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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른 사띠(정념)
부처님은 궁극적 진리인 법은 직접 볼 수 있는 것이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며, 와서 확인해 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법은 언제나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법이 실현되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라고 말씀하신다.
궁극적 진리인 법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진리(truth)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이해함에 의해서만, 즉 그 진리의 근본까지 직접 꿰뚫어 봄에 의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진리가 해탈을 가져다주는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매개 없이 진리 그 자체를 직접 대면해 깨달아야 한다.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나, 책이나 스승의 권위 때문에 믿게 된 것이나, 세밀한 연역이나 추리에 의해 생각해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는 통찰지(위빳사나 지혜)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며, 즉각적인 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종의 앎(knowing)에 의해서 파악되고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의 기능을 빠알리어로 사띠(sati)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보통 mindfulness로 번역한다.(이하 ‘사띠’로 번역하기로 함) ‘사띠’는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둠’, ‘주의 깊음’ 또는 ‘알아차림’이다.
하지만 사띠와 관련된 알아차림은 일상에서 작용하는 의식으로서의 알아차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알아차림이다. 모든 의식은 대상을 경험하거나 안다고 할 때와 같은 알아차림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사띠 수행에서 알아차림은 특정한 위치에서만 적용된다. 사띠의 알아차림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이른바 ‘맨 주의(bare attention)’의 수준에 의도적으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바른 사띠를 닦을 때는 마음을 현재에, 열린 채로, 고요히, 또렷이 깨어있게 한 다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관찰하도록 훈련한다. 모든 판단과 해석은 중지되어야 하며, 만약 중지되지 않고 생길 경우에는 단지 알기만 한 다음 떨쳐내야 한다. 이것은 파도타기 선수가 파도를 탈 때처럼 사태의 변화와 함께 하기는 하지만, 어떤 일이 닥치든 닥치는 그대로를 단지 주시하기만 하는 지극히 단순한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만한 생각들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미끄러져 넘어지지도 않고, 현재로 돌아와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항상 현재를 잘 알고(aware)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착각이다. 사띠 수행이 요구하는 대로 정확하게 현재를 알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일상적 의식에서 우리 마음은 지금 이 순간 접수한 접촉(impression)을 계기로 하여 인식과정을 시작하지만 그 접촉에 계속 머물지는 않는다. 마음은 초기의 접촉을 정신적 구조물을 짓는 도약대로 이용하는데, 그 결과 원래 자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인식과정이 대개는 해석적이다. 마음이 대상을 개념화하지 않고 인지하는 것은 잠시뿐이고, 마음은 대상의 초기 접촉을 붙잡자마자 대상 자체를 해석함으로써 관념화하기 시작한다. 즉, 대상이 속한 범주와 대상에 관한 가설 등으로 대상을 쉽게 파악해 버리고자 한다. 그러한 작업을 해내기 위해 마음은 먼저 개념들을 설정하고 상호 뒷받침하는 개념들의 집합인 구조물에 이 개념들을 결합시킨 다음, 이 구조물들을 복합적인 해석의 체계로 엮어나간다. 이렇게 되면 결국 처음의 직접 경험은 관념화의 과정에 함몰되고, 눈앞의 대상은 구름에 가린 달처럼 관념과 견해라는 두터운 장막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게 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정신적 짜 맞추기 과정을 ‘빠빤짜[papañca 戱論]’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듬기’, ‘꾸미기’, 또는 ‘개념의 증식’을 뜻한다. ‘빠빤짜’는 제시된 현상의 현장성과 즉각성을 차단해 버린다. 다시 말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오직 ‘거리를 두고서야’ 알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빠빤짜는 인식을 가릴 뿐 아니라 대상에 주관을 투사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어리석음으로 뒤덮인 전도된(deluded) 마음은 자기자신이 만든 정신적 개념구조들이 정말로 대상에 속하기라도 한 듯 밖으로 투사한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 인식 대상인 줄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가치, 계획, 행위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원래부터 그렇게 있던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짜 맞춘 가공물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가공물이 전적으로 허상이거나 완전한 환상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직접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원료이자 주성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음이 가공해 낸 다른 꾸밈들도 뒤섞여 있다.
