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제1회 고봉산 해넘이 축제
□ 행사 취지
우리가 사는 고양명칭은 고봉산의 高자와 덕양산의 陽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고봉산은 고양의 주산이며, 또한 고양팔경중의 하나이다. 그 옛날 민족의 번영과 영토 확장을 위해 삼국이 치열한 각축을 벌렸던 곳으로서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주변일대를 잘 조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현재까지도 고봉산과 관련된 역사와 설화가 같은 맥락으로 구전되어 전해오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와의 봉화설화이다. 또한 산중턱 동쪽에는 고양팔현 중 한분이신 모당 홍이상 선생의 묘소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팔현 이시고 천명도설 창시자이신 추만 정지운 선생의 묘소가 있다. 서남쪽의 중턱에는 민속 신앙으로 세시풍속을 간직한 안악골 도당산 도당제가 주민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며 이어져 오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기축년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마무리 짓고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고, 경인년 새해 찬란한 여명을 맞이하기 위해 송년 해넘이 축제를 거행한다.
2009년 12월 31일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장 안 재 성
□ 행사일정
1부 식전행사
사회 강충구 - 15시00분 -
- 길놀이 : 경기도무형문화제22호 고양소포호미걸이보존회 조경희 외20명
2부 식전행사
1. 개 회 사 : 이은만 전, 고양문화원장 - 15시30분 -
2. 제 사 장 : 안재성 고양시향토문호보존회 회장 - 15시35분 -
3. 축 사 : 우일덕 민주 평통 자문회의 고양시협의회장 - 15시40분 -
4. 축 사 : 김상묵 고양시중산동체육회 회장 - 15시45분 -
5. 천 고 제 : 고양시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천고제 봉행 - 15시50분 -
6. 축원덕담 : 덕담 및 앉은반 공연호미걸이 조경희 회장 - 16시00분 -
7. 축하공연 : 신월숙 명창의 경기소리 한마당 - 16시20분 -
8. 소망적기 : 한해의 소망을 적은 소원지 날려 보내기 - 16시30분 -
9. 모 듬 북 : 통일기원과 소원성취를 위한 해넘이 모듬북 축제 - 16시50분 -
조경희 천무소리예술단 공연
10. 폐 회 : 2009 제1회 통일기원 해넘이축제 주최/주관위원회 - 17시00분 -
- 아 래 -
일 시 : 2009년(기축년)12월31일 목요일 오후15:00~17:00분 까지
장 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고봉산 정상부근(쉼터)
추 최 : 민주평통 자문회의 고양시협의회, 고양시 향토문화 보존회,고양시 중산동 체육회,
주 관 : 경기도무형문화제22호 고양송포호미걸이보존회
후 원 : 고양신문, 일산소방서여성의용소방대
□ 행사문의
주 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603-3번지 주신빌딩402호
전 화 : 031)967-3131, 팩스 031)968-2115,
□ 고봉산 유래
고봉산은 고양의 주산으로 해발208.8m로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평야지대에 웃뚝 솟아 주변일대를 잘 조명 할 수 있다. 이 산은『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안장왕(519~531)과 한씨 미녀의 전설이 전해오는 곳으로 한씨 미녀가 고구려군에 연락하기 위해 봉화를 밝혔다는 산이다.
고봉산은 대위산 혹은 대산 이라고 부르는데, 발음상으로는 '테미산', '템산' 이라고 부른다. 이는 산 봉우리가 계단을 설치한 것처럼 정상은 운동장 처럼 평평하게 이루어졌으며 정상에서 중턱쪽10m아래쪽에서 폭3m정도의 펑퍼즘 하게 전개되는 띠를 두른 듯한 평지가 봉우리 전체를 감싸고 있어 '띠 둘레산' 즉 대위산 이라고 이름 지어 졌으며, 멀리서 바라보면 산 정상이 띠를 두른것 같이 보인다. 그 띠 아래에는 장군총(將軍塚)이 있는데 주민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1755년 고양군지)전한다. 고양은 고봉의 高자와 덕양의 陽자를 취해서 만든 것이다.
