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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일 (월)
오월이 지나고 새달 유월을 맞았다.
오늘은 시내로 가서 인터넷을 하고 오기로 어제 아닐과 이야기를 하였는데 아침에 말하길 땅 지적도를 만들기 위하여 이웃 주민과 함께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번 주면 지적도 완성과 건물 설계에 들어가야 할텐데 말은 그렇게 하였어도 말대로 이루어지기는 두고 보아야만 하는 이곳의 모습이다.
아침까지 전기는 안들어왔고 이웃집에가서 화장실 사용할 물 떠다가 놓고 설거지 물 떠다가 놓고 세면물 떠다가 머리감고 세면을 하였다.
오늘은 여느날보다 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덮다. 전기가 이틀째 안들어오므로 냉장고가 전기 들어오는 시간만큼이나마 돌아가 냉동실을 이용 시원한 물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이제 온장고가 되어버려 아예 물을 밖으로 다 내어놓았다. 이사람들이 전수기 물을 받아 먹을 줄은 알아도 물을 보충할 줄 모른다. 그렇게 이야길 하여도 먹은 빈 물병은 여기저기 나뒹굴고 어떤 가즈런함이나 정돈은 찾아볼 수 없다 밥을 먹고나면 설거지는 다음 끼니 먹을 즈음에야 하고 파리는 그틈을타 배를 채우고 그야말로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음식 먹을 마음이 싹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랴 그렇다고 안먹을 수도 없고 다른 대용의 음식도 공급할 수 없으니 말이다.
더위에 지쳐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 부채질을 하여도 잠시뿐이고 몸은 늘어져 자꾸 잠만오는데 줄줄 흐르는 땀으로 잠도 잘 수 없고 그야말로 찜통더위 찜질방을 방불케 한다.
저녁때가 되어 해가 넘어가는 틈을 이용 시내로 인터넷을 하러 나갔다. 그곳도 마찬가지로 전기가 안들어왔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발전기를 돌릴 수 있는 곳을 찾아가 인터넷요청을 하였더니 일반 인터넷보다 발전기를 돌려야 하므로 돈을 더 내야 한다고 하는것이다, 그렇다고 안할 수 도 없고 시간당 계산을 한다고 한다. 발전기를 돌리고 검회색 연기를 내품고 귀청을 소란스럽게하는 가운데 인터넷을 연결 하는데 한글이 뜨지를 않는것이다. 20여분 씨름을 하여도 안되어 그만 접기로 하고 다음에 고락푸르로 나가서 하기로하고 시장을 들려 빨래할 세제와 음료 및 과일을 좀 사가지고 돌아오니 저녁먹을 8시가 넘어버렸다. 오늘 점심은 라면 5개남았는데 비상 식량으로 남겨두고 아끼려고 안먹었더니 배가 더 고프다. 그러니까 하루 두끼로 때우는 것이다. 점심은 안먹지만 전후로 과일이나 다른 것으로 간식으로 대신 하지만 점심을 먹는것과는 다르다.
아닐이 시장을 보면서 야채들도 샀는데 정작 사야할 식용유는 안사왔다고 아닐 엄마가 꾸중을 한다.
아닐 막내 동생이 고락푸르에사는 누님댁에 가서 그곳에서 일을 찾아 일하다가 내와 와서 학교건축을 한다고 하니까 집으로와 일거리를 잡으려고 왔다. 이곳 마을 사람들과 그 외 사람들이 학교 건축일을 하고 싶어 너더 나도 아닐 집을 열심히 드나들고 있다.
얼마나 좋겠는가 일이 없고 수입원이 없는 이 농촌 마을에 뜻하지 않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즉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말이다. 나라도 적극적으로 매달려 일을 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아닐이 오늘 벼를 166Kg을 팔았다. 아닐 제수가 몸이 아파 병원을 다녀오고 의사의 진단은 눈 시력이 않좋아 신경으로 말미암아 머리와 눈이 아픈것이라며 안경을 맞추어 써야 한다고 하여 안경을 맞추고 왔다는 것이다. 그 안경 값이 500루피(한국돈 약 15,000원정도)란다. 그래서 벼를 판 것이다. 아닐 땅 값으로 얼마를 줄터이니 팔지 말라고 하였더니 아니라고 하며 그 돈은 건축 하는데 쓰라고 한다. 이곳 저곳 다니면서 땅 지적도를 만드는일등 많은 일들로 오토바이 기름도 만만치 않게 사용 되므로 기름값과 비용을 주겠다고 하였더니 아니라고하며 자신이 한국에 있을 때 목사님도 돈 안 받고 자신을 데려다주고 태워 주었잖느냐며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자신이 부담을 할 것이라고 한다. 마음은 고맙다 그렇지만 돈이 없어 벼를 팔아야 할 정도인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 밤은 유독 바람도 없고 무덮다. 어떻게 모기가 들어오는지 잠들었다가 모기 소리와 물려 가려움으로 깨어 폰 라이트로 모기를 처단하고 다시 잠을 자다보면 또 들어와 시식을 하니 하룻밤 한두 번도 아니라 짜증까지 난다.
그렇게 자는둥 마는둥 하니 낮만 되면 더위와 더불어 졸음만 오는게 아닌가?한마디로 병든 닭 신세가 되고만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냈다.
2009년 6월 2일(화)
아닐이 목사님 인터넷은 5일에나 고락푸르로가서 하자고 한다. 오늘부터 왔다갔다 땅 지적도와 더불어 할 일이 많다고 한다. 나도 같이 다니냐고 했더니 목사님은 집에 있으라고 한다. 아침 빨래에 진땀부터 흘리고 샤워후 자이 한잔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고 또 닦아낸다.
전기는 언제 들어오려나 오늘이 벌써 사흘째인데......
