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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最大)의 등장인물 겸 최초 수출소설 <삼한습유>
은전 300을 치르고서 사갔다
<삼한습유>는 중국으로 수출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금액은 당당 은 300냥이다. 은 300냥에 대한 정확한 가치를 이 시절에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비슷한 시기 물가로 어림해 보자. 유만주의 『흠영』이란 일기를 보면 1778년 한 해 동안 집안 식구 8명이서 먹은 쌀값이 총 56냥이었다고 한다. 또 연암 박지원의 1780년 작품인 <허생전>을 보면 허생이 들에게 100냥을 주며 여자 한 명과 소 1필을 사오라고 한다. 이를 은 300냥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책값으로는 대단한 액수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김운순 저, 김석진 역, 도헌유고(道軒遺稿)(안동김씨도헌공가집, 1996.)에 보이는데 김운순(金雲淳,1798~1870)은 김소행의 삼세손이다. 그 문장을 찾아 옮겨보면 이렇다.
<향랑전> 외서 한 권을 지었다. 그런데 이 책은 곧 붓을 잡아 한나절동안 희롱하여 부른 것이라. 그러나 세상의 벼슬을 하는 문사들도 대문장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국으로 사행 가서는 이 책을 중국인들에게 보이니 당시 문단에서 명성을 날리던 자들이 보고는 깜짝 놀라 탄식을 하며 ‘천하문장’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는 도합 은전 300을 치르고서 사가지고 갔다.
은전 300이면 얼마나 될까. 당대에 대단한 금액이다.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잠시만 더듬어보자.
19세기 초, 조선후기 사회의 소설에 대한 견해는 공적으로 정조 때의 소설 배척론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순조실록 7년 10월 29일(정유)과 순조실록 8년 3월 26일(임술)의 기록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소설 수입을 규제하는 데서 공적으로 소설 배척론이 계속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이와는 다른 현상이 나타나 각종 소설이 간행되는 등 활발한 소설의 장과 함께 소설비평도 그 논의가 확장되는 양면성을 보인다. 홍희복(洪羲福,1794 ~1859)은 「졔일긔언서문」에서 장르적 이해를 바탕으로 소설의 개념 정립을 시도하였으며, 李圭景(1788 ~?)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소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양오(李養吾,1737 ~1811)․이우준(李遇駿,1801 ~1867), 그리고 목태림․수산선생 등 소설가 겸 소설비평가들이 나타나 19세기 우리 소설사를 영토를 확장시켰다.
특히 이 시기 한문장편소설이 우리의 고소설사의 지형도에서 한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삼한습유이다. 삼한습유는 19세기 소설들 중 가장 선행하는 작품이다. 삼한습유(1814)는 죽계(竹溪) 김소행(金紹行:1765 ~1859)의 작품으로 표제와 내제 제목이 둘이다. 즉 겉 표제는 삼한습유이나 안 내제는 「의열녀전義烈女傳」 1․2․3 권으로 되어 있으며, 외형적으로는 열녀를 입전(立傳)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열녀 이야기와는 영판 다르다. 이 작품은 배경으로 중국과 신라․고구려․백제가 나오고, 중국의 항우․제갈공명 등과 신라의 김유신, 백제의 계백 등 역사적 인물들과 가공 인물들이 무려 500여 명이 넘게 등장하며, 천상계의 마왕魔王과 지상의 항왕項王이 싸우는가 하면, 유불선 사상의 논리가 서술되고 있다. 서사적인 전개도 만만치 않아 향랑香娘과 효렴孝廉이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 폭넓은 역사적 조망과 고전문헌을 오르내리는 작자의 박식함에서 오는 소재의 확장과 문체의 현란함과 서사적 편폭의 호한함이 돋보이는 장쾌한 스케일의 열녀전을 빙자한 독특한 한문장편소설이다.
그래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소설을 현대학문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김태준, 증보조선소설사(학예사, 1935, 361 ~362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 있어 孔雀東南飛 전설과 恰似한 姑婦衝突에서 생긴 悲劇은 조선 善山 못에 投死한 香娘閣氏의 전설이요, 이것을 신라 시절의 記事로 하여 화랑들의 南征北伐과 男女情事를 交織한 것이 三韓拾遺이니 漢文小說長篇으로는 아마 최고인 六美堂記와 雁行할 장편이다.”
