는 네 가지의 올바른 단계가 있다.
첫째, 들어야 한다. 이것은 분별의 단계이다. 사람들에게 귀기울이고 또 하나님께도 귀기울이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마음속의 필요를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털어 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면, 정말로 그들의 말에 귀기울인다면 종종 우리 마음속에서는 “예”라는 소리가 우러나온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그 상황을 위해 기도하라고 싶어 하느냐고 정중하게 묻게 된다. 이십년 이상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온 나는 아직까지 내 제의를 거절한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일을 공항에서나 백화점에서나 사람들이 많은 강당에서나 가리지 않고 해왔다. 이런 식으로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또 하나님께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문제의 핵심을 보여 달라고 간구해야 했다. 이 기도의 응답은 직접적인 계시로 오기도 하고, 때로는 말씀 이면에 깔려 있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기도 하고, 또는 그 두 가지가 어울려서 오기도 한다. 내 친구 한 명은 옷을 잘 차려 입은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정서적인 질병과 정신 의학적인 치료와 정신 병원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혼잣말로 속사포같이 쏘아대며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는 내내 이런 조언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여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해라.” 그러나 그 여자는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부인, 부인의 죄는 사함 받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그 부인은 자신의 독백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마침내 그는 그 여자의 양 어깨를 잡고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를 보세요,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부인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여자는 숨이 찬 듯이 말을 끊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 여자가 물었다. “부인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순간 그 여자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그 죄들이요?” 내 친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짧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죄들이요.” 댐이 무너지고 그녀의 두 누에서 홍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 부인은 자기 남편을 바라보며 눈물에 뒤범벅이 된 채로 이렇게 말했다. “제 죄가 사함 받았대요.” 그것이 바로 필요한 돌파구였고 실제적인 치유의 관건이었다. 이 착한 여자는 무론 지금까지 계속적인 상담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때 만난 이후 12년이 지나는 동안 정신 병원에 돌아갈 필요가 없었으며 비교적 정상적인 방법으로 맡은 일을 수행해 오고 있다. 우리는 들어야 한다.
둘째, 구해야 한다. 이 단계는 믿음의 단계이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면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만약에,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말들로 우리의 요청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마틴 루터가 그의 병든 친구 멜랑히톤(Melanchthon)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 담대하게 기도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는 매우 힘차게 간구했다.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약속을 성경에서 인용하며 그 기도들을 응답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이후로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믿어야만 한다면 내 기도를 꼭 들어 주셔야 한다고 기도했다.”
한 번은 프랭키라는 남자 아이를 심방한 적이 있었다. 그는 눈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심방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친해졌는데 그의 시력은 계속해서 나빠졌다. 의사들이 최악의 상황을 우려한다고 그 부모가 말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발견했다. 프랭키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단지 누군가가 병실에 들어오자 그 그림자로 인해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프랭키에게 해줄 조언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순간 잠깐이기는 하지만, 아아 보지 못하는 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좋지 못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 믿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는 혼자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지금은 그의 장애를 받아들이라고 말해 줄 때가 아니지, 계속해서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워야 해.” 나는 프랭키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둘 다 네 눈이 회복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하지만 어쨌든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구해야만 할 것 같다. 내가 내 두 눈에 안수해서 예수님의 치료의 빛이 네 눈을 비추도록 하면 어떻겠니? 물론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보장은 못하지만 분명히 나빠지지는 않을 거야.” 프랭키는 재빨리 동의 했다. 우리는 함께 지금까지 감히 구해보지 못했던 것을 간구했다.
그 다음주, 내가 프랭키를 방문했을 때 햇빛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오고 있었고 프랭키는 공과 글러브를 손에 든 채 퇴원 수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내게, 놀랍게도 악화되어 가던 프랭키의 눈이 어떤 일인지 역전되어서 이제는 시력이 거의 정상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의사들이 그에게 어떤 종류의 의학적인 치료를 실시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 마음이 흐뭇했고, 어느 어두운 오후에 프랭키와 내가 함께 그의 시력을 위해서 간구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처럼 우리는 구해야 한다.
셋째, 믿어야 한다. 이것은 확신의 단계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다시 말하면 전인격적으로 믿는다. 때때로 우리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고와주소서”(막9:24).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건, 약하다고 생각하건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확신이 어떤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기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에 기초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특히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예수님 속에서 가시화된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기를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의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어떤 대학에서 새로 강의를 맡았다. 학기가 시작된 지 두 주 되었을 때 내가 가르치고 있던 영성훈련 강좌를 위해서 조금 일찍 강의실로 갔다. 한 학생이 거기에 와 있었는데 이름은 마리아였다. 우리는 곧 친해졌다. 그날 느지막이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캠퍼스의 한구석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모퉁이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하여 가까이 가 보니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멈추어 서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이 내게 한 한생이 소형 트럭을 타고 있었는데 모퉁이를 돌다가 떨어졌다고 말해 주었다. 그 여학생의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쳤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학생을 구급차에 실을 때 나는 그 학생이 아침에 교실에서 만났던 여학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날 아침 우리의 만남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직감했다.