와우! 드다어 전기가 들어왔다. 아닐이 좋다고 박수를 친다. 나도 아닐의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런데 5분이나 들어왔을까. 다시 나가고 말았다. 좋았다 말았다. 한참 후에야 잠시 들어오더니 이번에는 역 10분정도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고 만다. 아닐이 오늘 땅 지적도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고 갔다. 이곳 기온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올라가는 듯하다. 좀더 시원한 곳을 찾아 더위를 식혀 보려고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다. 간간이 불어오는 나무밑 바람은 있지만 태양열기에 금새 땀으로 흠뻑 젖고 만다. 집안 그늘진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바닦에 앉았더니 아닐 동생이 돗자리를 가져다 주어 위에 앉으란다. 이곳시간 12시경 아닐이 돌아왔다.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를 하였는데 이곳은 지금 결혼 시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때문에 땅 지적도를 만드는것이 다음주 주일이나 되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해진다. 이번주 마무리하고 건축 설계까지 하려고 하였고 설계가 완성되면 최소한 펌프공사와 기초 공사라도 시작해 놓고 한국을 다녀올 생각 이었는데, 어제저녁 꿈에 땅 길이 숫자 4가지를 보았었는데 숫자는 기억이 안나지만 마지막으로 이곳 경찰에게 안되는 것을 제발 해달라고 내가 무릅을 꿇고 말했던 모습이 있어서 아무리 생각 하여도 쉽사리 일이 진행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대로다. 아닐이 내가 꿈에 보았던 4가지 숫자를 컴퓨터로 뽑은 것을 가져다가 주었다. 이 숫자가 일치하는지는 모르지만 다음주 주일이나 되야 된다는 말은 나의 마음을 가라앉게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 하나님의 섭리 하심과 인도하심 안에서 있기 때문에 어떤 인위적 방법으로 돈을 얹어 주어서나 다른 방법을 고려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번 잘못 그랬다가는 매번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하시는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마음은 착찹 하기도하다. 남인도 칸누르를 다녀와야 할 것인지, 그곳을 다녀온다면 최소한 10일정도를 계산해야 하는데 기차로 왕복 6일을 잡아야 하고 기차표 구하는데 얼마간을 날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하여 가야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다. 처음부터 일이 하리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되지 않고 진행 되었더라면 남인도에도 여유있게 다녀올 수 있었을 것인데, 안나의 부탁을 다음으로 미루더라도 이곳에서 일 진행에 신경을 써야 될듯하다. 오늘이 화요일 주일까지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데 날씨라도 좀 사람살게좀 하였으면 좋겠다.
오후에야 들어서 전기가 들어왔다. 그것도 들왔다 나갔다를 반복을 하다가 좀 긴 시간 나가지 않고 전기가 들어와 팬을 돌려주니 그나마 달구어진 집안의 공기이나 피부에 닿는 느낌은 그나마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아닐이 TV를 틀더니 에어 프랑스 항공기가 바다에 추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방송을 보니 그림으로 번개에 맞아 바다에 추락하여 200명이 넘는 많은 승객들 모두 다 죽었다는 것이다. 다시 언급하게 되지만 작년에 왔을 때 고 최진실 자살 소식과 중국 쓰촨성 지진 사건 소식이 있었는데 이번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과 에어 프랑스기가 추락하는 사건을 접하게 되어 마음심히 심란하기도 하다.
몇일 전부터 밤마다 결혼을 예비 축하노래 소리가 있었는데 결혼하는 사람이 우리 아가페선교회에서 지원하는 어린이(학생) 아라빈드의 누나이다. 오늘은 사이클릭샤에 스피커를 장착하고 나팔수들이 동원되어 축하 음악 소리에 동네가 떠날듯하다. 아닐 말로는 부자 사람은 자동차로 하는데 수십아니면 백여대가 동원 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 아라빈드 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자전거릭샤에 고직 신부가 탈 자그마한 자동차 한 대 뿐이다. 사람들도 얼마 되지도 않는다.
전통 흰두 방식으로 집에서부터 템풀에가서 의식을 치르고 템풀이 아닐 집 옆에 있는데 바로 앞에 우물이 있다 물 신에게 의식을 치르는것인지 신랑 신부가 우물을 돌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동네를 한바퀴돌고 신랑집으로 가는 것같다.
왜 날이가면 갈 수록 더 더워지는 것 같은지 모르겠다. 이제 이쯤이면 적응도 될법한데 저녁 먹을 시간쯤되서 아닐이 결혼식 하는데 가자고 한다. 아는 사람 아들이 결혼을 하기에 가야한다고 한다. 가서 구경하고 밥 먹고 오자고 한다. 함께 동행하여 인근 마을의 한 작은학교를 빌려 모임의 장소로 하고 있었다. 아주 큰 부자가 아니라고 한다. 큰 부자 사람은 여자 댄서들도 불러 춤을 추고 한다고 한다. 아닐집 뒤에사는 아르빈드 누나가 시집을 가는 의식에서는 마을 사람들초차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먼 곳에서부터 몰려와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고 있다. 나 또한 이곳에서 톱 인기인인이 되었다. 하얀사람이 나타나 사진기(촬영하는 사람의 것보다 더 좋은 카메라)를 들고 번쩍이며 찍어대니 촬영기사도 부러운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디를 가나 구경 거리로 주변에 모여들고 말 한번 걸어보고 싶어사 다가와 인도 말로 뭐라고 하는데 도통 뭐라고 하는 지 알아야 면장을 하지요. 그래도 표현을 교차하면서 의사를 나누면 웃음으로 답하곤 한다. 인도가 영어권이라고 하지만 시골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알지 못한다.
