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홍씨 파의 유래2
풍산(豊山) 홍씨(洪氏)의 분파는 3세조 홍유(洪侑)의 세 아들 홍명(洪溟), 홍연(洪演), 홍준(洪浚)의 두 계통에서 나누어진다.
홍연(洪演)의 손자인 남평공(南平公) 홍이(洪伊)의 후손은 19개파로 나뉘어지는데, 거의 11세조, 12세조를 파조(派祖)로 한다. 홍천경(洪千璟)의 후손이 반환공파(盤桓公派), 홍천기(洪千璣)의 후손이 평은공파(平隱公派), 홍시현(洪時顯)의 후손이 경력공파(經歷公派), 홍시정(洪時挺)의 후손이 창애공파(蒼崖公派), 홍민기(洪民紀)의 후손이 봉교공파(奉敎公派), 홍민성(洪民聖)의 후손이 석계공파(石磎公派), 홍민위(洪民緯)의 후손이 취옹공파(醉翁公派), 홍민경(洪民敬)의 후손이 동복공파(同福公派), 홍준남(洪俊男)의 후손이 장전공파(長田公派), 홍호남(洪湖男)의 후손이 가천공파(佳泉公派), 홍심(洪深)의 후손이 고암공파(羔巖公派)이다.
그리고 홍한례(洪漢禮)의 후손이 함열공파(咸悅公派), 홍정립(洪廷立)의 후손이 교관공파(敎官公派), 홍정업(洪廷業)의 후손이 유몽재공파(猶蒙齋公派), 홍정기(洪廷器)의 후손이 상강공파(上崗公派), 홍정달(洪廷達)의 후손이 농은공파(聾隱公派), 홍희도(洪希道)의 후손이 주부공파(主簿公派), 홍희준(洪希俊)의 후손이 동지중추공파(同知中樞公派), 홍계(洪桂)의 후손이 군수공파(郡守公派)이다.
6세조 생원공(生員公) 홍의(洪儀)의 후손은 2개파로 나누어졌는데, 홍응상(洪應祥)의 후손이 동래공파(東來公派), 홍우(洪■)의 후손이 감역공파(監役公派)이다.
같은 6세조 사정공(司正公) 홍숙의 후손은 8개파로 나누어지는데, 문경공(文敬公)(홍이상(洪履祥))系 홍영(洪霙)의 후손이 지계공파(芝溪公派), 홍립의 후손이 감사공파(監司公派), 홍집(洪■)의 후손이 장령공파(장령공파(掌令公派), 홍방의 후손이 추만공파(秋巒公派), 홍보(洪■)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홍탁(洪■)의 후손이 남원공파(南原公派), 습지공(習池公)(홍난상(洪鸞祥))계(系) 홍정(洪霆)의 후손이 진산공파(珍山公派), 홍보(洪■)의 후손이 풍녕군파(豊寧公派)이다.
4세조 홍준(洪浚)의 후손은 4개파로 나누어진다. 6세조 만은공(晩隱公) 홍재(洪載)로 이어졌는데, 홍옥석(洪玉碩)의 후손이 어모장군공파(禦侮將軍公派), 홍오상(洪五常)의 후손이 지평공파(持平公派), 홍연석(洪璉碩)의 후손이 교수공파(敎授公派), 홍■(洪■)의 후손이 서령공파(署令公派)이다.
풍산홍씨(豊山洪氏)는 고려조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을 지낸 홍간(洪侃)과 보문각(寶文閣)ㆍ춘추관대제학(春秋館大提學) 및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한 홍유(洪侑), 밀직사(密直司)를 지낸 홍준(洪浚) 등을 내었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 숙종조 이후 가문이 크게 현달하였고 정조(正祖)의 즉위를 돕고 처음으로 세도정치를 연 홍국영(洪國榮)대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다.