자료제공: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 중산동 지명유래
구 일산리는 일산읍의의 중심지가 되는 마을로 일산리라 부르기 시작 한 것은 일제시대 부터이다. 1904~1905년 일본이 경의선을 부설할 당시 중면의 면사무소를 백석4리 에서 일산역 부근으로 옮김에 따라 하나의 행적구역으로 개편하였는데 그때 새로운 행정 구역의 명칭을 송포면 덕이리 한산마을의 고유 명칭인 한메를 따서 일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산 지역의 옛 이름은 와동(瓦洞)또는 와야촌(瓦野村)으로 이때 후곡촌(後谷村)후동을 합하여 일산이라 하였다. 중산은 일산6리에 있는 자연 마을의 이름으로 입구 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지나 도당산 쪽으로 올라가면 안악골이 있다. 중산과 안악골을 합쳐 중산(구 일산6리라)동 이라 한다. 안악골은 현재 국민은행 연수원이 있다.(뒷산에는 도당산이 있어 예전에는 매년 도당제(산신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중산이라 부르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우선 중산은 고봉산을 중심으로 볼 때 마을의 위치가 고봉산의 가운데에 있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고봉산이 고양시에서 제일 높을 뿐만 아니라 고양시의 주산으로 고양시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데 바로 이 고봉산 밑에 중산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자료제공: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2009 제1회 통일기원 고봉산 해넘이 축제
□ 비나리문
단군기원 4342년 기축년 12월 31일 고봉산 정상에서 해넘이 천고제를 올리며 이 땅의 통일과 고양 시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삼가 천지신명께 고하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 통일강산 이룩되게 하옵시며,
만백성을 평안하고 화목하게 하옵시며,
모든 혼돈과 갈등을 없애게 하옵시며,
이 땅의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비나이다.
하늘이시여 땅 이시여 이렇게 머리 조아려 고 하는 것은 이제는 평등과 화해 그리고 평화의 큰길 속에서 대동하고 통일하며 참다운 삶, 대동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아주 작은 밀알을 뿌립니다. 비록 바람에 나부끼는 한 포기의 들풀처럼 보잘것없는 민생들의 외침이지만 하늘이시여 신령이시여 생명과 행복이 가득 찬 신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천지신명이시여 저희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주소서 저물어 가는 기축년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다가오는 경인년 새해에는 만백성의 막힌일 맺힌일 올올이 풀어 주시고 온 겨례 만사형통 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기원하옵니다.
상 향
단군기원 4342년12월31일고봉산 정상에서
고양시 향토문화 보존회장 안 재 성
□ 설화(說話)
1. 고봉산 한씨미녀 이야기
옛날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세나라가 서로으르렁 거리고 대치하고 있을때 한강유역에 있던 고양시(당시는 계백현)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삼국은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처음 이 지역은 백제의 땅이었으나, 후일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침하여 이 지역을 고구려의 땅으로 만들었다.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다시한강 유역에서 내 몰았다. 고구려는 빼앗긴 이 곳을 다시 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었고, 백제도 또다시 이곳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철통같은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고양의 한 고을에 한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미색이 출중하여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주'라는 딸이 있었다. 부자 한씨는 아름다운 딸이 나이가 들자 훌륭한 신랑감이 나타나 주길 바라고 있었고, 그 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화창한 봄날, 한주는 하도 날씨가 좋아 집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때 한 청년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그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 청년의 옷 차림은 천민의 옷차림이었으나 그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귀한 인상 이었다. ㅎㄴ참동안 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은 용기를 내어 가까이 접근하여"낭자"하고 부렀다.
깜짝놀라 뒤를 돌아본 한주는 비록 천민의 복장을 하고 있으나 준수한 풍모와 늠름한 자세에서 풍기는 청년의 위엄에 한순간 압도 되고 말았다. "낭자" 낭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무례함을 무릅쓰고 "낭자 앞에 나섰습니다. 몆마디 말씀드릴 기회를 주십시요," 하고는 숲속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한주는 당황하고 망설였으나 자기도 모르게 그청년을 쫒아갔다. 숲속에서 청년은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그는 고구려의 태자로서 오랫동안 통치해 오던 한강 유역을 백제에 빼앗긴 후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이곳에 몰래 들어와 정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태자와 한주는 몆 차례나 몰래 만났다. 어느날 태자는"나는 이제 내 임무를 끝냈으니 이곳을 떠나 고구려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을 쳐서 정복하고 낭자를 아내로 맞이할테니 기다려 주십시요,"라고 한중게 말하고는 고구려로 돌아갔다. 태자는 얼마 후 고구려의 임금이 되었다. 바로 그가 안장왕이었던 것이다. 안장왕으 한주에게 약속한 대로 여러차례 군사를 내어 백제를 공격했으나 번번히 성공하지를 못하였다. 따라서 한주의 마음은 매우 안타까웠다.
