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Land 17

[사빈]

I'll Land

17

정오가 훨씬 지나 아침을 건너뛴 런치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역시 테이블 두 개를 연결했는데, 이렇게 북적이며 식사를 하게 되다

니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이 곳에서의 런치는 내게 길리와 단 둘이서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상한 기

하는 밥 보다 잠이 좋다는 주의였고, 방문객도 별로 없었으니까. 그와의 런치는 내게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내 행복에 크게 이바

지했고, 불쌍한 내 사랑에도 어느 정도 위안이 돼 주고 있었다. 길리를 독차지하는 시간. 하지만 내가 열망하던 아일랜드의 런치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이건 문어처럼 생겼지만 알고 보면 소시지야."

재인의 앞접시로 찌개에서 건져 올린 소시지를 올려두며 길리가 말했다. 옥타브를 올려 하는 말투. 그와 그의 조카 주위로 핑크빛

아우라가 번진다.

"귀찮게 하지말고 밥이나 먹어, 길리."

나이스! 나는 재인의 저런 점이 마음에 든다. 민망할 텐데 길리는 잘도 웃는 얼굴이다. 그는 재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재인을 쳐다

보며 흐뭇해한다. 저런 표정의 길리는 낯설지만 한편으론 가슴이 설렌다. 나를 위한 얼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짝사랑도 이

정도면 누구 하난 감동 받아 쓰러져야 하는데 말이다. 육지에 남아 있는 나의 수많은 추종자들에게 정말 면목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 오늘은 뭐 하실 거예요?"

어린 녀석이 하릴없이 정중한 말씨다. 재수 없는 아줌마. 이런 시간에 풀 메이컵을 한 쌍둥이의 엄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글쎄. 해변에나 나가지 뭐. 딱히 할 일이 있겠니, 이런 곳에서?"

"그럼 저랑 진이는 방학 숙제할게요. 걱정말고 놀다 오세요."

"그건 좋은 생각이구나. 종이로 이상한 거나 만들지 말고 밀린 일기라도 좀 쓰렴."

"그럴 게요."

그 대목에서 나는 재인이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았다. 저 철없는 아줌마를 향한 재인의 신경전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지켜본

결과, 재인은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이 아니었다. 물론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스타일 역시 아니었다. 그런데 재인은 오직 저 아

줌마를 향해서만 적의를 드러낸다. Interesting! 정말 재미있다.

"호호 불어 드세요, 영숙씨."

찌개를 좀 덜어 앞에 놓아주자 영숙씨는 방긋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사랑스러운 영숙씨. 나는 그녀가 세상을 사는 방식을 좋

아한다. 그녀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모두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모두에게 감사한다. 나는 사람들이 그

녀를 안쓰러워 하는 일에 동참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지나간 일 따위, 기억나지 않으면

어떤가.

"오빠도 드세요."

"고마워요."

저것 보라지. 이 시대 마지막 에고이스트인 저 서기하가 고맙다고 말한다. 대단한 영숙씨. 지나간 일 따위, 잊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캡틴 장은 또 어딜 간 거야? 자꾸만 영숙씨를 혼자 두고 있잖아."

투덜거리듯 말하자 영광스럽게도 길리가 대답해온다.

"모두에게 부탁하는데, 당분간 영숙씨를 돌봐줘야 할 것 같아. 그 친구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니야."

그 때 일을 떠올리며, 그건 정말 사건이었지, 라고 생각했다. 그 날 영숙씨는 장영실과 사쿠라를 동시에 기억해냈던 것이다. 그 두

개의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캡틴 장이 요즘 벚꽃에 혈안이 돼 있는 걸로 봐서 대단한 일이구

나, 하는 정도였다. 언젠가 술에 취한 캡틴 장이 영숙씨의 믿을 수 없는 과거를 얘기할 때도 나는 그저 샐러드에 위스키를 홀짝였

을 뿐이었다. 이야기 속의 영숙씨는 몹시 불쌍했기 때문에 도저히 내가 좋아하는 영숙씨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

은 지금의 영숙씨였다. 내가 아는 영숙씨. 나를 언니라 부르며 늘 웃어주는 지금의 그녀가 바로 나의 영숙씨인 것이다.

카페 아일랜드의 무더운 두 시. 에어컨 온도를 조금 더 내리고 돌아서자 재수 없는 아줌마가 완벽한 비치 차림으로 내려왔다. 그녀

는 엉덩이를 실룩이며 내게로 오더니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며 오만을 떨었다.

"우리 애들 간식 좀 부탁해요."

