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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하반기 신인상
조현태
배형호
2010년도 하반기
신인상 심사평
우주의 생명률을 찾는 작가적 시선을
심사위원
한 상 렬 (수필가. 문학평론가. 『에세이포레』 발행인)
박 양 근 (수필가. 문학평론가. 부경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최 원 현 (수필가.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혹자는 지금 우리 수필 문단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한다. 실상 수필 문예지의 군웅할거가 벌써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다지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문예지 역시 경쟁 논리에 의해 미래가 결정될 것이고, 그 선호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어서다. 이에 따라 앞서 가는 문예지의 역할 수행에 의해 문학은 발전할 일이다. 다만 문예지의 수준이 한국 문학의 현재를 가늠케 하는 척도가 된다는 데에 우려 또한 없지 않다. 그럼에도 수필 문예지 『수필세계』는 창간 이후 한국 수필 문단에 등불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게 중론이다. 편집의 참신성, 문학의 옹호를 위한 경영의 순수성, 미래 문학을 위한 기대에 부응하는 발상의 전환 등이 수필작가나 독자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신인 발굴에 있어 타지와 차별화된 『수필세계』만의 독특한 발상은 수필 문단에 만연한 치부를 조금이라도 감싸 주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의미에서 『수필세계』의 신인 발굴은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구태여 사족을 붙일 필요도 없이 『수필세계』의 등단 작가들의 문학적 역량은 이미 실증되고 있다 해도 좋을 일이다.
심사자에게 넘어온 이번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 수는 10명의 50편의 작품이었다. 이들 작품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조현태와 배형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자 중, 조현태는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배형호는 신라문학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들이 응모한 각기 5편씩의 작품들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치 비교적 고른 작품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굳이 대표작을 고른다면 조현태의 「기대(期待)」와 배형호의 「명의(名醫)」였다.
이들 작품들은 대상에 대한 참신한 시선, 발상의 전환,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 제재의 상상화와 구체화가 담론의 진정성을 갖음으로써 독자의 감동을 유발하는 흡인력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신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화자가 취택한 소재를 바라보는 시선의 참신성일 것이다. 이는 화자의 시선에 비친 사물과 대상을 어떤 각도로 바라보면서 그 안에 내재한 일상의 진실을 발견해 내느냐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대상을 통찰하고 숨어 있는 삶의 진실을 해석하고 의미화해야 문학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단 조현태와 배형호의 작품들은 신인으로서 지녀야 할 문학적 역량을 기대해도 좋을 만하다고 판단되었다.
조현태의 「돌[石]매운탕」, 「송(松) 부인」, 「기대(期待)」는 그 소재를 아내 그리고 음식 만들기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의 모티브를 아내가 환청 때문에 자주 스트레스를 받는 일에서 찾고 있다. 「돌매운탕」에서는 그런 아내를 위해 화자는 특별한 음식을 만든다. 이른바 돌매운탕이다. 그게 특별하고 대단한 음식은 아니다. 한마디로 사랑을 담은 음식이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랑 하나로 다 덮을 수 있다면 그 사랑 하나만 맛나게 먹으면 될 일이다. 때로는 사랑의 맛이 쓴맛일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 쓴맛의 사랑일지라도 지금 마주 앉아 마시는 커피처럼 즐기면 될 일이다.라는 해석이 진정성을 갖는다.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화자의 마음은 다시 「송 부인」에서 아내를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이 튼실한 소나무가 아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차라리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이 소나무를 아내로 가정하자.라는 다짐은 결미에 내 맘대로 될 일이 아니니 그대로 인정하자며 그냥 내려오기로 했다.는 반전을 통해 수필 읽기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조현태의 수필은 무엇보다 결미의 의미화, 함축적 여운이 글맛을 더한다. 담장 옆에서 해바라기가 모둠발 하고 우리를 훔쳐보면서 동그랗게 웃는 얼굴에는 시샘이 노랗게 번지고 있었다.(「돌매운탕」에서)나 소나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떡갈나무의 참지 못하는 웃음이 집 앞까지 따라왔다.(「송 부인」에서)의 예이다. 이런 행간의 깊이는 주제 구현에 있어 역행성의 미학을 보임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더하고 있다. 이런 두 수필과 같은 계열에서 수필 「기대」는 체중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내를 보며 유년 시절 키가 작아 철봉에 매달린 다음 키 눈금을 재던 회고담을 직조하여 아내의 기대에 대한 의미에 천착함으로써 삶의 진정성을 깨우치게 한다. 앞 두 편의 작품이 다소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축성이 떨어진다면 「기대」는 더욱 정제된 시각적 단아함과 진실과 애정이라는 두 개의 축이 합일하는 언어적 미감을 느끼게 한다.
