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탄생>-주어지는 것과 일구어 내는 것
'가족'
생각하면 참으로 눈물겨운 단어다.
그러나 우리들 가슴의 생채기는 늘 가까운 주변인들로부터 비롯되고 그 후유증은 오랜 흉터를 남기기 마련이다.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대상은 행복 뿐만 아니라 불행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안전하지만 무미건조한 타인.
그에 반해 가시를 속에 품고도 결국은 서로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게 바로 가족이 아닐까.
여기, 외로운 섬 같은 타인들이 만나 핏줄보다 더 뜨거운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굳건히 끌어안는 감동의 드라마가 있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때로는 '일구어 내는 것'이 '주어지는 것'보다 아름답다.
첫 번째 이야기.
미라(문소리 분)는 분식집을 경영하는 소녀 같은(?) 노처녀.
어느 날 군에 입대한 후로 5년 동안 소식이 없던 동생 형철(엄태웅 분)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누나, 나 결혼했잖아~"
엄청난 멘트와 함께 소개받은 무신(고두심 분)은 미라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만큼 어마어마한 충격파다.
줄담배, '도로남'을 구성지게 불러 제키는 심상찮은 분위기, 형철보다 20년 연상이라는 환상적인 연륜.
이 놀라운 커플, 아무래도 미라 집에 슬쩍 눌러앉을 분위기다.
대책이 안 선다.
그런데 그들 닭살행각이 어째 너무너무 애틋하다.
미라는 조금씩 마음이 풀리고 결국 두 사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찬 새출발 앞에 불쑥 나타난 복병, 예닐곱 살 쯤 된 여자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미라의 집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딸'이란다.
무작정 애를 들쳐 업고 나가는 무신.
형철까지 데리고 나가라고 쏘아붙이는 미라.
모두 자기가 책임진다며 큰소리치는 형철.
허나 '책임' 운운하던 형철은 집을 나간 후 끝내 소식이 없고, 100만 세면 돌아온다던 형철을 아이는 날마다 기다린다.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미라와 무신의 침묵 앞에서 강아지와 즐겁게 뛰노는 아이, 두 사람을 그대로 둔 채 휙휙 흘러가는 마당의 시간, 그리고 이윽고 정적.
매우 특이한 편집 기법이 그들의 쓸쓸하고 불안한 심리를 한층 배가시킨다.
무신이 아이를 데리고 떠난 뒤 그녀처럼 '도로남'을 흥얼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미라.
작은 인기척에 흠칫 놀라며 뒤돌아보는 미라의 어깨 너머 후둑후둑 장대비가 구슬프다.
두 번째 이야기.
여행사에 근무하는 선경(공효진 분), 출근 준비를 하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현관문 앞에 선 엄마 매자(김혜옥 분)의 손에 들려있는 김치통과 커다란 트렁크.
"또 집 나왔어?"
선경은 매정하게 엄마를 밀어내고 문을 닫아버린다.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추억을 두고 다른 남자들과 쉽게도 사랑에 빠지는 엄마가 그녀는 죽도록 싫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만나 아이까지 낳았지만 엄마의 남자는 아직도 제 가정의 울타리 안에 굳건히 소속되어 있다.
지긋지긋한 엄마로부터 멀리 떠나려는 그녀를 찾아온 엄마의 남자 운식(주진모 분).
"니 엄마 지금...아프다...많이 아프다. 니 엄마..."
"그래서요, 죽을병이라도 걸렸어요? 몇 달 밖에 못 살아요? 울 엄마? 어쩌라구요?"
왜 우리는 항상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에 스스로 아파하는 걸까.
매몰차게 거절하지만 결국 동생 유치원 운동회에 엄마 대신 참석하게 되는 그녀.
엄마가 색칠해 준 가면을 나눠 쓰고 열심히 이어달리기를 하는 누나와 동생.
아무리 부정해도 그들은 엄마의 핏줄을 나눠 가진 남매일 수밖에 없다.
돈 때문에 엄마를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선경의 예상과 달리 그 남자는 부유한 중산층의 가장이다.
"아저씨는 없는 게 없으시네요? 아저씨, 울 엄마 사랑하세요? 엄마 사랑하시냐구요!"
"그래, 사랑한다...사랑한다, 진심이다...됐니? 선경아, 됐니?"
선경은 이제 엄마의 사랑을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이 더 화가 난다.
"선경아, 엄마랑 어디 좀 갈래?"
"나 시간 없어"
그러나 정작 시간이 없는 건 그녀가 아니라 엄마다.
엄마의 죽음 끝에 남겨진 남매.
엄마가 두고 간 커다란 트렁크를 어렵사리 연 선경은 차곡차곡 모아 둔 그녀의 어린 시절 추억들을 발견하고 엄마를 부르며 통곡한다.
뼈저린 후회가 엄습해 온다.
슬픈 엄마의 사랑을 어리석은 딸은 너무 늦게 알아챈 것이다.
가족의 탄생.
오지랖의 대명사 채현(정유미 분)은 사랑이 너무 넘쳐 늘 문제다.
그녀의 남자친구 경석(봉태규 분)은 어려운 주변 사람들을 돌보기 바쁜 여자친구로 인해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
죽어라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는 그를 슬며시 뒤로 밀치는 그녀.
"경석아, 잠깐만...밑에 꽃 밟았어"
어느 날 경석은 누나에게 마음 속 고민을 털어놓는다.
"누나는 연애만 하는 게 좋아"
"그러면 좋아? 누나, 엄마랑 똑같잖아"
엄마가 죽고 난 후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노처녀로 늙어버린 선경은 어느새 그토록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하지만 마음은 평온하다.
오랜 꿈이었던 노래를 다시 시작하며 그녀는 비로소 잔잔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던 경석은 채현에게 이별을 통보하지만 채현의 말대로 그런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다.
춘천 행 기차 안, 스웨터를 짜고 있는 그녀 옆에 슬쩍 다가와 앉는 경석.
하얗게 쌓인 눈, 고즈넉한 호수.
이제 채현은 경석의 유일한 '보물'이 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되던 영화는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야 각각의 에피소드가 서로 잔가지를 뻗으며 커다란 하나의 기둥을 이루게 된다.
낡은 대문을 열고 채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의 '엄마들', 중년의 미라와 노년의 무신.
무신의 생일 케이크에 밝혀진 세 개의 촛불은 그녀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일궈 온 세월의 나이다.
아직 덜 완성 된 채현의 스웨터를 어깨에 걸치고도 무신이 마냥 행복한 것처럼, 밤하늘에 수놓아지는 화려한 불꽃놀이는 그들 가족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빛나는 사랑의 외침이다.
돌아온 탕아, 늙은 형철은 미라에게 문전박대를 당함으로써 진정한 가족이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랑과 책임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엔딩,
지하철 역 대합실을 이리저리 스쳐지나가는 시공간을 초월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완벽한 타인들조차도 따뜻한 가슴으로 끌어안고픈 뭉클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