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사촌초등 이공회
 
 
 
카페 게시글
추억,고향이야기 스크랩 상데미산(함안),무진정 외 문화유적 답사
사랑목(조성자) 추천 0 조회 172 15.11.08 23:2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산여행이다.

아내의 許가 떨어진 건 불감청(不敢請)이었지만 그렇다고 장사가 안되어 떠나는 것이니만큼 고소원(固所願)은 아니었다.

산행 후 남는 시간에는 함안의 문화유적지를 찾아 바쁜 걸음을 하기로 하였다.

함안은 아라가야의 고장이지 아니한가?

함안군 문화유적지를 준비하였지만 주로 함안역 반경 2km를 두르며 답사하였다.

 

* 원효암 칠성각(전통사찰)  1동 1983.08.06 함안군 군북면 사촌4길 863      -상데미산 날머리-

* 함안 군북 지석묘군 32기 1997.12.31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656-4외 일원     -이동 중 논에서 1기-

* 무진정 1동 1976.12.20 함안군 함안면 괴산4길 25

* 함안대산리 석조삼존상 보물 3구 1963.01.21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1139  -무진정 길 건너편-

* 함안 검암리 충순당 정려각 1동 2011.04.28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225

* 함안향교 4,175㎡ 1983.08.06 함안군 함안면 덕암길 103

*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  1기 1972.02.12 함안군 함안면 함안대로 105-2    -함성중학교-

* 함안 성산산성 사적 195,081㎡ 1963.01.21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와 함안면 괴산리 일원   -무진정 주차장 위-

 

상데미산은 사촌마을 뒷산이자, 오곡마을의 앞산이다.

상데미산과 미산령으로 마주보는 여항산 서북산은 6·25 당시 작전상 요충지로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미군들은 여항산을 지긋지긋하다하여 갓뎀산으로 불렀고,

738고지로 알려진 서북산은 6·25 때 격렬한 포격으로 민둥 황토산으로 변해 중머리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에 유해발굴도 이루어져 이곳저곳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다.

 

오곡재는 신라말엽 고운 최치원선생이 어린시절 어머님을 모시고 이곳을 지나던중 까마귀가 날아와 닭고기를 물어주고 갔다하여 '오곡(烏谷)'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뒷산의 생김새가 까마귀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름지어졌다고도 한다.

 

피바위는 오곡마을 처녀 총각이 이곳에서 밀회를 즐기다가 총각이 구렁이였다는 사실이 들통나 사투를 벌이다 둘 다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들의 피가 암벽을 타고 흘러 굳어진 후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원효암 칠성각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지지만 원효암과 의상대란 이름만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동하면서 서촌마을에서 차를 멈추고 본 허부재령이씨효열비석과...

도로 건너 반대편의 또다른 비석을 살펴본다.

'파산조한규시혜불망비'

그 옆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비석도 파산조한규와 관련된 비석인 듯하다. 

차를 사촌마을 표석이 있는 삼거리에 대고 동네어귀의 비석을 살펴본다. '기미독립운동애국지사조상규지비'와 '통정대부행갑산진영 용강함안조공유허비'이다.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이다.

사촌마을 삼거리에서 원효암 방향으로...

즐어가면...

왼쪽으로 사촌마을회관을 지나고...

이내 실질적인 상데미산 들머리를 만난다.

사랑목가든 간판이 붙어있는 우측 이정표가 있는 산길이 들머리.

이정표엔 미산봉과 여항산이 표시되어 있고...

들머리 우측 묵밭엔 버려진 듯 효자비 한 기가 서 있다. '효자김해김공용업지비'

솔숲길을 따라 걷다가 한 차례 된비알을 차고 올랐더니...

작은 봉우리에 닿는데,오곡리 갈림길이다. 나는 무심코 직진을 하였는데, 알바였다. * 주의지점

날개 없는 스텐 이정표엔 누군가 매직으로 오곡방향 화살표를 그려놨고,저 앞 나무(빨간 동그라미)엔...

'오곡동'이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10여분 알바를 하다 다시 올라와서 확인을 해보니...

스텐봉 다른 면엔 미산봉과 여항산은 좌측으로 가라는 매직글씨가 적혀있다.

