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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인터넷 법문]
如天 無比 스님 신심명 염화실 방송-2006년 02월 20일 신심명 제12강
반갑습니다. 오늘 2월 20일 월요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신심명 지난 시간에 이어서 要急相應(요급상응)하면 唯言不二(유언불이) 할 차례입니다. 그 앞의 구절 眞如法界(진여법계) 無他無自(무타무자) 이하는 전부 신심명의 내용을 총결산하는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보면 내용을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죠. 眞如法界(진여법계) 無他無自(무타무자)라.
우리가 모두 眞如法界(진여법계)에 살죠. 진여법계에 살면서 眞如法界(진여법계) 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 너다, 나다 하는데 치우쳐서 차별하고 차별하다 보니까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갈등이 심하면 거기서 고통이 일어나게 되는거죠.
그래서 만인이 평등한 본래의 진여법계 - 누구나 다 가지고 있고 그것은 누구나 다 평등하고 한 그 진리의 자리, 그것은 中道의 입장이라고도 할 수도 있고 大道다, 지극한 도 至道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한덩어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너도 있고 나도 있지만 너와 내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그런 조화의 극을 이루고 있는
그런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삶을 無他無自(무타무자)다,
너도 없고 나도 없다로 이렇게 표현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지를 우리가 바로 수용하려면 오랜 세월 걸리고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수행을 해야된다느니 그런 것 말고
바로 어떻게 우리가 우리 살림살이로 만들 수는 없을까? 내 공부로 할 수 없을까? 이렇게 만약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要急相應(요급상응)하면 급히 상응하기를 요한다면 그 경지 -
지극한 도, 中道 , 大道, 眞如法界(진여법계), 또 無他無自(무타무자)한
그자리에 급히 상응하기를 요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는고 하면 오직 不二(불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不二(불이) -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니고 나아가서 선(善)과 악(惡)이 둘이 아니고 시(是)와 비(非)가 둘이 아니고 일체가 둘이 아닌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경지를 여기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둘로 나누어져 있고 또 둘은 모든 현상계를 형성하는 그런 상대적인 이치로써 만들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서 둘이 아닌 아주 조화의 극치인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그런 어떤 삶을 여기서
不二(불이),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不二(불이)란 말이 참 좋은 말 중에 하나인데요, 둘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둘' 인 것을 전제로 한 말이죠. '둘' 인 데에서 '둘'이 아닌 이치를 우리가 보자는 것이고 또 '둘'인 곳에서 둘이 아닌 삶을 살자는 것 - 이것이 不二(불이)죠. 不二(불이)하면 維摩經(유마경)의 不二法門品(불이법문품)이 제일 不二法門(불이법문)의 원조이죠. 불이의 용어 중에서는 원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말이기도 합니다. 유마경은 법화경과 아울러서 저는 저 나름대로 대승불교 운동의
선언서라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그만치 대승불교를 아주 역설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있죠. 특히 유마경은 기존의 승단의 승려들을, 그리고 나아가서 또 보살 지위에 있는
사람들 까지도 세속의 일개 거사가 그들의 견해를 전부 부숴버리고
새로운 어떤 길을 거기서 열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거기서 유마거사란 이가 병이 들었는데 앓아 누워있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게 되죠. '내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부처님이 무슨 위로의 말씀이 안 계실까? 만약 위로해주신다면 참 고마울텐데...'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제자들을 병문안을 보내지요. 그 당시 분위기는 세속에서는 유마거사, 출세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렇게 쌍벽을 이루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성지 바이샬리(Vaisali)라고 하는 곳이 바로 유마경이 설해진 무대이다, 그래요. 비야리성에서 살았던 유마거사의 이야기죠. 유마거사가 그래서 아팠는데 부처님은 제자들 보고 한사람 한사람 대표가 되어서 '병문안을 하도록 하라'는 부탁을 하니까 그 십대제자가 , - 십대제자란 것도 유마경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죠.
경전에서 십대제자, 십대제자 그런 말은 구체적으로 쓰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십대제자가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십대제자 한 분 한 분이 아주 십대제자의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들인데 부처님의 그런 부탁을 듣고는 '아이구 저는 부처님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왠고하니 내가 어느 때 이러 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마침 유마거사가 지나가시다가 내가 하고 있는 이러 이러한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저는 참 유마거사의 가르침이 너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차원 높은 이치라서 정말 그때 참 부끄러웠고
물론 배운 점도 많았습니다만 혼이 났습니다.' 이런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은 도저히 가서 병문안을 못 드리겠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나율존자 (阿那律尊子)같은 천안제일(天眼第一) 이런 이들도 경행을 하는데 그런 부탁을 받고는 과거의 유마거사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또 우바리존자(優婆離尊子) 같은 분은 계율로서는 뛰어나신
분이시지요. 그런데 어떤 두 비구가 파계를 하고서 우바리 존자에게 와서 참회를 청했는데 우바리존자는 원칙주의자라 참회가 도저히 안된다,
큰 계를 범했기 때문에 참회가 도저히 안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죄지은 파계한 비구들을 더 낙담하게 하고 더 이상 헤어나지 못하는 방향으로
사람을 몰고가는 식이 되어버렸어요.
