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메콩, 홍하와 함께 유유히 흘러온 베트남의 역사!
전쟁을 넘어 동남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이 되기까지의 베트남의 근현대사!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베트남 근현대사』. 호찌민과 베트콩, 쌀국수, 베트남 여성 등 베트남에 대한 이미지는 서로 상이하다. 그리고 베트남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우리의 시각 또한 매우 소소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길고 복잡하다.
이 책은 다른 나라의 시각이 아닌 오로지 우리의 시각으로 베트남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려 시도한다. ‘베트남적 근대성’이란 무엇인가를 집중하여 메콩, 홍하와 함께 유유히 흘러온 베트남의 역사를 조목조목 살피는 동시에 앞으로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설정도 예측해 본다.
베트남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논의하는 이 책은, 총 2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치열한 전쟁과 대립, 그리고 통일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따라 베트남을 북부와 중부, 남부 세 지역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전쟁을 넘어 동남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이 되기까지의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조목조목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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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최병욱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베트남사). 호주국립대 Graduate Diploma (동남아시아학). 호주국립대 박사(베트남사).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등에서 동남아시아사 및 관련 과목 강의. 서울대 인문학 연구원 연구교수.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 현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주요 저서: 『짜오 아인 비엣남-안녕하세요 베트남』(나라사랑, 1994), 『바다의 실크로드』(청아, 2003,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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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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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이옥순 교수의 『이옥순 교수와 함께 읽는 인도 현대사』에 이은 또하나의 아시아 지역 연구서이자 우리나라에서 드물게도 동남아시아 역사연구의 장을 개척하고 있는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외부의 시선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베트남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려 시도하고 있으며 특히 ‘베트남적 근대성’이란 무엇인가를 집중적으로 타진하고 있다. 메콩, 홍하와 함께 유유히 흘러온 베트남의 역사를 조목조목 살피는 동시에 앞으로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설정도 예측해본다.
그곳에서도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에게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가. 호찌민과 베트콩, 쌀국수의 나라, 한류에 열광하는 동남아시아의 신흥공업국, 한국남성과 결혼하려 한국에 오는 베트남여성. 이렇듯 우리에게 베트남은 서로 상이한 이미지들로만 존재하며 흩어진 채로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베트남을 포함해 동남아시아를 해석하는 우리의 지식은 그렇게 소소한 것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의 지역사 연구가 그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복잡다기하다. 특히 베트남은 지금의 베트남이 있기까지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유구하고도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졌으며 현재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을 뿐, 그 저변에는 베트남 특유의 근대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18세기말 베트남의 통일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베트남과 베트남사람들을 역사적 주체이자 역사의 현장으로서 새롭게 사유하여 그들 고유의 질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베트남 근현대사와 근대적 인간형의 출현
이 책은 총 21개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베트남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베트남을 북부/중부/남부 세 지역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는 인종적?지리적?문화적으로 구분된 세 지역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200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 및 대립 속에서 적대감을 키워갔고 따라서 18세기말부터 시작된 베트남 통일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는 뿌리깊은 지역감정의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호찌민조차 “남북은 한가족”이라고 역설했을 만큼 그 골은 매우 깊었는데 이러한 지역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중부에서 처음 시작된 통일운동은 결국 남부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어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는 남부의 응우옌 왕조(1802~1945)가 되었으며 응우옌 왕조는 결국 베트남의 마지막 봉건왕조가 되었다. 이 왕조의 국호가 ‘비엣 남(Viet Nam, 越南)’이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국명으로 굳어져 ‘베트남’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국가에 헌신하며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인간형이 하나둘 출현했으며 이는 베트남이 서서히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였다. 베트남 통일운동의 주요인물이었던 보 따인을 선두로 판 보이 쩌우에서 호찌민에 이르기까지 근대적인 지식인들이 베트남의 미래를 준비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적 근대성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베트남은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독특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1820년부터 베트남 왕실에서는 매년 한척 당 승선인원이 수백명에 이르는 선단을 적게는 2척, 많게는 6척씩 해외로 파견했다. 이 활동을 ‘공무(公務)’라 하는데 대체로 중국 꽝뚱이나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페낭, 신흥 싱가포르 마닐라 등이 행선지였다. 원거리항해를 통해 수군을 조련하고 각종 선진물자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조차 19세기 전반까지 외국문물에 대해 폐쇄적이었음을 생각하면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 비해 한발 앞서 나라 밖 사정에 깊은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베트남의 1830년대는 ‘토지개혁의 시대’였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하는 혁명적인 토지개혁이 19세기초 유가 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토지개혁 문제가 중국이나 조선에서 양심적인 유학자들의 ‘주장’만으로 그쳤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