그러니까 오곡리 갈림길에선 직진을 하지말고 거의 90도 좌로 꺾어서 내려가라는 말씀.

평이한 육산에 문뜩문뜩 바위들이 나타나며 우측으로 샛길 시그널도 보인다.

상수원보호구역 표식은 일련번호가 붙어있어 지형지물 역활을 하고있다.

보기좋게 붙어 있는 이 이끼식물은 양치식물 넉줄고사리(?)인가,모이고사리(고양이 발톱?)인가?

우측 첫 전망대에서 오봉산을 조망한다. 

진행방향으로 고개를 쭈욱 빼니 처절한 전설의 상데미(피바위)가 보인다.  *데미(덤)는 갱상도 표준말로 바위를 말한다.

진행 등로의 우측 아래에 움푹 꺼진 동굴은 인공적인 것인지 자연동굴인지?

조망바위에 서면 자꾸만 오봉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새 피바위는 더 가까워지고...

오봉산과 그 뒤로 괘방 방어산이 마루금을 긋고 있다.

이제 피바위를 타고 오른다.

피바위에 올라선 조망은...

오봉산은 물론이고 산과 산사이의 분지에 들어서 있는 평화스러워 뵈는 오곡리마을이다.

산허리 구절양장(九折羊腸) 꾸불꾸불 휘어지는 길은 진전면 여항으로 넘어가는 1029지방도.

어느새 하늘이 뻥 뚫렸다.

상데미산 정상이다.

헬기장인 상데미산 정상에선 사방 뚫린 조망이 일품이다. 가까이 미산봉과 미산령 도로를 건너 여항산 서북산으로 마루금을 긋고 있다.

헬기장이라 반반한 정상석 하나 없이 누군가 매직으로 보도블록에다 상데미산 표식을 해놨다.

오봉산과 그 뒤로 방어산이...

여항산 건너론 마산쪽 낙남정맥이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원효암 의상대 뒤로 내려선다.

의상대 뒤의 이정표.

의상대사와 관련지어진 의상대

현판

의상대에서 내려서면서 원효암을 잡아본다. 산허리 좁은 공간에 축대를 쌓아 아담하게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원효암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하던 곳이다.

칠성각은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고, 원효암이라는 절 이름과 의상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앞 면 3칸과 옆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세개의 현판이 붙은 '함안 원효암 칠성각(咸安 元曉庵 七星閣)'은 경남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산령각(山靈閣)과 칠성각 그리고 독성각(獨聖閣) 세개의 현판.

칠성각 안내판

칠성각 우측 뒤에는 "요사일동(要舍一棟)시주김태명,여항산원효암범종각(梵鐘閣)건립시주공덕비,감천(甘泉)시주비"가 나란히 서있다.

칠성각 우측 계단을 따라 칠성각 앞마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원효대 건물 우측 뒤로 상데미산과 미산봉 산길이 이정표와 함께 열려있다.

상수원보호구역의 쫄쫄 마른 계곡에서 그제사 점심보따리를 풀었다.

세멘트 포장도로를 걸어 내려와...

돌아선 모습.

원효암은 2km 남짓한 거리.

이정표엔 2.5km

여항산 트레킹 안내판도 서 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걸은 길에서 미산령을 넘어 여항산까지 걷는 셈인데,교통편이 문제일 것.

사촌마을까지 회귀하였다. 도중에 밥먹는 시간 포함하여 원효암에서 여기까지 1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차를 타고 유적지 탐방을 나서는데, 길가에 우람한 노거수 한 그루를 만난다.

사진으론 자연석에 새긴 글자식별이 잘 되지않고,거대한 수술자국을 안은 채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600년이 훨씬 넘은 시무나무라고 한다.

시무나무는 느릅나뭇과 속한 낙엽 교목으로 높이는 20미터 정도이며 어긋나고 톱니 있다. 5월에 노란색 피고 산기슭이나 개울가 자란다고...

우쨌든 서촌마을 앞의 이 노거수는 몇 백년 동안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는 쉼터역활을 충분히 해주고 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길옆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에 범상치 않은 바위 두 개가 보인다. 동촌에 있다는 지석묘인가하여 차를 멈추고 가까이 가보니...