<삼한습유>는 ‘일부 <서유기>의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전법 정도만을 모방한 것에 그친 독창성이 강한 우리나라 유일의 신마소설(神魔小說)’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학자도 있다. 물론 당대에도 이 소설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삼한습유를 지은 죽계 김소행을 조야를 막론하고 큰 문장이라고 일컬었고, 중국에서조차 문장의 대가들이 은전 300냥을 주고 사 간 것이 아닌가.
작가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 소설의 작가 김소행은 안동 김씨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 ~1652)의 6대 손이다. 그러나 그의 증조부는 적성현감을 지낸 김수징으로 서출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분적 한계성과 아울러 농암 김창협金昌協․삼연 김창흡金昌翕․김매순金邁淳 등의 정통적인 도문일관지지道文一貫之志를 중시하는 가문의 사람으로서 사유체계를 짐작케 한다. 김소행과 동렬인 김원행(金元行,1702 ~1772)의 제자는 홍대용(洪大容,1731 ~1783)이고, 함께 수학한 이정리(李正履,1783 ~1843)는 지계 이재성李在誠의 아들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 ~1805)의 처조카이며, 또 김매순의 고조부가 김창흡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론老論 계열이기에 김소행도 어느 정도는 낙론洛論의 소양을 지녔으리라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김소행 집안의 학문적 역량은 그가 삼한습유라는 걸작을 지을 수 있었고 또 내로라하는 당대 대표적 고문가들의 서․발이 여러 편이나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이어진다. 서․발은 “대상 작품이나 전적의 큰 틀에 관계되는 내용을 제시하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작자에 대한 찬양을 부가하는 것이 집필의 원칙이자 주된 목적”이다. 이 서․발은 우리 고소설비평사의 예사롭지 않은 변화를 짐작케 하니, 그것은 천것이 틀림없는 소설에 대한 양반 학자들의 관심표명이란 점이다.
서․발에 대해 잠시 짚자. <삼한습유> 서․발(書後․題後)의 비평자로는 「서의열녀전후書義烈女傳後」를 지은 연천 홍석주(洪奭周:1774 ~1842)와 「의열녀전서義烈女傳序」를 지은 항해 홍길주(洪吉周:1786 ~1841), 「제향랑전후題香娘傳後」를 지은 해거 홍현주(洪顯周:1793 ~1865)와 「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를 지은 대산 김매순(金邁淳:1776 ~1840), 그리고 「의열녀전후발義烈女傳後跋」의 무태거사無怠居士와 「죽계선생향랑전서竹溪先生香娘傳序」의 홍관식洪觀植 등으로 6명이나 된다.
이들 중 무태거사를 제외하면 작가로부터 비평가들까지 모두 쟁쟁한 문사들이다.
면면을 살펴보면 이렇다.
연천은 영의정을 지낸 홍락성의 손자로 1834년 좌의정이 되는 등 문학과 문장 면에서 능통한 사대부였다. 길주, 현주 또한 연천의 동생으로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며, 현주는 부마도위였고 홍관식은 석주의 조카였다. 또 김매순은 벼슬이 참판에 오르고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안동 김씨 김상헌의 후손으로 김소행의 조부와 같은 항렬이었다. 특히 연천과 대산은 ‘연대문학淵臺文學’이라 일컬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고문가들이었으며, 창강 김택영의 ‘여한십가麗韓九家’의 인물들이기도 하니 넉넉히 저들의 학문적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무태거사는 김소행에게 이 소설을 짓게 청한 사람이다. 10여 년 동안의 글벗이며, 자신도 향랑의열을 지은 점 등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 무태거사 또한 고문가의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삼한습유의 서․발 비평을 통하여 당시 문풍을 주도하던 지식인 그룹의 소설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 읽을 수 있으며, 소설에 대한 계층적 인식의 층위가 무너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한습유의 서․발은 소설에 대한 평이기에 청탁자와 집필자의 친분만이 고려될 수는 없었다. 서․발 비평은 문헌의 특성상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과 평자의 견해가 기본적으로 동일해야만 집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평자들 대부분은 선진先秦․양한兩漢의 글을 이상으로 삼아 문도합일文道合一의 세계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려는 고문가들이다.