그 말에 기가 막혀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머리 위로 올려놓은 선글라스를 한 손을 내려쓰며 유유히 카페를 빠져나

갔다. 잠깐의 그로기 상태를 마치고 나는 길리가 있는 바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탕, 쳤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 둘 거야, 저 아줌마?"

"선금으로 낸 돈만큼, 일까?"

"돈을 받았어? 얼마나?"

그는 대답 대신 검지를 들어 내밀었다.

"백?"

"현금으로 몽땅."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그저 짧은 숨만 몰아 쉬었다. 점입가경이었다. 목적도 없이 섬으로 들어

와 현금으로 백 만원을 턱 하니 꺼내놓는 여자라니...... 아일랜드는 점점 더 겉잡을 수 없는 곳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주방에

서 재인이 나왔다. 이마에서 목덜미까지 땀으로 번진 모습을 한 채. 현금 운운할 때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던 길리는 언제 그랬냐

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주방에도 에어컨이 있어야겠어."

길리의 사고방식.

"나는 땀 흘리는 게 좋아."

길리의 사고방식에 대항하는 재인의 라이프 스타일. 이것도, 재미있군.

"재인. 설거지나 시키자고 이 곳으로 부른 건 아니었어."

"그나마 설거지라도 하니까 여기가 좋은 거야."

"여기가 좋아?"

금세 화색이 도는 길리의 얼굴 위로 무뚝뚝한 재인의 음성이 오버랩 된다.

"설거지가 좋다는 거야."

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었다. 제법 다급하게.

"재인. 길리 좀 설득해. 이 어쩔 수 없는 남자가 쌍둥이를 데려 온 여자한테 돈을 받은 모양이야."

"...... 얼마나?"

"백 만원. 그게 뭘 뜻하는 건 지 알아? 그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우린 그 여자를 봐야만 한다고."

재인의 작은 콧망울이 움찔거렸다. 모든 것은 재인에게 달렸다. 모든 것이 재인에게 달린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일단은 공공

의 적부터 떼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장사치가 다 됐구나?"

재인의 그 말에 길리는 하하 웃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을 뒤엎어버리는 재인의 말.

"나는 그만 올라갈래."

"잠깐! 그게 다야?"

막아서는 내게 재인은 살짝 풀린 듯한 눈동자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똑똑히 지켜봐 줄 거야."

더위라도 먹었나 싶을 정도의 상태로 재인은 유령처럼 걸어 이층으로 사라졌다.

"저기, 길리."

나는 여전히 텅 비어버린 계단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저 아이의 인생이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해."

내 뒤로 깊게 잠긴 길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평생이 그랬어."

길리의 방문 앞에 선 것은 아침이 얼마 남지 않은 즈음이었다. 생각이 많아 뒤척이다 늦게 잠이 든 통에 평소보다 늦어버리고 말았

다. 누가 언제 잠에서 깰지 위태로운 시간이었지만 잠깐이라도 길리를 보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길리의 문손잡이를 막 돌리려

던 순간, 기하의 방문이 열렸다. 세상이 모두 잠든 새벽. 그 작은 소음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 나는 방을 착각했어."

그렇게 변명하며 속으로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욕했다. 기하는 별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날 응시할 뿐이었다.

"담배나 가지러 가야겠다."

그를 조금 앞서 걸으며 주절대기 시작한다. 침묵은 곤욕이었으므로. 물론 기하에게선 그 어떤 대꾸도 없었다. 일층으로 내려오자

마자 바의 조명부터 켰다. 낮게 깔린 어둠이 희미하게 물러나자 바 테이블 아래 선반을 열어 괜히 담배들을 뒤적였다. 신경은 온통

기하에게로 쏠려있었다. 그가 냉장고를 열어 뭔가를 꺼내드는 기척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애꿎은 담배를 뜯으면서 돌아보자 기

하는 탄산수를 들이키고 있었다. 화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떠올랐다.

"영숙씨는 너의 어떤 점에 반한 걸까?"

...... 헉......

"하긴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타입이지."

아...... 뭐라는 거야.....

"그래서 넌 왜 이렇게 일찍 깬 거야?"

"파도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낮에는 더워서. 밤에는 파도 소리 때문에. 너무 유난스럽잖아, 너?"

"그밖에도 잠을 방해하는 소음은 얼마든지 있지."

기하의 그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해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옅은 조명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은 웃는 것 같기도 하

고 무표정한 것 같기도 했다. 잠을 방해하는 소음. 설마 새벽마다 타인의 방을 침입하는 나의 얘길 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쩐지 발

이 저리다.

"재인이 말이야."

다음으로 돌린 화제였다. 얼렁뚱땅 꺼낸 말이었는데 기하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날 보는 그는 확실히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

이었다.

"어때? 좀 괴상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나름 귀엽잖아."