칠련정(七蓮亭)이라 새겨져 있다. 일곱 연꽃의 정자?

칠련정 각자

무진정에 왔다.

솟을 삼문인 돈화문(敦和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괴산재(槐山齋)가 있다. 나는 제(엄숙할 제齊)와 재(재계할 재齋)를 솔직히 분간하지 못한다.

* 어떤 이는 제라고 하고 또다른 이는 재라고 하는데,나는 재라고 할란다.

괴산재(槐山齋)는조선시대의 건축물로 무진정(無盡亭) 옆에 새로 건립하였다. 

원래 함안 조씨 집의공파 파조(派祖)이며, 5주 목민관을 두루 거치고, 춘추관, 편수관을 지낸 청백리로 유명한 무진정 선생(無盡亭 先生) 휘(諱) 삼(參)선조님의 묘역 옆에 세운 제실(齊室)로 함성중학 교정에 있던 구(舊)함안 동현 건물을 옮겨 개축한 것이다.

원래 위치는 마을뒤 1km정도 마을 뒷산(성산 산성 자락)에 괴산제(槐山齊)가 있었는데, 보존 관리가 어려워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집의공파 문중(門中)에서 무진정

옆에 터를 마련하여 새로이 건립 하였다. 매년 5월초에 종회(宗會)를 개최 한다.

무진정은 '경남유형문화재 제158호'로서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명종 22년(1567)에 무진(無盡) 조삼(趙參)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우고, 선생의 호를 따서 무진정(無盡亭)이라고 하였다.

무진은 조선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무진정(無盡亭)현판은 조선 중기의 문신 주세붕(周世鵬 1495 ~1554)의 글씨라고 전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팔작지붕이다.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다.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중건한 것으로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이 단순 소박하게 꾸민 건물로 조선 초기의 정자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앞뒤의 퇴를 길게 빼고 중앙의 한 칸을 온돌방으로 꾸며놓았다.

무진정에서 연못으로 내려서는 출입문인 동정문(動靜門)은 연못산책을 나서면서 정(靜)에서 동(動)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지...

동정문을 통하여 보는 무진정

안내판.

연못 중앙을 따라...

수십그루의 왕버들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영송루(迎送樓) 빗돌이 서 있다.

영송루는 손님을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누각을 말하는 것.

영송루엔 1984년에 쓴 영송루기가 적혀있다.

함안조공 행적비와...

왕버들과 잘 어울린 연못가에 부자쌍절각(父子雙節閣)이 있다.

부자쌍절각은 어계 조려 선생의 6세손이자 이곳 정자의 주인 무진 조삼 선생의 증손인 조준남과 그의 아들 조계선의 효와 충을 기려 세운 전각.

부자쌍절각 옆에는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라는 비도 있는데, 정유재란 때 전사한 주인 조계선을 따라 죽은 노비 대갑을 기려 세웠다.

부자쌍절각의 문인 성인문.

카메라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진정 안내판

눈길을사방으로 돌려가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무진정을 떠나 마을 입구에서 본 사적 제67호 '성산산성'안내판.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성산산성은 무진정 주차장에서 올라야만 길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가까운 '대산리 석불'을 찾아간다.

충노담 무진정에서 신호를 받아 79번 도로를 건너면 삼정동산 대사마을과 대산리석불 안내판이 170m를 가리킨다.

보물 제71호인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한절 즉 대사(大寺)라 전해지고 있는 이 사지는 함안면 대산리 1139번지 내 위치한다.

모두 4구(軀)의 불상이 남아 있어서 하나의 석불군(石佛群)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완전한 상(像)은 2구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이다.

이 입상은 형식이나 양식이 흡사하여 입불상의 좌우협시(左雨脇侍)로 조성되었음이 분명하다.

두 보살입상 사이의 뒤에 있는 좌불은 목이 부러져 머리가 없는 본존불로 손상이 심하여 가슴과 손 및 하체의 일부만 성할 뿐 다른 부분은 깨어지고 마멸되었다.

평판적인 가슴에는 우견편단의 법의(法衣)를 선명하게 표현하였고 두 손은 배에 대어 법계정인(法界定印)을 하였다.