홍이상(洪履祥)은 선조 1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言)ㆍ수찬(修撰)ㆍ병조정랑(兵曹正郞)ㆍ교리(校理)ㆍ직제학(直提學)ㆍ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예조참의(禮曹參議)로서 왕(王)을 평양(平壤)에 호종(扈從),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전임됐다. 1594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에 전임, 영남(嶺南)의 유생(儒生) 문경호(文景虎) 등의 성혼(成渾)배척 상소를 극구 반박하고 성혼(成渾)을 변호하다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좌천되었다. 광해군 원년(元年)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12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효종 때의 학자인 현묵자 홍만종(洪萬宗)은 널리 학문에 통하고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문학평론집이라고 할 수 있는 ‘순오지(旬五志)’에서 정철의 시가를 평했다. 그 외에 ‘역대총목’, ‘소화시평‘ 등이 전한다.
홍보(洪■)는 관직에 있다가 광해군(光海君)의 실정(失政)으로 벼슬을 버리고, 면천(沔川)에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해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하고,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재직하던 중 인조 5년 이인거(李仁居)가 난을 일으키자 그를 원주(原州)에서 체포, 난을 진압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 1등으로 풍녕군(豊寧君)에 봉해졌다. 1632년 주청사(奏請使)로 명(明)나라에, 1638년 진주사(陳奏使)로 청(淸)에 각각 다녀왔다. 그 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홍주원(洪柱元)은 선조으 공주와 결혼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는데, 청(淸)에서 시헌력(時憲曆)을 구입해 귀국, 신식 역법의 시행을 건의했다. 당대으 풍류객으로서 시(詩)를 즐겼다.
홍만조(洪萬朝)는 좌참찬(左參贊)에, 홍만용(洪萬容)은 우참찬(右參贊)에, 홍만종(洪萬鍾)은 도승지(都承旨)에, 홍중하(洪重夏)는 관찰사(觀察使)의 관직에 올라 가세(家勢)를 높였다.
영조ㆍ정조대의 인물로, ‘한중록(恨中錄)’을 지은 혜경궁 홍씨(洪氏)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을 빼놓을 수 없다.
음보(蔭補)로 세마(洗馬) 등을 거쳐 영조 19년 딸이 세자빈(世子嬪)(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妃))으로 뽑힌 뒤 다음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 1745년 광주부윤(廣州府尹)에 특진, 1749년 세자(世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케 되면서부터 누진(累進)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연■도감제조(延■都監提調)를 지내고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으로 ‘임필절목(臨筆節目)’을 수찬(修撰)했다. 1755년 좌참찬(左參贊)에 승진, 1761년 우의정(右議政)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를 지낸 뒤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사도세자가 사약을 받은 후 임시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었다. 그 후 영조(英祖)의 정책에 순응(順應)하여 많은 업적(業績)을 이룩했다. 특히 당쟁(黨爭)의 폐해, 인재(人材)의 발탁 등 시무(時務) 6조(條)를 당면한 정책(政策)을 건의(建議)하여 시행케 하고,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환정(還政)의 문란,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케 하여 국고의 충실과 백성부담의 절감(節減)을 기하는 등 영조(英祖)를 도와 조선후기(朝鮮後期) 문화부흥(文化復興)에 많은 업적(業績)을 남겼다. 영조 48년 두 번째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정조초에 죽으니, 왕이 부원군(府院君)의 예에 의하여 장례 지내고 3년 동안 녹봉을 내리게 하였다.
‘한중록(恨中錄)’을 지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는 10살 때 사도세자빈이 되어 궁중에 들어갔다. 부군(夫君)인 세자의 살해를 아버지 홍봉한(洪鳳漢)과 삼촌 홍인한(洪麟漢)까지 지지하는 당쟁의 소용돌이 앞에서 참담한 세자의 운명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들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 혜경(惠慶)의 궁호를 받고 고종 때에 왕후(王后)로 추존되었다.