젊은이도 그렇고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닐집 같은 경우는 그래도 한국에가서 일하고 돈을 좀 벌었기에 집도 짓고 아들 안몰(Anmol)을 준 도시 지역으로 유학을 보내 교육을 하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안다. 지금 이곳은 방학 기간이라서 아닐 아들이 집에와 있어 아닐 집안 식구들하고 이야기 하는데 많은 통역 역할을 하고 내게 말을 하기도 한다. 명랑한 성격에 똑똑하기도하여 내가 만지는 물건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옆에서 한번 보면 나 없는 사이 카메라든 손을대서 때론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한번은 노트북을 나 몰래 들고 집안 식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전원을 켤때 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다음부터는 절대로 손을 대면 안된다고 말을 하였더니 이제는 컴퓨터에는 손을 안댄다. 얼마나 호기심도 있고 만져보고 싶겠는가.
내가 어렸을적에 동네에 사는 세네살 위의 형님되는 분이 도시로 이사를 하였다가 겨울방학때쯤인가 고향에 온적이 있었다. 그때 그 형님이 피겨스케이트를 가지고와 얼음판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보았고 우리집에 그 피겨 스케이트를 놓고 다른집에 간 사이 내가 맞지도 않는 큰 피겨스케이트(지금 김연아 선수가 타는 그런 스케이트)에 양말을 넣고 발을 최대한 움직이지 안도록 하고 얼음판 위에 선적이 있었다. 이건 일어서 앞으로 숙이면 앞으로 콕 넘어지고 뒤로 조금만 힘이가면 꽈당 뒤로 넘어지고 하길 수십여차례 골탕을 먹고 나서야 조금 일어서는 방법을 터득한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그 피겨스케이팅을 잘만 배웠다면 오늘의 김연아선수처럼 되지않았을까?^*^(그냥 웃어주세요)
그 후에 어머니께서 도시에사는 아는 사람의 아들이 타던 다 낧은 스케이트를 얻어다 주어서 날을 숫돌에 갈아가며 얼음판을 질주하였던 생각이 떠오른다. 60년대 말 이라면 다른아이들은 양날 썰매든지 외발 썰매가 고작이었는데 남들에게는 많은 부러움이 되었을 법하다.
가랑이 사이로 외발썰매 뭐라고 하는지 이제는 이름도 잊었는데(앞으로 나가기 위하여 지치는 것) 바지 가랑이가 헤어져 혼도 많이 났었다. 그 후로 개발한것이 가랑이 사이로 넣지 않고 양쪽손으로 지치는 방법으로 더 이상 가랑이 헤어지는 것을 끝마친 그런 경험이 있었다.
무슨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나? 결혼식 의식은 모두 흰두식 즉 점보는듯한 길운을 점치는것이겠지. 한쪽에선 음식(로띠; 밀가루를 반죽하여 부침개 모양으로 만들어 굽는것)을 만들고 한쪽에서는 차량을 이용하여 대형 스피커로 노래하며 춤추는데 악단들 틈에 여장을 한 남자가 밤이 새도록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신이난 사람들이 합류하며 흥을 돋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하는 그런 춤사위로 한마디로 무당 춤추듯 이건 흥에겨워 즐겁게 추는 춤이 아니라 그야말로 광란의 모습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차이는 어디가나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음식 먹을 차례가 돌아와 음식을 받아 먹었는데 너무 달아서 비위에 안 맞고 너무 지저분하게 보여 먹을 수 없겠고 로띠 하나로 저녁을 때우게 되었다. 안물이 하는이야기가 집에서 먹는 밥이 더 맛있다고해 아닐과 함게 웃어댔다.
식사를 끝내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새워 후 바로 잠들어 모기가 무는지 안무는지도 모르고 아침까지 잘 잤다.
2009년 6월 3일(수)
벌써 인도에 온지 보름이 지나는데 눈에 보이는 아무런 일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음이 매우 안타깝다. 아닐이 어제 하는 말이 목사님 많이 많이 프러블럼, 한국 같으면 모든 것이 빨리 빨리 이루어지는데 이곳에서는 너무 천천히 그것도 약속했다고 해서 약속대로 맞추어지는 것도 아니라서 많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말은 아니다 괜찮다고 했지만 마음은 매우 초조하기 짝이없다. 앞으로 이제 보름남짓 한 시간에 얼마만큼 일이 진척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이 그런 곳이다. 그렇다고 이런 이들의 생활과 행정을 내 마음에 안맞는다고 바꿀 수도 없는것 아니겠는가?
밤새 나갔던 전기가 아침에 잠시 들어오더만 또 나갔다. 오늘도 이 더위를 어떻게 보내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시원함이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만들어 할 수 있겠는데 그럴수도 없고 그냥 놀고 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연신 펌프로 물을 길어 샤워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새워할 때 물 끼얻는 시간만 시원함을 느끼고 옷 입는 시간에 다시 땀이 솟아난다.
밀란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자기집에 나를 오라고 한다. 주일 전까지 별 할 일이 없기에 밀란 집에 가기로하고 밀란에게 오라고 하였다.
아침 뜨거운 해가 오르기 전에 아닐 집 마당을 보면 울퉁불퉁하게 생겨 비가오면 물이 고이고 꺼져들어가는 부분이 있어 오늘 이곳에 흙을 채우자고 했다. 그랬더니 목사님 더워서 안되요 하며 안해도 된다고 하였다. 마침 아닐에게 시집간 누나 둘이 있는데 누나의 딸들 둘이 왔다. 이곳은 방학이되면 인척집에 왔다갔다하며 여러날을 지낸다고 한다. 인원이 많아진 틈에 아닐집 앞 마른 저수지라고 해야할까. 마른 땅을 이곳에선 만능으로 사용하는 곡괭이를 들고 나갔더니 모두 흙 나를 도구(바구니)를 가지고와 흙을 담아 주었더니 나르기 시작 하였다. 곡괭이질을 내가 하고 흙을 덩어리를 바구님에 담아 주었더니 열 살박이 아닐 아들도 신이 나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흙을 날랐다. 얼마후 나의 얼굴에 폭포수가 터졌다. 얼마나 땀이 흐르던가 줄줄 흐르다 못해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즈음 흙이 패인곳에 채워지고 그만 하였다. 너무 더워 많은 땀이 흐르고 새워를 했다. 전기가 들어와 있는 사이라 펌프를 돌려 팬티 바람에 우물가에 앉아 틀어댔는데 그만 저기가 나가고 펌프로 물을 퍼 할 수 밖에 없었다.
