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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克” 독서 감상문
야간 1학년 배시창 에발도
레포트를 쓰기 전에 먼저 이 좋은 책의 독서를 의무적으로 추천해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럴 경우가 아니면 언제 읽어 보겠습니까.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건성으로 읽다가 무의식중에 정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 글 한자 버릴 것이 없는 내용이라 마음속에 새기기에 바빴습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다시 읽어볼 귀중한 서적임을 인식하고 마음이 요동 칠 때에 언제나 곁에 두고 읽어 볼까합니다. 신부님께서 이 책을 권한 意中을 알고도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원죄에 대해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만물을 아주 훌륭하게 창조하였고 그 중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가 되어 하느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의 생명을 만드시고 사람중심으로 세상을 만드셨다.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고 사람의 중심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을 바라보며 매우 만족하시며 기뻐하셨다.
하느님은 선이고 악은 사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결국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꼬임에 악을 선택하고 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善인 하느님을 실망시키고 배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 이 책의 저술 배경
그리고 천주교 전도를 위하여 중국에 왔던 스페인 예수회 신부출신 빤또하
(1571-1618)가 지은 책이다. 천주교 전도를 위하여 명나라에 왔던 예수회 신부들은 천주교의 敎義 등을 한문으로 저술하였는데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중국고전을 바탕으로 저술하였다. 칠극 또한 예외가 아니다. 서양의 중세 신학과 중국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전제가 되어야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다. 저자 빤또하의 고백
그는 팔 만리 떨어진 외국(스페인)에서 온 나그네인데 일찍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애를 받아 이 세상의 복이란 지극히 일시적이고 미미한 것이며 굳은 것도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아가 영원한 행복은 죽은 후에야 진실로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회의 가르침에 따라 뛰어난 분(예수님, 사도들, 성인 등) 들께서 밝혀주신 가르침으로 자신을 바로잡고 세속을 교화시키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인간과 사물이 참된 주인임을 알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매우 가련하게 여겼다. 구사일생의 고비를 겪으며 3년 만에 중국에 도착한 그는 언어와 문자에 가로막힌 벽을 실감하고 열심히 배우고 익힌다.
그런 후에 유학자(儒賢)들의 강론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儒學공부를 하기에 이른다. 덕을 쌓고 사욕을 이겨내는 일이 천주학문과 방법도 같고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 동의한다.
유학에 사람의 마음병은 일곱 가지가 있는데 마음병을 치료할 약 또한 일곱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것은 영원한 즐거움과 영원한 복을 쌓는 것이요, 없애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영원한 괴로움과 영원한 재앙을 없애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도 죄의 근본을 7가지의 실마리가 있고 실마리를 이겨내는 일도 7가지가 있다고 한다
가),죄의 근본 7가지
첫째, 교만, 둘째, 질투, 셋째 인색함, 넷째 분노, 다섯째 유혹, 여섯째 여탐이고, 일곱 번째 착한 일을 함에 게으름이다.
나),실마리를 이겨내는 7가지
첫째가 겸양으로 고만함을 이겨내는 일
둘째가 남을 어질게 대하고 남을 사랑하여 질투를 이겨내는 것
셋째가 재물을 버려 인색함을 이겨내는 일
넷째가 참고 견딤으로써 분노를 이겨내는 일
다섯째가 집착을 버림으로써 먹고 마시는 유혹을 이겨내는 일
여섯째가 욕망을 끊어서 여색에 빠짐을 이겨내는 일
일곱째가 하느님을 부지런히 섬겨서 착한 일을 함에 게으름을 이겨내는 일이다.
라. “七克” 권1
1. 교만을 누르다
첫째. 善이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이고
셋째,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자랑하는 일이고
넷째, 남을 경멸하며 자신은 뭇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고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고 남과 달리하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고 남을 놀리거나 모욕하고 싸움질하며 남을 공경하지 않고 효도로써 부모를 따르지 아니하고 잘못을 그럴 듯하게 꾸며 선을 가장하는 것들은 모두교만의 갈래이다.
2. 교만을 이겨내기는 어렵다(克傲難-극오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욕망을 쌓아 두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까 두려워한다. 그것은 악에 대한 두려움이다. 교만이라는 하나의 욕망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까 두려워 하드라도 선에 대한 두려움이다”
왜냐하면 덕과 교만이 서로 등을 지고 있지만 德에 대한 뜻이 한번만 바뀌어버리면 그 덕에서 교만이 생겨나 덕을 크게 해치게 된다. 덕의 형체가 존재한다 하드라도 덕의 비탕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육신을 공격하지만 교만은 정신을 공격한다. 교만이 우리를 공격 해 올 때 처음에는 악의 모습으로 다가오다 들어 올 수 없으면 덕의 모습으로 바꾸어 공격한다.
