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2일 청림회(1)
오늘 <법화경>, 우리 교재 95쪽, 122번부터 할 차례네요. 불교 경전 중에서 이 <법화경>을 “경(經) 중의 왕(王)”이라 라고, 물론 경(經) 안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경(經) 중의 왕(王)”이라고 그렇게 칭송을 하는 것은 이것이 언제 결집이 되었든 간에 이 <법화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파악이 되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 가르침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그런 입장에서 결집된 것이 <법화경>입니다. 그래서 저 앞에서도 있었지마는 이 <법화경>을 설하게 된 동기가, 머지않아 이제 부처님은 열반에 들게 될 것이고 열반에 들 것을 염두에 두고, 최후로, 그동안 내가 비장해 두었던, 그런 최고의 가르침을 전하노라, 하는 그런 말씀이 간간이 나오죠. 그래서 이 결집이 부처님 열반에다 초점을 맞춰서, 물론 부처님 열반하시는 그 날과 열반하시는 앞 뒤 며칠, 그런 이야기는 뭐, <열반경>이 되겠습니다마는, 이것은 꼭 열반에다 맞췄다기 보다는 일생을 교화하시고 최종적으로 열반을 앞두고 종합하고·정리하고·또, 유언하고 그러시면서 최후로, 비장해 두었던 최고의 가르침을 이제, 전수한다, 하는 그런 입장에서 결집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의 다른 가르침을 많이 신봉해 왔던 사람들과 사상적 충돌이 있었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경전하고 이 <법화경>을 비교해 보며는 이걸로, “대승(大乘) 불교 운동의 선언서다.”, 이렇게 서슴지 않고 표현을 하는데. 그래요. 대승 불교 운동을 하려면은 그 동안 <법화경> 표현을 빌리자며는 소승 불교가 그 동안 세상에, 모두인 양으로 그렇게 알고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사상과 상당히 충돌이 심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 대승 불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금은, 물론 불교 안에서의 문제도 있습니다. 근래는 워낙 통신이 발달하고·교통이 발달해서 남방 불교·북방 불교, 이런 불교들이 서로 잘 이제, 교환하고 가서 연구하고 하는 그런, 사례들이 아주 많은데. 그래서 이제, 서로 어떤 새로운 불교·몰랐던 불교, 이런 것들이 많이 전파되고 해서, 간간이 어떤 사상적 충돌이라 할까, 이런 것들을 볼 수가 있어요. 그건 이제 불교 안에서의 이야기고. 사회 전반에서 볼 때는 사실 또 다른 종교의 사상과 불교라고 하는 것과의 어떤 그, 사상적 충돌이라 할까,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상당히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도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다른 종교의 주장을 드러내는 사실은 도대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거부감을 일으키거든요. 그런 것들이 하나의 충돌이거든요. 서로 사상적 충돌이라. 그러면 불교 이야기를 듣고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할 거란 말 이예요. 그래서 일단은 서로 거부감을 느끼고 서로 충돌을, 약간은 정신적으로 일으키지마는 나중에 가서는 결국 이제, “무엇이 진리인가? 정~말 참되고 바른 이치인가?”, 하는 것, 이것이 이제 승부를 좌우할 거란 말이예요.