따라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당대 지식인들로부터의 비난까지도 감수해야만 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점을 삼한습유 서․발의 평자들은 시분 이해하였다. 문장의 곳곳에서 체계적이며 이론화된 비평으로 이를 극복하려 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해의 흔적이리라.
<삼한습유>의 줄거리는 베스트셀러 한문소설 10선에 있다.
최대(最大)의 대하장편소설 <명주보월빙>
235책이나 되는 국문필사본
‘대하소설(大河小說)’이란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대부분의 독자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 한국문학에 금자탑을 세워 올린 염상섭의 <삼대>, 박태원의 <천변풍경>, 채만식의 <태평천하>, 김남천의 <대하>등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대하소설인 <명주보월빙>과는 견줄 수도 없다. <명주보월빙>은 무려 100책이나 되는 국문필사본으로 세계 소설사를 훑어도 이와 같은 대하소설은 드물다. 더욱이 <명주보월빙>이 <윤하정삼문취록(尹河鄭三門聚錄)> 105책, <엄씨효문청행록(嚴氏孝門淸行錄)> 30책과 함께 3부 연작을 이루고 있다. 합치면 무려 그 전체 분량이 235책이나 되니 고소설 중 최대이다. 혹자가 ‘왜 180책인 <완월회맹연>이라는 국문장편소설을 놔두고 <명주보월빙>을 우리나라 최고의 대하장편소설로 하였냐?’하면 저러한 이유가 있어서다. <명주보월빙>이 연작인 점을 감안하면 <완월회맹연>보다 55책이나 더 많기 때문이다. 홍희복(洪羲福, 1794~1859)의 「졔일긔언서문」에 <명쥬보월빙>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1835년 이전에 이미 이 소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하소설로는 이 외에도 <유씨삼대록>․<명행정의록>․<미소명행>․<조씨삼대록>․<쌍천기봉>․<화산선계록>․<하진양문록> 등 수십 종에 이른다. 이러한 장편소설들은 하나같이 충․효․열 등 유교이념 등을 구현하려는 듯한 윤리교과서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 소설들의 작가를 상층벌열층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 학자들은 이 소설들을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중세로 역행시키는 상층의식의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이 <명주보월빙>은 신이 내려준 명주(明珠)와 보월패(寶月佩)를 빙물(聘物)로 삼아 윤(尹)·하(河)·정(鄭) 세 가문의 3대에 걸친 인물들이 혼인을 통하여 새로운 혈족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가계소설이다. 비록 소재나 주제가 새롭지 못하고 구성도 평면적이지만 엄청난 분량에다 수백 명을 등장시킨 것 자체가 대단한 구상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고소설의 모든 주제와 유형을 종합적으로 치밀하게 연결해 놓은 수법은 중요한 성과로 보아야한다.
<명주보월빙>의 줄거리를 발맘발맘 따라가 보자.
시절은 송 나라 진종연간이다. 이부상서 윤현과 태중태부 윤수는 형제간으로서, 형은 전부인 황씨의 소생이요, 아우는 후부인 위씨의 소생이다. 황씨부인은 죽고 위씨부인은 현존하고 있다. 상서부인 조씨는 현숙하나 태부부인 유씨는 어질지 못하여 위씨부인과 함께 조부인을 몹시 미워한다.
윤상서가 친구인 어사태부 하진과 대사도 정연과 함께 강상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용이 나타나 윤공 앞에는 명주(明珠) 네 개를 토해 놓고, 하․정 양공 앞에는 보월패(寶月佩) 한 줄씩을 토해 놓았다. 그리고는 3공을 향하여 세 번 머리를 숙이고 사라진다.
3공은 그 명주와 보월패를 가지고 돌아와, 아들딸을 낳거든 예물로 삼자고 한다. 이윽고 3공의 부인들이 아이를 낳자, 윤상서의 딸 명아는 정공의 아들 천흥과 약혼하고, 윤태부의 차녀 연아는 하공의 4남 원광과 약혼한다.
이 때, 금국(金國)이 배반할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황제는 윤상서를 정사로, 정공을 부사로 삼아 금국으로 보낸다. 윤상서가 떠나자 위부인과 유부인은 조부인과 명아의 밥에 독약을 넣어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윤상서가 주고 간 해독환을 먹고 살아난다.