교만의 모습으로 바꾸어 공격하드라도 이겨내지 못하면 겸손하고 정성스러운 모습으로 僞裝 하고 다가온다. 부유한 모습으로 이겨내지 못하면 재물을 가볍게 보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귀한 모습으로 이겨내지 못하면 地位를 사양하는 모습으로 바꾸고 말 잘하는 모습으로 이기지 못하면 조용하고 잠잠한 모습으로 변신 시켜 다가온다.
선을 행하면 선을 행하는 명분으로 공격하고 교만을 피하려 선을 행하면 교만을 피하려는 선으로 우리를 공격 한다.
다른 욕망들은 죽으면 끝이 난다. 그러나 驕慢만큼은 殮(염)을 하드라도 관속에 여전히 모습을 가지고 있고, 葬事를 지내더라도 무덤 속에 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교만은 습관적인 행위이기에 죽는 날까지 당사자 자신도 모르고 지나지만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사방에 남겨 놓은 망자의 교만함의 흔적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다른 욕망들은 자리를 바꾸거나 시기를 바꾸면 점차 사라지거나 무너져 내리 내린다. 그런데 욕망은 장작불을 꺼버리면 솥의 물이 식어지는 재주밖에 부리지 못하지만, 교만만은 끈질기게 붙어 다닌다. 몸이 늙어가도 교만은 시들지 않으며 자리를 옮기면 교만도 그 자리로 따라오고 일을 바꾸면 교만도 일을 바꾼다. 그것을 애써 물리치려고 하면 더욱더 거세게 달려든다.
태양이 바로 아래로 비추이면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덕을 닦을 때도 바로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햇빛은 한쪽으로 기울 것이고 교만이라는 그림자가 반드시 따라 붙을 것이다. 덕을 바르게 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그림자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교만은 끼어들 틈이 없어 질 것이다.
3. 육신의 행복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함(戒以形福傲)
너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너희의 존재가 없었을 때에는 짐승보다 천하고 초목보다 보잘것없고 먼지보다 가벼운 존재였다. 길짐승은 기운이 세고 날짐승은 인간보다 빠르다. 풀과 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는다. 그것들은 인간보다 쓸모가 있으나 인간들은 쓸모가 없다. 그것들(사물들)은 인간을 부리지 않지만 인간은 그들을 부리지 않을 수 없으니 반드시 겸손해야한다. 그런데도 교만하니 한탄스럽도다.
사람이 외부와 접촉할 때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생각하며 자신의 아래위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될 것이다.
남들은 지혜와 능력 그리고 재주와 덕을 가졌는데 어느 하나도 남만 못하니 반드시 겸손해야 하겠다는 각오가 설 것이고,
자신의 내면을 생각하는 이는 선한 일은 하늘에서 빌려온 것이고 제주와 지혜는 다른 사람에게 배워온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으니 나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하느님이 지으신 만물을 부리려면 겸손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위에는 천사가 있다고 여긴다. 천사의 바탕은 우리보다 매우 아름답다. 언제나 천사가 지켜줌에 있어서 세상의 근심에서 벗어나게한다. 또 위에는 하느님이 계서 인간의 능력을 빼앗을 수 없고 지혜를 감출수 없으며 仁을 시들게 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반드시 겸손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면 교만을 없애고 겸손을 보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교만한것은 교만을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마음의 덕을 자랑하는 것을 경계함(戒以心德伐)
덕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덕을 가졌기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덕을 자랑하기 위해서 덕을 행한다.
덕과 지능은 근원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다. 그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영예 때문에 욕심을 낸다면 이는 벽을 뚫거나 울타리를
넘고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과 같다.
고운 옷을 입고 구걸을 한다면 어찌 그를 가련히 여겨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겠는가. 우리도 하느님의 동정을 받으려면 마땅히 부족함을 드러내어서 하느님이 감동하도록 움직여야한다.. 그런데 자신의 행위가운데 더러운 것은 감추고 덕만 자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겠는가. 넉넉하다고 생각하고 하느님께 빌것을 모르는 사람은 천하에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5.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여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경계함(戒好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너도 사람일 뿐인데 만약에 남들과 다르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 가운데 남과 다르게 되고 싶어 하는 이가 많다. 남과 다르게 되는 방법을 알거나 남과 다르게 되는 일을 행하는 이는 많지 않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곧 뜻이나 말 그리고 행동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6.명예를 좋아하는 것을 경계함(戒好名)
성서에도 “너희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 알지 못하게 행한다면 너희 아버지가 너희에게 갚아 줄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더라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하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얻을 것도 없지만 인간세상에서 잃을 것도 없다. 굶주린 이들을 먹여주고 헐벗은 이들을 입혀주는 행동은 그 누가 그것을 덕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제물을 쓰고 때로는 마음을 기울여 헛된 명예만 얻었다면 얻은 것이 아니다.