가난할 때는 그야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먹고 사는데 사상이고·바른 것이고·이치고 이런 게 없었지마는, 사람이 먹고 살만하면 누구나 다 바른 것을 따르게 되고 바른 이치를 따르게 되지 뭐, 누가 구호물자 많이 갖다 준다고 해서 그리로 꼭 기울거나 그러는 게 아니라구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앞으로 볼 때, 참으로 바른 가르침, 뭐 불교 안에서도 더욱 중요한 일이지마는 대사회적으로 볼 때도 정말 진리의 가르침·올바른 가르침,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과학의 발달과 관계없이 정말 사람들의 상식에 맞고, 또 살아가는 경험에 맞고, 또 이치에 맞고, 하는 그런 종교가 결국은 살아남지 않겠는가? 또 살아남는다고 하는 말은 그런 가르침이야말로 진정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사람들의 마음을 건질 수 있는 그런 길이다. 이것은 자명한 일이죠, 사실은. 당연히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참으로 이 불교가 많이 전파돼야 되고, 또 불교에서도 정~말 <법화경>같은 이런 그, 아주 뛰어난, 바른 진리의 가르침이 많이 전해져서 불교 안에서 첫째, 어떤 사상적인 것, 또 어떤, 정말 진리인 것을 이렇게 내세우고·그것을 주장하고·또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결국 많아야 된다고 하는 것, 또 많도록 하는 어떤 운동을, 사실은 일으켜서 그런 일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하는, 그런 것들이 참 필요한 때가 아닌가, 그래요. 지금같이 이렇게 밝은 세상인데도 보며는 불교 신문이나·불교 TV·불교 라디오 같은데 나는 광고들 보며는 우습지도 않은 광고들이라구요. 내가 가끔 이야기하지마는 뭐, 이렇게 바위가 생기다 보며는 사람 비슷하게도 생기고·누워 있는 사람 비슷하게도 생기고·서 있는 사람 비슷하게도 생기고, 잘~ 뜯어서 억지로 갖다 끼워 맞추면 비슷~해요. 근데 그걸 가지고 무슨 불상(佛像)이니·뭐어니, 이런 식으로 해서 팔아먹는데 그런 광고라든지·그런 어떤 정신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눈 밝은 사람이 많아야 되고·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되고·제대로 이치를 꿰뚫어 보는, 정말 사람은 이치대로 살아야 되거든요. 진리라는 게 뭡니까? 참다운 이치라는 뜻이니까. 참다운 이치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그런 게 발을 못 붙이거든요. 지금도 이렇게 밝은 세상에 그런 것들이 그렇게 성행을 하는 걸로 봐서는 대중들은, 사회가 이렇게 발달을 했다 해도 참으로 정신적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구나, 하는 것을 아주 절실히 느낍니다. 이 <법화경>이, 물론 그동안도 불교가 세상을 많이 교화를 했지마는, <법화경>이 세상에 등장하는 데는 그만한 그런, 어떤 사상적인 것, 그것이 밑에 깔려 있었다는 거죠. 그게 이제 내가 말하는 소위 “대승(大乘) 불교 운동의 선언서”로서 <법화경>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르침이다. 그동안은 물론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서 방편의 가르침이 필요했고, 필요하지마는 너무 사람들이 방편에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나아가지 못하면 그 방편은 또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배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그냥, 가야 되거든요. 근데 강을 건넜다고 뭐, 뗏목이나·자기를 건네준 배에 어떤 미련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당치도 않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방편이란 그런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법화경>은 참 그런 면에 있어서 아주, 아주 강한 주장을 그렇게 많이 하는 내용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해서 삼승(三乘)을 모두, 한데 모아 가지고 일불승(一佛乘)으로 귀결시키는 그런 내용인데. 그런 “삼승(三乘)”이라고 하는 방편설이 어느 한 순간까지는 필요했지마는 그러나 그것을 종래, 끝까지 의지할 것은 아니라는 거, 끝까지 의지할 것은 아니라는 거, 여기에 큰~ 뜻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화택(火宅)의 비유”를 공부하고 있는데, ‘비유’가 지난 시간까지 거의 끝났죠. 오늘 보며는
122. 諸子是時(제자시시)에 歡喜踊躍(환희용약)하야
이 여러 아들들이 그 때에 환희용약(歡喜踊躍)해 가지고서
乘是寶車(승시보거)하고 遊於四方(유어사방)하며
보배 수레를 타고 사방을 노닐면서
嬉戲快樂(희희쾌락)하야 自在無礙(자재무애)하더라