그가 지은 ‘한중록(恨中錄)’은 홍씨(洪氏)가 환갑 때 자신의 한 많은 이야기를 사소설체(私小說體)로 적은 것이다. 문장이 섬세하고 아담한 궁중체로 되었는데,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문학의 쌍벽으로 꼽힌다.
홍인한(洪麟漢)은 영조 2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ㆍ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가 되어 유민(流民)을 위무하여 정착케 했다. 그 후 공조(工曹)ㆍ이조(吏曹)ㆍ병조(兵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거치고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홍상한(洪象漢)은 1784년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법에 어긋난 장형(杖刑)의 남용을 엄금케 했으며, 1754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어 조헌(趙憲)의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하였다. 창절(彰節)ㆍ민민(愍民)의 두 서원(書院)을 중수(重修)하고, 상소하여 황보인(黃甫仁) 등을 신원(伸寃)하고 시호를 내리게 했다. 그 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세손사부(世孫師傅)를 겸임, 1769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홍현보(洪鉉輔), 홍중효(洪重孝)는 모두 예조판서를 역임했는데, 특히 홍중효(洪重孝)는 경전(經傳)에 조예가 깊었다. 홍락성(洪樂性)은 영조 20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1793년(정조 17) 영의정이 되었다. 홍씨(洪氏)는 정조대에 들어 최고의 현족으로 된 것이다.
홍국영(洪國榮)은 관찰사 홍창한(洪昌漢)의 손자다.
영조 4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及第), 정자(正字)를 거쳐 설서(說書)가 되었다. 당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정조(正祖))을 해치고자 수차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켰고, 벽파(僻派)의 반대를 물리치고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는 데 많은 힘을 썼다.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하여 정세병(精稅兵)을 별도로 뽑아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하여 신변이 위험한 정조(正祖)의 보호에 힘쓰고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상주(上奏)와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쳐 나가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세도정권이 이룩되었고, 갖은 횡포와 전횡(專橫)을 일삼아 정후겸(鄭厚謙)과 비슷하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으로 불렸다. 뒤에 강릉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33세로 병사하였다.
홍석주(洪奭周)는 정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병조판서(兵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순조(純祖)가 죽자 총호사(摠護使)를 겸임, 이어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외척(外戚)으로서 헌종초(憲宗初)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세도(勢道)를 다투던 조씨(趙氏) 집권의 일익(一翼)을 담당했다.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특히 문장(文章)에 있어서 10대가(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러나 홍씨(洪氏) 가문이 가장 크게 긍지로 삼는 것은 문명(文名)을 떨친 대대의 인물과 그의 저술이다. 여조(麗朝) 때는 한시집(漢詩集)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2세 홍간(洪侃)의 ‘홍애집(洪崖集)’이 수록되었으며, 조선조(朝鮮朝) 인조(仁祖)ㆍ숙종(肅宗) 때의 홍만선(洪萬選)은 실학자(實學者)로서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 학풍을 일으킨 선구적 인물이다.
농예(農藝)ㆍ의학(醫學)ㆍ구황(救荒)에 관한 그의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실학사상(實學史上)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 후학(後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숙종조 도승지를 지낸 홍만종(洪萬宗)은 자신의 평론과 정철(鄭澈)ㆍ송순(宋純)의 시가, 속담 130여종 등을 수록한 ‘순오지(旬五誌)’와 ‘명엽지해(蓂葉誌諧)’ㆍ‘역대총목(歷代總目)’ㆍ‘해동이적(海東異蹟)’ㆍ‘소화시평(小華詩評)’ㆍ‘시화총림(詩話叢林)’을 남겼다.