윤공과 정공이 금국으로 들어가자 금국왕은 정공을 가두고, 윤공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윤공은 끝내 굴복하지 않고 자결한다. 금국왕은 윤공의 충절에 감동하여 정공을 풀어주며 윤공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반하도록 한 후 항복한다. 이 때 조부인은 쌍둥이 형제를 낳는다.
이에 윤태부는 형의 아들인 희천을 양자로 삼았는데, 형 광천은 영웅의 기상을 가지고 태어나고, 아우 희천은 군자의 기풍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들 형제가 자라자 정공은 광천을, 하공은 희천을 사위로 삼는다. 하공은 4형제를 두었으나, 간신의 참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3형제는 참형을 당하고 4남 원광만이 겨우 죽음을 면한다.
윤상서의 딸 명아와 정공의 아들 천흥의 혼인날이 다가오자, 위부인과 유부인은 명아를 납치하도록 시킨다. 명아는 이를 눈치 채고 피신하였다가, 장원급제하고 돌아오는 정천흥을 만나 집으로 돌아와 혼례를 올린다. 정천흥이 동평위사 양절광의 딸을 재취하니, 윤부인은 양부인을 맞아 자매와 같이 의좋게 지낸다.
한편, 유부인은 차녀 연아를 명문대가에 시집보내기 위해 하원광과의 약혼을 파기한다. 이에 연아는 절개를 굽히지 않으려고, 광천과 희천 형제의 도움을 받아 강정으로 피신하여 몸을 숨긴다. 그 뒤, 아버지인 윤수가 상경 직전에 귀가한다. 추밀사가 된 윤수는 촉군으로 가서 연아를 하원광과 혼인시킨다.
이 때 운남왕이 역모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정천흥이 자진하여 출전해서는 운남왕의 항복을 받는다. 그는 회군하던 중 친구인 경학사 집에 들렀다가, 그의 누이 숙혜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셋째부인으로 맞이한다. 촉군에서 돌아온 윤추밀은 하소저를 맞아 광천과 성례시킨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윤광천은 정소저․하소저를 취한 후 다시 진소저를 취했다. 또 황제가 그를 부마로 간택하니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된다. 정천흥도 윤․양․이의 세 부인을 취하고, 또 문양공주를 취해 부마가 된다.
한편 위부인과 유부인은 또다시 음모를 꾸며 조부인을 살해하고자 하나, 조부인은 정소저의 지략으로 위험을 피한다. 정씨집안에서도 문양공주가 윤․양의 두 부인과 세 부인의 아들들을 수장시키는 등 극악무도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도사 혜원 등에 의해 구출된다.
이 때, 하원광이 장원급제하고 대원수가 되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역모한 초왕을 평정하니 그의 명망이 천하에 가득했다. 윤씨 집안에서는 유부인이 하부인을 구타 끝에 궤에 넣어 강물에 넣었는데, 정공이 회군하는 도중에 강물에 빠진 하부인을 구출한다. 윤광천은 대원수가 되어 장사왕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간신의 모략으로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윤원수가 임정각과 정부인의 도움을 얻어 장사왕을 물리치고 개선하니, 황제는 윤원수를 남창후로 봉한다. 그 뒤 윤참정이 3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위부인을 극진히 섬기니, 위부인은 비로소 이제까지의 잘못을 뉘우친다. 이로부터 남창후의 집안이 잘 다스려지니 집안에 평화가 온다.
이 때, 동창왕이 반역을 일으키자 정천흥이 출전하여 반군을 진압하고 회군하니, 황제는 정천흥을 제국왕으로 봉한다. 유부인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쳤으며, 공주도 윤부인의 덕망에 감화되어 선인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윤․하․정 세 가문의 삼대에 걸친 일부다처생활에서 전개되는 오랜 가문의 액운이 다 끝나고 모두 부귀공명을 누린다.