하체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상부만 남아 거의 평면을 이루었고, 발이 조금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을 뿐이다.

두 발 사이에 'C'자 모양 옷무늬를 선각(線刻)한 것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두 보살상은 타원형의 부드러운 얼굴이나 아담한 체구, 그리고 8각과 원형의 2단 대좌 등에서 통일신라 초기양식의 전통을 계승한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원통형의 높은 관(冠)이나 작달막한 체구, 기하학적인 의문(依紋), 한복식 옷 등의 표현은 고려의 지방양식 석보살상(石菩薩像)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파괴가 극심한 머리없는 좌불상은 온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의 석질과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불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입불상은 머리가 없지만 양감(量感)이 풍부하고 세련미가 있는 조각으로 상당한 수준의 작품.

안내판

그리고 다시 '함안 검암리 충순당 정려각'을 찾아간다.

이령(李伶)장군 창의비(倡義碑)와 충신 정려각(忠臣 旌閭閣)은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검암천 기슭에 충신(忠臣) 정려각(旌閭閣)과 함께 서있다.

* 창의(倡義)는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

 

충순당(忠順堂) 이령(李伶, 1541~1592)장군은 함안군 검암리 출신으로 임진년(1592년 4월 14일) 왜구가 부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1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서 김해성으로 달려가 동문 수문장으로 왜적을 무수히 참살하고 4월 20일 장렬히 순절(殉節)했다.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세상에 공포하기 이틀 전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 순절(殉節)한 성산(星山- 廣平) 이씨(李氏) 충순당(忠順堂) 이령(李伶) 장군은 함안 검암(儉巖)사람이다.

이령(李伶) 장군의 자는 여윤(汝允)이요, 호는 충순당(忠順堂)이고, 이름은 (伶)이다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 때가 4월 14일이요, 순국한 때가 4월 20일이니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4월 22일보다 이르니 전국 최초의 의병인 셈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만 8700명의 육군의 정규 병력을 원정군으로 편성하여 9번대(番隊)로 나누어 조선을 침공하도록 했다
이밖에 수군과 정규 전투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 제1번대 주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은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 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52세의 이령 장군은 다음날인 4월14일 즉시 1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 백리 길도 마다않고 김해성으로 달려가 참전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자 효시(嚆矢)이다.

당시 동래성이 함락되고 얼마 후 왜적의 대군이 밀려오자 김해부사(金海府使)인 서예원(徐禮元)은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주하며 성안의 주민들과 군사들에게 퇴각을 권하자, 선생은 “나라의 존망이 눈 앞에 있는 데 어찌 내 한 목숨 아까워 도망갈 수 있겠느냐”며 크게 꾸짖고는 데리고 간 둘째 아들 명화(明?)에게 피묻은 적삼(血衫)을 벗어주며“만약 내가 죽거든 이 옷으로 장사를 지내거라”하고는 동문의 수장이 되어 왜적을 참살하고 격퇴했으나 끝없이 왜군들이 밀려오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내 적을 당하지 못하고 김해성이 함락되면서 순절(殉節)했다.

정려 안내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31호인 '함안 검암리 충순당 정려각'

이같은 선생의 혁혁한 공적과 충성심이 수 백년 간 묻혀 있다가 뒤늦게 조정에서 알고 고종 6년(1869년)에 충의를 찬양하기 위해 가야읍 검암리 상검동 길목에 충신의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으며, 고종 17년 (1880년) 통훈대부사헌부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에, 고종 22년(1885년) 에는 통정대부이조참의 (通政大夫吏曹參議) 정3품 당상관으로 증직되었다.

선생 사후 293년만의 일이다.

정부는 1980년에서야 충순당과 성인사(成仁祠, 별묘), 정려, 묘소 등을 정비했다.

이후 선생의 행적은 또다시 역사 속으로 묻혔다가 후손들의 요청으로 재실과 정려각이 2011년에 이르러서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530호로 지정되었다.