희희쾌락(嬉戲快樂)했다. 그리고 자재무애(自在無礙)하더라, 그랬어요. 희희쾌락(嬉戲快樂)하면서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아무 걸림 없이 그렇게 편안하게 살더라. 이건 이제 사실은 이 아이들은 전부, 양이 끄는 수레·사슴이 끄는 수레·소가 끄는 수레를 생각하고 나왔는데 정작 그 수레들은 하나도 없고 큰, 흰 소가 끄는, 거대한 아주 호화찬란한·어마어마한·보배로 된 수레가 있더라는 거예요. 그 수레를 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 나눠 줬다, 이 이야기거든요. 그 보배 수레를 받고는 환희용약(歡喜踊躍)해 가지고 이 보배 수레를 타고는 사방으로 즐겁게 쾌락하고 자재무애(自在無礙)했다, 하는 것, 이것이 이제 궁극적으로 우리의 살 길이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은 어떤 방편에도 끄달릴 것이 아니고 자주적 삶, 그야말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삶, 그리고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이미 가지고 있는 무한한 보물·한량없는 신통·무량복덕(無量福德), 이 모든 것에 눈을 뜨고 거기에서 말하자면, 어떤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줄 알 때, 그게 이제 우리가 목적하는 바, 성불(成佛)의 길이고·부처의 삶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이 <법화경>이 한마디로 가장 중요한 것만 말씀드리면, 이제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불교, 오늘의 한국 불교 세태와 연관시켜서 우리가 볼 때, 참 이 <법화경> 성향운동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서 이왕 우리가 불교를 믿고·의지하고·공부를 한다며는 정말 진정한 불교·가장 최첨단의 불교·가장 최!궁극의 불교, 이런 그 최고의 불교를 우리가 공부하고·의지하고·믿고·따라야지 언제, 세월이 언제까지나 기약해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도 없는데 말이죠, 방편설에 그렇게 허덕이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대목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이 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게 이제 비유의 마지막 단계였고. 그 다음에 이제 “비유”하고 “법”하고 합해 가지고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이야기, 너무 많이 듣고, 또 스스로 공부한 바도 많고 해서 잘 아시겠지마는 그래도 이런 것은 우리 마음이 선뜻 안 내킵니다. 그래서 세뇌가 되어야 되요. 아무리 바른 이치라 하더라도 이게 세뇌가 되고·의식화가 되어야 된다고. 당치도 않는 그런 것도 계~속 세뇌 시키고 의식화 운동을 통해서 그만,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믿거든요. 사람이란 게 참 묘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원리라, 그것도. 우리 한생각이 한 번 잘못 들어가 가지고 없는 것도 있다·있다·있다, 하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그래 완전히 그 속에 빠지는 거야.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자기가 빠져 가지고 그렇게 이제, 헤매고 있는데. 이런 바른 이치야, 사실은, 그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의식화하는데 들어가는 노력의 10분의 1이면 된다고요, 이게. 의미 있!는 이치, 정말 진정한 바른 이치라면 이거는, 이게 이제 우리 의식에 뿌리 내리는 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잘 안되는데. 그래서 자~꾸 아는 이야기라도 반복해서 듣고·아는 글이라도 또 보고·볼 때마다 이제 생각을 좀 깊이 하고,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이라고 하는 거, 이건 이제 습득하고 반복하는 데 의미가 있는 거거든요.
부처님도 이제 ‘비유’를 들어서 비유 안에 다~ 이야기가 됐지마는 그걸 이제 ‘실법(實法)’하고, ‘실(實)다운 법(法)’하고 합해 가지고 설명을 하려는 순간이죠.
123. 告舍利弗(고사리불)하노니 我亦如是(아역여시)하야
사리불에게 고하노니.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앞에는 이제 장자(長者) 비유를 했죠. 장자(長者)와 아이들, 비유를 했습니다. 그와 같이, 나도 또한 그와 같아서
衆聖中尊(중성중존)이며 世間之父(세간지부)라
여러 성인(聖人)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높은 성인(聖人)이다, 이 말이야. 그래, 성중성(聖中聖), 이러잖아요, 부처님을, 성중성(聖中聖). 이런 데서 따온 말이거든요. ‘성인(聖人) 가운데 성인(聖人)이다.’ 여기는 성중존(聖中尊), 했어요. 중성중 존(衆聖中 尊). 여러 성인(聖人)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어른이다. 그러면서 세간의 아버지다.
124. 一切衆生(일체중생)이 皆是吾子(개시오자)어늘
일체 중생은 다 나의 아들이다, 나의 자식이다.
