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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 감상 |
눈 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옹호자의 노래
김현승
말할 수 있는 모든 언어가
노래할 수 있는 모든 선택된 사조(詞藻)가
소통할 수 있는 모든 침묵들이
고갈하는 날
나는 노래하련다 !
모든 무형한 것들이 허물어지는 날
모든 우리의 꽃향들이 해체되는 날
모든 신앙들이 입증(立證)의 칼날 위에 서는 날
나는 옹호자들을 노래하련다 !
상식으로충만한 거리여
수량의 허다한 신뢰자들이여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는 길을
모든 사람들이 결론에 이르는 길을
바꾸어 나는 새삼 떠나련다 !
아로새긴 상아와 유한의 층계로는 미치지 못할
구름의 사다리로 구름의 사다리로
보다 광활한 영역을 가련다 !
싸늘한 증류수의 시대여
나는 나의 우울한 혈액 순환을 노래하련다 !
날마다 날마다 아름다운 항거의
고요한 흐름 속에서
모든 약동하는 것들의 선율처럼
모든 전진하는 것들의 수레바퀴처럼
나와 같이 노래할 옹호자들이여
나의 동지여
오오, 나의 진실한 친구여 !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 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
절대 고독(絶對孤獨)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 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詩)는.
❁ 김현승(金顯承) 약력
호 남풍(南風)·다형(茶兄).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생. 목사인 부친의 전근을 따라 평양(平壤)에 이주, 그 곳에서 숭실(崇實)중학과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교지에 투고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가 양주동(梁柱東)의 인정을 받아 《동아일보》에 발표(1934)됨으로써 시단에 데뷔하여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침》 《황혼》 《새벽교실》 등을 계속 발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나타내어 주목을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8·15광복 후 1949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 《내일》 《동면(冬眠)》 등 지적이고 건강한 시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51년부터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흡(朴洽)·장용건(張龍健) 등과 함께 《신문학(新文學)》(계간)을 6집까지 발행,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7년에 처녀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간행하고, 1963년에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1968년에 제3시집 《견고한 고독》, 1970년에 제4시집 《절대고독》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의 예찬을 통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띠었으나, 8·15광복 후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보여 주었고, 말기에는 사랑과 고독 등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1973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김현승 시선집》을 출간했다.
저서로 《한국 현대시 해설》(1972), 《세계문예사조사》(197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