7.선을 가장하여 명예를 낚으려는 것을 경계함(戒詐善釣名)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명예를 잡을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얻게 되면 말과 모습이 많아 달라진다. 겉으로 천상의 사람인 듯이 보이지만 그의 뜻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허망한 영화와 헛된 명예라는 보잘것없는 것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품행을 곱게 꾸며 자랑하고서는 손을 뻗쳐 허망한 영화와 헛된 명예를 손에 넣는 것이 목표이다.
그리고 善을 가장하는 것은 善이 아니다. 이것은 두 개의 나쁜 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선하지 않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선을 가장하는 행위는 악을 드러내는 것보다 심하다.
명예를 좋아하는 이들은 선한 듯하지만 참으로 선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참된 선을 가장 꺼린다. 그런데 그들이 선을 假裝하는 노력을 옮겨 참된 선을 계획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착한 마음과 착한 모습을 아울러 가질 것이다.
8. 예찬을 듣는 것을 경계함(戒聽譽)
榮華와 기림(榮譽)에는 헛된 것도 있고 참된 것도 있다. 헛된 것은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참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스스로 조명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내가 영화와 영예를 받게 된 일이고 두 번째, 나에게 영예를 준 사람이며 세 번째, 영예를 꾀하는 사람의 의지이다. 내가 영예를 받게 된 일이 이치에 맞고 참된 일이라면 그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을 받을 것이 아닌데도 받았다면 도둑질한 것이다.
명예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자신만 볼 뿐이며 하늘에 마음을 기울여 하느님을 찬송하거나 남들을 위해서 이로운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다. 그들의 영화는 헛된 것이 된다.
9.귀해지기를 경계함(戒好貴))
귀한 지위보다 더 쉽게 자리가 바뀌고 흘러가는 것은 없다. 그것을 굳이 얻고 싶어 하는 것은 진흙속의 미꾸라지를 잡는 일과 같다. 꽉 잡으려하면 더욱더 빨리 잃어버리기 때문 이다. 세네카는 귀해지기를 좋아하는 이는 회오리바람에 비유 할 수 있으니 자신을 돌게 한 뒤에 다른 사물까지 돌려버리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귀해지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그곳이 지극히 어렵고 지극히 위태로운 곳임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10. 겸손의 덕을 논함(論謙德)
겸손이란 무엇인가.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고 자신을 낮은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위대하지만 사람인 나는 보잘 것 없고 하느님 아니었다면 태어 나지도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고 현명할 수도, 知德이 뛰어 날수도, 事理에도 완전히 통할수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에게 겸손해지고 남들에게도 겸손해 질수 밖에 없다.
성서에도 “너희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모든 일을 더욱 겸손히 하여야 하느님은 너희를 총애하실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교만한 이들은 서로 다투는 일을 그만 두지 않는다. 그러나 겸손한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가장 편하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이들은 높은 곳을 찾는 반면 겸손한 이들은 낮은 곳을 찾는다. 높은 곳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낮은 곳을 찾는 사람들은 더 떨어질 곳이 없다 교만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살려하니 늘 위태로운 것이다.
교만한 이들은 겸손한 이들을 늘 원수로 생각한다. 교만함이 먹히지 않으면 겸손의 선례를 이어받아 자신을 덮어버린다. 그들도 겸손이 좋은 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11.자신을 알아 겸손을 지킴(識己保謙)
나는 나와 절대로 갈라설 수 없다. 나는 나와 가장 가깝다. 나의 가장 가까이 있는 나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저 멀리 있는 하느님을 알 수 있겠는가?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을 알면 겸손이 생겨나는데 악은 모든 선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알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의 마지막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교만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모든 죄의 시작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느님에게 바라거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것은 모든 악의 마지막이다.
겸손의 경지에 오르는 데는 일곱 단계가 있다.
첫 번째,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일이고
둘 째, 그것을 깊이 뉘우치는 일이고
셋째, 그것을 밖에 알리는 일이다.
넷째, 남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죄를 가졌음을 믿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 남들이 비난하는 소문을 전해 듣고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섯 번째, 나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라도 성내지 않는 것이고
일곱 번째, 나에게 모욕을 입혀 주기를 깊이 바라는 것이다.
겸손한 이는 덕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교만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한 이는 죄를 짓더라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모욕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교만은 자연히 드러나게 되어 둘 다 숨길 수 없다.
덕을 쌓고 죄를 쌓았는데 어찌 영화와 욕됨이 없겠는가.
마. “七克” 권2
1. 질투를 가라앉히다.
질투란 남이 복되는 것을 근심하고 남의 재앙에 기뻐한다. 질투는 교만의 벗이다. 그래서 서로 늘 붙어 다닌다. 남의 나쁜 점을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헐뜯고 남에게 재앙이 생길 것을 바라는 악은 모두 질투에서 생겨난 것이다.