특징적인 것은 한 사람의 일대기가 아니라 주인공만 해도 20여 명에 이르는 방대한 대하소설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은 신의 섭리에 따라 진행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아름답고 소망스러운 삶을 좇고 있으며, 따라서 도선적 초월 세계관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신성소설(神性小說)이다. 독자들께서도 짐작했겠지만 이것으로 보아 작품의 담당층이 매우 보수적인 상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하늘의 뜻으로 태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한 후에 마침내 천상으로 복귀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삶의 원리를 보여 준다. 여기에 여성 주인공들의 수난적 일대기와 남성 주인공들의 영웅적 일대기, 그리고 그들의 갈등과 애증, 시련이 거듭되면서 전쟁, 정치, 처첩제도 등이 겹쳐지며 파란만장한 삶의 애환이 펼쳐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천륜을 따르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는 절대적인 논리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명주보월빙>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자면 남녀 간의 혼사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므로 지상적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숙명이라든가, 여성들에게 있어서 혼사는 삶의 궁극적 의미이기에 남성에게 모든 것이 매어있다는 점 등을 들을 수 있다. 하기야, 조선 저 시절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를 들자면,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을 처절하게 보여 준다는 점이다. 작중 등장인물의 일생은 이미 계획되어있는 전개도에 따라 살뿐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해보지만 결국 패배하게 마련이고 왕후장상 같은 상층인물은 이미 하늘이 점지하였다. 주인공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하늘로 복귀한다. 물론 이것은 <명주보월빙>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고소설 전반에 걸쳐 이러한 서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봉건국가, 사농공상이라는 철저한 신분제와 삼강오륜을 국가의 통제수단으로 사용하던 시대를 작가는 피할 수 없었다.
우리가 고소설을 읽을 때 이러한 점을 잘 이해하고 따라잡아야 한다. 자칫 자신의 삶이나 신념이 흐슬부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첨언 한 마디하고 이만 줄인다. 이 소설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었고 알려지지 않은 소설이다. 일반인들은 당시 이 소설의 이름조차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낙선재 소장 <명주보월빙>
낙선재는 창덕궁동쪽에 있는 왕궁부속건물이다. 1846년 조선헌종 때 지었다. 이 낙선재에는 수많은 한글소설류가 수집되어 있었다. 이 소설들은 모두 99종 2,215책으로, 궁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자료의 <명주보월빙>의 글씨체 또한 전아한 궁중서체로 필사되었음을 볼 수 있다. 낙선재 소설은 대체로 장편소설이 많았다. 이유는 단편보다 장편이 문장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보다는 읽는데서 오는 청각의 즐거움과 전아한 궁궐체가 주는 시각이 한껏 고려된 듯하다.
최대(最大)의 여성귀신 등장 소설 <강도몽유록>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소설 속에 역사는 살아 있다.
‘여자 귀신’하면 아마 독자들은 단박에 하얀 소복을 하고 머리를 산발하여 신관 사또를 공포에 떨게 하는 <장화홍련전>을 떠 올리겠지만 <강도몽유록>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은 17세기 초반 경에 지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몽유록계 한문소설이다. <강도몽유록>에는 무려 15명의 여성 귀신이 등장한다. 단일 소설로는 가장 많은 여성 귀신이다. <강도몽유록>의 작가와 시기에 대하여 조심스레 추론을 옮긴다면, 작가는 여러모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의 함락을 잘 아는 식자층으로 도교적인 색채가 강한 사람이고, 저작 시기는 1637년에서 1644년 사이이다. 몽유록은 15-17세기 초반까지 집중적으로 지어졌는데, <강도몽유록>은 특히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강화도(江華島)’라는 공간적 배경을 허구의 몽유형식을 빌려 역사의 진실을 증언한 기록이다. <임경업전>이나 <박씨전>과 동일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였으나 이 소설은 두 작품과는 완연 다르다. <임경업전>이나 <박씨전> 소설을 통해 병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것이라면, <강도몽유록>은 오히려 무능하고 저열한 행태를 일삼는 정치 지배층에 대한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몽유록(-夢遊錄)’부터 짚고 넘어가자. ‘-몽유록’은 현실의 세계가 아닌 내용으로 엮어지는 문학작품에 대한 총칭으로 ‘몽유록’은 우리의 한문소설사에서 ‘꿈’이라는 특이한 소재가 서사구조의 중심 틀을 이룬다. 대부분의 몽유록은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이계(異界)에 들어가 여러 체험을 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는 전형적인 구성이다.