베트남과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이제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는 다양한 분야에서 교집합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는 베트남 내 한국인 이민자수가 화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을 정도로 베트남에서 한인의 영향력은 급증하고 있다. 역으로 노동자, 유학생 등 다양한 이름으로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혈연적 공통분모도 통계가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커지고 있으니” 저자는 이들을 “신(新 )한국인”으로 부르며 “한국에서 뼈를 묻게 될 베트남 엄마들과 이 엄마들이 낳고 키워내는 소중한 자녀들”을 더이상 남이 아닌 우리로 포용하자고 한다. 저자 특유의 ‘운명공동체로서의 동아시아’라는 관점은 그래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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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베트남이 역사를 이루어 온 시간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10세기에 천년의 중국 지배를 극복하고 독립국이 되었을 때 국가의 영역은 북부 베트남에 해당되는 지역뿐이었다. 중부지역에는 참파 왕국이 약 천년 동안 존속해왔고, 남부지역은 현재 앙코르와트가 있는 곳에 수도를 두었던 캄보디아의 남쪽 변방이었다. 베트남은 독립 이후 500년 동안 줄기차게 남쪽으로 팽창하여 중부지역을 차지했고(15세기), 그뒤에도 남진을 계속하여 약 300년 뒤(18세기)에는 남부를 다 흡수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이 500년 동안 대체로 한 영역 속에서 단일 운명체로서의 의식을 강화해오던 시기에 베트남은 인종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달랐던 참파와 캄보디아를 베트남의 일부로 끌어들이느라 분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부와 남부 지역에 베트남인이 이주해 살며 선주민인 참파인, 크메르인과 섞이고 새로운 지리환경에 적응하는 가운데 세 지역 사람들의 문화, 인성에서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0
단지 말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지금의 하노이에 수도를 둔 홍하델타 지역의 정권에서 보면 지배영역의 남부 끝이던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16세기에 한 ‘반역정권’이 수립되었다. 응우옌이라는 성을 가진 인물이 수장이었다고 해서 응우옌 정권이라고도 부르는 이 권력집단은 중앙정권과 대결하면서 남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18세기까지 베트남이 남부 메콩지역 전체를 흡수했다 함은 이 정권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독립국가도 수립되었다. 베트남에는 수세기 동안 두 개의 국가가 있었으니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200년에 걸친 남북 간의 치열한 전쟁 및 대립이 낳은 적대감은 매우 깊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18세기말 중부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다. 떠이 썬 출신 삼형제가 지휘하는 군대는 먼저 응우옌 정권을 쓰러뜨리고 이후 북으로 진격해서 홍하델타도 장악했다. 떠이 썬 군대는 베트남 사태에 개입한 중국군을 밀어내고 남부로 들어온 태국군도 물리치는 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이질화된 베트남의 세 지역을 하나로 묶는 일은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훨씬 더 힘겨웠다. 떠이 썬이 남과 북의 정권을 다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던 1788년, 남부 싸이공에서는 또다른 정권이 탄생했으니 남부 즉 싸이공 메콩 출신들이 주체가 된 쟈딘(쟈딘은 베트남 남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정권이었다. 11
또다시 시작된 내전은 약 15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남부사람들이 주체가 된 세력이 19세기 초 떠이 썬에 승리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니 이것이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자 현재 베트남의 북,중, 남부를 포괄하는 최초의 통일왕조 응우옌 왕조(1802-1945)였다. 응우옌 왕조의 국호가 ‘비엣 남’이었는데, 이것의 한국식 발음이 ‘베트남’이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이 생긴 지는 약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왕조가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1859년이니 전통시대 통일의 경험은 고작해야 57년이었다. 12
바타비야란 자카르타의 옛 이름으로서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건설한 도시다. 1652년 우리나라에 표류해온 하멜 일행은 바타비야의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들로서 당시 일본으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제주도 해안으로 밀려온 것이다. 나뽈레옹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19세기 초, 영국으로 망명한 네덜란드 왕실의 요청으로 잠시 영국이 바타비야를 차지한 적도 있으나 나뽈레옹 몰락 후 다시 네덜란드가 바타비야로 돌아와 20세기 중반까지 지배했다. 35
베트남은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독특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1820년 제2대 황제 민 망이 등극한 이래 조정에서는 매년 한척 당 승선인원이 수백명에 이르는 선단을(적게는 2척, 많게는 6척) 해외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 파견단의 활동을 ‘공무’라 칭하는데 대체로 ‘여동공무’와 ‘하주공무’로 대별된다. 여동공무란 중국 꽝뚱으로 가는 공무이며, 하주공무란 하주를 다녀오는 공무를 말하는데, ‘하주’란 베트남 아래에 있는 땅 즉,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페낭, 신흥 싱가포르, 자바의 바타비야, 필리핀의 마닐라 등을 말하며 때때로 인도까지도 행선지에 포함되었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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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우리나라에서 드물게도 동남아시아 역사연구의 장을 개척하고 있는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외부의 시선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베트남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려 시도하고 있으며 특히 ‘베트남적 근대성’이란무엇인가를 집중적으로 타진하고 있다. 메콩, 홍하와 함께 유유히 흘러온 베트남의 역사를 조목조목 살피는 동시에 앞으로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설정도 예측해본다.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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