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캄보디아의 수수민족 (3)
중국계 캄보디아인 (화교)
Chinese Cambodian

"중국계 캄보디아인"(Chinese Cambodians, 화교[華僑])은 중국계 조상을 둔 캄보디아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크메르어로는 "크마에 쩬"(Khmer-Chen) 혹은 "쩬 크마에"라고 부른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들은 소수민족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를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42만5천명 정도의 인구로 추산됐는데, 1984년 인구조사에서는 61,400명밖에 남지 않았었다. 이는 전쟁과 불경기가 겹친 데다, 크메르루즈와 베트남이 연속적으로 캄보디아를 통치하면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이민을 떠난 데도 그 이유가 있다.
1. 경제적 역할
1963년, 해외거주 화교 연구의 대가 윌리암 윌못(William Willmott)은 캄보디아 내 화교들의 90% 가량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오늘날의 한 통계를 보면 캄보디아 내 화교의 60%가 도시지역에 거주하며 주로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부분 상점주인이나 쌀, 사탕야자, 과일, 어류 등을 취급하는 가공, 중개업자 및 대부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껌뽀웃(Kampot) 도에 사는 화교들과 꺼 꽁([코콩] Koh Kong) 도 일부 지역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경우, 후추와 과일(특히 사으마우[rambutans: 태국어 람푸탄], 두우랜[durians: 태국어 "두울리안"], 코코넛)을 재배하고 있다. 시골지역의 일부 화교들은 바다 어업에 종사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사진) 중국계 크메르족 어린이들이 프놈펜에서 진행된 용춤놀이를 감상하고 있다. ☜ 확대사진보기
대부부의 화교 대부업자들은 크메르족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여,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50년대의 연구들을 보면, 화교계 상점 주인들이 월 10-20%의 고이율로 전당이나 대출을 해주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호주 식민지상업흥신소"(Australian Colonial Credit Office)에 따르면, 이러한 화교들의 고리대금업으로 인해, 1952년에 캄보디아 농민 75%가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대부업과 상점경영을 하는 데 있어서, 순수한 "화교들"과 "화교계 크메르인"(Sino-Khmer: 화교와 크메르인의 혼혈)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방언집단
캄보디아 내에서 중국어 사용자들은 5종류의 주요한 방언(사투리)집단으로 나눠진다. 그 중 조주어(潮州話, Teochiu)가 60%로 가장 큰 집단이고, 그 다음은 20%를 차지하는 광동어(Cantonese), 7%의 복건어(Hokkien), 그리고 각각 4% 정도의 인구를 가진 해남어(海南話, Hainanese)와 객가어(客家話, Hakka)가 그 뒤를 잇고 있다.
2.1. 조주어 사용집단
캄보디아 내 시골지역 화교의 90%를 차지하는 조주어 사용인구는, 마을창고를 운영하고 시골의 신용대부업 및 쌀거래 시장을 장악하고, 채소도 재배한다. 도시지역에서는 종종 수출입 무역이나 전통 약제업, 그리고 노점 등을 운영한다.
2.2. 광동어 사용집단
1930년대 후반 조주어 사용 인구가 이민오기 전까지, 광동어 사용집단은 가장 큰 화교공동체였다. 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한다. 이들은 건설기술자나 목수로서 물류와 건설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크메르어로는 "쩬 쩌똥"(Chen-Catung)이라 불린다.
2.3. 해남어 사용집단
해남어 사용집단은 껌뽀웃(Kampot) 도에서 후추 재배로 이민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이 산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프놈펜으로 이주했고, 호텔업과 요식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장악했다. 이들은 양복점과 악세라리 상점업을 하기도 했다.
2.4. 객가어 사용집단
프놈펜 지역으로 새롭게 이주해온 객가어 사용 화교들은 전통적인 치과업이나 한약판매, 신발제조업 등에 종사하는 것이 전형적이다.
2.5. 복건어 사용집단
복건어 사용 공동체는 수출입 무역과 은행업에 종사한다. 캄보디아 화교들 중 부유한 계층은 대부분 복건성 출신들이다.

|
(사진) 2011년 2월 2일, 구정을 맞이하여 캄보디아 왕궁에서 행한 사자춤 공연의 모습. |
3. 역 사
3.1 중세의 역사
중국인들이 캄보디아에 출현한 역사는 13세기 원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던 주달관(周達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의 포르투갈 선원들은 프놈펜에 중국인 거주지역(객관)이 존재했다고 기록했다. 이 초기의 화교들은 재빨리 현지화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농업사회였던 고대 캄보디아 사회에 동화되었다. 초기의 화교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었고, 현지의 크메르 족이나 짬 족(참족, Cham) 여인들과 결혼했다. 이러한 화교이민자들은 명나라가 멸망한 후 18세기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해갔다.(주1)
3.2. 프랑스 식민지시대
방언집단의 구분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캄보디아 내 화교들을 다룸에 있어서, 베트남의 지아 롱 황제(Gia Long: 1802-1820 재위)가 고안한 출신지역과 방언에 따른 구분법을 차용해 사용했다. 이러한 방언집단은 "방"(bang: 프랑스는 "집단"[congregation])이라 불렸는데, 각 집단에는 고유한 지도자가 있었고, 이 사람이 법질서의 유지와 세금징수 등의 책임을 졌다. 캄보디아 내의 모든 화교들은 "방"에 소속되는 것이 강제되었다. "옹방"(ong bang)이라 불린 "방"의 수장은 선거로 선출했다. 그는 구성원들과 정부 사이의 매개자였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만일 "방"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이 발견되면 추방을 시키곤 했다.
