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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스크랩 지리산의 계곡들
영원한가이드 추천 0 조회 37 05.08.30 20: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지리산의 계곡...대성계곡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지리산 대성계곡은 오랜 옛날부터 보기드문 기도처로 뭇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피의 제전이 역사를 간직한 길고 깊은 골짜기로 잘 알려져 있다.

 

화개동천 맨 안쪽에 숨어있는 협곡의 수림과 남향으로 배치된 기암 절벽, 그리고 그 위용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주려는 듯 흐르는 물줄기는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손색이 없다.


  세석평전을 거느리는 영신봉의 위엄은 세석과 더불어 대성골을 이상향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어 오랜 옛날부터 과학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성골을 찾아나서는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대성골 가운데서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영신봉 아래 영신대는 지리산에서 최고의 기도처로 각광 받으면서 치성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 영험스런 자태는 금방이라도 소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듯해 치성객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충분하다.


  우리 민중의 정서를 방증하는 대성골의 소망하는 그러나 온 산하가 동족상잔의 전란을 겪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변하기도 해 우리에겐 비운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성골은 빨치산 투쟁의 최대의 비극으로 이 곳에서 수백여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다.

 

정충제씨가 기록한 "실록 정순덕"과 이기형씨가 쓴 "죽음의 골", 그리고 이태의 "남부군"등은 1950년대 초 지리산 일대에서 치러진 군·경과 빨치산의 처참한 격전을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성골의 비극이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 기록마다 빨치산 몰살 규모와 일시등이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1952년 1월 17일과 18일이 최대 격전기였으며 그 해 1월 한달동안이 백야전사령부 3기 토벌작전 시기로 보인다.

 

토벌대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1월 17일 무렵 지리산 온 골짜기는 함박눈이 퍼붓고 있는 가운데 날이 저물자 빗점골, 거림골, 신흥등지에 있던 빨치산이 대성골로 모였다.

 

다음날 새벽무렵 눈덮인 대성골에는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1만명에 이르는 빨치산이 모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른바 백야전 사령부의 제3기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대성골에 모인 빨치산은 사면초가 격으로 수백명이 처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이 전해진다.

 

당시 몰살 당한 빨치산의 규모는 각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1952년 1월께 남은 빨치산 수를 미뤄볼 때 이기형씨의 "죽음의 골"에 나오는 수백명(대략 800여명)이 근사치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빨치산 몰살 사건이 이 곳 대성골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대성골이 갖는 지형적 특성에서 비록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계곡중 대성골이 가장 깊은 협곡인데다 지세가 험난해 도피하기엔 안성 맞춤이어서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이곳으로 숨었고 때마침 토벌대의 정보와 작전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불과 40여 성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대성골엔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무심한 대자연은 수천년 변함없이 그대로 인간이 하는 일을 모른듯 지켜만 보고 있을 따름이다.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을 찾아가는 길은 화개동천을 따라 잘 포장된 길을 올라 대성교에서 시작된다.

 

등산로는 대성교에서 시작되는 길과 조금 위의 의신 마을에서 시작되는 두갈래다.

 

세석까지 12km, 대성교에서 등산로는 시작부터 가파른 길이지만 의신부터는 평탄한 길이 시작돼 1km만 지나면 하나로 된다.

 

이곳이 옛날 능인사가 있었다는 절터이다. 해발 500m지점이기도 하다.


 

   능인사 터에서 완만하고 뚜렷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후박나무가 우거진 대성동 마을에 도착한다.

 

대략 대성교에서 2km거리에 위치한 대성동에는 10여 가구가 산골생활을 하면서 민박도 하고 토종닭, 산채, 동동주등을 팔고 있다.

 

자가발전으로 전깃불을 이용해오다 95년 12월에야 한전에서 전기를 공급했다.

 

경운기 동력으로 전기를 만들던 자가발전기는 새해부터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원래 대성동은 이곳에서 4km 더 들어간 곳에 있었으나 60년대 후반 정부의 배려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4km 위의 집터가 있는 곳을 원대성이라고 부른다.

