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경기도 오산시 평택시 화성시 전통사찰 8곳 순례하였습니다.
용주사
용주사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능사(陵寺)로서 1790년에 건립하였다.
절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다. 정조가 처음 절을 짓고자 장소를 물색하였는데 당시의 신하들이 이 갈양사터가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고 하였다.
이에 이곳에 절을 새우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게 하니, 비로소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된다. 절이 건립된 갈양사터는 천여 년 전인 신라시대 때 이미 부처님의 복전(福田)이 가꾸어졌던 곳이다.
봉림사
봉림사(鳳林寺)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북양리 642번지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흥사
신흥사는 큰법당·삼성각·청소년수련원·어린이법당·요사로 이루어져 있다. 큰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1990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당성과 불도에서 모셔왔다는 아미타보살상과 관음보살상, 그리고 근래에 새로 조성한 지장보살상과 천불상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키가 약 180㎝ 정도 되는 석조의 입상인데, 현재는 두껍게 호분이 칠해져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칠성도·현왕도, 그리고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수도사
신라 원성왕 때인 798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 ?∼844)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다만 절 주위에 흩어져 있는 석탑부재와 뒤편의 거목 느티나무로 보아 고찰이었으리라는 추측을 한다. 1911년 화재로 전소되어,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60년 최영석 스님이 중창하였다.
원래 절터는 정토선원이 있던 곳인데, 이곳에서 l00m 가량 떨어진 자리에 건립한 것이다. 지금은 수도사에 편입된 정토선원이 원효성사의 오도성지(悟道聖地)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효가 35세 때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구법순례를 떠나는 도중, 해골에 괸 물을 먹고,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는 깨달음을 얻어 구법의 길을 포기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그 깨달음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수도사에서는 현재 1만 2천평의 대지에 오도성지 불사를 계획 중에 있다.
약사사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廉巨和尙, ?∼844)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고려태조 때(927) 해일대사가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절의 내력을 적은 기록이 소실되어 현재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1971년 안태영 주지가 대웅전을 새로 짓고 1972년에는 후불도를 비롯하여 관음도·신중도·칠성도·산신도를 조성 봉안하였다. 1973년에는 요사와 선실을 짓고 대웅전의 단청을 마쳤는데, 이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나 세상에 전하고 있다. 요사를 신축하던 무더운 7월 어느 날 밤, 마당에 쌓아두었던 400여 장의 벽돌이 신축중인 요사 앞으로 옮겨져 사람의 키만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심복사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말엽에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1936년 중건불사때 발견된 기와에 1575년 3월이라는 명문이 적혀있어 이 때에 중창불사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현재 대적광전 앞에 있는 석주(石柱)에는 1705년 3월에 세웠다는 건립시기가 새겨져 있으며, 법당의 대들보에는 1767년 3월 17일에도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1824년, 1875년, 1936년 등에 계속해서 중건불사가 이루어졌다. 1990년에 대적광전을 중건하였고, 1991년에는 법당 앞마당을 확장하는 등 시설을 확충하였다. 1992년에는 후불도와 신중도를 봉안하였다.
자비사
자비사(慈悲寺)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75번지 덕천산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보적사
사적 140호로 지정된 독산성(禿山城)의 세마대(洗馬臺)에 자리한 세마사는 본래 보적사(寶積寺)라는 이름의 절이었으나, 1978년에 권율장군의 고사를 따서 세마사라고 개칭하였다.
독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인데, 임진왜란 때인 1593년 권율(權慄)장군이 군사 2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즉 장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 장군 가토가 이끈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는 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보내 조롱하였다. 이에 장군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려고, 백마를 산 위로 끌고 가 흰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물로 말을 씻을 정도로 물이 많다고 착각하고는 퇴각해버렸다. 그후 나라에서 독산성에 세마대(洗馬臺)를 세우고, 병기창고를 두어 군사훈련지로 정하였으며, 산 이름을 석대산(石臺山)에서 세마산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