유마거사가 그런 사실을 알고 아주 크게 꾸짖습니다. 우바리존자 보고.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냐?'고 '계율이 도대체 그런 것이냐?'고. 한 예로써 그런 이야기는 證道歌(증도가) -우리가 이제 증도가공부를 이어서 할텐데- 에서도 有二比丘犯淫殺 에 波離螢光增罪結 하고 (유이비구범음살) (파리형광증죄결) 維摩大士頓除疑 還同赫日銷霜雪 (유마대사돈제의) (환동혁일소상설)
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두 비구가 아주 무거운 죄를 범했는데 波離螢光增罪結(파리형광증죄결)이라 우바리존자는 반딧불같은 그런 소견이라 오히려 죄지은 사람의 참회를
할 수 있도록 해주지는 못하고 죄의 매듭을 더욱 더 증폭 시켜 주었다.
그런데 維摩大士頓除疑(유마대사돈제의)라 유마대사는 몰록 그들의 의심을 제하게 하고 죄를 참회하게 하고 그렇게 한 것이 마치 還同赫日銷霜雪(환동혁일소상설)이라 저 뜨거운 태양이 눈이나 서리를 한꺼번에 녹여버리는 것 같이 그렇게 시원하게 유마대사가 그렇게 법문을 했다. 이런 영가대사(永嘉大師)의 평(評)이 영가 증도가(證道歌)에 나오듯이 유마경에 근거한 이야기이죠 그게. 그런 우바리존자와의 관계, 가섭존자, 수보리, 이런 이들도 탁발을 나갔다가 가섭존자는 탁발을 나갔다가 가난한 집, 말하자면
복을 지어준다고 가난한 집에만 탁발(托鉢)을 다녔는데 유마거사가 '於食(어식)에 평등한 자는 於法(법)에 평등이라.' 유마경에 아주 유명한 이야기들이 참 많아요. '법에 평등한 사람은 걸식을 하는데에도 평등하다.'는 아주 유명한 그러한 말을 남기면서 어떻게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려서 그렇게 걸식을 하느냐? 가난한 집만 다니면서 복지어준다 그게 무슨 중으로써 될 법이나 할 소리냐? 이런 식으로 도대체 이치를 알고 하느냐, 어쩌느냐? 그런 식으로 꾸중을 듣게 되지요. 또 수보리존자(須菩提尊子)같은 이들은 해공제일(解空 第一)로서 아주 뛰어 나지요. 금강경의 주인공이시기도 한데 그 분도 걸식을 나갔는데 그 분은 또 생각하기를 평소에 가난해서 당신들 먹기에도 힘드는데 어떻게 수행자들에게 보시할 의식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부잣집만 다니면서 음식을 빌었지요. 그것도 유마거사가 보기에는 당치도 않는 짓이라.
걸식을 하려면 부자든 가난한 집이든 간에 평등하게 똑 같이 다니면서
해야지 다 이유를 대면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인데 알량한 자비심으로 그렇게 차별을 해서 사람을 그렇게 대하고 그렇게 한데 대해서
아주 혼이 나지요. 십대제자가 전부 유마거사에게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 기억을 되살리면서 '부처님 저희들은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죠. 그래서 십대제자 그 누구도 유마거사에게 병문안을 도저히 못 간다 이렇게 되고
그리고 나서 그다음 보살품(菩薩品)이 이어지는데 보살들도 한 사람 두 사람 부처님께서 시켜요. 그들도 과거에 십대제자가 당했 듯이 유마거사에게 어떤 당했다기 보다는
가르침을 받았던 그런 기억들을 되살리면서
'저로서는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유마경이 참 재미가 있는 경전이죠. 그래서 그런 내용들이 '대승불교 운동의 선언서다' 제가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출가 중심의 승단이 만일 불교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어떤 입장에서 불교는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의 함께 누려야 할 그런 큰 지혜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출가인 중심으로 승단이 이루어져서야 되겠는가 하는
이 의식을 말하자면, 깨뜨리는 것 입니다. 그것이 유마경이에요. 그러니까 출가한 부처님의 제자들을 유마거사의 입을 통해서 그들의 견해, 그들의 사상, 그들의 생각들을 사정없이 깨뜨려 버리죠. 거기에 꼼짝을 못합니다. 그런 형식을 유마경에서 취하고 있는 이유가 그러니까 '불교는 인류 공동의 것' 이고 특히 '승가(僧伽)' 하면 출가인 중심의 단체와
집단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을 함께 일컬어서 승가(僧伽)다.'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큰 의미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집단, 단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집단 내지 단체는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거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가르침을 공유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승단 중심으로 그렇게 나가선 안된다 하는 것.