 

대성동에는 대성골이 으뜸 기도처임을 입증이라고 하듯 지금도 아무 하는 일없이 정신수양을 하거나 요양을 위해 장기간 민박하는 사람이 10여명이 된다고 한다.


 

대성동 마을에서 세석까지는 10km. 이 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등산은 험난한 코스가 별로없이 비교적 평탄한 길이 계속된다.

 

남부 능선과 갈라지는 1,400m 갈림길에 못미쳐 3m 구간이 조금 힘들 뿐 등산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조금 지루한 산행은 각오해야 하는 게 대성골 등반의 특징이다.

 

대략 오르는데 4시간30분에서 5시간은 걸리며 내려오는데도 3시간 30분은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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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계곡...한신계곡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지리산 북부의 깊고 넓은 한신계곡은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의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계곡미가 일품이다.

 

계곡미의 극치인 폭포를 수 없이 빚어내며 백무동에서 세석까지 10Km의 여정을 자랑하는 한신계곡은 영롱한 구슬이 그르듯 맑고 고운 물줄기가 사철 변함없이 이어지는 폭포수의 계곡이다.


한신계곡은 수많은 폭포수만큼이나 많은 명명 사연을 갖고 있다.


 

   우리네 선조들이 나무 한그루, 돌 하나, 물줄기 하나에도 깊은 사연을 만들고, 그것을 즐겨 얘기해왔듯 이 계곡도 마찬기지로 예외가 아니다.

 

하나는 「깊고 넓은 계곡」의 의미로 한신계곡이며 다른 하나는 한여름에도 몸에 한기를 느낀다해서 한신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계곡의 물이 차고 험난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심하다고 해서 한심계곡이라 불렀으나 발음이 변해서 한신계곡이 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옛날 한신이란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몰죽음을 했대서 한신계곡이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데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계 곡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린 다는게 이 지방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신계곡의 본류는 세석으로 이어지지만 이 계곡 주위에는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형성돼 있다.

 

하부 백 무동 앞의 계곡을 백무동계곡으로 지칭할때 백무동계곡은 크게 네갈래의 큰 계곡을 안고 있다.

 

백무동 위로 세석까지의 한신계곡과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 칠선봉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흘러내리는 한신지계곡등 네갈래가 그것이다.

 

여기서 한신계곡을 중심으로한 네개의 계곡이 백무동계곡을 만들어 엄천으로 흘러 남강의 상류가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한신계곡은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협곡으로 만들어져 가네소폭포에서 한신지계곡과 합류, 백무동으로 이어진다.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은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통해 누구나 쉽게 등반할 수 있으나 바른재골, 곧은골은 아직도 범접하기 힘든 미지의 계곡으로 남아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한신계곡의 등반기점은 백무동이다.


  백무동까지 차량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며 여기서 야영장을 지나 넓다란 길을 따라 첫나들이 폭포까지 쉽게 오를수 있다.

 

백무동 - 첫나들이 폭포까지 2Km구간은 계곡과 절벽을 사이에 두고 평탄한 오솔길이 있는데 울창한 숲의 터널을 이뤄 계곡에서 울려오는 물줄기 소리와 어우러져 환상의 등산코스로 불린다.

 

여름철이면 싱그런 녹음과 시리도록 차갑고 맑은 물줄기로 최고의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늦은 가을이면 어지러이 나뒹구는 낙엽과 단풍물결로 만추의 서정을 빚어내 찾는이를 감동케 한다.

 

백설이 쌓이면 빙벽과 설벽을 만들어 모험을 즐기는 산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백무동에서 첫나들이폭포까지의 넓다란 오솔길은 가족등반을 가능하도록해주고 있을 정도로 잘 닦여져 있는데 이 도로의 생성동기는 의외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1963년 9월 삼성흥업 주식회사란 벌채업소가 서울 영림서로부터 마천면 강청리, 삼정리, 추성리 일대 국유림내의 고사목등에 한해서 벌목허가를 받았다.

 

그당시 목재 운반을 위해 산판도 로를 만든것이 이 오솔길인데 벌목허가가 그후 남선목재와 서남흥업이란 회사로 전매되면서 무차별 도벌이 자행된 아픈과 거사의 현장이다.