이러한 가공과정을 작동시키는 태엽은 눈에 띄지 않는 숨은 번뇌들이다. 이 번뇌, 즉 마음의 번뇌 꾸밈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꾸밈을 밖으로 투사해서 번뇌가 표면으로 뛰쳐나오는 데 쓸 갈고리로 삼고, 그래서 일단 표면에 뛰쳐나오게 되면 번뇌는 더 심한 왜곡을 일으킨다.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는 일은 지혜의 몫이다. 그런데 지혜가 자기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빠빤짜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바른 사띠의 역할은 인식의 장(場)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다. 사띠는 순수한 현장성 그대로의 경험을 훤히 밝힌다. 개념이라는 도료로 칠해지고 해석으로 덧칠되기 이전의 대상의 원래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따라서 사띠 수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생각하지 않기, 판단하지 않기, 연상하지 않기, 계획하지 않기, 상상하지 않기, 바라지 않기 등이다. 우리의 모든 ‘행함(doings)’은 실은 간섭의 갖가지 모습들이며, 마음이 경험을 조작하고 그것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노력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사띠는 단지 ‘주시할 뿐임’으로서 이러한 ‘행함’들의 엉킴과 매듭을 풀어 원상으로 되돌려 놓는다. 주시 이외의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고, 다만 경험을 할 때마다 그것이 생기고 머물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이렇게 지켜만 보는 데에는 집착할 여지도, 사물에다 욕망이라는 안장을 얹고 싶은 충동도 자리 잡을 수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적나라한 현장성 그대로의 경험을 주의 깊고, 정확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계속 지켜봄이 있을 뿐이다.
사띠는 마음을 어떤 대상에 굳건히 자리 잡게 해준다. 사띠가 마음의 닻을 현재에 단단히 내리게 해주기 때문에, 마음은 기억, 후회, 두려움, 희망에 떠밀려 과거나 미래로 표류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띠하지 않고 있을 때의 마음은 조롱박에, 사띠가 확립된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연못에 조롱박을 놓으면 물위에서 이리저리 떠다닌다. 그러나 돌은 그렇지 않다. 바로 물속으로 잠겨 바닥에 가라앉는다. 이처럼 사띠가 강력할 때에는 마음은 대상에 머물게 되고, 그 특성들을 깊이 꿰뚫어보게 된다. 마음은 더 이상 떠돌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띠와 함께 하지 않는 마음이 하듯이 대상의 겉만 대충 훑어보지도 않게 된다.
사띠에 의해서 고요함과 통찰지 모두를 얻을 수 있다. 사띠를 어떤 방식으로 기울이느냐에 따라 깊은 집중으로 이끌 수도 있고 지혜로 이끌 수도 있다. 내면적 고요함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선정이라는 여러 단계의 본삼매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예리한 통찰지에 이를 것인가,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사띠를 기울이는 방식의 미세한 차이에 좌우된다.
고요함 쪽으로 나아가는 경우에 사띠에서 우선해야 할 일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어떤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사띠는, 마음이 대상을 벗어나 제멋대로의 생각들 속에 빠져 길을 잃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띠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요소들을 살펴보면서 이것들이 장애로 발전하여 각기 그럴싸한 위장을 하고 나타나서 해롭게 하기 전에 미리 붙잡아서 축출해 버리기도 한다.
반면에 위빳사나 지혜나 지혜의 완성에 이르려면 좀 더 특수한 방식으로 사띠 수행을 해야 한다. 이 단계의 수행에 있어서 사띠가 해야 할 일은 법의 근본적 특성이 환하게 드러날 때까지 그 법을 철저하고 정밀하게 관찰하고 유념하고 판별하는 것이다.
바른 사띠는 사띠의 네 가지 토대인, 몸 느낌 마음 법(마음의 대상)을 관찰하는 사띠 수행을 통해 계발된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사띠인가? 이 교법에서 비구는 열심히, 분명히 알고, 사띠하면서 몸에 대해서 몸일 뿐이라고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해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면서 살아간다. 그는 …… 느낌에 대해서 느낌일 뿐이라고 ……, 그는 …… 마음에 대해서 마음일 뿐이라고 ……, 그는 열심히, 분명히 알고, 사띠하면서 법에 대해서 법일 뿐이라고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해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면서 살아간다.