"질문의 의도가 뭐야?"

"의도는 무슨. 난 그냥 그 아일 대하는 너의 방식이 좀 흥미로웠거든."

그냥 해 본 소리였다. 기하의 방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맹세컨대, 겨우 이 정도 미끼에 월척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

런데 지금 기하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혹시 길리와의 사연에 대해 뭐 들은 거 없니?"

"그런 시시콜콜한 사연을 묻는 건 내 방식이 아니지."

"오오, 그래?"

잔뜩 괴롭혀주고 싶을 정도로 그의 정색은 대단했다. 서서히 장난기가 발동하고 있었다.

"뭐야, 서기하. 진짜 재인과 뭔가 있는 거야?"

올곧게 솟아 있는 콧날 아래로 그의 표정이 서늘해져 갔다. 그 모습에 긴장하는 동안, 기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피식, 웃어버린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다소 위험해 보이는 미소였다. 

"누구든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매일 밤 방을 착각하는 사람이 그렇듯."

혈관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춘기 소녀처럼, 아니,

사십 이점 일구오 킬로미터를 달리다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된 마라토너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내 기분을 비웃기

라도 하려는 듯 기하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왔다.

"좀 더 자도록 해. 담배를 피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어제보다 삼십 분 일찍 시작된 런치. 흡사 데자부처럼 모두의 표정이 어제와 같았다. 물론 내 입장은 달랐지만. 그건 그렇고, 기하

저 녀석은 왜 자꾸 런치에 참석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끼니를 챙겨 드셨다고. 

"어머니! 좀 나와 보슈! 영실이 모친!"

기하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내게 또 하나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저 목소리. 아, 캡틴 장, 제발 좀!

"무슨 일인가, 자네?"

상기된 캡틴 장의 얼굴에 놀라 길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작 영숙씨는 숟가락으로 콩자반을 뜨고 있었는데.

"이보게, 길리. 아니, 여러분. 식사 중에 실례이긴 하지만 잠시 좀 나와들 주겠소?"

"뭔데 그래요?"

결국 나도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캡틴 장은 다소 억지로 영숙씨를 일으켜 세웠고,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 카페 밖으로 데리

고 나갔다.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길리가 쫓았고, 나와 재인, 기하, 더불어 재수 없는 여자와 그녀의 쌍둥이들까지 모두 밖으로 나

왔다. 그리고 우리는 한꺼번에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에서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

경. 영숙씨를 향한 캡틴 장의 진심은 마침내 기적을 일으켰다.

"우와, 벚꽃이다!"

정지된 화면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임을 기억해낸 것은 쌍둥이들이었다. 두 아이는 숨막힐 듯 강렬한 더위를 뚫고 캡틴 장을 향해

달려나갔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제야 조금씩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캡틴 장이 섬으로 가지고 들어온 벚나무의

묘목이었다. 하지만 가지마다 돋아있던 연두색의 이파리들 대신 새하얀 꽃이 만발해 있었다.

"...... 사쿠라......"

영숙씨의 입을 통해 그 말이 전해졌을 땐, 머리 속이 투명해질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흐벅

진 벚꽃 나무를 사이에 두고 동그랗게 둘러선 모두의 심장 소리가 확실하게 전달되고 있었으니까.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재인의 눈

동자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수백 가지의 감탄사보다 가치 있는 것이었다.

"사쿠라. 사쿠라."

영숙씨는 아이처럼 벚꽃 나무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 곁에 선 캡틴 장은 눈물을 펑펑 쏟아 내고 있었고, 그런 그의 어깨

를 감싸주는 일은 물론, 길리의 몫이었다. 

"캡틴 장도 할 땐 하잖아?"

"음. 천재일지도 모르겠어."

옆에서 말을 받아주던 기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우리는 동시에 웃기 시작했다.

"버터 냄새가 진동을 하네. 밥 먹다 말고 이게 다 무슨 난리야."

쌍둥이의 엄마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즉시 카페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은 내가 그녀를 싫어한다는 사실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모든 세상일이 다 마찬가지였다. 지금 나는 한 여름의 벚꽃과 조우했다. 그것이 기적이든, 팝

콘이든, 정말이지 아무 상관없었다. 행복한 영숙씨의 얼굴.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계속.

[사악한 702]

벚꽃이라....감동이네요...

[super21s]

ㅠㅠ 오늘은 완전 감동이로군요. 캡틴 장은 물론이거니와, 재인에 대한 관심이 생긴 기하하며... 다음 주 기다리기가 힘들어지겠는걸요...

[사빈]

사악한 702님, super21s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우유빛마루]

사빈님 글 잘 보았습니다... 아래 자격증관련 정보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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