 

숲속 길을 한참 지나다보면 처음으로 등산로와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곳이 첫나들이 폭포이다.

 

20여개의 물줄기를 자랑하는 이 폭포는 바람폭포로도 불리고 있다.

 

계곡을 가로 지르는 철제다리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데 다리 위에서 보다 아래서 위로 보는 폭포수가 더욱 장관이다.

 

등산로만 따라가다 보면 놓치기 쉬운 폭포수로 바람처럼 물방울이 흩날리면서 물안개를 피어 올리기도해 환상적이다.

 

철제다리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가면 곧장 또다른 철다리 3개를 더 만날수 있는데 출렁이는 다리 위에서 발아래 계곡류를 구경하는것도 일품이다.

 

첫나들이에서 1Km남짓한 거리를 두고 있는 가네폭포까지의 계곡미는 한신계곡의 진수로 평가되고 있다.

 

이름없는 폭포수며 넓다란 반석들과 울창한 수림은 바로 선경이다.

 

가네소폭포 바로 아래 지점 에서 물줄기는 두갈래로 나뉘어지는데 바로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이다.

 

   지계곡은 내림폭포를 따라 장터목으로 이어지며 한신계곡은 오층폭포 한신폭포를 따라 세석으로 연결된다.

 

가네소는 15m높이의 폭포이며 50여평의 검푸른 소를 만들고 있어 우선 그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사철 수량이 변함없어 예로부터 기우제 장소로 많 이 이용돼왔다.

 

기우제의 전설을 안고 있는 가네소는 요즘들어 연중 수많은 등반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백무동 - 가네소구간은 한신계곡의 서막이다.


 

   한신계곡의 본격적인 산행은 가네소에서부터 세석가지의 7Km구간이다.

 

가네소 왼쪽 흙비탈길을 올라 조금만 가다 보면 계곡을 만나 건너게 되는데 계곡주변 숲길을 가면 5단계의 폭포가 길게 이어지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오층폭포가 나온다.

 

오련폭포라고도한다.

 

오층폭포에서 산죽과 잡목터널을 따라 계곡을 건너고 등반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소 벅찬 경사길이 나타 나기를 몇차례 한뒤에야 한신계곡을 상징하는 한신폭포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폭포는 이정표에서 80여 m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야 볼수 있을 정도로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다.

 

한신계곡은 수많은 폭포수를 빚어 놓은 채 마지막으로 1Km거리를 칼날 같은 바위길을 따라 세석으로 이어진다.

 

백무동을 출발해 원시림과 수려한 물줄기를 지나 철쭉의 향연이 베풀어지는 세석에서 마무리되는 한신계곡 루트는 올 여름 한번쯤 등반할만한 환상적 등산코스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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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계곡...백무동 계곡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지리산의 북쪽 자락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거리는 곳이 백무동이다.

 

이곳은 남쪽의 중산리처럼 천왕봉을 오르는 북쪽의 등산구이자 세석고원과 10km 거리로 가장 가까이 자리한 마을이다.


세석고원에서 철쭉제가 열릴 때의 백무동 일대는 등산객들로 파시를 이룬다.

 

세석고원으로 오르는길 길은 주능선 남쪽의 경우 거림 청학동 대성리로 나뉘어져 있으나 북쪽은 백무동이 유일하다.

 

또 백무동은 우람한 폭포가 연이어 있는 한신 계곡과 백무동계곡의 매력 때문에 한여름철엔 지리산 최고의 피서 명당이다.


경남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이 강청리는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와 도촌, 송알, 강청 등의 여러 마을로 이뤄져 있으나 요즘은 강청리란 행정명칭 보다 백무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강청이란 이름은 대부분 모르고 있지만 백무동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백무동이 너무 아름답다 보니 지난 60년대까지 북쪽 지리산 관문이던 인월, 이어 70년대까지의 관문이던 마천면 소재지 가흥리가 이제는 그 자리를 백무동에 넘겨주고 통과지역으로 자리바꿈을 하였다.