질투는 분노보다 나쁘다. 남이 먼저 나를 해쳐야 내가 그에게 성을 낼 것이니 분노는 그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질투라는 하나의 情만은 모두 나의 교만함에서 나오는데 이는 남의 덕이나 복이 내 것보다 나을까 걱정하여 그것을 부수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질투는 인색보다 나쁘다. 인색한 이들은 남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지마는 다른 사람이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상서롭고 복된 것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보내주려고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은 지극히 공명정대하다. 사람들이 착한지 악한지 헤아리지 않고 해와 달처럼 골고루 비추어 서리나 이슬처럼 똑같이 적셔준다.
그러나 질투하는 이들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고 남의 행복을 근심한다. 그리고 그 행복을 빼앗을 생각을 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자신만을 지켜주고 남들은 버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어진이 들은 하느님이 만물의 어른이시므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그리고 남들도 자신과 같은 존재임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2. 남의 나쁜 점을 헤아리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함(戒計念人惡)
마음이 仁에서 나오면 모든 일은 인이라는 바탕을 가지게 되지만 질투에서 나오면 질투라는 바탕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인과 질투는 사나운 불길과도 같다.
어진 사람은 남의 착한 점을 보면 반드시 그를 믿는다. 나쁜 점을 보더라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질투하는 이들은 그렇지가 않다. 남의 나쁜 점을 보면 비웃고 잘못을 보면 큰 죄로 여긴다. 착한 점을 보면 의심하고 “겉모습이 그럴 뿐이지 참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사람은 남의 착한 점을 보더라도 자신의 나쁜 점을 보탤 뿐이다.
덕이 진실하고 견고하다 하더라도 질투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잘못된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선과 비슷하게 보일 뿐이지 그를 모욕하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은 깊이 감추어져 있어 하느님과 같이 한없는 감식력을 가진 분이 아니면 찾아볼 수 없고 참되고 나쁜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판단할 수가 있다.
3.남을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함.(戒謙言)
남의 더러운 행실을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고 남이 저지른 더러운 행실을 이야기하면 자신의 입을 더럽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남의 더러운 물건을 훔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으니 그래도 남을 욕되게 하겠는가.
헐뜯는 말을 하는 이들은 남의 밝은 덕을 덮고 사람들에게 그 덕을 의심케 하여 그를 우러러보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남의 나쁜 일을 헤아려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게 하고 또 마음을 어지럽혀서 그것을 믿도록 한다.
성서에서도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그들의 이빨은 적을 공격하는 화살이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이다”라고 써져있다.
어리석은 이가 마음속에 남을 헐뜯는 말을 품고 있으면 마치 화살에 맞은 개와 같아서 화살을 뽑지 않으면 편안히 쉴 수 없다. 또 남을 헐뜯는 이는 구덩이를 파서 남을 빠뜨리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4.헐뜯는 말을 듣는 것을 경계함
남을 헐뜯는 말은 회오리바람에 견줄 수 있으니 조그만 배는 그것을 만나면 뒤집어지지만 큰 배는 그것을 만나면 더욱더 빨리 움직이게 되고 행선지에 빨리 도달한다.
헐뜯는 말도 작은 덕을 가진 사람이 들으면 발끈 달아올라 성을 내지만 큰 덕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듣더라도 높은 곳에 서서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고 불쾌한 모습이 없이 기뻐하므로 그 말을 들을수록 더욱더 빨리 덕으로 나아가고 더욱더 착한 곳에 이르게 된다.
5.남에게 어질게 대하고 남을 사랑함
죄의 일곱 가지 근본은 그것과 맞서 다스릴 것이 있는데 이는 병명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다. 분노와 질투는 연이어오고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맥이므로 병의 근본이 비슷하다. 어짊과 사랑은 순수한 덕이므로 이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치료 할 수있다.
하느님께서 미워하는 죄 가운데 질투만한 것이 없고 하느님이 좋아하는 덕 가운데 仁愛보다 더 한 것이 없다.
사람이 참으로 사랑을 베풀면 그들의 행복과 공덕, 지혜와 능력 그리고 재력과 같은 것을 서로 함께 하여 가질 것이다. 따라서 혼자서는 할수 없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이를 믿는다면 해 낼 수가 있다. 사람에게 우애와 덕이 없는 것은 세상에 해가 없는 것과 같다.
해가 없으면 검과 흰 것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서로 사랑해주는 벗이 없다면 선과 악을 알수 없을 것이며 세상의 즐거움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우애할 인연이 맺어질 길은 오직 덕행뿐이다. 그러니 벗에게는 나쁜 짓을 하였다면 덕이 없는 것이다. 덕이 없으면 벗의 뿌리도 없는 것이니 友誼가 어찌 스스로 존재하겠는가.
