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진 역사에 무심한 것은 80년 남짓한 한국 대중음악사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 서구 중심주의에 맹종한 천박한 앨리트 주의는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유력한 음악 문화를 쇼비즈니스의 아수라 속으로 유배시켰다. 식민지 시대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 담당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에게 씌워진 몇 겹의 편견 속에서 이윤 동기의 노예로 전락했고, 초라한 스포트라이트와 값싼 환호에 도취하며 서서히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이 땅의 대중음악이 '오락'의 소비재라는 주홍글씨를 벗고 '문화' 담론의 대상으로 승격한 지 이제 겨우 십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고 한국 대중음악의 미학적 저변은 지난 70~80년대보다 오히려 황폐화하는 우울한 시대를 통과해야 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결정되는 아이돌 스타 시스템은 창조적 상상력을 시장의 금 밖으로 밀어내었고 다양한 음악적 개성은 가택연금되었다.
이와 같은 그리샴의 무참한 법칙 아래서도 주목할 만한 미세한 경향이 출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 LP 복권의 조용한 신드롬이다. 사실 LP가 생산되던 90년대 초중반까지 거개의 LP 컬렉터들은 이른바 '가요' 판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새로이 부상한 LP 컬렉터 세대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저주받은 걸작과 거장들에 대한 관심에 불지피기 시작했다. 이 인터랙티브 미디어에서는 자율적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신중현과 그 사단의 앨범들과 70년대 초기 포크 앨범들을 고가의 컬렉터스 아이템으로 만들며 명예의 전당을 구축한다.
80년대 중반에 조용히 데뷔한 포크 뮤지션 김두수 또한 곽성삼, 이성원과 더불어 이와 같은 재평가 혹은 재조명을 통해 망각의 무덤에서 부활하였고, 11년 간의 침묵을 뒤로 하고 이렇게 4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그것도 LP 팬들에 대한 경의를 담은 2장짜리 한정판 LP를 먼저 앞세워서 말이다.
이 앨범의 타이틀 '자유혼'은 바로 마이너리티의 그늘에서 고독과 은둔을 자양분으로 삼았던 이 싱어송라이터의 다른 이름이다. 김두수의 음악은 1986년 데뷔앨범 '귀촉도'부터 우리의 토속적인 정한에서 시동을 걸었지만, 거기에 갇히지 않고 프로그레시브 포크의 서구적 세련미와 종교적 명상, 그리고 보헤미안적인 초월 의지를 복합적으로 포괄하고 있다. 그의 시적인 노래말은 단순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말과 말 사이의 여백에선 지극한 아포리즘의 울림이 순결하게 흘러나온다.
모든 집착의 옷을 벗어버리고자 한 이 기조는, 첨단 디지털 시대의 사운드 폴리시와는 거리가 먼 이 앨범의 미니멀한 연주와 자연스러운 녹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나무에 눈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리는 산골 오지의 장점을 이용해 자연 상태의 스튜디오를 고집했다. 자연 그대로의 방음이 되는 구조물에서 소형 마이크와 휴대용 아날로그 릴테이프 녹음기로 더빙 없이 작업했으며, 악기도 어커스틱 기타와 신서사이저, 하모니카뿐이다. 김효국, 정유천, 김광석, 신성락 등 일급 세션맨들이 청량한 자연음 만들기에 동참했다.
수십 트랙의 믹싱과 더빙으로 이루어진 소리 환경에 길들여진 귀에 이 앨범의 소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간과해 왔던 가난한 풍요로움의 아우라를 질박하고 단호하게, 그러나 명료하게 제시한다. 김민기와 한대수, 조동진과 정태춘이 한국 음악의 거대 신화라면, 김두수는 그 거목들 뒤로 수줍게 펼쳐진 산중 초원의 들국화의 강인한 향기를 품고 있다. 이 소담스런 정찬에 초대받기를 거부하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사족을 붙이자면, 김두수의 LP는 80년대말, 90년대초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섯자리 액수로 거래된다. 아마도 이 앨범 역시 곧 그렇게 될 운명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