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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번지 연대 : 신라 헌안왕 3년(서기 859년) 창립자 : 신라 도선국사
청암사는 조선 인조 25년(1647)화재로 전소 되었는데 벽암 성총화상이 덕유산에서 이소식을 듣고 그 문도인 허정대사로 하여금 청암사를 재건토록하니 이에 허정대사가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건하였다. 이를 제2차 중창이라 한다. 이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정조 6년(1782)에 다시 재화를 입어 전각이 소실되자 환우 대사가 다시 신궁보전과 누당을 중건하였는데 이를 제3차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고종 9년에는 주지 대운당 스님이 극락전을 창건하였다. 1911년 9월 21일 밤 청암사는 다시 화재를 입어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대운대사가 화주가 되어 대중을 위로하고 독려하여 그 다음해 다시 청암사를 재건 하였다. 특히 대사는 중국 강소성으로부터 석가상을 조성하여 대웅전을 봉안하는 등 전각의 장엄을 완성하였다. 이를 청암사 제4차 중창이라고 한다.
지정 :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20호, 1985. 8. 5. 위치 :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청암사 연대 : 조선후기 규모 : 높이 4.21m, 폭3.3m, 4층탑 청암사 대웅전의 연혁은 전통사찰편 청암사조에서 기록했듯이 신라헌안왕 3년 창건,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 제2중창, 정조6년에 제3차 중창을 거쳐 일제시대인 1911년 9월 21일밤의 화재로 전소되어 대운대사가 이듬해 봄부터 3년에 걸쳐 제4차로 중창한 것이 지금의 대웅전이다. 대웅전 규모는 정면 3간,측면 2간, 총 23평의 팔작지붕이다. 대운대사가 4중창을 끝내고 중국 강소성으로부터 석가상을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하고 1914년에는 여러가지 성보를 제작하여 대웅전에 봉안하니 청암사 대웅전은 명실상부한 보전이 이루어졌다. 대웅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1.26m*0.76m), 후불탱,산신탱,신중탱,칠성탱,독성탱과 함께 소종과 수번이 있다. 1987년에 강주 지형 스님이 승가대학을 설치하여 비구니의 수학장이 되었다.
지정 :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21호, 1985. 8. 5 위치 :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청암사 연대 : 조선후기 규모 : 높이 4.21m, 폭3.3m, 4층탑
청암사 주지 대운대사가 청암사 중건시(1912년) 성주땅 어느 논바닥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고도 전해지는데 신라 헌안왕 3년(859년) 도선국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 봉안을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4매의 지대석위에 2층 기단으로 되어있고, 1층 옥신에는 4면에 좌불이 1구씩 양각되어 있다. 각층 옥신에 비해 옥개석이 넓으며 옥신 받침이 없어 다소 불안정하고 옥개석의 전각은 반전되었으며 상륜부는 일부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불안정하기는 하나 경쾌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지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8호, 1994. 4. 16. 위치 :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청암사 연대 : 1905년(광무 9년) 규모 : 앞면 3간, 옆면2간, 겹처마, 팔작지붕 청암사 대웅전이 있는 큰절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암자가 있는데 동쪽 건물은 극락전이고, 서쪽은 보광전이다. 보광전의 창건은 미상이나 조선 정조 6년(1782년)에 화재를 입고 환우대사가 다시 신보광전을 중건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1689년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폐위되고 서인의 몸으로 이곳 청암사 극락전에 은거하면서 복위를 빌었다고 전하고, 또 극락전 서쪽에 인현왕후의 복위원당으로 보광전을 건립했다는 설도 있다. 19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은 대운대사가 대웅전과 함께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보광전을 했는데 건물양식은 대포양식과 익공양식을 절충한 전통적인 수법을 썼다. 중건할 때의 시주록현판에 왕실상궁의 이름이 26명이고 여타 시주록에도 17명의 상궁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청암사와 왕실의 종교적 관계가 2백여 년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수도암은 불영산(해발1317m)중턱에 위치한 깊고 그윽한 절이다. 절 위치도 1050m 의 고지대이므로 여름에도 모기없고 그 아래 마을과는 한달 가까운 계절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래 불영산은 수도산이라고 불려져 왔는데 100여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가호가 많다 하여 불영산이라고 고쳐 불렀으며 또 이곳 석불 이마에서부터 자주 방광이 있었으므로 불영산이라 불리워졌으며 수행자가 모여 수도하고 마음 밝히는 곳이라 하여 수도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암 창건 연대는 따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청암사 사적비에 쌍계사,(현 증산면 소재지), 청암사, 수도암은 같이 창건했다고 하였다. 이절은 도선국사 창건 이후 꾸준히 선원으로 발심한 수행자가 자취를 숨기고 수도하던 곳이다. 현재에도 결재기간에는 절안에 대중이 약 30명 그중 수도승이 25명 가까이 언제나 정진하고 있음며 원근 각지에서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수도암에는 현재 본당인 대적광전.약광전. 나한전 조사전. 선원. 휴원으로 관음전 그리고 부속건물로 3,4동 건물이 있으며 부속 암자 로서 정각 .서전 .낙가가 있다.