深著世樂(심착세락)하야
그런데 세상락[世樂]에 너무 깊이 집착해 가지고서.
無有慧心(무유혜심)하며
지혜의 마음이 없으며
三界無安(삼계무안)이 猶如火宅(유여화택)하며
이, 유명한 말이거든요. “三界無安(삼계무안)이 猶如火宅(유여화택)이라”. 많은 사람들이 인용해서 씁니다. 우리 유명한 고려 보조 국사(普照 國師)도 이 말을 이끌어다가 쓴, 그런 글이 있죠. 삼계무안(三界無安)이 유여화택(猶如火宅)하며. 삼계(三界)가 편안하지 않는 것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얼마나 다급하고·얼마나 뜨겁고·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 그, 이제 설명은 저 앞에서 많이 했었죠.
衆苦充滿(중고충만)하니
여러 가지 고통들이 충만해 있으니
甚可怖畏(심가포외)라
심히, 아주 두렵고 두렵더라.
125. 常有生老(상유생노) 病死憂患(병사우환)하야
항상 태어나고·늙고·병들고·죽는 그런 우환(憂患)들이 있어서. 뭐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그런 우환(憂患), 없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다~ 병이 있고. 건강하면 어디가 못났어도 또 못났고. 아무리 건강해도 또 늙어 가니까. 뭐, 백 살 쪼끔 넘긴 사람들은 간~혹 있습디다마는 2백 살 넘은 사람은 없더라구요. (웃음) 백 살 넘긴 사람도, 글쎄요, 백만 명에 한 사람 될까? 백만 명에 한 사람도 될까 말까한 그런 숫자라. 그러니 그건 뭐 굳이 칠 것도 없는 거라. 친다손 치더라도 그까짓 것, 2백 살을 살지를 못 하거든요.
如是等火(여시등화)가 熾然不息(치연불식)하거늘
이와 같은 불길이. 치연(熾然)이야. 아주 활활 타오르면서 쉬지를 않는다. 쉬지를 않애요, 이게 쉴 날이 없어. 이, 생사(生死)가 참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가 하며는. 지금 이 지구상에 예를 들어서 6, 70억 인구가 있는데 그 6, 70억 인구가 다~ 죽은 뒤에 내가 제~일 꼴찌로 죽는다 하더라도 백 년, 못 살아. 오늘 태어난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내가 죽는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백 년이 안 된다고요. 그렇게 다급한 일이고·너~무나도 확실한 일이고·너~무나도 결정된 사실이야, 이게. 그러니 좀 이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얼마나 참 다급하고·걱정스러운 일이냐, 는 거죠.
부처님은 일찍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할 때 이런 문제에 정말 깊이 고민하다가,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면, 그까짓 것, 아무리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린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무 의미가 없다고·아무 맛도 없고·재미도 없다, 이렇게 본 거죠. 그러니까 그런 부귀영화가 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하니까, 그만··· 가지고 있으나 버리나, 아무 것도 관심이 아니야, 이건. 그 사람에게는 가져도 가진 것도 아니요 버려도 버린 것도 아니여. 아예, 뭐 마음이 없는 분이니까. 그런 시각도, 뛰어난 종교적 영혼을 타고난 이들은 벌써 인생을 그렇게 젊었을 때 볼 줄 알았다는 거죠.
126. 如來(여래)는 已離 三界火宅(이리 삼계화택)하고
여래는 이미 삼계(三界)의 불타는 집과 같은 그런 고통을 다~ 떠났고
寂然閑居(적연한거)하야
고요하게 또 한가하게 그렇게 이제 살아서.