 

   부산에서 백무동에 가려면 산청~함양을 거쳐 인원~가흥의 우회 도로를 밟는다.

 

가흥~백무동은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좁은 벼랑길 이었으나 현재는 2차선 도로확장 포장공사가 끝났다.


부산에서 차량으로 4시간 정도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휴천계곡을 따라 생초에서 바로 직행하는 도로가 포장되면 백무동도 부산에서 3시간의 거리로 차량 운행 소요시간이 중산리와 거의 맞먹게 된다.

 

'백무동 가는길' 이 결코 멀지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날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백무동은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에도 많은 기도객이 붐비는 곳으로 이름나있다.

 

전국 무당들의 우두 머리가 천왕봉의 성모사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언제나 1백명의 무당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원래의 이름은 '백무동(百巫洞)' 으로 불렸다.

 

또 다른뜻으로 ' 백무(白霧)동 '으로 일컬어진 때도 있었는데 안개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썼다.


  현재는 이도 저도 아닌 백무동(白武洞)으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백무'는 여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수 있을 것이다.

 

주로 '지리산 굴바위' 주변에서 많이 활동하고 한때는 휴천계곡의 용류담, 한신계곡의 가내수폭포와 하동바위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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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계곡...중산리 계곡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지리산에 있어서 중산리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거대한 지리산자락 어느지역 보다 중요시되며 많은 등반객들이 중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마도 주봉인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고 오를수 있다는 지리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지리산 답사(등반)의 시발점으로 "알프스의 샤모니"로 불릴 정도인 중산리는 천왕봉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장 사랑받는 자리를 차지 할수 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천왕봉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오르려면 중산리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북쪽사람(충청이북)들은 흔히들 지리산을 오르면서 구례나 남원, 함양등지를 시발점 으로해 천왕봉을 등정하는 탓에 중산리의 의미를 하산하는 종착지쯤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자신들의 편의에 의한 것일뿐이며, 지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많다.

 

그리고 지리산 등반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중산리를 기점으로해 천왕봉을 오르고 지리산을 등반하는것 만큼 지리산 등반의 묘미를 느끼는 산행은 드물다.

  이른 새벽 여명을 등지고 중산리를 출발해 멀리 운해위에서 용솟음하는 아침햇살을 천왕봉에서 맞이하는 기쁨은 중산리를 거치지 않은 등반객은 결코 알지 못한다.

 

지리산행의 진미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등산로의 전진기지가 중산리인 셈이다.

 

몽블랑과 알프스의 수많은 산군들을 조망할 수 있고 등정하기 위한 시발점인 샤모니와 중산리가 곧장 비유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천왕봉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중산리,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올려볼때면 한걸 음에 달려 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지리산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이들은 중산리를 마음의 고향으로 정해 두기 도하며, 중산리 입구에 들어서기만해도 마음이 설렌다고들 말하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의 지리산(천왕봉) 사람은 5-6 년전에 있었던 천왕사 성모석상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산마을 뒤편에 위치한 천왕사 혜범스님이 현몽했다고 자처하며 찾아낸 천왕 성모석상을 천왕사에 안치한 사실을 두고 이 곳 중산리 사람들은 "안된다"며 성모 석상을 천왕봉으로 다시 모셔야한다는 논리로 법정공방을 벌인 것이다.


  물론 소송에서는 천왕사의 기득권이 인정돼 중산리 사람들이 졌으나 이들이 지리산 , 특히 천왕봉을 신성시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중산리에는 노고단 못지않은 급속한 개발이 진행중에 있다.

 

산청군이 이 일대에 대단위 집단시설지구 조성을 시작하면서 2-3년 이내에 중산리는 색다른 관광명소로 탈바꿈할 채비를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중산리의 개발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오히려 다른 지리산자락 보다 뒤늦게 추진 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일부에서도 차제에 중산리에서 지리산 중턱까지 케이블카나 모노레일을 가설하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이니 개발도 중요 하지만 편의에 앞서 생태계 보전 문제가 가장 우려되고 있는 현실이다.


5백년전 김일손이 그의 일행들과 다시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중산리를 찾는다면 뭐라할까.