이게 대승불교운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엔 승속을 가리지 아니하고 , 또 남녀를 가리지 아니하고 , 어떤 빈부귀천도 없이 똑같이 불성이 있는 사람은 성불할 수 있다 하는 그런 주장을 펴게 되는 것이 소위 '대승불교운동의 핵심' 이지요. 그래서 법화경이니 유마경이니 하는 것은 거의 그런 입장에서 초기 대승경전의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경전입니다. 어쨌거나 不二法門(불이법문), 不二(불이) 이야기가 유마경이 원조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9번째 품에 가면 入不二法門品 (입불이법문품)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앞에서 제자품, 보살품 이렇게 해서 설법이 죽 이어지다가 종결부분 쯤 가면 불이법문
- 둘이 아닌 이치에 들어가는 법문품 - 이 있는데 거기에서 문수보살이 인솔자가 되고 대표가 되어서 많은 보살들과 많은 부처님 제자들을 거느리고 문수보살이 가서 병문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수보살이 대표가 되어 갔으니까 문수보살이 문안을 드리고 해서
대화를 이렇게 많이 나누게 되죠. 그러다가 不二(불이)에 대한, 둘이 아닌 이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유마 힐이 여러 보살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이여! 어떻게 하면 보살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둘이 아닌 그 이치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정말 무슨 약을 이야기하고 병고를 이야기하고 그것만 하겠습니까? 법문이 이제 벌어지는거죠. 그래서 한 사람, 두 사람 그 나름대로 둘이 아닌 이치를 다 이야기를 하게 되죠. 그런데 마지막에 문수 보살이 이야기를 하게 되고 문수보살은 '일체 법에 대해서 말이 없고 또 보여주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것 - 그래서 온갖 문답 , 우리가 지금 이렇게 문답을 하고 있는데 당신과 우리 부처님 제자들이 함께 문답을 나누고 있는데 이 문답까지도 떠난 것, 그 자리가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도리입니다.' 문수보살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상당하지요. 그리고 나서 문수보살까지 다 대답을 하고 문수보살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유마힐 거사께서는 이 둘이 아닌 도리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겠습니까? 주인공이신 유마 거사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아주 근사하지요. 대화의 그런 흐름이요. 그러니까 유마거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가만히 있습니다. 묵연무언(默然無言)이라 - 묵연히 말이 없었다. 그랬어요. 그래서 거사비야두구(居士毘耶杜口) - 비야리에서 입을 닫았다. 유마거사 계시던 비야리성에서 입을 닫은 법문이다, 막은 법문이다,
이렇게 말이 없었거든요. 한참 있다가 문수보살이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문자와 언어가 하나도 없는 것. 문답을 떠난 것이 불이법문이라고 억지로 표현을 했는데 그 말마저 하지 않은 유마거사야 말로
진정 불이법문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문수보살이 칭찬을 합니다. 말이 떠났다, 우리가 편의상 말을 활용을 하지요. 말을 통해서 의사전달도 하고 법문도 하고 경전도 강의하고 온갖 생각과 마음을 말로 표현합니다만 궁극에 가서는 그 말이란 게 도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거죠. 그야말로 '둘이 아닌 이치' 하나만 가지고도 '이런 말도 떠나고 문답도 떠난 것이 둘이 아닌 이치 입니다.' 이렇게 말해봤자 그건 말이 있는거죠. 말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말을 빌어서 말을 하는 거니까. 그런데 유마거사는 그 말마저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하고 문수보살이 칭찬을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要急相應 (요급상응) 唯言不二 (유언불이) 유마경의 최고의 불이법문. 유마거사가 아무 말이 없음, 그 말이 없음으로 해서 서로 상반된,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무르녹게 되고, 무르녹는다는 것은 조화를 이루게 되고 저절로 그러함 - 자연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죠. 거기 '저절로 그러함' 그것도 말을 붙이는 것도 이미 군더더기가 되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말이 없음으로써 불이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글로써 쓰다보니까 唯言不二 (유언불이)다, 오직 불이라고만 말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不二(불이)는 둘이 아니란 것은 둘 다 같다는 뜻이지요.