사람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평등한 자애에 기대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하느님의 은혜 또한 너무 커서 잠시라도 떠나 있을 수가 없다.
두 번째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나의 육신이 아니고 정신이다. 육신을 아끼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나쁘게 하는 것이고 육신을 아끼지 않는 것은 자신을 나쁘게 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세 번째로 사랑해야 할 사람은 이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먼저 바로 서야한다. 자신이 바로서지도 못하면서 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한다면 이는 이웃을 잘못 사랑하는 일이다.
네 번째로 사랑해야할 것은 자신의 몸이다.
바. “七克” 권 3
1.탐욕을 풀다
탐욕의 마음은 마치 손아귀에 물건을 잡고 있는 것처럼 단단한데 이는 베풂으로 풀어야한다. 그것은 끝없이 재물을 바라는 것이다. 탐욕의 마음은 하늘과 땅 속의 모든 물건을 얻고 싶어한다. 그래서 욕심이 많은 이들이 그들의 탐욕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니 탐욕의 마음은 끝이 없다.
성서에도 “재물을 탐내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재물을 욕심내는 것은 모든 악의 입이다. 성을 내거나, 다투는 것, 속이는 것, 훔치는 것, 남을 학대하는 것, 간사하거나 음란한 것 그리고 게으름과 같은 행위들이 재물에 기대어서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탐욕을 가진 이들은 재물을 늘릴 기회를 잡고 싶어 하므로 마음은 언제나 탐욕에 빠져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참된 마음과 하느님의 德과 天國을 보잘것없는 재물과 쉽사리 바꾸어버린다.
굶주림은 간사한 일을 만들지 않고, 곤궁은 음란한 일을 만들지 않으며 가난 때문에 죄를 받았던 것은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배부름은 간사한 일을 생각나게 하고 풍요는 음란한 일을 제멋대로 하게한다. 가난한 자는 위협을 받아도 피해가 없고 도적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유한 이는 벼슬이 높은 이를 만나면 자신을 헤칠까 두려워하고 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을 훔쳐갈까 두려워한다.
욕심이 많고 인색한 인물은 은혜를 받음에 말미암아 사랑을 알아서 은혜를 베풀어준 이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부유해질수록 제멋대로하고 하느님을 잊어버린다. 하느님을 잊어버리니 더욱더 마음은 간사한 행동으로 돌아선다. 자애로운 마음을 끊어버리고 남을 헤치니 하느님의 죄인이요, 짐승들의 죄인이다.(禽獸보다 못한 인간)
부유한 사람의 근심은 벗이 없다는 것이다. 벗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재물을 일어버린다면 재물을 사랑한 이들은 떠날 것이고 사람을 사랑한 이는 남을 것이다. 그제 서야 참된 벗과 거짓된 벗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 “참된 벗은 행복할 때 에는 그를 알 수 없다. 거짓된 벗은 불행할 때 자신을 숨기지 못한다.”라고 쓰여 있다. 이 말씀은 가난하게 된 사람을 잊어버린다면 그 사랑은 재물에 있다는 것이라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세상의 부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참된 벗이다
성서에“부자는 나쁜 일은 마음대로 하면서도 언제나 즐겁게 웃고 가난한 자는 해를 입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 부자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찬미하지만 가난한 이가 입을 열면 모든 사람이 꾸짖으며 나무란다.”고 말씀하신다.
곧 재물의 해가 지극히 많다는 것은 재물이 사람을 끌어당겨 나쁜 일을 하면서도 거리끼는 것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 害가 가장 큰 것이다.
또 성서의 말씀이다“ 손에 가진 것이 없어도 늘 부유한 이가 있고 재물을 가득히 가졌으면서도 언제나 가난한 듯한 이가 있다. 그리고 재물을 나누어 주면서도 언제나 풍족한 이가 있고 재물을 빼앗으면서도 언제나 가난하게 사는 이가 있다”
예로니모 성인은 “욕심을 내지 않는 이는 세상이 모두 그의 넉넉한 재물이다. 그러나 욕심이 많고 인색한 이는 지극히 적은 것도 모두 바란다.”라고 하였다.
2.베풂의 덕을 논함
영혼을 갖지 않는 사물 가운데 해와 달보다 더 숭배 받는 것은 없다. 영혼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또한 착하고 덕을 갖춘이가 되기를 소원한다. 참된 덕을 가진 이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한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사양하지 않고 남을 가난에서 건져내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반대로 재물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한다면 마음이 비루하고 덕을 쌓지 못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때 주의 할 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정성을 다하여 베풀어주는 것이다. 베풀어 주는 것을 좋아해야 베풀어주는 것이 은혜가 된다. 억지로 베푼다면 덕을 베푸는 일이 아니다.