몇 시간 후에 밀란이 아닐집에 도착 하였다. 벌써 낮이되어 너무 더웁기 때문에 지금 바로 갈 수 없기에 서늘해질 저녁 시간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전기도 나갔기 때문에 나름대로 시원한 바닥에 자리를 피고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자고 정말로 할 일이 없고 할 일이 있어도 더웁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것이 무료하기만 하다.
아닐 누나의ㅏ 딸들이 와서 한국에서 가져간 퍼즐을 선물로 주고 그것을 맞추라고 했더니 처음에 함께 하다가 밀란이 오는 바람에 이 아이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낮선 남자나 이웃 남자가 오면 여자들은 함께 동석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먹을 것을 주는것도 여가가 가져다가 주지 않는다. 어린 아이가 있으면 아이를 시키고 어린 아이가 없으면 남자가 대접을 한다.
할 수 없이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아닐과 밀란 그리고 나와 이웃 남자들과 퍼즐을 완성 한 뒤에야 밀란 집으로 향하였다. 오토바이 뒤에 타고 포장 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지나 25Km 떨어진 밀란 집에 도착 하였다. 밀란 집에 도착하니 밀란 동생인 드네쉬가 반겼고 그의 아버지도 반겨 주었다. 작년에 왔을때 뵈었기 때문에 더욱 반가와 하셨다. 그런데 이소 여자 식구들은 나와 보지도 못하고 어디선가 나를 주시하여 보았을 것이다.
마중도 배웅도 이곳 여자들은 할 수 없다. 이 전토이 언제나 바뀔까?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난 뒤 바로 잠자리에 드는 이곳 밀란 아직 나는 적응이 안되어 한참을 옥상에서 서성이다가 모기장을 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얼마나 더운가 또 땀이 범벅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자다 말고 샤워를 하고 다시 잠들었는데 몇 번을 깼는지 모른다. 흐르는 땀 으로 잠이 깨는 것이다.
2009년 6월 4일(목)
간신히 아침을 맞았다. 이곳은 4시면 일어나 덜그록 거리고 어제 저녁 먹은 그릇을 설거지 하고, 청소를 하느라 분주하다.
아직 어두 컴컴한 상태이고 같이 일어나기도 그렇고 너무 더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여 몸은 정상 상태도 아니고 하여 좀더 누웠다가 일어나 세면을 하며 샤워를 하고 아침 자이 한잔으로 아침 속을 달랬다. 이곳은 열시나 열한시경이나 되어야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저녁 8시경 저녁 이렇게 두끼로 만족하고 있다.
아침을 먹고나서 밀란이 가게를 가자고한다. 주변 구경삼아 따라 갔다가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몇 몇분들과 통화를 하였다. 인도에 와서 코친과 칸눌도 다녀간다고 했었는데 이곳에와서 정상적으로 계획대로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코친과 칸눌을 방문하는 것을 취소하였다.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들 빅토와 폴에게 이번에는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가게 주변 사람들이 외국인이 왔다고 구경하러 다가오기도하고 밀란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시골 시장가로서 이발하는 곳도 있고 자이를 만들어 파는 곳도있고 과일을 파는 상점도 있다. 사진 찍는것을 좋아하는 이들이기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진기를 들이대면 환한 웃음으로 응대를 하여준다.
밀란 집으로 돌아와 태양열기로 데워진 집안에서 어떤 시원함을 찾을 수가 없다. 작년에 사용하였던 방법으로 물동이에 물을 담아다가 발을 적시고 담갔더니 작년에 보았던 식구들은 웃음으로 보아주고 외국인이 왔다고 밀란 친구하나는 2km나 되는 곳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처음보는 모습이라 의아하기도 할 것이다. 처음보는 외국인이라고 구경을 하러 온다니 좀 웃음이 나오기도했다.
어제 저녁 너무 더운가운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여 졸음이 오기시작한다. 견디기 어려워 외국인이 왔다고 보러온 밀란 친구앞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겠기에 잠좀 자겠다고하였더니 벳터리로 천장에 달린 팬을 돌려주어 눕자마자 잠이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흐르는 땀으로 깨어나 보니 친구는 아직 안가고 밀란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과일을 챙겨와 먹고 달려드는 파리를 쫓는데 신경도 한계에 이르기도한다. 그러나 이들은 파리가 달려들든 모기가 있던 아무런 상관을 하지도 않는다. 파리가 앉아 무얼하던 기어다니던 핥고있던 무신경이다. 나는 파리가 날라오는것만 보아도 쫓아야 하고 팔다리에 앉기만 하여도 즉각 즉각 반응이 저절로 나온는데....