부처님은 사띠의 네 가지 토대를,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고통과 근심소멸하게 하고, 성스러운 도(道)를 성취하게 하고, 열반을 체험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네 토대를 ‘유일한 길(ekāyano maggo)’이라고 한 것은 편협한 독단주의적 주장이 아니라 해탈은 사띠 수행을 바르게 실천함에 의해 얻어지는, 경험의 장(場)을 꿰뚫어 보는 관찰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사띠의 네 가지 대상 중에서 몸은 중생의 물질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주로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수행을 완성하려면 이 네 가지 수행 모두를 필요로 한다. 수행해 나아가는 데 꼭 정해진 순서는 없지만, 대체로 몸 관찰을 기본 영역으로 먼저 다루게 되며, 몸을 관찰해서 사띠에 힘과 명료함이 생긴 다음에, 다른 것들도 잘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이 네 가지 토대에 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에 각각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6.1 몸 관찰
부처님은 몸 관찰에 대해서 법문하실 때 ‘호흡 관찰’에서부터 시작하신다. 수행할 때 반드시 호흡 관찰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수행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호흡이 ‘근본 수행주제’ 즉 전체 관찰과정의 기본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제가 오직 초심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호흡 관찰은 그것만으로도 수행의 모든 단계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최고의 깨달음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실제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날 밤에 택하신 것도 바로 이 수행주제였다.
부처님은 그 후로도 계속 홀로 머무시는 동안에는 이 수행주제로 되돌아오셨고, 비구들에게도 항상 이것을 “불선한 생각들이 일어나는 즉시 추방해 버리는, 평화롭고 고귀하며 순수 지복과 함께 머무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시면서 이를 권장하여마지 않으셨던 것이다.
호흡 관찰은 수행주제로서 매우 효율적인 기능을 한다. 호흡은 언제든지 이용 가능한 생체 리듬이기 때문이다. 이 호흡을 수행의 기반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호흡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호흡을 사띠의 영역 안에 가져다 놓는 일이다. 수행은 특별히 정교한 지적(知的) 작업을 요하지 않으며 단지 호흡을 알기만 하면 된다. 공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 몸과의 접촉지점인 콧구멍이나 윗입술에서 호흡을 알면서, 자연스럽게 콧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으면 된다.
이때 호흡을 통제하거나 자기가 예정해 놓은 리듬 속으로 끌어들이려 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쉬고 있는 과정을 단지 주의해서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호흡에 대한 사띠를 통해 우리는 산만한 생각의 타래를 잘라내고, 헛된 상상의 미궁 속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현시점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게 된다. 왜냐하면 호흡하고 있는 것을 알 때마다, 그것을 진실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과거나 미래에서가 아니라 현시점에서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호흡 관찰을 네 가지 기본 단계로 설명하신다. 처음 두 단계는 길게 들이쉬는 숨이나 길게 내쉬는 숨을 일어나는 그대로 주의해서 바라보고, 짧게 들이쉬는 숨이나 짧게 내쉬는 숨을 일어나는 그대로 주의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 중 어느 쪽을 먼저 해도 상관없다. 호흡이 들고나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되, 가능한 한 면밀히 관찰하여 지금의 이 호흡이 긴지 짧은지를 주목하고 있도록 한다.
사띠가 점점 더 예리해지면 들숨의 시작에서부터 중간과정을 거쳐 끝날 때까지, 그리고 바로 이어서 날숨의 시작에서부터 중간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호흡의 전체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이 세 번째 단계를 ‘호흡하는 몸 전체를 분명히 알기’라고 한다.
네 번째 단계인 ‘몸의 반응 가라앉히기’는 호흡 및 관련된 신체 기능들을 극도로 가늘고 미세해질 때까지 점차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기본적 단계 너머에는 호흡 관찰을 깊은 집중과 통찰로 이끄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수행들이 있다.
몸을 관찰하는 또 하나의 수행방법은 자세 관찰이다. 이는 앉아서 하는 한 가지 고정된 자세에서 벗어나 수행을 확장하는 것이다. 몸은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기본자세와, 어떤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변화할 때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게 된다.