경종 때의 문호(文豪) 홍양호(洪良浩)는 ‘이계집(耳溪集)’ㆍ‘역상익(易象翼)’ㆍ‘만물원시(萬物原始)’ㆍ‘육서경위(六書經緯)’ㆍ‘격물해(格物解)’ㆍ‘칠정변(七情辨)’ㆍ‘목민대방(牧民大方)’ㆍ‘향약절중(鄕約折中)’ㆍ‘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ㆍ‘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ㆍ‘삭방습유(朔方拾遺)’ㆍ‘북색기략(北塞記略)’ㆍ‘흥왕조승(興王肇乘)’ 등의 저술을 남겼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후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겸임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갱장록(羹墻錄)’,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사신으로 중국(中國)에 갔을 때 대구정(戴衢亭), 기효람(紀曉嵐) 등 학자와 교유, 귀국 후 고증학(考證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지방관(地方官)으로 나가면 치산(治山) 식수(植樹)에 주력했고, 영조 40년에는 통신사에게 의뢰, 일본 벚나무 묘목을 가져와 우이동(牛耳洞)에 심어 후일 경승지를 이루게 했다.
영조ㆍ순조 때의 홍인모(洪仁謨)는 경사(經史)ㆍ음양(陰陽)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와 손오(孫吳)의 병서(兵書) 및 도교와 불교의 경전에 통달했으며, 고문(古文) 몇 편과 고근체시(古近體詩) 2천여 편을 남겼고, 저서로는 ‘족수당집(足■堂集)’이 있으며, ‘황명사략(皇明史略)’ㆍ‘춘추공곡합선(春秋公穀合選)’ㆍ‘당명신언행록(唐名臣言行錄)’ㆍ‘모시다직편(毛詩多織編)’ㆍ‘좌전인명보(左傳人名譜)’ㆍ‘속사략(續史略)’ 등을 남겼다. 영조(英祖)ㆍ헌종(憲宗) 때의 좌의정으로 그 아우 홍석주(洪奭周)ㆍ홍현주(洪顯周)와 더불어 ‘삼문장(三文章)’으로 드날렸던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도 문집(文集)인 ‘연천집(淵泉集)’ 외에 ‘동사세가(東史世家)’ㆍ‘학강산필(鶴岡散筆)’ 등 20여종의 저술을 남겨 홍(洪)씨 집안의 저술만으로도 문고(文庫)를 이룰 정도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조선삼대재(朝鮮三代才)’의 하나로 꼽히던 ‘임꺽정전’의 저자 홍명희(洪命憙)를 꼽을 수 있다.
홍범식(洪範植), 홍충희(洪忠憙), 홍진(洪震) 등은 대한제국이 망한 후 순국하거나 독립운동에 종사한 인물들이다.
홍범식(洪範植)은 고종 2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902년(광무(光武) 6)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한일합병이 되자 치욕에 분을 못 이겨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홍충희(洪忠憙)는 1903년 구한국무관학교(舊韓國武官學校) 보병과를 졸업, 목군부위(睦軍副尉)를 지냈다. 3ㆍ1운동(運動)에 가담하고 1920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했다. 청산리(靑山里) 싸움 때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휘하에서 대대장서리(大隊長署理) 겸(兼) 제2중대장(第2中隊長)으로 참전, 크게 전공을 세우고 군대를 재편성하여 목릉현(穆陵縣) 산중에 주둔하고 있다가 중국군(中國軍)에 무장해제를 당했다. 그 후 교포청년들의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35년 대종교(大倧敎)에 의한 민족정신을 앙앙하기 위해 하르빈에 대종교선도회(大倧敎宣道會)를 조직했다가 해방으로 귀국했다.
홍진(洪震)은 한말(韓末)에 한성평리원검사(漢城平理院檢事), 충청검찰청검사(忠淸檢察廳檢事)를 역임하였다. 3ㆍ1운동 후 상해(上海)로 망명(亡命), 임시정부(臨時政府) 법무총장(法務總長), 내무총장(內務總長), 의정원의장(議定院議長),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했다. 한편 1928년 김구(金九), 이동령(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설, 최고 간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38년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가 통합(統合)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이 결성되자 운영간부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