아닐 친구도 저녁 해가 저물어 시원할 즈음이나 돌아갈 모양이다. 점심때를 지나 목사님 점심 먹어야지요 하기에 2시나 3시쯤 먹겠다고 했더니 우유로 요플레와 같이 만들어 한그릇 주면서 이것 먹으면 소화가 잘된다고 한다. 먹기에 좀 부담은 되었지만 성의에 거절 않고 먹었다. 좀 있다가 점심을 먹자고 하는데 안먹는다고 할 수도 없겠고 하여 조금만 먹겠다고 하였다. 로띠(밀가루로 만든 부침개 모양의 마른 전병)하나만 먹었더니 망고를 가져다주며 먹으라고 한다. 밀란이 더 먹으라고 자꾸 권하여 두 개를 혼자 다 먹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 좀 여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다르다. 아닐 집에선 망고 하나를 쪼개어도 한 개를 가지고 열 개 이상으로 길게 잘라 놓는다.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한조각씩 먹을 수 있게 그리고 혼자 먹더라고 천천히 오래 먹을 수 있게 하여서다. 밀란 집에서는 망고 하나로 세조각으로 잘라 놓는다 그러니 한국 방식으로 볼때 입안에 무언가 좀 들어간 느낌이라 먹은듯 하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밀란 친구가 집에 간다고 일어선다. 다음에 또 보자고 배웅을 하고 자리에 앉았으나 전기가 드락날락 하더니 이제 오지도 않는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니 밀란 아버지가 누워있으면서 웃음으로 바라본다.
오후 들어 결혼 시즌이라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결혼 축하 노래 소리에 옴 마을이 시끄러울 정도이다. 밀란 마을에서고 한 사람이 결혼을 하여 온 마을을 돌면서 템풀을 들려 자신들의 결혼 축복을 기원하는 모양이다. 밀란 집 마당 한 곁에 (신당이라고 말해야 올을 듯) 템풀이라고 만들어 놓고 보기에 가관도 아니다. 이렇게 허무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이곳에도 들려 몇 바퀴를 돌면서 의식을 행한뒤 밀란 집을 떠났다. 마을 여자들이 나아와 함께 돌면서 노래하고 악단을 동원하는데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이 들어나 보인다. 자전거에 스피커 하나를 매달고 여장을한 한 남자가 춤을 추고 흥을 돋구는데 신랑과 신부 모두 어떤사람도 웃음을 띤 사람을 한번도 보지를 못하였다. 모두가 신에대한 의식이어서 그런것인지 무표정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런데 음악 소리와 춤의 모양으로 보면 무당 굿패거리와 신들린듯한 춤사위가 이들의 생활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어둠의 사단 그늘아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 나타내주고 있다.
밀란이 저녁때가 되어 결혼 파티에 다녀온다며 드네쉬 아들을 데리고 갔다. 딸도 데리고 가라고 하였더니 여가 아이는 안된다고 한다. 낮에는 여자들만 나아와 동네를 돌며 노래로 축하를 해주고 밤에는 남자들만 모여 축하를 해주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나는 너무 더운 어제밤을 생각하고 옥상에 해질 무렵 물을 뿌려 식혀 시원한 잠을 잘 수 있도록 하였다.
한번 뿌려놓고 조금 있으니 금새 말라버렸다. 잠자기전 한번 더 뿌려야 겠다고 하고 완전히 해가 넘어간 뒤 물을 뿌리려 모터를 돌렸는데 전기가 약하여 물을 옥상 위로 올리지를 못하였다. 할 수 없이 드네쉬가 물 한동이를 가져다가 옥상에 놓았다가 잠자기 직전 잠자리 침대 옆에서 샤워를 하고 그 물로 야외 침대 밑에 물이 흐르도록 하여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와는 달리 훨신 시원함을 느끼고 잠을 아주 잘 잘 수 있었다.
밤 12시쯤 돼서야 밀란이 돌아오는 인기척에 이제 오느냐고 말했더니 목사님 안잤어요 한다.
2009년 6월 5일(금)
새벽 4시에 잠을깨 일어나 앉아 묵상으로 기도하고 하루의 날과 앞으로 이루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선하신고 계획하신 일을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언제나 기도 가운데에 나의 생각을 구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이루시어 나가실 일들을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계획대로 이루어 나가시는게 아닌가 때론 떼를 쓰고 구하는 기도를 뿌리치지 않으시고 이루어 주심도 계시나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아버지의 계획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자이 한잔에 기름을 가미하여 익힌 콩을 가져다주어 비위에 안맞지만 함께 나누고 세면과 샤워를 마친 후 있으니 밀란 앞집에 사는 어린 아이 하나를 밀란 큰 아들이 데리고 왔다. 밀란이 말하길 밀란 집 주변의 여러 가정 가운데 아이가 이 아이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밀란 가족도 이 아이로 즐거워 하고 있는 듯 하다.
나에게 다가옴을 두려워하여 밀란의 아들(비뚜)이 나에게 가까이 하려하면 울음을 머금고 오려하지 않는다. 한번 두 번 얼굴을 익히고 오늘 아침에는 손을 잡고 악수도 했다. 뭐 줄것이 없나 하다가 미리 준비했던 껌을 하나 주었더니 사탕인줄 알고 입안에 넣고 우물 거리다가 물렁거리고 달아 없어지지 않으니까 손을 넣어 껌을 땅에 버려버리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 껌은 생애에 처음 맛보고 입에 넣어보는 첫 경험이리라.
60년대 말 미국에서 보내준 세계지도 퍼즐을 첫 경험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곳에도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퍼즐을 가져다 주었더니 생전 처음 보는 것에 신기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아무리 설명을 하여도 이해를 못한다. 할 수 없이 처음 시작을 해주면 그제야 이해를 하고 맞추어 보는데 첫 경험이 얼마나 어설프겠는가. 상상에 맡겨 드립니다.
오늘은 고락푸르 역으로 가서 한국에 문서와 메일을 보내기로 하였다 몇일전 시도를 하였지만 한글이 뜨지를 않아 실패를 하였고 오늘 아침 8시에 밀란 집에서 출발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온 가족이 기념 사진을 찍자고 하였더니 나이 많으신 밀란 아버지부터 아이들 모두 새 옷으로 갈아 입느라 분주하다.