자세 관찰은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있는 그대로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걷고 있음을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음을 알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음을 알고,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음을 알고, 자세를 바꿀 때에는 자세를 바꾸고 있음을 안다. 자세에 대한 이러한 관찰은 몸이 무아임을 분명히 밝혀준다. 즉, 몸이 자아가 아니며 자아에 속한 것도 아니며, 단지 의도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살아있는 물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다음 수행은 사띠를 한 걸음 더 확장시키는 것이다. ‘사띠와 분명한 앎’라 부르는 이 수행은 ‘맨 알아차림’에 이해라는 요소를 첨가하는 수행이다. 무슨 행위를 하든지 철저히 즉 분명히 알면서 하는 것이다. 가고 오고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돌아보고 몸을 굽히고 펴고, 옷을 입고, 먹고 마시고, 소변 보고 대변 보고, 잠에 들고 잠을 깨고, 말하고 침묵하는 등의 모든 것을 분명히 알면서 하면, 수행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주석서에는 ‘분명한 앎’을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행위의 목적을 이해, 즉 행위의 목적을 알고 그것이 법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것,
(2) 적합성을 이해, 즉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아는 것,
(3) 수행의 범위를 이해, 즉 행위를 하고 있을 때도 마음을 항상 수행상태로 유지하는 것,
(4) 전도됨이 없이 이해, 즉 행위를 제어하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는 무아로 보는 것. 이 네 번째 설명은 지혜의 계발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몸 관찰 중 다음 두 단락에서는 몸의 본성을 드러내고자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바른 정진(정정진)을 논할 때 언급한 바 있는 몸의 더러움에 대한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로 분석하는 것이다.
먼저 몸의 더러움에 대한 수행인 부정관은 육체에 홀려 있는 상태, 특히 성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적 충동이 갈애의 한 표현이며 괴로움의 원인이 되므로, 괴로움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적 욕구를 반드시 약화시키고 근절시켜야만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 수행은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인식적 토대, 즉 몸을 관능적 유혹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자체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성적 욕구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관능적 욕구는 이 인식과 더불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한다. 우리가 몸을 매력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관능적 욕구가 생긴다. 아름답다는 것에 대한 이런 인식이 사라지면 관능적 욕구도 시든다. 마음에 드는 접촉만으로 몸을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한, 신체적 매력에 대한 인식은 계속 유지된다. 그러한 인식을 불식시키려면 우리는 마음에 드는 접촉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냉철한 탐구적 자세를 가지고 몸을 더 깊은 차원에서 점검해 나가야 한다.
부정관 수행이 맡고 있는 역할은 바로 그런 인식을 유지하는 버팀목을 제거함으로써 밀물처럼 밀려오는 육욕을 물리치는 데 있다. 그러나 초심자들의 경우, 다른 사람의 몸, 특히 이성의 몸을 수행주제로 삼게 되면,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하기 쉽기 때문에, 이 수행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삼는다. 생각으로 몸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방법을 보조수단으로 사용하여 우리는 마음속에서 몸을 구성 요소별로 해부한 후, 그 하나하나를 검사하여 그것들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밝혀 나가는 것이다.
경전은 머리털·몸의 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횡격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내용물·똥·뇌·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기름기(피부)·콧물·침·관절 활액·오줌의 서른두 가지 부분을 열거하고 있다. 그 부분들이 혐오스러우면, 전체인 몸도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세히 살펴본 몸은 정말 비매력적인 것이어서, 그 아름다운 외모는 신기루일 뿐이다.
그러나 이 수행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그 목적은 혐오감이나 역겨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애착을 끊는 것, 육욕의 불을 끄기 위해서 연료 공급을 중단하려는 것일 뿐이다.
다음의 분석적 관찰은 몸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요소별 분석’이라고 하는 이 수행은, 몸이 본질적으로 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이 몸뚱이를 자기자신으로 생각하는 내재적 성향에 대처한다. 이 수행이 택하는 방법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마음속으로 몸을 네 가지 요소[四大]로 분해하는 것이다. 옛 용어로 지수화풍이라 불리는 이 네 가지 요소는 실제로는 견고성, 유동성, 열기, 운동성 등 물질의 네 가지 주된 행태(行態)적 양상을 나타낸다.
견고성은 몸의 장기·근육·뼈 등과 같은 몸의 견고한 부분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나며, 유동성은 몸속의 액체에서, 열기는 체온에서, 운동성은 호흡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들 요소가 드러나고 보이게 되면 시각이 확대되고, 그 결과 ‘나’ 또는 ‘나의 자아’와 몸을 동일시하는 인식도 깨어지기 마련이다. 일단 몸을 요소들로 분석하게 되면 육체적 존재의 주요 특질인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육체와 끊임없이 상호교환하고 있는 외부 물질의 주요 특질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장기간의 수행을 통해 이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몸을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몸에 대한 집착도 끊게 된다.