그에 비해 이령장군과 같은 시기 김해성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던 김해 4충신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 류식(柳湜) 등 4명은 사후 8년 뒤에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김해에 사충단(四忠壇)을 세워 매년 음력 4월 20일 4충신에 대한 향례를 지내고 있다.
또한, 김해의 사충단은 지난 95년 국도비 20억원을 들여 복원사업을 하고 경남도 문화재 제 99호로 지정되었다.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을 찾아간다. 함안 주리 사자석탑은 함성중학교 교정에 있다.

안내판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우뚝한 탑이 복원되어 있다. 한눈에 보아도 일부 새로 복원한 모습을 알 수 있다.

 

높이 2.40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인 이 사자탑은 본래 하성기단(下成基壇) 위에 서 있는 네 마리의 석사자(石獅子)가 3층 내지 5층의 탑신을 받들고 있는 형식으로, 보통 다층석탑의 상성기단(上成基壇)이 네 마리의 돌사자로 되어 있는 형식의 석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석탑은 그 유례가 매우 희귀하여 우리나라에는 이 탑을 합쳐서 4기만이 조사된 귀중한 작품이다.

즉, 구례 화엄사(華嚴寺)사사자삼층석탑, 회양(淮陽) 금장암지(金藏庵址)사사자삼층석탑,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사사자석탑, 그리고 주리사지사사자석탑 등 4기이다.

 

이 탑은 여항면 주서리 주리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이곳 면사무소로 이전하였다가 광복 후에 다시 현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는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건 때의 부주의로 5층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고 5층옥신(屋身)도 파손되었다.

현재는 1층옥개석 위에 2층옥개석을 올려놓고, 그 위에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를 앉히고 그 위에 3층옥개석을 얹었는데, 이것은 잘못 복원된 것이다.

사자석탑으로 이름지어진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로 탑을 받쳐들고 있다.

동편 두 마리는 암컷, 서편 두 마리는 수컷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어미사자와 새끼사자라고 하는 이도 있다.

1층옥개는 땅에 묻혀 있어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나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이형석탑이다.

상륜부는 새로 복원한 모습이 확연하고...

안내판

옆엔 여러 고풍의 유적들이 나열되어 있다.

가지런히 모아놓은 석물들과...

탑의 옥개석을 우주와 탱주 없이 쌓아놓았다.

그 옆에도 문화재의 잔해들이 널려있고...

누구누구 군수의무슨무슨 선정비가 주욱 도열해 있다.

군수선정비,영세불망비

 

이제 다시 '함안향교'를 찾아간다.

홍살문을 바라보며 차를 댄 후 우람한 은행나무를 올려다 본다.

범상치 않은 기품이 뿜어져 나온다.

500년이 훨씬 넘은 보호수로 지정한 은행나무다.

발걸음은 출입문인 외삼문(外三門)화루(風化樓)에서 멈춘다.

함안항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효종(1649~1659) 때 세워진 것으로 그 뒤 한국 전쟁 때 불탔으나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잠긴 문을 넘어 카메라를 집어 넣는다.특이한 것은 대성전 좌우에 동 ·서무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것은 급경사지라는 지형의 제약 때문으로 보인다.

명륜당과 동 · 서재(東 ·西齎), 사당(祠堂)인 대성전과 동 ·서무가 일렬로 서 있으며,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을 조금 당기고...

안내도를 담고는 함안향교를 벗어난다.

함안향교를 나서면서 바라보는 은행나무와 홍살문.

함안향교의 길목에서 만난 비각.

차를 멈추고 안으로 들여다 본다.  비석엔 '정후청덕비(鄭侯淸德碑)라 적혀있다.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한강 정구선생과 관련되어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로,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박학하여 후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관직은 여러 차례의 지방관을 거쳐 형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성산산성을 찾기 위하여 무진정주차장을 찾았다. 성산산성은 저 위쪽으로 나 있는 넓은 길.

성산산성은 600m를 올라야 한다.

뽕나무 열매 오디가 익어가는 산길.

대숲을 지나...

허허한 성터에 닿았다. 지금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해발 139.4m의 조남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북쪽에는 평야가 위치하며 멀리 낙동강이 바라다 보인다.