남녀도 아니다 란 말은 남자도 여자도 동등한 자격이 있고, 동등한 가치가 있고, 동등한 역할이 있다, 이런 의미예요. 그래서 다 살려내는 뜻입니다. 둘이 아니다, 둘 다 부정하는 것은 둘 다 궁극적으로 살려내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不二(불이)는 皆同(개동)이다 그래요.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둘 다 똑 같다, 같은 자격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無不包容(무불포용)이란 거죠. 無不包容(무불포용) 포용하지 아니함이 없다, 다 포용이 된다, 이런거죠. 전부 다 살아난다. 그래야지 우리가 일상생활에 버젓이 어떤 상반된 견해와 서로 상대되는 그런 관계속에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것이 부정당한 입장으로만 계속 일변도로만 나간다면 안맞죠. 깨달은 분들의 말씀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분들의 말씀이 안 맞는 말을 했을 리가 없는 거죠. 그러면 무불포용이라는 말이 설명하고 있듯이 다 거기서 각자의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공능과 의미를 갖고 그대로 다 거기서 살아나는 입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죠. 그런 것을 달리 표현하면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하고 똑같은 동등한 자격이 있고 동등한 가치가 있고 동등한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남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죠. 그 나름의 가치를 우리가 찾고 이해하도록 해야된다는 거죠. 내가 몇 번 비유를 들었습니다만 담을 쌓는데 큰 돌과 작은 돌. 그것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똑 같이 똑 같은 가치가 있고 똑 같이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큰 돌 없이 작은 돌은 무용지물이구요, 작은 돌 없이 큰 돌도 아무소용없습니다. 작은돌이 밑에서 괴어 주어야 그 큰 돌이 큰 돌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에요. 모든 것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이해하고 조화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극히 조화로운 삶을, 조화로운 삶을 살자고 하는 것. 그것이 중도고 원융(圓融) 이고 융화(融和) 이고 원효스님이 말씀하신 화쟁(和諍)이고 그런거죠. 그래서 十方智者(시방지자) 皆入此宗 (개입차종)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전부 이 종지에 들어간다 전부 이러한 이치, 이 근본 취지에 다 들어온다. 十方智者(시방지자) 皆入此宗 (개입차종)이라. 우리도 이론적으로 배우고 사량분별로써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해를 하지만 그러나 역시 우리도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이런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도 해도 지혜로운 것이니까요. 이 종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종이란 뭐냐? 둘이 아닌 이치 - 둘이면서 둘이 아닌 이치,
그래서 중도(中道)인 삶, 조화로운 삶, 원융(圓融)하고
융화(融和)로운 그런 삶을 此宗(차종)이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宗非促延 (종비촉연)이니 一念萬年 (일념만년)이요 그 종지- 중도의 경지, 조화로운 경지, 원융(圓融)하고 융화(融和)로운 경지는 촉박하거나 오랜 것이 아니다 - 시간적으로 길거나 짧은 것이 아니다. 促(촉)은 짧은 것이고 延(연)은 긴 것이죠. 시간적으로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다. 시간과 관계없다 이 말입니다. 시간에 관계가 있으면서 시간을 초월한 거죠. 그래서 一念萬年 (일념만년) 이라 그러쟎습니까? 한생각이 만년이다. 수 억만년의 시간도 일초 빼버리면 수 억만년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초 일초가 모여서 수 억만년의 시간이 되는거죠. 그래서 일 초 속에 만년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외우시고 계시는 一念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 -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세월이고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 - 한량없는 길고 긴 겁이 곧 한 생각, 한 순간이다. 이 생각이라는 것은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시간의 단위로 1년 이란 표현을 하는데
우리들이 한 생각 일으켰다는 그 한생각이 아니구요, 한 순간 - 시간을 말할 때 한 순간이 만년이요, 이렇게 해석해야죠. 한 순간이 만년이다, 만년이 한 순간이다. 無在不在 (무재부재)라 十方目前 (시방목전)이로다. 앞에 宗非促延 (종비촉연) 이 종지라고 하는 것 - 중도의 이치, 조화로운 삶, 원융하고 융화로운 그런 가장 우리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그런 삶이란 어떤 길고, 짧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 순간이 만년이다 - 이건 시간적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또 이 종지라고 하는 것, 中道(중도), 不二(불이) 이것은 無在不在 (무재부재)다.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다.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고 그런 것이 아니란 거야. 이 十方目前 (시방목전)이라 그랬어요. 시방세계가 바로 눈 앞이다! 시방세계가 어디에든지 다 있다. 無在不在 (무재부재)라. - 있고 있지 않은 데가 없다. 모든 것에 다 있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한 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으로도 어디에도 다 존재하는 것. 이게 진리이죠. 사막에는 각박한 땅이니까 존재하지 않고 이쪽에 무성한 수림이 울창한 그런데만 존재하고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죠. 어떤 장소든 어느 지역이든 다 존재한다.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그랬죠. 