몸은 변화하는 심리과정의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변화하는 물질과정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진실로 존재하는 ‘자아’라고 여길 만한 것이 전혀 없을 뿐더러, 개아(個我)로서의 나 자신이라고 느끼는 의식의 실제적 기반이 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몸 관찰의 마지막 수행방법은 죽은 후 몸이 해체되는 것을 관찰하는, 일련의 ‘묘지수행법’이다. 이 수행은 상상으로 하거나 실제로 시체를 마주해서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며, 전자의 경우 그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쪽을 택하든 썩고 분해되어 가는 몸의 형상을 마음속에 선명히 떠올린 후, 그러한 과정을 자신의 몸에 적용시킨다. “이 몸도 지금은 생명력으로 차 있지만 그와 같은 성질을 가졌고 그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몸의 붕괴 또한 막을 수 없으며 이 몸도 결국은 죽어서 썩고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행의 목적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수행의 목적은 죽음이나 시체에 대하여 병적 환상에 빠져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우리의 자아론적 집착을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관찰을 통해 그 집착을 분리하고 절단하는 데 있다. 우리의 존재가 영속되거나 영원하다는 따위의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맹목적으로 견지하는 한, 존재에 대한 집착 역시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체를 관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도 모호한 구석이 없이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단언하신 스승의 가르침을 생생히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6.2 느낌 관찰
사띠의 다음 토대는 느낌이다. 여기서 ‘느낌’이란 단어는 사띠의 세 번째 토대인 ‘마음’이나 네 번째 토대인 ‘법’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 복합적 현상으로서의 ‘감성’과는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여기서 ‘느낌’은 보다 좁은 의미에서 경험의 정서적 색깔, 또는 ‘쾌락적 측면’이란 뜻으로 쓰이는데 이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 주요한 형태가 있다. 모든 앎(knowing)의 작용에는 어느 정도의 정서적 색깔이 배어 있기 때문에, 느낌은 의식(consciousness)과 분리될 수 없이 항상 생긴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따라서 느낌은 무언가를 경험하는 매 순간 존재한다. 강할 수도, 약할 수도, 또 분명할 수도, 불분명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이든 느낌은 반드시 인지(cognition)와 함께 한다.
느낌은 접촉(觸 phassa)이라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접촉은 의식이 감각기능을 통해 대상과 만나는 것이다. 의식이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에 닿아서 마음에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 요소가 바로 이 접촉이다. 감각기능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므로 여기에 상응해서 접촉도 안촉, 이촉, 비촉, 설촉, 신촉, 의촉의 여섯 종류가 있으며, 느낌 역시 어느 접촉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여섯 가지 느낌으로 나뉜다.
느낌은 흔히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활성화하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한 관찰의 대상이 된다. 느낌이 분명하게 의식에 등재되지 않더라도 미묘한 방식으로 심적 경향을 불선법으로 부추기고 지속시킨다. 예컨대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탐욕이라는 번뇌의 영향을 받게 되어 이에 집착한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불쾌, 혐오, 두려움 등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혐오가 표출된 것들이다.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주목하지 않거나 아니면 이런 느낌이 우리를 속여서 거짓된 안정감에 빠뜨리도록 방치한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에 지배당한 마음상태이다. 이와 같이 각각 특수한 종류의 느낌들은 근본 번뇌를 일으키는 조건이 된다. 즉, 즐거운 느낌은 탐욕을, 괴로운 느낌은 성냄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느낌이 번뇌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느낌이 탐욕으로, 괴로운 느낌이 혐오감으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어리석음으로 예외 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끊어질 수도 있는데 그것들이 끊어지려면 사띠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느낌은 주시되지 않을 때, 즉 관찰의 대상이 아닌 탐닉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만 번뇌를 자극하고 번뇌를 일으킨다. 따라서 사띠를 통해서 느낌을 관찰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느낌에서 뇌관을 제거해버릴 수 있게 되고, 이런 느낌은 불선한 반응을 자극·촉발시킬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습관적으로 느낌을 애착·혐오·무관심과 관련짓는 대신에 관찰을 통해 느낌을 경험의 본질을 이해하는 도약대로 삼을 수 있다.