安處林野(안처임야)호니
편안하게, 저 들·숲 속에서 편안하게 있으니
今此三界(금차삼계)가 皆是我有(개시아유)며
그런데 나야 그렇게 편안하게, 모든 생사(生死)의 고통을 벗어나서 편안하게 잘 살지마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삼계(三界),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라고 하는 이 삼계(三界)라고 하는 것이 다 나의 소유여. 이제 남의 것이 아니다, 이거여. 다~ 내가 돌봐야 하고·내가 관리해야 되고·내가 걱정해야 되고··· 그 보살(菩薩)의 자비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거든요. 그 뭐, 자기 한 가족만 안전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죠. 그건 뭐, 보통 사람들이 다 하는 거니까요. 그래 부처님은 이 지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뭐 인도라고 하는 넓은 땅덩어리,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까지 전부 당신의 소유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어. 욕심이 많을라며는 이쯤~ 돼야죠.
저기 경상도 사람들은 저어기 호남평야 한 번 가 보며는 ‘아유, 저 넓은 땅, 한 만 평 쯤 가졌으면···’ 하지만, 그까짓 만 평, 몇 푼어치나 돼요? 부처님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전부 당신의 소유다, 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고
其中衆生(기중중생)은 悉是吾子(실시오자)어늘
그 안에 사는 사람들·그 안에 사는 뭇 생명들은 전부 당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거늘
而今此處(이금차처)에
지금 이 곳에
多諸患難(다제환란)이라
이 환란(患難)이 너무 많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참 사람들이 사는 꼴이, 이루 말할 수 없어. 환란(患難) 덩어리여. 세월이 그렇게 흘렀으며는, 그래도 그동안 성인(聖人)들도 많이 나오고 그렇게 했는데, 이게 어리석음과 지혜가 막상막하인지 도대체 전체적으로 좋아지는 현상이 거의 없어요, 이렇게 보며는. 모르긴 모르지마는 과거나·지금이나···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혜롭게 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뭐, 그 좋아진 것 없이 그렇게 아주 무지몽매하게 어리석게 사는 거죠. 뭐, 교육이 아무리 높다 한들·지위가 높다 한들 그건 아~무 쓸모없더라구요. 이 마음의 어리석음·어떤 이치에 대한 어리석음은 이게 뭐, 많이 배우고·적게 배우고도 아무 상관없고 뭐, 부귀하고·가난하고도 아무 상관없고. 늙고·젊고도 또 상관없고. 그러니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이 곳이 환란(患難)이 너무 많다.
唯我一人(유아일인)이
오직 내 한 사람이
能爲救護(능위구호)니라
내 한 사람만이 이 세상을 구호(救護)할 수가 있다.
127. 雖復敎詔(수부교조)나
비록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치고 또 가르쳤으나
而不信受(이불신수)는
그러나, 불신수(不信受)여. 신수(信受)하질 않애. 믿고 받아들이지를 않애. 참 답답할 거야. 옛날부터 이제, 그런 말 있어요. ‘접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웃음) 여기 전부 접장들만 앉았죠? 옛날 표현이··· 하도 속을 썩혀 가지고. 잘 믿고 따르지를 못 하고 도대체가 말을 안 들으니까. 그러니까 하도 속을 썩혀 가지고 속이 다~ 타서 똥이 얼마나 쓴지 개도 안 먹는다는 거야. 옛날 말이 하나도 안 틀려. (웃음) 그래 부처님도 이런 말을 했어. 가르치고 또 가르쳤지마는 믿고 받아들이지를 않아. 왜 그런가?
於諸欲染(어제욕염)에 貪著深故(탐착심고)일새니라
욕염(欲染). 뭐, 하고자 하는 게 그래 많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 하고자 하는 게 그리 많은지. 온~갖, 하여튼 어디서 보고·어디서 들었는지 별별 뭐, 하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아요. 거기에 물들어 가지고. 여~러 가지, 온갖 욕염(欲染). 온갖 하고자 하는 데 물들어 가지고. 물만 들인 것이 아니라 아주 그것을 탐하고 집착하고, 그것이 너무너무 깊기 때문이다.
128. 以是方便(이시방편)으로 爲說三乘(위설삼승)하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방편으로서 그들을 위해서 삼승(三乘)을 설했다.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삼승(三乘)이라고 하는 것은 성문(聲聞)의 가르침·연각(緣覺)의 가르침·보살(菩薩)의 가르침입니다. 그, 방편으로, 병(病)이 들었으니까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내가 이런저런 약방문을 그렇게 펼쳐 보인 것이다, 그거야.