 

옛 선조들의 두류산 기행문을 한번쯤 탐독하고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산리 일대가 현대화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중산리 계곡일원은 여전히 우리의 토속 신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거대한 바위 벽면에 어지럽게 페인트로 이름을 적어 놓고 온갖 음식들을 차려 치성을 드리는 치성객의 행렬은 하루도 빠짐이 없는 지경이다.

 

특히 천왕봉이 마주 보이는 계곡 지점에는 길일이면 서로 좋은 기도처를 차지하러 밀어닥칠 정도로 중산리 계곡이 붐빈다.

 

이 곳을 찾는 치성객들은 대개 밤을 새워 가며 굿판을 벌이기 일쑤여서 조난사고까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바위 마다에는 치성객들이 써내린 글씨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으며, 바위 틈새에는 치성에 쓰다 남긴 음식물들이 틈틈이 버려져 있다.

  급속한 개발과 지리산으로 향하는 등반객들의 끊임없는 행렬과 함께 극성스러울 정도로 몰려드는 치성객들의 행렬, 이 세가지가 오늘날 중산리의 현실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정서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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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계곡...내원골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지리산의 비극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채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해 주는 곳이 있다.

 

갈색 수풀 사이로 푸름이 하나 둘 움을 돋아내고 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4월 중순.

 

우리 한민족 역사에 있어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이었던 역사의 현장인 지리산 내원골은 아직도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음침한 갈색 수림은 당시의 비극을 말해 주듯 했으며 어둠의 대지를 뚫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연분홍 진달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남긴, 아니 못다한 삶을 계속 영위하려는 듯 핏빛처럼 선명하게 갈색 숲속에서 돋보였다.

 

그리고 햇푸름을 보일락말락하고 있는 고목들만이 변함없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수십여 성상을 버티고 있었다.

 

폐허가 된 채 잡목과 잡초만 무성히 자리한 그 옛날 빨치산의 생가와 살던 집, 그리고 끝내 붙잡힌 장소는 아직도 흉물스런 모습을 하며 남아 있는 내원골.


  초라하고 처참한 당시의 흔적을 내원골은 그대로 부여 앉고 있으나 세상은 이제 한 세기를 마감하며 "이데올로기"를 역사의 낡은 단어로 뒤꼍에 미련없이 내팽개치고 있음은 무얼 의미하는가.

 

   이제 관광지로 겨우 각광받고 있지만 수 년전 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물었던 곳이다.

 

내원사에서 바깥 내원마을을 지나 배양이, 안내원 마을에 이르기까지 다소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주변 곳곳에 중장비가 들어와 집들을 짓고 단장하고 있는 모습은 개발의 전주곡처럼 보였다.

 

"외탑이" "쌍탑이" "큰 절골" "작은 절골"등등의 지명이 그것이다.

 

장당골과 나누어지는 내원사에서 왼쪽으로 연결한 도로를 따라 계속되는 내원골은 국사봉으로 이어지는데 승용차를 이용해도 해발 8백m인 안내원 마을까지 쉽게 갈 수 있다.

 

내원골은 별다른 세련된 운치를 풍기는 풍광은 없으나 고산지대에서 보기 드문 "분지"가 이색적이며 옛날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사실과 근대 빨치산들의 활동무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찾아가 볼만한 곳임에 틀림없다. 

지리산의 계곡...뱀사골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뱀사골하면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한다.

 

지리산의 깊고 깊은 산록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빚어져 즐비한 징담을 거쳐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뱀사골의 청정계류는 가히 손색없는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부를 만하다.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 또한 장관이다.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 만큼 잘 알려져 찾는 이도 많지만 그 품이 너무도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에서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까지 12km, 장장 39여리의 물줄기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소(沼)와 징담이 뱀사골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표적인 것만 하더라도 오룡대, 뱀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가 그림같이 전개돼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뱀사골의 특징은 화려한 소와 징담의 잔치와 더불어 산행을 하다보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힘들이지 않고 어물쩍 길손의 발길을 산마루에 올려 놓게 하는 그 완만하고 고른 경사도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뱀사골에는 연중 등산객 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옛날 뱀사골 입구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매년 칠월 칠석날 밤이면 주지 스님이 사라져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 소리를 전해듣고는 사람이 부처가 되어 승천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 어느해 칠석날 장삼 속에 비상(극약)주머니를 달아 주지 스님에게 입혀 예년과 똑같이 독경을 하도록 시켰다.