<강도몽유록>은 이 작품은 강화도를 피로 물들였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그 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도몽유록>에는 17세기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시간과 강화도라는 지리적 공간이 그대로 놓여 있으며 질타 받는 사람들은 모두 강화함락과 관계된 인물들이다. 그만큼 당대를 읽어내는 알레고리가 이 작품에 내재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작중 인물들의 병자호란 중 강화도에서 행동을 추적하는 작품 속의 정치적 알레고리와 소설적 형상화 그리고 작가를 추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상의 비극은 누대에 걸친 문치(文治)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 대략을 살피고 넘어가겠다.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은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 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임금과 신하의 사이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투마 3,000필, 군사 3만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마부대 등을 보내어 조선이 신하가 되어 청나라를 섬기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는 8도에 영을 내려 결전을 불사할 의사를 굳혔다. 격분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1636년 병자년 12월 2일, 수도 심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자. 적약용의 『아언각비』(일지사, 1976)를 보니, 용골대는 영고이대(英固爾垈)로 음은 ‘잉구알때’요, 마부대는 마복탑(馬福塔)으로 ‘마우타’가 맞다고 적어 놓았다. 정약용은 누군가 번역하면서 잘못 옮긴 것이라 하였다. 세상에 저러한 일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이 책 또한 저러한 어리석음이 있을까 내심 두렵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간다. 당시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으나 적은 14일에 이미 개성을 통과한 뒤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원손․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이미 인조는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인조 5년) 때 조신(朝臣)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한 경험이 있는 터였다. 강화는 고려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40여년이나 버틴 곳에서 알 수 있듯, 천연의 요새이기에 강화도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버리자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병사를 모집하도록 격문을 발하는 한편, 명나라에 급히 사절을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하지만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올리고야 만다.
이때부터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었고 청나라에게 복속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잠시 ‘화냥년’을 거쳐 가자. 이 병자호란으로 여인들의 수난이 어떠했는지는 ‘화냥년’으로도 알 수 있다. 나만갑(羅萬甲, 1592 ~ 1642)의 기록에 따르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은 60여만 명이라고 하니 그 숫자부터 어마어마하다. 1919년 슬픈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할 때, ‘2000만 민중이 성충을 합하여’ 운운이라 하였다. 저 시절 인구는 1000만 명 남짓, 그 중 60여만 명이라면 조선 총인구의 5-6%정도이니 어림잡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더욱이 저 60여만 명의 남녀들 중 꽃다운 조선의 처녀들과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태반이었다는 사실이다.
최명길은 이 여인들 중, 3만 여명을 조선으로 데려온다. 이 여인들이 바로 ‘고향으로 돌아 온 여인들’이란 뜻의 ‘환향녀(還鄕女)’다. 하지만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의 남정네들은 저 여인들을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환향녀’들은 ‘화냥년’이 되었고 도처에서 화냥년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었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상징적으로 ‘환향녀’들을 강에서 몸을 씻게 하는 의식을 치룬 뒤, 각 가정에서 받아들이라는 국법을 시행했지만 저 여인들의 비분한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강도몽유록>은 바로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자들에 대한 저주의 글인 셈이다. 문제는 이 글을 읽어야할 이들이 정작 이 <강도몽류록>을 읽었을까하는 점이다. 물론 읽었을 턱이 없다.
이러한 치욕을 지켜본 극히 일부 지식인들이 이 전란을 문학적으로 승화하려 지은 것이 <박씨전(朴氏傳)>․<임경업전(林慶業傳)>․<산성일기(山城日記)>․<삼학사전(三學士傳)>․<강도일기(江都日記)>․<병자호남창의록(丙子湖南倡義錄)> 등과 바로 이 글에서 살피고자하는 <강도몽유록> 따위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우선 대략의 내용부터 살피자.
적멸사(寂滅寺)의 청허선사(淸虛禪師)가 강도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연미정(燕尾亭) 기슭에 움막을 짓고 지낸다. 어느 날 꿈에서, 병자호란 당시 강도에서 죽은 열다섯 여인의 혼령이 한 곳에 모여 울분을 토로하는 광경을 엿보게 된다.
첫 번째로 말하는 여인은 당시 영의정을 지낸 김류(金瑬)의 부인으로서, 남편이 능력 없는 아들 김경징(金慶徵)에게 강도 수비의 책임을 맡겼고, 아들은 술과 계집에 파묻혀 강도가 쉽게 함락되게 하였다며, 남편과 아들을 함께 비난한다.