令諸衆生(영제중생)으로 知三界苦(지삼계고)케하고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三界)의 고통을 알게 하고
開示演說(개시연설) 出世間道(출세간도)어든
출세간도(出世間道). 세간을 벗어난 그런 길을. 개시(開示)하고. 열어 보이고 연설했다. 그 출세간도(出世間道)라는 것이 무슨, 어디, 세상 살다가 산으로 도망가서 사는 그런 길을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세간에서 출세간(出世間)의 눈을 뜨라, 는 거죠. 그래서 이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아닙니까? 정말 아름다운 법, 정말 지극~히 아름다운 법,은 비유컨대 뭐와 같으냐? 연꽃과 같다. 연꽃이라고 하는 것이 다, 그런 미묘한 법, 아름다운 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 우리가 그걸 한 마디로,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마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제일로 치죠. 연꽃의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도 아주 혼탁한 물 속에 있지마는 연꽃 그 자체는 항상 깨끗하다. 그렇다고 세상에 살면서 저 혼자 잘난 것 같이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렇게 살라는 뜻이 절대 아니예요.
불교는, 심지어 모범도 너무 지나치게 보이지 마라, 그래요. 모범도. 너무 사람이 한결같이 모범만 보이며는 옆에 사람이 숨이 막혀. 빈틈도 있고·실수도 있고·우정 실수도 좀 하고·우정 빈틈도 보이고···, 이렇게 해야 이제, 사람이 가까이 할 수가 있고·숨을 쉴 수가 있고, 뭔가 틈이 있다는 거죠. 모범도, 계속 그렇게 모범만 보이지 마라, 이렇게까지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슨 뭐, 여기서 출세간도(出世間道)라고 하는 것이 뭐, 불교 좀 믿고·절에 좀 쫓아다닌다고 해 가지고는, 어떻게 어디서 누구한테 배웠는지 하여튼 뭐, 안 먹으면 지 혼자나 안 먹지, 온 가족을 그냥, 아무 것도 안 먹이고 말이야, 절에 비구승들보다도 더 아주, 청정하게 가족들을 그렇게 키우려고 하는, 그렇게 잘못된 소견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의외로 많아요, 보면. 그런 식이 아니거든요, 불교가. 그 뭐, 꼭 먹물 옷 입어야 뭐가 되는 줄로 그렇게 알아. 전혀 그런게 아닌데 그렇게 잘못 알고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출세간도(出世間道)는 건, 참, 이걸 잘 이해해야 되는데···이 출세간도(出世間道), 잘못 이해하면 정말 사람이 잘못 되고 광신도(狂信徒) 돼 버리고 크게 아주 뒤틀린 사람 되고. 자기가 다니는 절의, 자기가 믿는 스님의 그 가르침만 최고라고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는 더 이상, 뭐, 바늘 끝도 하나 안 들어가는 그런 소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뜻밖에 그렇게 많다구요. 그러니까 옛날에 <법화경>이 결집될 무렵에, 얼마나 소승(小乘)들이 답답했으면 이런 <법화경> 같은 경전이 나왔겠는가? 이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종교가 없다면 모르거니와 종교가 있다면 그런 바른 종교를, 또 바른 불교를 믿고 따르도록 하는 것, 이게 이제 정말 필요한 거다. 그래서 “정법(正法) 운동”, 법을 전하는 데에도 정법(正法)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이 여러 사람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이 출세간도(出世間道)에 대해서 참, 연구를 많이 하고·생각을 많이 하고·또 깊이 생각 해야 할 그런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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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우리가 호흡하고, 웃고 떠들며 살고 있는,,,바로 이곳에서 "出世間"의 눈을 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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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이미 가지고 있는 무한한 보물, 한량없는 신통 無量福德에 눈을 뜨고 거기에서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줄 알 때, 우리가 목적하는 바 成佛의 길이고 부처의 삶이다... 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 _()()()_
지금은 正法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참으로 필요한 시기이다...가을햇살님!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_()()()_
감사합니다...
今此三界 皆是我有
其中衆生 悉是吾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