둘째, 재물이 아까워 머뭇거리면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바라고 있을 때 얻지 못하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다. 이럴 때는 거절하는 것만 못하다. 베풀어 줄 것이라 기대하던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기보다는 모욕을 받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사람들은 받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지만 모욕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은혜를 베풀 때 한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잘 베푼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의로움이 아닌 것을 베풀어 줄 때 예의도 없는 자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베푼 은혜로 나쁜 짓 할 것을 알았다면 결코 베풀기를 사양해야한다. 그의 죄악이 베푼 이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에 “너희가 주어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귀를 틀어막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나 역시 귀를 틀어막고 너희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은 바로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와준 것 같지만 실은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주는 것은 이세상의 물건이지만 받는 것은 하늘나라의 즐거움이다.
사. “七克” 권 4
1. 분노를 없애다.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하기에 忿怒가 생긴다. 사나운 말과 욕설, 다툼과 싸움, 그리고 殺傷과 지나친 刑罰들은 분노에서 흘러나온다.
성서에도 “함부로 성을 내는 이들은 악으로 흘러가기 쉽다”고 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성인은 “분노는 모든 악의 문이다. 이 문을 닫지 않는다면 쌓아온 덕은 자신의 거처에서 편안해 질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분노의 불길을 누르지 못하면 재물과 힘을 다 써버리고 정력은 모두 소모될 것이다. 이것은 자신마저 태워 없앨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갑자기 성을 내는 것은 사람의 감정 때문이다. 성을 내면 사람을 죄에 빠트릴 수 있다. 지속적으로 성을 내면 악함을 만드는데 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슬기로운 사람은 성을 내지 않는다. 사람은 善 하지 않으면 惡하다. 바보가 아니라면 선한이에게 성을 내겠는가. 그리고 악한 이에게도 성을 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악한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을 내면 마음의 눈도 함께 흐려진다. 아무리 이치에 밝은 사람이라도 화를 내고 있으면 그것을 보지 못한다. 밝은 마음이 화를 내면 다시 어두워진다. 사람들이 일들을 판단할 하기 전에 피해야 힐 것이 두 가지 있는데 조급성과 성을 내는 것이다.
2,원수를 사랑하라
성서에 “너희가 남에게 베푼 만큼 하느님도 너희에게 베풀어 줄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견뎌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하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다. 분노를 품고 있을 때 착한 일을 한 것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하느님을 받들어 섬긴 것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하느님은 반드시 너희를 미워 할 것이다.
성서에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면 하느님도 반드시 너에게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다”그리고 “너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남을 용서해야만 하느님도 용서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남들이 너희에게 지은 죄는 얼마 되지 않지만 너희가 하느님께 지은 죄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들이 지은 얼마 되지 않는 죄를 너희들이 용서하고 헤아릴수없는 너희 죄를 용서받는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것은 악한 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너희가 이런 사랑을 할 뿐이라면 무슨 하늘의 보답을 바랄 것인가. 따라서 너희를 원수로 여기는 이를 사랑 할 수 있고 너희가 미워하는 이들에게 베풀 수 있어야만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는 성경말씀이 있다.
하느님 앞에서 “ 그는 저를 싫어하고 저를 해쳤지만 하느님을 위하여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이 사람은 이미 보답을 받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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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참음으로써 어려움에 맞서다.
참음이란 침착한 마음으로 害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해를 끼친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참음으로 세상의 변화에 맞서고 마귀들을 이겨내고 모든 사욕을 공격하고 모든 덕을 지키고 분노를 막고 혀를 묶고 마음을 다스리고 平安함을 기르고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다툼을 끊고 근심을 떨쳐버리고 부유함의 방자함을 누르고 가난함의 굴욕을 떨쳐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 겸손함을 지키게 하고 어려움을 받고 있으면 용기를 잃지 않게 한다. 남이 나에게 죄를 지었으면 나에게 그를 용서하게하고 내가 남에게 죄를 지었으면 다시 나에게 그것을 용서해 주기를 빌게 하는 것이 참음(忍)의 정도이다.
4. 고생과 어려움으로 덕을 늘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좋아함과 미워함이 일정하게 하지 않으니 착한 일을 한 이들에게는 모든 복을 내려주고 나쁜 일을 한 이들에게는 모든 재앙을 내린다.”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일은 다만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참된 복과 참된 재앙과 복도 아니고 재앙도 아닌 것이다. 살아있을 때 덕을 쌓았다면 죽은 후에는 영원히 즐거울 것이다. 이것이 참된 복이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 죄를 지었다면 죽은 후에 영원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참된 재앙이다. 사람이 하늘나라에 공덕을 쌓았는데 하느님이 그것을 막거나 죄를 지었는대도 하느님이 그 벌을 입히지 않는 일도 없다. 하느님이 참된 재앙을 착한 이에게 입히고 참된 복을 악인에게 입히지 않으신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은 부귀 안락을 착한 사람에게 주어 그것이 참된 재앙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악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 그것이 참된 복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고 했다.