온가족이 함께 모여 가족 사진을 찍기로 하였는데 드네쉬의 두 딸이 나오질 않아 나머지 식구들만 함께 찍고 고락푸르 기차역으로 출발을 하였다. 밀란 집에서 약 50여Km떨어진 기차역을 밀란 오토바이 뒤에타고 가방 하나는 무릅에 얻고 노트북을 그 위에 얻고 쉬지않고 달린다 생각해보라. 한국처럼 미끄러지듯한 도로 사정도 아니고 털털대고 달리다보면 그야말로 무아지경이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나야크 동생이 운영하는 PC방으로 가서 월간 소식지를 이메일로 아들에게 보내어 회원들에게 보낼 양식을 만들어 보내기 위해서였다.
앞으로는 이러한 일들을 회원들 간에 누군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터넷을 마친 후 기차 역으로 가서 19일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17일 밤 기차표 예매를 하였는데 당일 기차표 좌석이 없는 것이다. 7곱번째로 좌석이 생기면 탈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17일 당일 기차를 타기전까지 다른사람이 취소를 하면 내가 그 좌석을 배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생활화되어있고 좌석이 그 안에 분명히 있게 된다는 아닐과 밀란의 설명이다.
고락푸르에 사는 형제에게 수시로 확인하여 연락을 줄 것을 부탁하고 아닐 집으로 돌아왔다.
아닐 집까지는 40Km정도인데 기차역으로 갈때보다 아닐 집으로 올때는 더 먼것 같고 또 더 많이 지친다.
돌아오자마자 전기가 들어와 있는 틈을 타서 모터를 돌려 빨래를 하고 샤워를 했다. 샤워도 할 때 뿐이지 조금만 있으면 다시 땀이 줄줄 흐른다. 인도에 와서 델리에서 그루가온에서 고기식탁을 대하곤 하리 집이나 아닐 집이나 밀란집에선 고기를 먹을 수 없기에 오늘 아닐 집에와서 한국으로 전화를 하다가 충전한 돈이 떨어져 충전을 시켰더니 가게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달걀을 파는 것을 보았던바 이왕 나가는 길에 달걀을 사오라고 하였더니 자기 집에서는 요리도 할 수 없다고하며 뒷집1 찬드라쉬크할 집에서 요리를 해다가 옥상에서 먹으면 된다고 한다.
한판을 사오라고하여 매일 내가 2개를 먹고 찬드라 쉬크할 집식구들 3개씩 먹으라고 하였다. 오늘 저녁은 찐 달걀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올때만 하여도 벨트 마지막 구멍에 맞추어 왔었는데 이제는 처음 구멍에 맞추어야 바지가 흘러내리질 않는다. 그만큼 많은 땀으로 체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과 영양 섭취가 제대로 되지를 않고 있다는 증거에겠다. 또한 하리 집에서 물이 맞지않아 배탈이 나서 더욱 그랬던것 같다.
찬드라 쉬크할의 할머니가 저녁에 달걀 3개를 삶아 왔는데 삶아서 찬물에 식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져왔다. 아닐외 집 식구들은 달걀을 보더니 아연실색 놀라는 모습을 한다. 이들은 달걀도 생명체라 생각하고 먹지를 않는 것이다. 힌두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기류 생선이든 육류든 절대로 먹지를 않는다.
혼자 옥상에가서 먹으려니 외톨이가 된것 같기도하고 좀 이상하다. 다른날 같지않게 아닐도 함께 저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너희들의 방식을 다 따를 수도 없고 나도 살려면 내 방식을 따른다. 그러니 더 이상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목사님은 고기를 먹는구나 그렇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녁식사후 피곤함에 일찍 잠들었느나 모기가 또 극성인지 몇방을 물리고 나서야 알아차려 깊은잠을 또 이룰 수가 없었다.
자다말고 일어나 폰 라인트로 또 모기장 수색에 들어갔다. 몇 마리 사살 후 다시 잠들 수 있었다,
2009년 6월 6일(토)
일찍 일어나 아침 인사들을 나누고 물청소에 들어갔다. 아닐집에 개가 있는데 연못에 가서 흙투성이가 되어 집안에 들어와도 그만, 사람이 맨발로 밖에 다니다 들어와도 그만 위릐 풍습이나 환경으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 습관을 갖는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옥상 계단에서부터 1층 모든 부분을 물로 깨끗이 닦아내니 마음까지 맑아졌다.
청소를 한 뒤 모든 물기가 다 마른뒤 하늘이 범상치 않다.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은 온 하늘을 뿌연 황사, 황사가 아니라 황토 바람을 일켜 대지를 어둡게 하였다. 그 뒤 빗방울이 하나 둘 두둑두둑 떨어지더니만 소낙비로 세차게 번개 천둥을 동반하여 내리기 시작 하였다.
더운 열기를 식혀주니 너무 고마운 비다. 아닐이 오늘은 1층에서 자자고한다. 소낙비로 얼마 내리지 않아 비는 그쳤는데 청소한 뒤 불어닥친 황토 바람에 청소는 하나마마가 되었다. 다시 언급이 되지만 아닐 집 창틀에 창문이 없다 창틀에 방범 철창은 있는데 문짝이 없어 커튼으로 가려 놓았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시원한 바람도 들어오지만 이렇게 황토 바람이 불면 그 먼지가 그대로 집안에 쌓이게 되는 것이다.
오후가 되어 해가 넘어가는 시원한 시간에 흩뿌리고간 소낙비 뒤에 아닐 집 움푹 들어간 마당에 어제 퍼다놓은 흙 덩이를 곡괭이로 깨었다. 가만 놔두면 여러번 비가 내리고 자연적으로 평평해진다고 하는데 어찌 한국피가 흐르는데 그렇게 긴 시간을 못본척 기다릴 수 있겠는가. 곡괭이 자루가 헐거워 빙글 빙글 돌고 연장이 말이 아니다. 망치를 찾아 손을 봐가며 깨고 있는데 아닐이 낮잠을 자다가 깨어 합류하고 더 이상 곡괭이가 말이아니라 아닐 동생이 보다못해 어디선가 나무를 구해오더니 곡괭이 자루를 교체하고 나는 망치고 흙을 부수었더니 생각 외로 곡괭이보다 더 잘 부수어졌다.