그러는 중에도 한주의 아름다움은 소문을 더하여 이 지방의 태수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태수는 사람을 보내 청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주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어 청혼을 승낙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태수를 화나게 하였다. 태수는 한주를 강제로 붙잡아 들이고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주가 대답을 하지 않자, “네가 장래를 약속한 사람을 밝히지 않는 것을 보니 적의 첩자와 장래를 약속하고 내통한 것이 틀림없다” 고 말하고는 한주를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의 안장왕은 크게 낙심하여 부하들에게 큰상을 걸고 계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해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안장왕에게는 안학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을밀이라는 장수가 안학공주를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었다. 을밀은 임금이 한주를 구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장왕 앞으로 나아가 자기가 계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해올 터이니 안학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을밀은 20명의 용감한 병사들과 함께 무기를 옷속에 감추고 평복을 입고 춤추며 광대놀이를 하는 무객으로 변장한 후 계백현에 잠입하였다,
한편 옥에 갇혀 있던 한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일편 단심가를 지어 부르니 태수는 한주의 굳은 결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태수는 한주를 포기하지 않고 생일 잔치때 옥에 갇혀 있던 한주를 끌어내어 다시 청혼을 하였다. 한주가 이를 완강히 거절하자 태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한주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바로 이때 무객으로 가장한 채 잠입해 들어와 있던 을밀과 그의 부하들이 몸속에 감추고 있던 무기를 꺼내 들고 일제히 뛰쳐나와 고구려 대군이 이미 이곳에 쳐들어 왔다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백제의 군졸들을 쳐 죽이니, 백제의 군졸들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혼비백산, 도망치기에 바빴다. 을밀은 백제군을 몰아내고 한주를 구했으며, 이 소식을 안장왕에게 전했다. 대군과 함께 국경에 주둔하고 있던 중에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크게 기뻐하며 한시바삐 한주를 만나고자 하였다. 을밀에 의해 구출된 한주도 빨리 안장왕을 만나고 싶은 심정에 높은 산에 올라 봉화를 밝혔으니, 마침내 안장왕과 한주는 결합하게 되었고 한주를 구출한 을밀도 안학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 이때 봉화를 밝힌 산이 바로 고봉산 이었다고 한다.
2.감투바위
감투바위는 고봉산 정상에 있는 바위의 이름으로 바위의 모습이 마치 감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 퇴미산 치마바위
치마바위는 감투바위 옆에 있는 바위의 이름으로 감투바위와 마찬가지로 바위의 모양이 마치 치마와 같이 넓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심학산과 퇴미산(고봉산)
옛날에 심학산과 고봉산에 힘센 장수가 각각 살고 있었다. 두 장수 모두 힘이 아주 세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느날 두 장수는 서로가 힘이세다고 하면서 우겼다. 그러던 중 서로 화가 머리끝까지오른 싸우기 시작 하였다. 얼마를 싸워도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두장수는 쉬지 않고 싸웠다. 결국 싸움은 판가름이 났는데, 고봉산 장수는 목이 잘렸고, 심학산 장수는 양 팔이 잘렸다. 그래서 오늘날 고봉산은 산 정상이 펑퍼즘하고, 심학산은 양팔이 잘려나갔기 때문에 뾰족한 산이 되었다고 한다.
5. 퇴미산(고봉산)이야기
퇴미산은 원래 산줄기가 좋아서 예로부터 이 부근에서는 퇴미산의 정기를 받아 장군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일본 놈들이 이 산의 정기를 주이기 위해 퇴미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
자료제공: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
첫댓글 안재성회장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는 더욱더 성숙된 행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