세상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영원한 것이 없다. 즐거움이 다하면 그것을 잊고 괴로움이 끝나면 즐거움이 그것을 잊게 한다. 그런데 지나간 괴로움은 오랜 세월 동안의 즐거움을 잊게 할 뿐 아니라 오늘의 괴로움을 늘려주기까지 한다..
성서에도 “행복이 찾아 왔을 때 불행을 잊지 말고 불행이 찾아 왔을 때 행복을 잊지말라고 말씀하신다. 행복이 찾아왔을 때 불행했던 때를 생각하면 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불행이 찾아 왔을 때 행복했던 때를 생각하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괴로움은 본래 선하고 악한 것이 없다. 오직 내가 참으면 이로운 것이 되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참지 못하면 해가되어서 하느님의 분노를 받게 된다.
사. “칠극” 권 5
1.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다.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은 즐김에 절도가 없다는 말이다. 시끄럽게 떠드는 일, 재물을 탐내는 일, 착한 일에 게으런 것 등의 감정들이 여기에서 나온다.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몸의 적이다. 덕을 쌓는 선비들은 마땅히 이것을 공격하여 가장 먼저 극복해야한다. 몸속에 있는 육신의 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밖에있는 정신의 적만을 공격한다면 결코 이것 (식탐)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도를 닦는 선비는 스스로 세상의 즐거움에서 물러나 괴로운 곳을 가려서 살아야 한다.
먹고 마실 때에는 마치 약을 먹고 마시는 듯이 하여 필요한 것만 취해 몸의 안락함을 지키고 최소한 허기와 목마른 고통만은 막아야한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것은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서가 아니다. 실제로 몸에 섭취할 것도 있겠지만 탐을 내어서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두스 성인은 제자들에게 훈계를 내려 “너희는 음식을 먹을 때 먹고 마시고 난 뒤에도 여전히 도덕을 찾고 힘쓸 것이며 정신일도를 위하여 외우고 읊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네카는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하는 이들은 마땅히 짐승들과 벗해야 할 것이며 마땅히 인류와 벗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직 사람들만 먹는 것 때문에 몸을 망친다. 몸에 해가 된다는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중지 할 줄 모른다. 배가 가득차서 터질듯 한데도 굶주린 듯이 식탐을 한다.
사람들이 배가 부른대도 식탐하는 것은 인간들이 저지른 죄 때문이 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2. 정도를 넘지 않는 덕을 논함
많이 먹지 않으면 몸은 가벼워 날렵해지고 氣는 맑아지고 五官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정신은 맑아진다. 뜻은 곧아져 하늘의 이치를 생각하고 속세의 더러운 것들에 물들지 않고 선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여 바른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정립될 것이다.
아. “칠극” 권6
1. 음란함을 막다
음란이란 마음이 어두워져 사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 그리고 마음이 쉽게 변하고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 德과 義와 죽은 후를 생각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음란이라는 악에서 나온다. 음욕은 세찬 감정의 불길이다. 이 감정은 한번 일어나면 선에 대한 생각, 덕에 대한 바람, 의로운 행실은 타서 재가 된다.
이 불길은 처음에는 미미하더라도 방관하거나 소홀하면 반드시 거세게 타올라 참으로 끄기 어렵게 된다.
사람이란 본래 나쁜 것도 오래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디면 자신을 맡기게 된다. 또 자신을 맡기면 나쁜 점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자신의 나쁜 행위를 견고히 지키려하고 그것을 지키려하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게 되는데 그 때는 건져내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충고의 말을 하면 성을 내고 바른 말을 하면면 듣기 싫어한다. 바른 행위를 하는 사람을 보면 헐뜯는데 마음속에 사악한 것들로 채워져 있어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德 이 아름답고 이로운 것임에 동의한다. 그러나 德,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마저 한다. 사람은 음란함이 더럽고 수치스러움을 알고 있으나 거기에는 특별한 즐거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이 즐거움이 세상을 속이고 사람을 모든 죄의 속으로 빠뜨리는 교활한 속삭임이란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육신은 보잘 것 없는 부분이며 마치 짐승과 같다. 그러나 마음은 존귀한 것이어서 천사와 다를 것이 없다. 몸뚱이가 더러운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덕을 쌓으면 즐거움이 생긴다.
2,정덕(貞德: 음욕을 끊어낸 공덕)
貞潔은 음욕에 대한 고리를 끊는 것이다.