   새벽녘이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큰 뱀이 송림사에 왔다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 갔다고 한다.

 

이에 서산대사가 뱀을 따라 올라 가 보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뱀소에 죽어 있어 뱀의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고 하였고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를 일러 반선(半仙)이라 부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반선(伴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설속에 등장한 송림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며 그 터에 전적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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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사골의 유래는 이 외에 여러 이야기가 많다.

 

옛날 석실(石室) 부근에 배암사라는 절이 있어서 뱀사로 줄여 뱀사골로 됐다는 얘기도 있고 뱀소(沼)에서 유래되어 뱀소골, 뱀사골로 부른다.

 

또 뱀사골은 수많은 소(沼)가운데 간장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개재를 넘나들며 소금 장사를 하던 운봉 소금장수의 얘기가 있다.

 

그 옛날 화개장터에서 소금을 사서 화개재를 넘어오던 소금장수가 너무 지친 나머지 발을 헛디뎌 소금과 함께 웅덩이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웅덩이의 물이 간장처럼 짜다고 해 간장소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화개재에서 삼도봉을 거쳐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목 왼쪽에 이름모를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 무덤이 운봉 소금장수의 무덤이라는 얘기도 있다.


  뱀사골의 소와 징담마다 그에 얽힌 얘기가 전해지는데 제승대는 정진 스님이 산을 향해 제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는 등 뱀과 용에 얽힌 설화가 수두룩하다.

 

곳곳마다 징담이 이름과 함께 그 유래를 간략하게 소개해주고 있어 찾는 이를 흥미롭게 해주고 있다.

 

또 간혹 오래된 지도상에 삼차, 막차라고 나오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산간도로를 만들어 지리산의 거목을 나르던 당시의 지명들이다.

 

뱀사골의 절경은 빼어나지만 이 곳에는 잊지 못할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흔적이 남아있다.

 

반선의 옛 송림사 터에 세워져 있는 전적 기념관만이 당시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전적기념관은 지난 79년 국방부가 조성한 것으로 광복 이후 6·25를 거치는 동안 지리산에서 벌어진 동족 상잔의 역사를 유일하게 상기시켜 주는 곳이다.

 

기념비와 2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각각의 전시실에는 당시의 각종 무기류와 사진, 모형물들이 전시되어 교육적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전적기념관에서 시작되는 뱀사골은 화개재까지 이어지는데 대개 등반객들은 화개재 200m 아래 뱀사골 산장을 목표로 산행을 한다.

 

12km의 긴 등산로는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데다 지리산 등산로 가운데 가장 완만한 경사를 하고 있는 탓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뱀사골 등반은 등산이라기 보다 산책하듯 즐길 수 있는데 전적 기념관 옆으로 널따란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한동안 이어진다.

 

큰 길 대신 계곡변 소로를 택해 오를 수도 있다.

 

두 길은 결국 석실부근 제 3야영장에서 만난다.

 

감나무와 간이매점을 지나면 용이 머리를 흔들고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는 일명 흔들바위 요룡대가 나타나고 곧 반야교가 나온다.

 

곧이어 탁용소가 나오는데 긴 암반위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물줄기가 장관이다.

 

탁용소에서 금포교를 건너면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라는 뱀소가 나오고 병모양의 기묘한 형상을 한 소가 연이어진다.

 

천장이 아치형인 명선교, 옥류교를 거쳐 계속 오르면 정진스님이 산신제를 올리던 제승대, 소금장수가 빠졌다는 간장소가 이어진다.


 

   화려한 소와 징담을 지나 고목이 뒹굴기도 하는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어느샌가 뱀사골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78년 반야봉산장으로 탄생했던 뱀사골산장은 그 후 85년 개축돼 지금은 8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89년 12월에는 전화도 개통돼(0671-626-1732) 대피소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풍부한 샘물 덕분에 많은 등산객이 붐벼 다소 지저분하다는 인상마저 든다.