두 번째 여인은 김경징의 아내로서, 자기 남편이 강도가 함락되게 만든 책임으로 죽임을 당한 것은 마땅하나, 같은 죄를 진 이민구(李敏求)․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은 전쟁 후 오히려 벼슬이 오른 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라고 비난한다.
세 번째 여인은 왕후의 조카딸로서, 남편은 전쟁 중에 눈이 멀고 그 부모도 돌아가셨다며 애통해 한다.
네 번째 여인은 왕비의 언니로서, 적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자기 아들이 자결을 재촉하여 놓고는 정렬(貞烈)로 표창케 한 사실을 어이없어한다.
다섯 번째 여인은 강도가 함락된 데에 자신의 남편이 책임이 있음을,
여섯 번째 여인은 강도 유수를 맡았던 시아버지의 책임을,
일곱 번째 여인은 아들의 책임을 각각 말하며 개탄한다.
여덟 번째 여인은 남편이 오랑캐의 종이 되어 상투를 잘랐다며 비난한다.
아홉 번째 여인은 서울로부터 홀로 강도에까지 피난을 왔다가 무참히 죽임 당한 원통함을 토로한다.
열 번째 여인은 50세쯤 되는 여인으로 며느리와 딸과 함께 절사하였다고 한다. 강도의 지휘관이었던 자기 남편의 잘못과, 이름 있는 관리의 아내이면서도 오랑캐에게 몸을 내준 동생의 실절(失節)을 비난한다.(연구자들이 아홉 번째 여인과 열 번째 여인을 한 이야기로 보았다. 이것은 원문에 근거하여 그러한 것인데 앞 뒤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혹 필사자의 실수가 아닌가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둘로 보는 것이 더욱 이해에 합당할 듯하여 나누었다.)
열한 번째 여인은 마니산 바위굴에 숨었다가 오랑캐의 겁박을 피해 절벽에서 투신한 여인으로서, 으깨어진 비참한 몰골로 원한을 토로한다.
열두 번째 여인은 혼인한 지 두 달만에 전쟁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으나,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아내가 오랑캐 땅에 들어갔는지, 길에서 죽은 것인지 의심하고 있다며 탄식한다.
열세 번째 여인은 자신의 시아버지가 강하게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대의(大義)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그 공로로 하늘 궁전에서 선녀로 노닐게 되었음을 자랑한다.
열네 번째 여인은 그 할아버지의 고결한 지조의 공로로 인해 천당에 들어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열다섯 번째 여인은 기생으로서, 뒤늦게 정절을 지키려 하였으나 전쟁을 만나 목숨을 버렸다고 하면서, 전쟁 중에 절의 있는 충신은 하나도 없고, 늠렬(凜烈)한 정절은 오직 여인들만이 보여 주었다고 개탄한다.
여인들의 통곡소리에 청허선사는 꿈에서 깬다.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청허선사를 제외하고 15명이며 모두 여성이란 점이 특이하다. 더구나 이들은 모진 ‘병화로 죽음을 맞은 여성의 문학적 형상화’란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데, 여성들이 공격하는 대상 또한 모두 남성들로, 냉엄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강도몽유록>의 특징인데, 이 문제는 꼭 여성의 순절은 있었으나 남성의 순국(을 찾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굳이 실례를 들자면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익겸(金益兼, 1614-1636)과 김상용(金尙容, 1561 -1637)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지금도 김상용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강화도 성원골의 충렬사에는 강화도에서 순절한 25인의 위패가 있고, 이외에도 이름 모를 수많은 병사들 넋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을 것이다.
잠깐, 방금 읽은 서너 줄 위의 김익겸을 다시 보자. 이 김익겸이 바로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의 아버지이다. 김만중이 유복자가 된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고소설 속에는 이렇게 얽히고설킨 끈들이 있다.
이 <강도몽유록>은 조선, 그 남성 지배 사회에 대한 일침이다. 소설에서 그녀들의 심지는 끓고 중세를 똑바로 치어다보는 눈자위는 살아있다.
<강도몽유록>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신분과 나이를 제외한다면 모두 그만그만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욱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당대인이라면 알음알음 알 수 있었을 실제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