지정 : 보물 제296호, 1963.1.21 위치 :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513. 수도암 연대 : 고려 초기 규모 : 불상높이 1.54m 어깨폭90cm 대높이 1.22m
수도암 약광전 석불은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으나 조각수법이나 솜씨는 서로 다른 면이 있다. 4각형 대좌에 문양 없는 원통관을 쓰고 두 손은 법계정인을 하고 보주를 들었다. 법의 옷주름은 도식적이고 광배는 거신광으로 연화문. 당초문.화염문을 새겼다. 문양없는 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 처럼 보이지만 신체 각부의 표현이나 광배,대좌의 양식으로 보아 여래상이 분명하다. 대좌의 상대는 양련을,중대는 안상을 , 하대는 복련을 조각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지정 : 보물 제297호 1963. 1.21 위치 :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513 수도암 규모 :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동탐과 서탑이 있다.동탑 높이 : 3.76cm 서탑높이 4.25cm 연대 : 통일 신라시대
서기 859년(신라 57대 헌안왕 3년) 도선국사가 청암사와 수도암을 창건하면서 조성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대적광전앞에 동서로 두탑이 섰는데 모두 3층석탑이다. 동쪽의 탑은 단층위에 기단위에 섰고, 서탑은 각면에 한개씩 장대석으로 지대를 마련한 3층석탑이다. 이와 같이 두탑의 숫법이 서로 다르며 한쌍의 탑으로 볼수 없을 만큼 조각과 모양도 다르다. 그러나 두탑의 1층 탑신 4며에 여래불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그 수법이 단아하다. 동탑은 단층 기단이고 서탑은 각면이 1개씩 장대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를동탑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보륜이 남아 있고 서탑 상륜부에는 노반 보주가 남아 있다. 이 두탑은 옥녀가 지상에 내려와 베를 짜는 두 기둥이라는 전설이 있다.
지정 : 보물 제307호 1963. 1.21 위치 :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513 수도암 불상높이 : 2.51m 대좌높이 1.19m 연대 : 통일 신라시대
머리는 소발로 적은 편이고 얼굴은 네모지고 풍만하며, 긴눈, 작은입, 코 등의 표현에서 불심의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대좌는 8각대로 상대에는 16엽 단변 연화문을 2중으로 새겼고 앞 5면에 귀면을 묘사한 것은 특이한 수법이다. 불상밑에는 불경책이 있는데 손끝으로 뜯어내다가 안으로 말려들어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 불상은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처음 불상을 산너머 경남 거창의 불당골에서 조성하였다는데, 완성시킨 후 모셔올 일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한 노승이 나타나 그 불상을 업고 단숭에 달려 수도암 입구에 이를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부처님 모시는데 이렇 수가 하고 노승은 화가 나서 수도산 산신들을 불러 모으고 호통을 쳤더니 이후로 수도암쪽 수도산에는 칡넝쿨이 없어졌다고 하며 지금도 부근에는 칡넝쿨이 없다.