 

뱀사골을 찾는 등반객들은 이곳에서 1박 한뒤 반야봉을 오르거나 산을 넘어 피아골, 멀리 노고단과 화엄사를 거쳐 하산하기도 한다.

 

또 연하천산장을 지나 세석이나 천왕봉을 오르는 등반객도 많다.

 

한여름철 뱀사골을 찾아 지리산 계곡의 진수를 만끽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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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계곡...피아골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피아골은 아름다운 계곡이다.

 

특히 피아골의 아름다움은 봄철 진달래, 여름철 우거진 녹음, 가을철 단풍, 겨울철 설화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가을의 단풍은 지리산에서 으뜸이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고 고운 피아골의 단풍은 찾는 이를 매료 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피아골의 단풍은 삼홍(三紅)이라 하여 산이 붉게 불타는 산홍(山紅), 붉은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치는 수홍(水紅) , 사람이 들어서면 사람도 붉게 물드는 인흥(人紅)이 절경이다.


  그 가운데 표고막터에서 삼홍소 간 1km사이의 빼어난 풍경이 피아골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단풍을 빚어내는 피아골은 연곡천의 상류인 연곡사로부터 주릉을 향해 40여리에 걸쳐 이어져 있다.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주릉과 불무장등릉, 그리고 노고단과 왕시루봉릉 사이의 원시림지대를 누비며 서남으로 돌고 돌아 왕시루봉을 따라 내려가 섬진강에 이른다.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주릉에서 빚어지는 피아골의 물은 울창한 수림과 아름다운 수석을 감돌아 늘 청정함이 깃들여 있다.

 

즉 반야봉의 중턱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삼도봉과 노루목, 임걸령, 불무장등 사이의 원시림지대와 기암괴석을 감돌아 내려오다 노고단과 질매재에서 흘러내린 계류와 하나가 되면서 웅장하고 깊고 깊은 계곡을 만든다.

 

   피아골의 어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계곡 중간의 직전마을이란 지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연곡사에서 2km정도 오르면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직전(稷田)마을이다.

 

이는 오곡 중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옛날부터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바로 피아골의 어원이다.

 

처음에 피밭골 (稷田谷)이던 것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다.


  피아골은 장장 40여리에 이르지만 차량이 직전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는 탓에 그 깊이를 그렇게 크게 느낄 수는 없다.

 

피아골 등반은 차량이 들어가는 직전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직전마을에서 선유교까지는 30분 정도 걸리는 비포장의 넓은 길이다.

 

왼쪽의 아름다운 계곡미를 맛보며 거닐면 상큼한 기분이 압도한다.


 

   선유교를 건너면 비교적 너른 야영장이 나온다. 표고막터라 부른다.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했던 곳이라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철에 한해 이곳에서 야영이 가능하다는 국립공원 안내 입간판이 이 색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면 지리산 어느곳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야영장으로 둔갑해 있는 현시점에서 구태여 이곳에 한해 여름철 한철만 야영을 허가한다니...

 

화장실 시설과 함께 잘 다져진 야영장 바로 아래 큰 나무 밑을 살펴보면 그물망을 쳐놓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서울대 농대에서 만들어 놓은 채종장이다.

 

종자를 받기위해 조그마한 그물을 나무 아래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표고막터에서부터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선유교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계곡 오른편으로도 등산로가 이어져 있으나 잘 이용되지 않고 선유교를 건너 표고 막터를 거쳐 계곡 왼쪽길이 많이 애용된다.

 

울창한 활엽수림에서 내뿜는 상큼한 산소를 마시며 잘 다듬어진 돌길을 걷는 기분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평탄하며 완만한 길을 흠뻑 물든 단풍의 정취에다 계류의 청아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피아골 단풍의 백미로 산홍, 수홍, 인홍 등 삼홍을 맛볼 수는 삼홍소까지는 30분 정도면 당도한다. 86년에 가설된 삼홍교가 주변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삼홍소에서 10여분 오르면 구계포다리가 나오고 여기서 바라보는 피아골의 경치는 극치를 이룬다.

