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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죄 안에 있는 사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위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엡2:1-3)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에베소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순히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이 놀라운 구원의 크기와 위대성과 그 장엄함에 대해서
더 붙잡길 바라고 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알 필요가 있고 확신할 필요가 있는 한 가지의 요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명확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두 가지 일이 언제나 병행되어야 한다.
그는 먼저 이해의 눈이 성령에 의해서 밝혀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성령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이해의 눈이 없고서는
우리가 숙고하려고 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기도한 다음 그들에게 지식과 교훈을 넣는다.
-어떻게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은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서 끊임없이 야기되는 하나의 주제이다.
첫 번째 척도는 우리가 빠져 나온 죄의 깊이이다.
그의 능력의 크심을 측량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깊은 수렁으로 내려가야 한다.
먼저 그로부터 올라와야 되고 그 다음에 하늘로 올리우심을 받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적으로 현실적이다.
그것은 정확히 우리가 처한 위치, 부패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 깊이를 인식해야 한다. 죄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죄가 인류에게 어떠한 일을 가져왔는가를 알아야 한다.
어떠한 사람도 죄에 대한 성경적 교리에 명확하지 못하다면
구속에 관한 성경적 바른 개념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속의 개념에 대해서
그처럼 희미하고 느슨해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친구가 되는 것이
모두인 것처럼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 죄의 교리를 이해하기까지는
주님의 성육신의 교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주님의 죽음과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속죄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고 형벌적 고난의 교리를 싫어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어요. 살아가는 문제를 알고 싶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인간이 타락하였고 죄 가운데 있다는
이 위대한 성경적인 교리에 비추어서 볼 때에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보면 그들의 모든 개념은
전적으로 역사에 의해서 위조된 것들이다. 그들이 인류의 타락된 죄의 상태가
출발점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이며, 세상이 오늘날 같은지에 대한 설명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① 비성경적인 관점 - 사람이 완전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직 되지 못했다.
전에 인간은 하나의 동물이었다. 인간은 숲 속에서 살고 있었고
나무에 기어오르는 존재였다고 말한다. 그러한 인간이 갑작스럽게 완전해진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에게 시간을 더 주어 기다려야 한다.
인간성의 문제는 순전히 시간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요, 성장과 교육의 문제라는 것이다.
② 성경적 관점 - 순전한 사실주의에 기초해서 인간은 “불순종의 자녀”이기 때문에
인간이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으며 또한 그의 사는 세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
성경은 인간에게 어떠한 핑계도 없으며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정면으로 부닥쳐야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회개라는 말로 불려진다. 성경은 자신에 관한 완벽한 진리를 말해 준다.
소설은 도덕성을 고양시키려하고 심리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이것만이 사실주의적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경적 관점은 근본적인 것이다. 성경은 개개 문제들을 만날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관통하여 본다. 비록 그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메스를 가하고 암의 뿌리가 드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파헤친다.
세상의 사상들과 철학은 그저 증상치료만하여 건강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성경은 근본적이다.
성경적인 관점은 다른 관점들보다 보다 낙천적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유토피아를 향해서 치달아 왔으나 그 유토피아를 얻지 못했다.
성경적 관점은 사람은 깊은 가운데 빠졌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붙잡아 높은 곳에 올릴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이 세 구절에서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교리와 관점을 요약하고 있다.
첫 번째,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상태를 묘사한다.
두 번째, 이 상태를 설명하고 어째서 인간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설명한다.
세 번째, 이 상태와 조건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것을 가져왔는가를 말한다.
네 번째, 하나님께서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말한다.
- 첫 번째 원리,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
1. 바울은 “너희가 죽었었다”라고 말을 한다.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다루고 있다. 비그리스도인에 있어서의 삶은
죽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말보다 강한 용어는 없다.
거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다.
생명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생명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묘사되고 규정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그것이 생명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는 생명의 원천이요 생명을 유지 시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생명이 없다.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은 죽어 있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가? 여러분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① 그러한 사람은 영적인 일이나 영적 생명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지겨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영혼에 관한 대화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생명과 죽음과 하늘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과 세상의 일들이
그들에게 엄청나게 호소적이다. 죽어 있기 때문이다 “새는 새끼리 떼를 이루고 산다”
②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미워하기조차 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나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③ 이런 유의 삶은 부패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썩어 있다.
그들은 악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떠벌린다. 그들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④ 죄 안에 있는 사람의 삶은 비참한 삶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삶이 비참한 삶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또한 오직 유일하게 행복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방식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근본적으로 비참하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그것들을 향해 돌진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죽어 있다.
2. 이 세상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2)
이런 유의 삶은 이 현생의 사고방식과 정신 구조 아래서 영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악한 세대”라고 말한다.(갈1:4)
언제나 하나님께 대해서 거스르고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세상이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고방식, 정신구조, 삶의 영위방식이다.
그것은 사람 스스로가 인생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사고방식과 정신구조를 가지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영역 가운데 있다. 사도 요한은 요일2:15-17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너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며
세상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반대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
사람들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바에 따라서
지배받고 있는 방식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마귀는 사람들이 그렇게 설득 당하도록
하는 데 얼마나 교묘한가! 그들의 작은 삶이 세상 조직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를 당하고 있다. 오늘날처럼 그것이 그처럼 명백해진 시대는 없었다.
그들은 따라올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통제이다.
세상의 생각! 흔히 세상의 유행, 성적인 광란이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이 세상의 생각 또한 선전의 시대, 광고의 시대, 군중심리 등을 알지 못하고도
거대한 군중에 의해서 휩쓸려지는 세대를 잘 반영한다. 그것이 비극이다.
이 세상의 정신에 의해 통제 받고 있는 까닭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삶 속에 있는 하나의 악한 원리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영”은 원리를 의미한다. 악한 원리가 있다.
“역사하는”, 힘과 능력과 에너지가 있는 강한 말이다.
이 세상 일에는 매우 강력한 악의 원리가 있다. 성경을 믿고 성령에 의해서
그의 이지와 이해심이 조명을 받은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그저 어쩌다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거기에는 역사하는 악의 원리가 있다.
세상이 이 모양인 것은 마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는 얼마나 교활하던지 그는 인간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지배를 받고 있지 않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인간은 심지어 성역에 등을 돌려댐으로써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그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된 빛나는 최고위의 천사였다. 그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그의 한 가지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훼손시키고,
하나님의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들어와
하와와 아담을 현혹시켰다.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으며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공중 권세 잡은 자, 어둠의 권세 잡은 자)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성경은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권세들이 있다고 말한다.
마귀는 “공중 권세잡은 자의 임금”이다. 그들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존재한다.
악의 권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절대적으로 이들 권세들에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고,
그들의 손아귀에 붙잡혀서 죽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아직도
그들에 의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은 영리하고 스스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힘과 능력과 권세와
그가 명령하는 모든 세력들을 가지고 또한 세상의 사고방식과 세상의 정신에
주입시킨 악한 원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 어떻게 우리는 여전히 서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믿는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그가 없이는 1초도
우리는 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그에게로 돌려야 한다.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오! 우리의 눈이 밝혀져서 우리로 하여금 그 문제를 보고
또한 그것의 깊이가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 능력이 결코 우리를 내버려두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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