그리고 다시 아닐집 앞 마른 웅덩이로가 그곳의 흙덩이를 파 아닐 집 식구들 모두를 동원하여 나르게 하고 움푹 들어간 곳을 메꾸어 가기 시작 하였다. 얼마나 땀이 흐르던가 아닐은 목사님 그만하라고 연신 옆에서 일하며 말한다. 내가 말했다 아닐 집에와서 밥만 먹고 아무일도 하지 않아서 그런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목사님은 아무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고 엄마가 마음이 안좋아 한다고 한다.
오늘 따라 푹풍이 지나간 후라 전기가 들어오질 않는다. 할 수 없이 펌프물을 길어 샤워를 하고 옥상에 자리를 피고 피곤함을 풀고 있을때 찬드라 집에서 겨란을 삶아 왔다. 어제는 세 개를 가져와 오늘은 두 개만 가져오라고 했더니 두 개를 가져와 저녁식사와 함께 하였다.
곡괭이질과 망치질을 해선 그런가 팔 다리가 많이 피곤하여 아내의 손길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다. 옥상 한켠에서 아닐 동생 부인인 제수가 막내동생의 팔 다리를 주물러 주며 이야길 하는데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아닐 제수의 남편인 아닐 동생은 지금 두바이에가서 일하고 집에 없다. 한마디로 제수가 시동생 팔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는 것이다.
부러운 마음을 갖고 금새 잠이들어 얼마나 잠들었을까 어제 내린 바탓인지 이슬이 많이 내려 온 몸이 누축할 뿐 아니라 모기장 위에 이슬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려놓은 타올에서 이슬방울이 얼굴에 떨어져 박차고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와 긴 팔의 점퍼와 긴 바지를 꺼내 입고 다시 잠을 잤다.
2009년 6월 7일(주일)
모기소리 왱왱 물어뜯어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어 어두컴컴한 새벽 기상하여 주일을 맞았다. 이른 아침 아닐 집에 손님이 찾아왔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닐 집에 손님이 자주 드나든다. 어제저녁의 시원함이 잠시 있었다면 오늘 아침은 벌써부터 푹푹찐다.
아침 세면과 샤워 그리고 식사시간, 참 이곳의 식습관과 생활을 보면 식구가 모두 집에 있음에도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 알아서 먹기도하고 남자끼리 먼저 먹고 나이든 어른 여자라고 하여도 남자가 우선이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도 함께 않지않고 여자는 바닦에 앉는다. 남인도 코친에서는 남자가 앉으면 나이많은 할머니라 하여도 문 한켠에 기대고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남녀 차병이 있는 나라이다. 또한 카스트 제도가 인도 법적으로는 페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생활 속에 배어 있기 때문에 이들 끼리라도 옛 우리나라 양반
쌍놈 이야기를 들은것 처럼 살아가고 있다.
자기들 끼리 앉아 있다가도 신분으 다른 사람이 오면 그 자리에서 일어서 바닦에 앉고 비워주는 그런 생활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도 먹은 그릇은 절대로 남자가 치우는 법이 없다. 설거지는 물론 식탁에 그대로 놓아두면 여가가 치운다. 그것도 여자가 바로 설거지 하는것도 아니고 온종이 방치해 두면 파리떼가 새까많게 모여 다 빨아먹은 뒤 저녂 식사시간쯤 되어서야 설거지를 한다.
정수기의 물을 보충하고 보니 아닐 집에 방학을 맞아온 큰 누나의 딸 자드니와 작은누나의 딸 쁘리띠가 아마 머리를 감은모양이다. 그런데 아닐의 제수 사뜨나마가 프라스틱 참 빗으로 쁘리띠의 머리를 빗어주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석케와 이를 잡아주고 있었다. 아연실색 내 머리가 가렵기 시작 하였다. 하리의 집에 있을때에도 하리 딸들이 이를 잡는 것을 보았었는데 어디를 가나 아이들이 있다면 어른이라고 없을리 만무하나 어른은 없다고 한다. 아닐에게 폰에 있는 사전으로 DDT 약을 보여 주었더니 가게에 있다며 나중에 사다가 뿌려 주겠다고 한다. 내머리가 지금굼실거리는 듯하다.
오늘은 내가 인도에 와서 가장 더운 기온임을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입을 열어 데우ㅓ진 내부의 공기를 내품어야만 하는 그런 실정이니 여름에 개가 혀를 내밀고 숨쉬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직 오전 즉 정오 12시도 안되었는데 아닐 식구들은 잠을 자려고 자리를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자리라고 해봤자 돗자리(비닐로만든)한개가 고작이고 아닐 동생은 시원한 맨 바닦에 그대로 눕는다. 나도 나름대로 바람이 조금이라도 통할 수 있는 문 앞에(그래도 건물 안쪽의 양쪽 문을 열면 바람이 통함) 양동이에 물을 떠다가 발을 담그고 팔, 다리 적셔가면서 열기를 식혔다. 어제 약속한대로 오늘 땅 측량을 하는사람을 확인하느라 아닐은 이 더위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 그래도 더웁더라도 모자하나 쓰고 오토바이타고 달리면 달리는 바람에 더운줄 모르고 오히려 시원함을 느낀다(타 보아서 암).
오후 두시가 되어서 아닐이 돌아왔고 아직 집안 식구들은 어른아이 할것 없이 모두 잠들어있는 상태이다. 아닐 여동생을 깨워 목사님 점심 차려 드리라고 하고 오늘 약속대로 사람이 올 것이라고 아닐이 말한다.