그랬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다고 키가 자란 것은 아니듯이, 하루를 쉬지 않고 움직였다고 체중이 빠질 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조금 빠진 것 같다는 기대는 체중을 줄일 수 있는 요긴한 도전장이다. 내가 그토록 키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조금이라도 자랄 것을 기대하고 살다 보니 오십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농부는 풍년 농사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봄에 씨 뿌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풍년을 기대하며 땅을 갈아엎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아직도 하며 산다.
이런 결미 부분의 산만함은 화자의 진술이 지나치게 설명 위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징과 함축, 여운은 결미의 생명이다. 수필이 언어미학임은 독자를 위한 배려요, 문학성 확보를 위한 지름길일 것이다.
배형호의 「보리밭」, 「명의」, 「먼 길」, 「인력시장」, 「귀인」은 마치 옴니버스식 수필을 읽는 듯하다. 건축설비업을 하는 화자가 그의 일상에서 건져낸 보석 같은 글들이다. 일상적 담론을 수필화하는 과정에선 늘 작가가 만나게 되는 함정이 도사린다. 상투적이고 식상한 이야기, 담론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일상은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배형호의 수필은 일상성을 뛰어넘는 유의미화에 있다. 이 점이 그의 강점일 것이다.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덜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 백자처럼 우아하지는 않지만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기교 없이 그냥 손으로 막 빚어 만든 문명의 얼굴을 쓰지 않은 토기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언어 사용의 경제성을 염두에 둔 정련된 문장 쓰기에 문제가 없지 않으나, 행간에 담긴 화자의 진정성이 그의 작품을 높이 사게 한다.
「보리밭」은 스토리가 지나치게 장황하다. 글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있는 제목 선정에 좀 더 유념할 필요가 있으며, 간결 명료한 문장 구성으로 문장과 단락 사이의 유기적 긴축성이 요구된다. 보리밭은 이 글에서 시간적 개념으로서의 소재일 뿐, 제재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먼 길」과 「인력시장」은 삶의 진지함과 더불어 그 일상적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특이함이 독자를 흡인하는 마력과도 같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화자의 감정의 절제와 묘사와 설명이 보다 선명하고 간결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수필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귀 기울였으면 한다. 하지만 작품 「명의」는 발상과 주제 제시의 탁월함과 함께 정제된 수작이다. 작품의 소재는 전자의 작품들과 대동소이하다. 이 작품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오늘도 아내는 일어나며 엉덩이 쪽을 좀 눌러 달라고 한다. 벌써 몇 년째다. 아내의 엉덩이를 손목으로 눌러 보지만 시원찮은지 아내는 위로 아래로 위치를 가리키며 팔꿈치로 꼭꼭 누르라고 한다. 병원이며 한의원이며 다 다녀 보고, 사진도 찍고 침도 맞고 했지만 별수가 없는지 아침마다 내 손을 필요로 한다. 뭉친 곳이 잘 풀려 몸이 개운해진 날은 아내는 나를 보고 명의라고 치켜세운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한마디 한다. 가끔 아주머니들로부터 명의란 소리를 듣는다고. 지금은 웃고 넘기는 이야기가 됐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내는 토끼 눈이 됐었다.