서북쪽에는 아라가야 산성인 봉산산성(蓬山山城)과 함께 아라가야 고분인 도항리·말산리 고분군과 동북쪽으로는 문암산성(門巖山城)과 동지산성(冬只山城),

동남쪽으로는 성참산성(城站山城) 등이 둘러싸고 있다.<자료>

1998~2008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성벽 및 성벽 단면, 문터, 건물터, 배수로 등의 모습과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저수시설 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많은 신라 목간들이 출토되어, 축조 시기와 역역 동원체제 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기존 성곽과 새로 복원하는 신 구의 조화가 슬기롭게 이루어져야 할 텐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일손을 놓고 있는 모양이다.

그냥 허물어진 성터의 헛헛함이라~

 

성산산성은 함안산성이라고도 불린다.

『함주지(咸州誌)』고적조(古蹟條)에는 “가야국의 구허(舊墟)로 군의 북쪽 5리 성산 위에 있다.

주위는 4,383척이며, 지금도 성의 기초가 완연하다”라고 하여, 이곳을 아라가야의 옛터로 기록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22년조에는 “…고신라가 아라 파사산에 축성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라고 하여, 561년에 신라가 축성하였다고 적었다.

발굴조사 결과 동문터와 남문터를 포함하여 안쪽과 바깥쪽 벽을 모두 돌로 쌓은 너비 8∼9m, 잔존 높이 2∼5m의 협축식(夾築式) 성벽이 확인되었다. 또한 신라 산성의 특징을 보이는 삼각형의 성벽 보축 방법, 연꽃무늬 막새 등의 기와류, 6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명문 목간, 동문터 부근의 저습지 안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제품 등도 확인되었다. 이로써 보아 이 산성은 아라가야가 멸망한 직후인 6세기 중엽 경에 신라에 의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자료>

발굴조사 결과 동문터와 남문터를 포함하여 안쪽과 바깥쪽 벽을 모두 돌로 쌓은 너비 8∼9m, 잔존 높이 2∼5m의 협축식(夾築式) 성벽이 확인되었다.

또한 신라 산성의 특징을 보이는 삼각형의 성벽 보축 방법, 연꽃무늬 막새 등의 기와류, 6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명문 목간, 동문터 부근의 저습지 안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제품 등도 확인되었다.

이로써 보아 이 산성은 아라가야가 멸망한 직후인 6세기 중엽 경에 신라에 의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자료>

안내판 1

안내판 2

안내판

.

이제 虛虛성산산성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선다.

차를 타고 귀가하면서 떠오른 짧은 단상(斷想).

세상엔 마음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무조건 참고 견디며 인내하여야만 한다.

그러니까 '삶은 참고 견디는 과정의 연속'이다.

'견딜 일 생겨서 살맛나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이 와락 가슴에 와 닿는다.

 

견디는 연습

 

삐걱거리는 인체 모형도처럼

못과 나사에 조여져야만 한다

 

딱 한 개 남아

흔들거리는 이처럼

먹먹한 사랑 한 조각,

가슴 한 켠에 밀어둔 채

서늘하게 계절을 기다려야만 한다

 

반병의 술처럼

남겨져서

내 삶의 여백을 삭여내고 있는

아픔이여,

 

차라리 앓고 있으니 행복한 것을

견딜 일 생겨서 살맛나는 것을,

 

그러니

말없이 끌어안고 눈물 흘리며

못과 나사를 조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견뎌낼 수밖에 없다

이 계절의 내 일과표는,

(이진숙·시인, 1972-)

 

 

 

 
다음검색
댓글
  • 15.11.09 12:04

    첫댓글 뉘신지 이렇게 해박한 지식을
    갖고 상세한 설명을 맛있는
    양념에 발라서 고향동네 소개를,,,,, 다시 한번 고향동네
    생각이 ,,,,,,

  • 작성자 15.11.09 15:39

    어제 TV보다 안대희가 함양출신이라 자막 나오길래 아닌데 함안인데 생각하며 검색하다 이 글이 나오길래 나도 잘 모르는 걸 잘 설명해 놔서 친구들도 보라고 데리고 왔졍~~^^
    그런데 내가 우리 형제들 모인데서 들었는강~~?
    안대희씨가 군북 안도인가 사도실인가 사람이라 들은것 같기도 하고~~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