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차림을 한 내가 거울을 보며 웃고 있다. 근데 머리카락이 엄청 길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고 '참 못났다!' 생각했는데 문득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들어올리니 갑자기 엄청 이뻐진거다! 내가 이렇게 이쁘다니! 신기하고 재미있는 꿈이었다. 의미심장하기도 했다.
오늘은 잠도 많이 자고 아침도 든든히 먹었는데 이상하게 기운이 없다. 밤새 비가 내리고 너무 추웠던 때문일까. 5km쯤 비틀거리다 어느 빵집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몸을 좀 녹이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어젯밤은 그저께 밤보다 바람이 훨씬 세게 불고 비도 많이 내렸다. 어제 내가 고생하며 걸어온 뻘밭길이 더 질어졌을텐데, 오늘 걸을 사람들이 좀 힘들겠다. 그러고보면 나는 항상 최악은 피해간다.
가이드북과 내 크레덴시알Credencial(순례자 여권), 그리고 만사니야Mazanilla(캐모마일Camomile).
어쨌건, 비와 햇살과 바람이 정신없이 오가고 작은 들꽃들이 기쁨으로 핀 길들을 지나 에스떼야Estella에 닿았다. 공립 알베르게 문여는 시각에 딱 맞춰 도착한 덕에 오늘도 내가 1등이다. 맨날 알베르게에 맨 먼저 도착하니 걸음이 오지게 빠른가보다 싶겠지만 내 1등 비결은 남들 20km, 30km 걸을 때 혼자 5km, 10km 걷는 것이다. 국영수를 교과서 위주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쉽다. 하하.
이런 작은 들꽃들의 꽃말은 '기쁨'이 틀림없다.
미국에서 화훼농장을 한다는 메어리를 만났다. 메어리는 이번이 두 번째 까미노 여행이라는데 농장을 돌봐주는 일꾼들이 있어 일년에 두 달은 이렇게 여행할 수 있단다. 처음 까미노에 왔을 땐 남들처럼 한 달만에 까미노를 주파했지만 지금은 훨씬 느리게 걷고 있다며 내 속도pace가 좋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내 속도가 좋다. 처음에는 느린 것이 무척이나 창피했다. '여기 환자가 가고 있어요'하고 광고라도 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는 사람마다 아프냐, 괜찮냐고 물어서 민망하고 속이 상했다.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갈 때면 어디라도 숨어있고 싶을 정도로, 모두가 빠른 세상 속에서 사람들 반도 못미치는 내 속도가 마냥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느리게 걸어서, 느리게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내가 느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까 느린 게 좋은 이유가 하나 둘 눈에 띈다.
내 위층 침대엔 자전거 순례를 하는 이탈리아 청년이 들었다. 착하게 생겼다. 얘, 너 코골지 않을거지? 그애는 나더러 영국인이냐고 물었다. (내가 어딜봐서. ㅡ,.ㅡ) 메어리도 프랭크도 내 영어가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하루만 지나면 밑천이 드러나는 콩글리쉬지만 그래도 잘한다고 칭찬해주니까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점점 나아지는 것은 비단 내 몸 뿐만이 아닌가보다.
에스떼야는 빵, 물, 와인이 좋은 마을이라고 마을 입구에 쓰여있던데 내 생각엔 까미노 위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마을에서 나는 빵, 물, 와인이 다 좋다. 위층 침대 필리포가 저녁에 스테이크를 구울 건데 같이 먹겠느냐고 묻는다. 당연하지 임마! 나는 좋다고 달려나가 후식으로 먹을 플랑(스페인식 푸딩)과 복숭아를 사왔다. 필리포는 이탈리아식 스테이크를 미디움 웰던으로 구워주었다. 정말 눈물나도록 맛있었다.
필리포가 구워준 이탈리안 스테이크.
필리포는 스물여덟 살 된 심리학자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정신과 의사다. 환자들 보다가 자기가 미칠 것 같아서 자전거로 까미노 순례 중이란다. 두꺼운 허벅지를 자랑하며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산길을 넘어가는 자전거 순례자들은 원래 튼튼해서 하나도 안힘든 줄 알았는데 엊그제 알랭 할아버지도 발목 부상으로 다음날 출발하지 못했고 오늘 필리포도 많이 힘들어했다. 아, 똑같이 힘들구나. 그래, 모두가 똑같다는 걸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
오늘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걸어온 사람들 옷이랑 신발을 보니 짐작대로 장난 아니게 뻘투성이다. 내일은 가파른 언덕길. 좀 평탄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꿈에서도 까미노다.
천둥 소리만 있으면 공포 영화의 오프닝감이다.
첫댓글 맨날 알베르게에 맨 먼저 도착하니 걸음이 오지게 빠른가보다 싶겠지만 내 1등 비결은 남들 20km, 30km 걸을 때 혼자 5km, 10km 걷는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느리게 걸어서, 느리게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내가 느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까 느린 게 좋은 이유가 하나 둘 눈에 띈다...저도 무척 느린데 생각 하나 바꾸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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