다소 만연체가 보이지만, 전개 부분은 화자 자신의 업인 건축설비의 일과 유사 착상을 통해 대상을 통찰하는 해석의 혜안을 보인다. 화제는 수도 배관의 교체이다. 나는 건축 일을 하면서 건물을 사람에 비유해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건물에서 전기는 사람의 신경에 비유되고, 수도 배관은 혈관이며 하수도는 배설 기관, 보일러는 심장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라는 언술은 일상성에서 일상 이상을 찾는 이른바 무의미한 사물의 속성을 유의미화하는 발상의 전환이요, 주제의 전도다. 이런 화자의 진술은 바로 시각의 변화, 시선의 차이에서 이루어진다. 수필의 생명이라 할 주제 제시의 탁월한 경지일 것이다. 이는 최근에 일고 있는 이른바 통섭적 사고와 맥을 같이한다. 덧붙여 신혼집은 아기의 웃음소리같이 맑고 아름다워야 하리라., 나는 원인을 아주머니께 설명했다. 이럴 땐 내 목소리가 좀 커지기도 한다.라는 건강성은 이 수필을 읽는 독자를 자못 행복하게 한다. 그래 화자는 진정한 명의가 된다. 동시에 약주가 과한 이튿날 아침 그 속을 다스려 주기 위해 해장국을 끓이는 아내도, 아내의 가려운 마음을 긁어 줄 수 있는 남편도 명의라고 말하고 싶다.는 결미의 언술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하고 있다.
조현태, 배형호 두 분의 신인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보편성을 뛰어넘어 사색과 명상 속에서 건져낸 잘 익은 발효주의 모습을 띤 생명의 신비, 우주의 생명률을 찾고자 하는 작가적 시선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들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이로써 『수필세계』는 참신한 두 신인을 발굴하게 되었음을 확신한다.
심사평│한상렬
신인상 당선소감
수필을 향한 플라토닉 사랑
배 형 호
1957년 성주 출생
2006년 신라문학대상 수필부문 수상
2007년 『월간문학』 신년호에 수상작 「황혼」으로 등단
수필사랑문학회 회원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 다루어지고 있는 이상주의적이며 관념론적인 사랑으로 순수한 정신적 사랑인 플라토닉 러브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혜를 추구하며 대화하고 조율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어린 왕자」의 참사랑은 현대판 플라토닉 사랑입니다. 사랑과 관련하여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사랑은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수필을 향한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는 많은 분들을 기억해 봅니다. 열정적으로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을 기억합니다. 거친 기억의 흙만 안고 있던 제게 그릇을 빚을 수 있게 가르침 주신 두 분 지도교수님을 기억합니다. 수필문학회를 흔들림 없이 잘 지켜 오고 있는 회장님과 임원님과 문우님들도 기억합니다.
수필세계 신인상 당선 소식을 접하고 흥부전을 생각합니다. 어릴 적 저는 박 속에서 기와집이 나오고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흥부전이 좋았습니다. 이것이 문학에 대한 첫 끌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 예술인 문학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이야기는 읽고 또 읽어도 즐거웠습니다. 부자가 되어 가는 흥부전은 어린 시절의 제 희망 사항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희망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기와집을 가지고 금은보화를 얻고 문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잠재된 원형일까요? 저는 도시에서 오래 살아오고 있지만 마음은 늘 시골 농부 같았습니다. 수필을 공부한 지 오 년이 지나고 있지만 농사를 짓는 것처럼 여전히 힘들고 앞으로도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압니다. 수필을 사랑하는 마음과 수필 사랑에 대한 책임감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동안 써 온 글이 그저 잠깐 쳐다보는 눈사람 같은 글이었다면 앞으로는 별처럼 뾰족하지만 부챗살처럼 빛이 퍼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나의 제일 번 독자가 되어 쓴 소리 아끼지 않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수필을 향한 나의 플라토닉 사랑을 변함없이 이어 가겠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문을 열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합니다.