3.3. 독립 후의 상황
캄보디아 내 화교들을 관리하던 프랑스 식민당국의 시스템은 1958년까지도 유지됐다. 1960년대에는 적어도 프놈펜에서만큼은 화교공동체를 위해 설립된 병원에 대한 기금마련과 관리를담당하던 "화교병원위원회"(Chinese Hospital Committee)가 화교공동체를 관할했다. 이 위원회는 캄보디아 내에서 가장 큰 화교 상공인 연합체로, 조직의 정관에 따라 조주어 사용집단에서 6인, 광동어 3인, 복건어 2인, 객가어 2인, 해남어 2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이 위원회는 프놈펜 화교공동체의 공인된 지도부로 재편되었다. 지방의 군소 시군에서는 "화교학교위원회"가 유사한 기능을 담당했다.
1971년 정부는 새롭게 화교공동체를 관할할 조직으로 "캄보디아 화교연합회"(Federated Association of Chinese of Cambodia)란 단체를 출범시켰다. 이 기구는 캄보디아 내 모든 화교 영주권자들을 포괄하는 최초의 조직이었다. 그 정관에 따르면, 연합회는 "사회적, 문화적 분야와 공공보건 및 의료분야에서 중국 국적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프놈펜 및 여타 지역의 화교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한 자산을 관리하고, 캄보디아와 중국의 우호관계 증진을 위해 설립되었다. 전국적인 화교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재편할 것으로 기대된 이 지도력의 출범은, 사회, 정치, 경제 등 전 분야에 걸쳐 개별 방언집단을 넘어서는 지도력을 창출하고자 한 1960년대 이래의 기획이 실현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중국계 화교들과 크메르 민족 간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상호간 혼인도 이루어졌고, 중국계 크메르인들(Sino-Khmer: 중국-크메르 혼혈)이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상당하다. 이들 중국계 크메르인들은 화교공동체나 크메르 공동체 어느 쪽이든 아주 쉽게 동화되어 들어가곤 했다. 윌리암 윌못은 캄보디아 독립 직후부터 크메르 공화국 시대까지 한 중국계 크메르인 엘리트가 캄보디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3.4. 크메르 루즈 정권
크메르루즈의 집권은 캄보디아의 화교공동체에 대해 몇 가지 측면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크메르 루즈는 도시를 점령하고 나자, 지역의 시장들을 폐쇄시켰다. 윌못에 따르면, 이러한 시장의 철폐는 도소매업을 사실상 소멸시킨 것으로 "[거의가 화교였던] 상인들은 도시의 무산계급과 별 차이가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고 한다.
화교들은 생계수단을 모두 잃어버린 것을 물론이고, 계급적 차별에도 시달려야만 했다. 그들은 대부분 고학력의 도시 상인들이었고, 크메르 루즈가 가장 증오할만한 여러 가지 징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화교 출신 난민들에 따르면, 이들은 크메르 루즈 정권 하에서 도시출신 캄보디아인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고, 베트남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 하나의 인종적 단위(민족)로 대우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베트남이 중국에 반감을 품었긴 했지만, 베트남과 그 하수인이었던 프놈펜 정권이 크메르루즈와 동일하게 했을 것으로 보고 있진 않다.
3.5. 최근의 상황
크메르 루즈 정권이 붕괴한 후 강압적 통치는 제거되었다. 화교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고, 중국어 신문도 발행되었다. 가정에서 중국어 사용을 금지했던 것도 철폐됐다.(주2) 특히 화교의 경제적 기여가 주목받아,(주3) 중국계 크메르인들이 다시금 과거의 사업들을 개업하도록 장려받았다. 현재의 캄보디아 경제는 국가경제를 대규모로 움직이고 있는 "화교계 크메르인"(Sino-Khmer) 기업들에 많이 의존한다.(주4) 또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화교계 혈통인 국회의원들이 많이 출현함으로써, 더욱 단단한 기반을 획득해나가고 있다.(주5)
화교계 크메르인 유명인사
- 분 라니(Bun Rany): 캄보디아 적십자사(CRC) 총재. 훈 센 총리의 부인.
- 신 시사모웃(Sinn Sisamouth): "크메르 음악의 제왕"으로 불리는 그는 태국, 캄보디아, 중국, 라오스, 베트남계 혈통의 혼혈인이다.
- 왕 스레이노(Vang Srey nou): 캄보디아의 유명 모델이자 여배우. 그녀는 중국, 베트남, 라오스계의 혼혈이다.
- 쩜 쁘라싯(Cham Prasith): 캄보디아 상무부 장관. 그는 "아익 틱 유"(Aik Tik Yu)라는 중국식 이름을 갖고 있다.
- 떼어 반(Tea Banh
): 국방부 장관. 원래 중국계 태국인이다.
|
첫댓글 조주어,,,
말이 잘 통하지 않터군요,,
야, 역시 꼬르 님은 대단하시네요.. 중국어를 할줄 아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