약속시간 3시쯤 되어서 전화를 해보더니 목사님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한다. 자기는 바지하나 달랑 갈아입으면 끝인데 나는 그제서야 썬크림바르랴 촬영할 사진기 챙기랴 옷 갈아 입으랴 좀 늦으니 목사님 빨리빨리 하며 늦었다고 한다.
나는 측량하는 사람이 아닐 땅으로와서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만 그사람을 데리러 가야 했고 끝나면 데려다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측량하는 별도의 도구가 있고 두 세사람이 올 것으로 생각 하였었는데 달랑 거구의 한사람만 태우고 왔다. 지적도 달랑 한 장(헝겁에다가 새긴 지적도)에다가 프라스틱인지 아주 작은 밀리로 잴 수 있는 그야말로 작은자, 쇠로만든 길이재는 도구 그리고 지적도 명부 한권 그것이 전부 다였다. 오후 3시면 그야말로 한창 뙈약볓이다. 숨이 턱 막히는듯한 태양 아래 땅바닦에 앉아 지적도를 한참 확인한 후 지적도를 보면서 측량에 들어갔다.
이리저리 재더니 또 아닐 땅 옆에 붙어있는 사람들의 주소를 아닐에게 알려주더니 그사람들을 불러 오라고 한것 같다. 아닐이 급히 동네로 가더니 조금 있다가 땅 주인들인듯 한 두명씩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세 팀이 도착을 하였다. 서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땅을 재고 서로 만족한듯 돌아가고 이렇게 측량이 끝나게 되었다. 측량이 끝나고 측량비를 주어야 하는 것 같다. 측량사는 1,500루피를 달라고 한다. 아닐은 힌디말로 무어라 하더니만 자기에게 있던 200루피와 내게 있던 200루피를 모아서 400루피를 건넨다. 측량사는 나를 한번 힐끔보더니 씩 웃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 돈을 넣는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아닐은 측량사를 데려다 주러 가고 나는 측량할 때 도우미로 일한 동네 사람의 자전거 뒤에 타고 엉덩이가 뭉개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조금있으니 아닐이 도착을 하였다. 아닐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다. 목사님 내가 땅을 살 때 7락을 주고 샀는데 속아서 샀다고 한다. 측량결과 정부땅이 꾀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땅을 파는 사람은 정부땅도 자기 땅인양 팔아먹은 것이다. 처음에 아닐이 자기 땅이라고 말한 부분보다 훨신 적다 싶었는데 아닐도 속고 땅을 산것이다. 해 넘어갈 무렵 아닐이 어딘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 어딜 갔는가 했는데 그 땅을 판 사람을 만나고 왔다는 것이다. 전 땅 주인이 말하길 자기도 몰랐다고 했단다. 그럼 정부땅의 대금을 돌려 달라고 말하지 그랬냐고 했더니 그렇게 말하니까 지금 돈이 없다라고 말했단다. 그 사람은 자동차도 있고 좋은 집도 있다고 한다. 그럼 자동차라도 끌고오라고 했더니 내일 아는 사람들과 다시 이야기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한다.
자기들 끼리도 이렇게 속고 속이는 판이니 외국사람한테는 얼마나 많이 속이려고 하겠는가.
아닐이 말한다. 목사님 나도 말 안하고 그냥 그땅에 학교 만들고 나무심고 길만들고 했다가 나중에 정부에서 왜 정부땅을 이렇게 사용했느냐고 하면 자기가 목사님을 속인것이 되니까 엄마도 목사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나도 목사님을 잘 안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안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도에는 거짓말하는 나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한다.
너무 더운터라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낮에 너무 뜨거운 햇볓아래 오래동안 서 있어서 그런지 온 몸과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지쳐 누워 있는 모습을 아닐 누나들 딸들이 보더니 팔 다리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두 딸들이 양쪽에 앉아 안마를 해주는데 천하에 부러울것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안마를 해주면서 지네들도 더웠는지 목사님 옥상으로 가요 하면서 손짖으로 말한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좀 시원한 느낌이다. 그러나 데워진 열기도 만만치 않다.
한참을 그렇게 안마를 밪고나니 좀 피곤이 풀리는것 같다. 저녁을 먹겠느냐고 하길래 몇시냐고 했더니 7시 30분이란다. 그럼 8시 30분에 먹자고 했더니 오케이한다. 좀 누워 있었더니 모기는 이때다 싶게 달려들어 시식을 시작하고 나는 모기 쫓느라 정신없고 그렇게 8시 30분이 되어 저녁을 챙겨와 먹으려고 하니 아닐이 들어와 함께 식사를 같이 하였다. 식사 도중 아닐이 목사님 오늘 달걀 가져왔어요 묻는다. 아니 내일 먹을게 했더니 바로 뒷집이라 아닐 여동생이 옥상에서 말해니 달걀을 삶아 놓았다고 한다. 아까 내가 아닐과 오토바이 타고 나가는 것을 보아서 언제 왔는지 몰라 안가져 왔다고 하며 가져와 오늘도 달걀 두 개를 먹었다. 아닐에게 말했다 아닐 하나 줄까 했더니 안먹는다고 한다. 아닐 한국에서 먹었잖아 그랬더니 한국에선 먹었지만 이곳에선 안먹는다고 한다. 철저한 채식주의자들로 달걀에도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달걀 담았던 그릇도 자기들 그릇과 함께 놓지도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먹고 난 뒤 다른곳에 그릇을 놓고 껍질은 소금을 덜어왔던 종이에 싸가지고 옥상에서 길 건너편 논에다 버렸더니 아닐이 목사님 잘해 하면서 웃는다.
오늘은 바람 한점 없는가운데 잠을 청하려니 흐르는 땀으로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잠들었다 싶으면 흐르는 땀으로 깨고 깨면 부채질하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 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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