-가장 낮은 등급: 한 아내와 남편이 지키는 정결이다. 부부가 도리에 맞는 관계를 맺고 법도를 넘지 않는다. 몸과 몸, 말과 행동에서 분수를 벗어나는 사욕을 끊어버리는 고리이다
- 중간 등급: 홀아비와 과부가 지키는 정결이다. 한쪽이 먼저 죽으면 정조를 지켜 아내나 남편을 맞아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도리에 맞지 않은 욕망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윗등급: 童貞의 몸을 지키는 정결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음과 육신이 여색을 탐하지 않는 것이다. 성서에도 한 부부가 정결을 지키면 한 개를 뿌리면 서른개를 거둬 들이고 호아비와 홀어미의 정결에는 육십을 거둬들이고 동정을 한이에는 백개를 거둬 들이다고 쓰여있다.
3. 결혼의 바른 뜻
영혼이 없는 사물들도 각자 그들의 본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늘은 언제나 돌고 땅은 언제나 조용하고 불은 언제나 타 오릅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그렇지가 않다. 하느님은 우리를 만물위에 올려놓았고 이성을 주었으며 우리에게 일을 헤아릴 수있는 마음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스스로 육신의 욕망을 누르고 善을 따르고 惡을 피하며 하느님을 섬기고 공덕을 세워서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리어 그들이 타고난 마음을 사용하여 욕망을 제멋대로 누리고 천명을 어기고 있으니 하느님이 내려준 바른 본성을 모두 어지럽혀버린 것이다
하늘이 열렸을 때 하느님은 먼저 만물을 만든 뒤에 마침내 한사람의 남자와 한사람의 여자를 만들고는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시었다. 그리고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면서 이들에게“너희부부는 하나의 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은 한지아비가 한 지어미만을 짝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한사람이 짝을 이루는 바른 예법이라는 명확한 증거이다.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정해 놓은 바른 길이다.
자.
“七克” 권7
1.게으름을 채찍질하다.
게으름이란 덕행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욕망 거리낌이 없고 귀찮은 일을 견뎌내지 못하고 善에 대한 굳은 자세가 없고 여가를 바라고 하는 일 없이 놀고 잠이 많은 것들은 모두 게으름의 가지들이다. 그리고 음란한 욕망, 먹고 마심에 절제가 없는 것, 도둑질하는 것, 남을 시기하는 것, 농담하는 것. 쓸데없이 웃는 것, 나쁜 일을 꾀하는 것, 남을 헐뜯는 것 등이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공적을 세우고 좋은 일을 이루고 싶지 않겠는가. 바램(所望)은 가졌으나 게으름 때문에 그것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 행하지도 않고서 도달하고, 씻지도 않고 깨끗해지고, 싸우지도 않고 이기고, 시작하지도 않고서 이루며, 찾지도 않고서 얻으려고 하니 어찌 그들의 소망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덕을 행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반드시 원수를 만나고 반드시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어렵고 괴로운 일을 만나더라도 마음의 힘을 늘려서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일이란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조금씩 익혀 가면 쉬워진다.
세상에 착한 일들은 오직 마음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며 의지가 굳은 이들만 이룰 수 있다. 더욱이 사욕을 이겨내고 덕을 쌓는 일이 천국을 향해 가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일을 부지런하게 하는데 비해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名利를 위하고 안락함을 도모하기 위해서 어디에서든 수고를 아끼지 않고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덕을 행하고 도를 이루는 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는 인색하다. 마음의 욕망이 없어졌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아니면 그것(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고금의 성현들과 선비들이 하느님을 섬길 때 덕을 쌓기 위해서 행한 부지런함과 수고로움은 우리의 게으름을 깨우쳐 줄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다. 덕을 수행했던 聖賢들은 그들의 감정을 부추기는 유혹과 싸웠고 소인들이 시기하여 헐뜯고 나무라는 것을 견뎌내었으며 질병과 가난과 근심을 이겨냈다.
그들은 힘써 私慾을 배척했고 하느님의 시험에 들어가서는 인간세상을 가볍게 보았고 먹고 마시는 일을 하찮게 여겼다. 잠은 적게 자고, 웃을 때가 적었고 울 때가 많았다. 늘 자신을 엄하게 꾸짖고 자신의 육신을 원수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즐거움을 물리쳤고 목숨을 가볍게 본 반면에 도덕을 중히 여겼다. 언제나 잘못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고 선을 행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참된 수도인은 피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차.결론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다 읽지 못한 채 레포트를 작성하여 정해진 날짜에 제출해야하는 다급한 마음, 정결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함을 느낀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서 책장을 억지로 넘기면서 대충 읽다보니 어느새 정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용들이 일일이 다 옳은 말씀들이다. 좋은 말씀들을 가슴에 새기랴 글로 옮기랴 3일간이 바쁘게 지나갔다.
마음이 정결하지 못할 때, 선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때 두고두고 읽으면 성경처럼 마음의 양식이 될 귀중한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억지로 읽혀서라도 마음의 양식을 깊게 심어주신 신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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