1) 용바우 ① 황정리 이전부락 동쪽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 전(田)씨 성을 가진 사람이 묘를 쓴 뒤 그 집안에 장사가 태어나 역적모의를 할까 두려워 산소의 혈을 끊었더니 용마가 나와 울고 갔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이전부락을 용암(龍岩)이라고도 한다. ② 황정리 고무실 안골짜기에 있는 바위로 이 마을 금(琴)씨가 스님을 박대한 후 다시 노승이 찾아와 이 바위를 깨뜨리면 금씨 집안이 흥한다고 하여 시키는 대로 했더니 바위 속에서 붉은 피가 사흘동안 흘러 나오고 그 뒤로 금씨는 망했다 한다. 2) 고무실(鼓舞室) 황정리 고무실은 전에는 고동(鼓洞)이었는데, 정승을 지냈던 금(琴)씨가 낙향하여 살면서 항상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 한다. 3) 수도암 약광전 석불 이 석불은 거창 땅 부처골에서 다듬어져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부처골에서 불상이 완성되어 운반하는 방법을 의논하는데, 난데없이 수염이 하얀 노승이 나타나 운반하기를 청했다. 노승은 돌로 된 불상을 등에 업고 쏜살 같이 달려 따라가던 사람들이 아무도 따를 수가 없었다. 노승은 고개를 넘어 수도암 입구(대적광 전 자리)까지 와서 칡넝쿨에 걸려 넘어졌다. 노승은 화를 내고 수도산 산신을 불러 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데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게 하였으니 앞으로 이 절 주위에 칡이 일절 서식하지 못하게 하라." 고 호령하고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서로의 얼굴들만 바라보다가 누군가 먼저 "부처님의 화신(化身) 이다." 고 말하니, 모두들 노승이 떠난 곳을 향해 절을 하고,이 사찰을 짓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곳 수도암에는 모든 초목들은 서식하고 있으나, 칡은 절 주위 300m 이내에는 일절 없어졌다고 한다. 4) 수도암 나한(1) 옛날 한 사도가 공양미를 매고 거창읍에서 이곳까지 산을 넘어오는데 한 동자가 나타나 "수도암에 있는 사람인데 스님께서 저에게 짐을 받아 오라 해서 왔습니다." 하고 쌀가마니를 받아 어깨에 메고 나는 듯이 산을 넘어 갔다. 뒤를 따라 절에 도착해보니 쌀가마니는 마루에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 소리로 부르자 그제서야 스님이 선실에서 나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스님이 연유를 되묻자 노인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스님이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나한전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나한님의 어깨에 지푸라기가 묻어 있지 않는가. 이렇듯 수도암에서는 나한님의 신통력에 의한 기적이 자주 일어난다 고 한다. 5) 수도암 나한(2) 수도암에 대적광전을 덮을 만큼 거대한 괴목이 법당의 기와를 상하게 해서 비가 새어 스님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어느날 노승 한 분만 절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여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있어 선실에서 정진하다 밖을 내다보았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시 참선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는 크게 영차영차 하는 소리가 나서, 노승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에 쿵하는 소리가 났다. 법당 쪽을 돌아 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법당 뒤의 거목이 뿌리째 뽑혀서 법당 탑있는 곳에 거꾸로 쳐박혀 있는게 아닌가. 노승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것이 있어서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에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한님들의 어깨와 손에 잎새와 나무껍질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 거목은 법당 쪽으로 무게가 실려 법당을 헐지 않고는 베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대중 스님들은 그 나무를 베어다가 화목으로 사용하고 밑둥치는 남아 있었는데 1969년 선원(禪院)을 지어면서 치웠다고 한다. 6) 마고실(麻姑室) 장전리 마고실은 마구실이라고도 하는데 마고할미가 성만재에 내려와 사람을 괴롭혔다 하고, 또 천태성 마고할미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이곳의 돌을 치마에 싸서 날랐다고도 한다. 7) 서무터(善武基) 장전리 서무터는 한자로는 '善武基' 로 표시하는데 100여년 전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들어와 정착하여 성주땅 천주교의 발상지가 되었다 한다. 지금도 성당이 있고 6가구 전원이 신자라 한다. 8) 황점(黃店) 황점은 옛날 유황을 끓여 정제하던 곳이다. 이에 얽힌 이야기로 박문수 어사가 목통령을 넘다가 허기져 쓰려졌다. 지나가는 한 부인이 젖을 먹여 살렸는데 뒤에 어사가 부인을 찾아와 소원을 물었다.그때 제발 유황 일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애원했더니 유황의 상납이 중단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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