 

완만한 암반위로 영롱한 오색의 구슬들이 층층 계단을 타고 쏟아지는 장관은 탄성을 절로 나게 만든다.

 

절경을 뒤로 하고 다시 10여분정도 오르면 남매폭포가 기다린다.

 

3∼4m의 아담한 쌍폭이다. 여기서 다시 조금 오르면 와폭이 있고 기다리던 피아골 산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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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계곡...장당골 | 지리산의계곡들
2005.07.06


길고 깨끗하며 적막감마저 감도는 지리산 동부의 계곡이다.

 

써리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의 덕천강에 합류하기 까지 그 길이가 50여리, 20km에 이른다.

 

기나긴 여정을 요구하는 장당골은 골짜기 속의 골짜기로 곧잘 표현된다.

 

덕산에서 대원사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포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가다보면 내원사 앞 계곡에서 물줄기가 둘로 나뉘어지는데 왼쪽은 내원골, 오른쪽이 바로 장당골에 해당된다.

 

장당골은 다시 바깥장당과 안장당으로 구분되는데 더 상류로 가면 무재치기 폭포로 이어지는 물줄기와 써리봉과 남단부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써리봉∼국사봉을 잇는 황금능선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 주변에 모여져 내원사까지 흐르다가 내원골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합류, 대포마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류의 무재치기 폭포는 지리산에서 가장 이름난 폭포수로 물줄기가 쏟아지면서 아래의 바위에 부딪쳐 아름다운 무지개를 빚어내는 폭포로 유명하다.

 

무재치기폭포 이외에 장당골에는 이렇다할 명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장당골의 속으로 깊이 파고 들수록 배어나오는 태고적 신비감과 순수함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독특한 형태의 물줄기는 하류, 다시말해 경상대 연습림이라는 널찍한 산판도로와 8차례나 엉키며 이어지고 있어 등 산로라기 보다는 산책로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상류는 전혀 판이한 형국을 하고 있다.

 

울창한 수림이 뒤엉켜 넘어지면 넘어진대로 그대로 썩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자연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 바로 장당골 상류이다.

 

아직은 사람의 때를 덜 탄 때문이다.

 

진초록의 청류와 수림은 정적의 운치를 더해 찾는 이를 오히려 두려움에 젖게 할 정도다.

 

   등산로는 치밭목 산장과 무재치기 폭포에서 내원사 주차장까지 17km구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대포마을에서 내원사까지는 차량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버스편으로 등반을 시작하려면 대포마을까지를 등산로로 간주해야 한다.

 

내원사 주차장 오른편 위로 계속되는 산판도로 입구에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차량운행을 통제하는시설을 설치, 차량운행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등산로의 시발점을 이곳으로 본것이다.

 

내원사에서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까지 도로가 잘 다듬어져 있는데 8번이나 계곡과 만나는 탓에 지프차 이외의 일반차량은 운행이 불가능하다.

 

장마철 계곡 물리 불어나면 지프차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내원사∼장당보호소간은 대략 10km거리로 두시간 가량 걸어야 된다.

 

등산로라기 보다는 호젓한 산책로 같은 이 구간은 장당골 특유의 깨끗하고 짙푸른 계곡수로 유명하다.

 

거대한 폭포수가 있는가 하면 산중호수를 연상케 할 정도의 넓고 깊은 소등 오밀조밀 계곡의 풍치는 일품이다.

 

이런 탓에 이 일대는 아직 덜 알려져 있는데도 매년 여름철이면 피서 인파들로 붐빈다.

 

실제는 여름한철 뿐 아니라 장당골에는 사시사철 색다른 자연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일반인들이 잘 몰라 아직은 여름 한철만 애용되곤 한다.


그래서 장당골을 잘아는 산꾼들에게만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 세계를 보여 주는 [소중한 비밀]로 아직 남아 있다.

 

이는 아마도 장당골이 천왕봉과 다소 동떨어진 탓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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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08.31 09:45

    첫댓글 지리산 계곡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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