초기 단계의 느낌 관찰에는 이미 생긴 느낌을 두고 그것이 즐거운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인지 그 특성을 주시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 느낌을 자기와 동일시하지 않고, 즉 ‘나’ 또는 ‘나의 것’ 또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주시한다. 이때 사띠는 덧칠됨이 없이 그냥 ‘맨 주의’의 수준을 견지한다. 느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느낌으로, 일체의 주관적 고려나, 모든 자아 지향성을 벗겨낸, 장식되지 않은 한낱 마음에서 생긴 사건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단지 느낌의 질감이랄까 색조랄까,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인지만 주목할 따름이다.
그러나 정진이 진척되면 느낌 하나하나를 주시하면서 그것이 지나가도록 놓아주고, 그 다음, 또 다음을 계속 주시하게 된다. 그러면 주시의 초점은 자연히 느낌의 성질을 살피는 것에서 느낌 그 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옮겨간다. 그 과정을 잘 살펴보면, 느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김과 사라짐의 지속적인 흐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흐름의 내부에는 영속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느낌 그 자체는 생기자마자 사라져버리는, 섬광같이 찰나 동안만 존재하는 사건들의 흐름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무상에 대한 통찰이 시작되고 그것이 발전되어 나가면서, 탐진치라는 세 가지 불선의 뿌리는 파헤쳐진다. 거기에서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도, 괴로운 느낌에 대한 혐오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군림하는 어리석음도 없다. 일체가 그저 쏜살같이 지나가는 허망한 사건들, 진정 즐길 것도 관여할 여지도 없는 사건들의 흐름으로만 보일 뿐이다.
6.3 마음 관찰
느낌 관찰을 계속하다보면, 느낌이라는 특정한 마음부수로부터 벗어나서 이 요소가 속하고 있는 마음 관찰로 접어들게 된다. 이 마음 관찰이 가져오게 될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려면 불교에서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을, 연속적인 경험을 해나가면서도 그 자체는 변함없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지속적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비록 경험은 변화하더라도 그 변화하는 경험을 겪는 마음은 다소간의 변경은 있을지언정 여전히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변함없이 영속하는 정신적 기관이라는 관념은 용납될 수 없다. 마음을 생각, 느낌, 의도의 지속적 주체로 보지 않고, 각기 별개로 분리된, 순간적으로 매순간 생멸하고 있는 마음의 연속이 이어지는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각 마음들 간의 결합관계도 실체들 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인과관계로 보는 것이다.
의식의 활동을 ‘마음(citta. 찟따)’이라고 하고, 마음은 마음부수(쩨따시까)들을 수반한다. 이 마음부수에는 느낌, 인식, 의도, 감정 등이 포함된다. 간단히 말해 이 마음부수에는 대상을 일차적으로 아는 기능인 마음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 기능이 포함된다.
의식은 본래 대상에 대한 맨 경험일 뿐이므로 그 자체의 성질로는 구분될 수 없고 단지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에 의해서만 구분이 가능해진다. ‘마음부수’가 ‘마음’에 색을 입혀서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관찰할 때에는 마음부수를 지표로 삼는 수밖에 없다. 마음 관찰을 설명하시면서, 부처님은 마음부수를 기준으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주시 대상으로 언급하셨다.
즉 ① 탐욕이 있는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 ②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 ③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④ 위축된 마음과 산란한 마음 ⑤ 위대한 마음과 위대하지 않은 마음 ⑥ 위 있는 [낮은 단계의] 마음과 위 없는 [높은 단계의] 마음 ⑦ [근접삼매, 본삼매로] 삼매에 든 마음과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 ⑧ [부분해탈, 억압해탈을 통해 번뇌로부터] 해탈한 마음[=선정마음]과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그 열여섯 가지 마음이다.
실천적 목적에서 보면 시작 단계에서는 이 열여섯 가지 마음들 중 탐진치의 여부와 관련된 여섯 가지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서 마음이 불선한 뿌리와 관련되어 있는지, 아니면 이로부터 자유로운지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중 어떤 마음이 있을 때 이를 단지 그런 마음이 있음을 관찰하기만 한다. 그것을 ‘나’ 또는 ‘내 것’이라고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자아나 자아에 속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마음이 순수하건, 때 묻었건, 고상하건, 천박하건 상관없이, 그 때문에 의기양양하거나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단지 그 상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단순히 주시하기만 하면 그 상태는 바람직하다고 집착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거부됨이 없이 지나가게 된다.