우리가 법성게에서 한 먼지 속에 다 이치가 포함되어 있고 그것은 어느 특정한 먼지만, 뭐 사찰에 있는 그런 먼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서울이면 서울에 있는 먼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부산이면 부산에 있는 먼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먼지가 다 똑 같이 그러한 이치를 내포하고 있다. -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아주 이럴 때엔 법성게의 가르침하고 딱 맞아 떨어진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無在不在 (무재부재) 十方目前 (시방목전) 宗非促延 (종비촉연) 一念萬年 (일념만년)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데 중도적인 삶, 조화로운 삶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렇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極小同大 (극소동대) 忘絶境界 (망절경계) 이것은 此宗(차종)이죠. 此宗(차종) 이란 것은 皆入中道(개입중도)이고 또 융화, 조화, 조화의 극치이고 가장 이상적인 삶이고 그런데 그것은 결국은 우리의 한 마음 그 작용이죠. 그래서 그것은 極小同大 (극소동대) - 지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에 큰 것과 같다. 그래서 얼마나 큰가? 크기 때문에 忘絶境界 (망절경계)이다 - 경계가 끊어졌다. 없어졌다 이말이에요. 워낙 크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는 워낙 크다고 하지만 본래는 지극히 작기 때문에 큰 것과 같다 이렇게 했어요. 그 다음에 그 반대로 極大同小 (극대동소) 라. 지극히 크면서 작은 것과 같아서 不見邊表 (불견변표) 그 변표를 볼 수가 없다. 그 껍질을, 겉을 볼 수가 없다. 워낙 작아서. 어느 정도 있어야,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야 속이 있고 겉이 있을 텐데 이건 겉이 없다는 것입니다.
워낙 작기 때문에. 그런데 워낙 작은 것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워낙 작다. 이게 아주 깊은 뜻이 있는 것인데 모든 것이 다 크고 작음의 어떤 이치를 가지고 맞추면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있었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하고 똑 같은 이치라고 할 수가 있어요. 한 미진 중에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하는 그런 이치입니다. 이건 내가 늘 말씀드렸듯이 중도의 이치를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마음이 가장 중도의 공식이라고 할까, 중도의 법칙에 가장 잘 맞는 그런 존재가 말하자면 마음이다, 그런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이 마음은 佛法(불법)은 心法(심법)이다, '마음의 법'이다 해서 언제나 '마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신심명도 마음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그 마음을 통해서 우리 삶이 영위되는 까닭에 우리 생활과 끊임없이 관계를 지어 가면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이 마음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 마음 떠나서 우리 생활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되어야 하는거죠. 또 중도라고 하는 것, 지극한 도라고 하는 것, 또 대도라고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있고 우리의 삶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마음과 우리의 삶과 大道니, 中道니, 至道니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혼연일체(渾然一體)입니다. 표현이 달라서 그렇지, 편의상 이렇게 표현하고 저렇게 표현하고 해서 그렇지 '하나'죠.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것도 다 마음에 근거하고 있고 해서 우리가 이런 말들도
極小同大 (극소동대) 忘絶境界 (망절경계) 極大同小 (극대동소) 不見邊表 (불견변표) 이런 것도 아주큰것을 이야기하고 아주 작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작은 것이 큰 것이고 큰 것이 작은 것이다. 마음의 이치에 대해 들어보고 생각을 해본 사람이면 그냥 이해하죠. 그냥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일상생활에다가 이끌어서 해석을 해 보면 이게 다 어디 해당 안되는 데가 없을 거에요. 그래서 이것이 우리 삶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삶의 일면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신심명 강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스님 건강하십시요_()()()_
() () () 성불하십시요. 고맙습니다.
佛法은 心法이다. - 모든 것은 마음에 근거하고 있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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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皆同(불이개동)하야 無佛包容(무불포용)하니...둘이 아니면 다 같아서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있다. 고맙습니다. 법체 강령하시옵소서.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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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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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었읍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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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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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_()()()_ 佛法은 智慧를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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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문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