나는 재빨리 구급차에 올라타면서 의료진에게 내가 그 학생의 담당 목사임을 알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 여학생을 위해서 즉시 기도할 수 있었다. 나는 의료진이 마리아를 살펴보는 동안 마리아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고 한쪽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리아의 친구들이 병원 응급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학생들에게 치유의 기도에 관한 긴급 강좌를 실시했다. “뇌에서 피가 흐르고 있고 부상이 충격으로 부어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뇌 속의 모세혈관 파열이 진정되고 부어있는 뇌가 가라앉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 학생들은 기도의 과제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부는 병원에서 밤을 샜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의 기도가 마리아의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담당 의사가 내게, 자동차로 여덟 시간이나 달려야 갈 수 있는 택사스에 사시는 마리아 부모를 불러 다라고 요청했다. “가능한 한 빨리 오시라고 하십시오.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리아의 부모는 자정이 다 되어서 도착했다. 나는 그분들에게 그 학생의 상태에 대해서 처음부터 상세하게 설명했다. “예, 마리아는 아직 의식 불명입니다. 하지만 수술은 하지 않았습니다. 출혈과 부기가 일정 시간 내에 멈추기만 한다면 수술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을 마친 후 나는 그 동안 우리가 마리아를 위해 어떻게 기도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그분들이 기도로 도울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대개의 부모들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경우 기도를 하지 못하고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마리아의 부모는 이 경우에 있어서 예외였다. 그들은 굉장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다.
이것은 전날 초저녁에 마리아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했던 교수 몇 명과 모여 기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다. “마리아를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것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나는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이 기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치유의 빛이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주님의 뜻이라면 마리아가 낫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기도는 다 그런 식이었다. 나는 내 동료들이 물론 선한 뜻을 품었지만 마리아가 나을 것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기도는 오히려 믿음을 방해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그 방을 벗어나 학생들이 있는 병원으로 돌아왔다. 학생들에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쳐 있었다.
그 후 나는 눈을 좀 붙이려고 집으로 갔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6시경에 일어난 일을 학생들에게 들었다. 마리아의 부모는 그날 아침 병원 근처의 한 모텔에 있으면서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마음속에 마리아가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나는 걸 그리면서 기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 어떤 학생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마리아를 지켜보고 있을 때, 마리아가 눈을 뜨며 그 친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마리아는 완전히 회복되어서 퇴원하였다. 친구들과 부모의 충만한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처럼 믿어야 한다.
넷째, 감사해야 한다. 이것은 감사의 단계이다. 우리가 구한 것이 이루어지면 조그마한 예절만 있어도 감사를 표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이루어진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하며 기도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기도한 적이 없다.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보고 말한 것이 결국 그렇게 될 것을 감사합니다. 아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믿음의 눈으로 나는 그저 어느정도 앞날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몇 주든, 몇 달이든, 몇 년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또 내가 믿음의 눈으로 하는 일이란 가능성 있는 일과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감사드리는 것뿐이다.
감사 그 자체에는 종종 능력이 있다. 영국의 어느 정신 의학자는 기계의 유전적 형질의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부정적인 성격이 다음 세대에 유전되지 않게 하려면 치유기도가 필요함을 가르쳤다. 그 다음주, 그 학급 학생 중에 연세가 일흔이 넘으신 할머니는 자기 계보를 훑어보고는 기도할 만한 아무런 문제점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할머니의 가족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겼던 많은 목사들, 그리고 친척들로 구성된 경건한 가계였다. 그 할머니는 아무런 주요한 유전적인 질병이나 비극적인 죽음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 할머니는 족보를 읽으면서 ㅁ음속에 큰 감사의 물결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래서 훌륭한 유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했다.
이 선한 할머니는 자기 자신의 상황이 바로 치유의 기도가 필요한 상황임을 깨닫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 할머니는 척수성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래서 버팀목을 사용해서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일평생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 자기가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너무도 큰 은혜를 입은 조상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잠이 깼을 때 그 할머니는 자기 다리가 완전히 나은 것을 발견했다. 감사하는 마음의 결과 였다.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건강한 회의와 건전한 믿음
다른 문제들도 다룰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치유 기도에 대해서 당신은 아직도 회의적일지 모른다. 그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 다소 건강한 회의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이 그런 식이었다. 그는 치유의 기도의 타당성을 의심했다. 그의 초기 저작들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치유의 은사의 계속성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언급해 놓았다.
그러나 424년에 한 오누이가 어거스틴이 살고 있던 히포라는 마을에 와서 경련성 발작 증세를 고쳐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어거스틴의 교회에 와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부활절 일주일 전까지 아무 일도 이러나지 않았다. 그 젊은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기도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찬송가를 준비하며 아직도 대기실에 있었다. 그때 그 청년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나 잠시 후 그가 일어나 앉아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정상을 되찾았고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그 젊은이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어거스틴의 회의는 이 청년의 증언 앞에서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부활절 사흘 뒤에 어거스틴은 그 오누이를 성가대 계단 위에 서라고 말했다. 그곳은 모든 회중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오누이 중 한 사람은 평온하고 정상적이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여전히 발작 증세로 떨고 있었다. 그 동안 어거스틴은 그 청년의 간증문을 읽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치유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회중드로부터 놀라움의 외침이 터져 나와 설교를 중단해야 했다. 오냐하면 그 젊은 여자도 바닥에 쓰러졌다가 즉시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여동생은 한 번 더 회중 앞에 섰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말로 이렇게 말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말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너무나 크게 울려 퍼짐이여, 내 귀가 그 큰 소리를 견딜 수 없도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어거스틴이 그의 대작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집필할 때였다. 그래서 그는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을 자신의 교구에서 일어난 자유의 기적들을 다루는 데 할애하였다. 그는 그가 어떻게 기적들을 기록하고 인증하는 과정을 밟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이 놀라운 일들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얼마나 그릇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여기 히포에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2년 전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미 우리에게 있는 입증된 기적은 거의 70가지나 된다.
어거스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겸손한 증거를 목격할 때, 건전한 믿음을 사기 위하여 건강한 회의(懷疑)를 팔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기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에게는 치유의 기도를 반대하는 수많은 논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의 기도를 찬성하는 유일한 논거이십니다. 결국 주님만이 승리하십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의 치유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해지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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