관찰이 깊어지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은 점점 더 순화된다. 난무하던 생각, 상상, 감정들이 가라앉으면서 사띠는 더 분명해지고, 마음은 그 자체의 변화 추이를 주시하면서 또렷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때때로 이런 변화 과정의 배후에 지속적인 관찰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수행을 계속하면 이 분명해 보이던 관찰자까지도 사라진다. 굳건하고 안정돼 보이는 마음 그 자체도 순간순간 생멸하면서, 오는 데도 없고 가는 데도 없이, 그러나 중단 없이 지속되는 마음의 흐름으로 녹아든다.
6.4 법 관찰[法隨觀 dhammānupassanā]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담마(dhammā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복수를 쓴다)’라는 말이 사띠의 네 번째 토대로 쓰일 때에는 경전의 설명처럼 상호 연결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는 앞서 마음 관찰에서 보았듯이 담마는 마음에 색을 입히는 역할과는 완전히 별도로 그 자체로서 주목해야 할 마음부수들을 뜻한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부처님의 교법 속에 조직화되어 있듯이 경험을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 즉 현존하는 사실 요인들을 뜻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담마’라는 말을 나타낼 더 좋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여기서는 법(phenomena)으로 옮기기로 한다. 그러나 이를 현상 뒤에 어떤 본체 즉 물자체(物自體 noumenon)가 따로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부처님이 무아를 가르치신 취지는 현존하는 사실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적 성분은 어떤 본체가 없는, 그저 일어나고 있을 뿐인 순수한 현상들(suddha-dhammā)이라는 것이다.
경에서 법 관찰은 각기 다른 현상들을 다루는 다섯 가지 작은 항목으로 나뉜다. 다섯 가지 장애[五蓋], 오온(五蘊), 각각 여섯 가지의 안팎 감각장소[六內外處]과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七覺支]과 사성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다섯 가지 장애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은 마음부수를 뜻하는 좁은 의미의 ‘담마’이고, 다른 것들은 사실세계의 구성성분이라는 넓은 의미의 ‘담마’이다.
그러나 세 번째 묶음인 감각장소에 관한 부분에 나오는,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족쇄들 역시 ‘마음부수들’에 포함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마음부수’로 간주되는 ‘담마’의 두 묶음, 즉 오개와 칠각지만을 간단히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 두 묶음 모두 제5장에서 바른 정진과 관련시켜 이미 언급한 일이 있지만, 여기서는 바른 사띠 수행과 관계되는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오온, 육내외처 등 다른 유형의 ‘담마’들은 마지막 장에서 지혜의 계발과 관련지어 논의하기로 한다.
오개와 칠각지는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왜냐하면 해탈을 이루는 데 있어서 전자는 주된 장애가 되고 후자는 주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감각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의 다섯 가지 장애는 일반적으로 수행의 초기단계 즉, 시작할 때의 큰 기대감과 혼란에 가까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미묘한 잠재성향들이 표면에 떠오를 기회가 열린 직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불쑥 튀어나오면, 그것이 존재함에 주목해야 하고, 차차 희미해져 갈 때에는 그것이 사라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장애들을 계속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해라는 특별한 마음의 요소가 필요하다. 즉, 이런 장애들이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제거될 수 있고, 또 앞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이해는 사띠[念], 법 고찰[擇法], 정진[精進], 희열[喜], 편안함[輕安], 집중[定], 평온[捨] 등 깨달음의 일곱 요소들[七覺支]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요소들 중 어느 것이든 일어나면 그것의 존재를 주시해야 한다. 그 존재를 주시한 후에는, 그것이 어떻게 생기며, 어떻게 하면 충분히 발달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탐구해야 한다. 이것들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힘이 약하지만, 지속적으로 계발해나가면 점점 힘을 축적하게 된다.
사띠는 관찰이 시작되도록 한다. 관찰이 제대로 잘 정착되면 그것은 다시 지적 능력이 지니는 검토 기능인 법 고찰을 생기게 한다. 법 고찰은 다시 정진을 끌어내고 정진은 희열을 낳고, 희열은 편안함에 이르게 하고, 편안함은 한 점에 모아진 집중에, 다시 집중은 평온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전체 과정은 사띠와 더불어 시작되고, 사띠는 시종일관 마음이 맑고 깨어있고 균형 잡혀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조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첫댓글 사두사두사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