신인상 당선작품
명의 외 3편
배 형 호
오늘도 아내는 일어나며 엉덩이 쪽을 좀 눌러 달라고 한다. 벌써 몇 년째다. 아내의 엉덩이를 손목으로 눌러 보지만 시원찮은지 아내는 위로 아래로 위치를 가리키며 팔꿈치로 꼭꼭 누르라고 한다. 병원이며 한의원이며 다 다녀 보고, 사진도 찍고 침도 맞고 했지만 별수가 없는지 아침마다 내 손을 필요로 한다. 뭉친 곳이 잘 풀려 몸이 개운해진 날은 아내는 나를 보고 명의라고 치켜세운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한마디 한다. 가끔 아주머니들로부터 명의란 소리를 듣는다고. 지금은 웃고 넘기는 이야기가 됐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내는 토끼 눈이 됐었다.
나는 건축설비업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주택의 상하수도, 즉 수도 배관과 하수도 배관을 전문으로 시공하고 고치기도 하는 직업이다.
얼마 전 나는 간판 밑에 현수막을 하나 걸었다. 무엇무엇 잘 고치는 병원이라고 거기에다 경력 삼십 년의 전문 박사라는 말도 덧붙였다. 현수막이 바람을 타고 잘 날아서인지,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셨다. 반신반의하며 머뭇거리며 들어서던 아주머니는 다시 한 번 현수막을 보고 웃으며 자기 집에 왕진을 와 달라고 했다. 나는 우선 몇 가지의 기구를 챙겨서 아주머니와 함께 나섰다. 아주머니의 집은 삼 층 건물로 남향이었다. 앞으로는 도로를 접해 있어서 풍부한 일조권으로 살기에는 좋아 보였다. 그러나 아늑한 보금자리에도 문제는 있는가 보다.
아주머니는 나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 작은방과 경계한 거실 천장의 한 귀퉁이는 구름 낀 하늘 같았다. 얼룩이 진 천장에 손을 대어 보아도 물기가 묻어날 만큼 젖어 있지는 않았다. 아주머니는 오래 전부터 그랬지만 당장에 뚝뚝 떨어지는 물은 없기에 그냥 지내 왔었다고 했다. 그런데 신혼부부가 이사를 들게 되었고, 몇 달이 지나자 새로 바른 벽지에 얼룩이 지기 시작했단다.
아주머니는 집안에 건축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삼 층에 내부 수리를 했다고 했다. 수도 배관을 교체하고 화장실도 보일러실도 물을 쓰는 곳은 방수를 하고 빠짐없이 손을 봤다고 했다. 그렇게 공사를 했지만 물은 처음 그대로 떨어진다고 했다.
천장 속에 받쳐 둔 그릇에는 소주잔에 찰 정도의 물이 들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그 정도의 물이 모인다고 했다. 일주일 동안 모인 물이 이 정도이면 하루에 몇 방울 떨어지는 물로, 자연 증발할 수 있기에 그냥 지낼 만도 하다. 그러나 신혼집은 아기의 웃음소리같이 맑고 아름다워야 하리라.
그동안 고민과 연구를 거듭했던지 아주머니는 상하수도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삼 층 화장실에는 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이 구석 저 구석 파헤친 흔적이 역력했다. 기존의 타일 바닥보다 높고 낮은 곳과 금이 간 타일 등으로 화장실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는 건축 일을 하면서 건물을 사람에 비유해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건물에서 전기는 사람의 신경에 비유되고, 수도 배관은 혈관이며 하수도는 배설기관, 보일러는 심장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여기저기 손을 댄 화장실이 보기에 안쓰러워 나는 보일러실로 가 보았다. 보일러실에는 깨끗하게 난방 배관이 교체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에 사용하던 난방관이 철거되지 않았는지 바닥 위로 녹이 슨 철 파이프 두 가닥이 보였다. 철거되지 않은 배관은 부식되면서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나는 그곳을 팠다. 아주머니는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물이 떨어지는 곳과 이곳과의 거리가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신문지 한 장 크기만큼의 바닥을 자르고 파냈다. 묻혀 있던 철 파이프는 흙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물에 불은 발뒤꿈치의 굳은살처럼 툭툭 떨어지는 부식된 파이프, 그 사이로 배수 파이프가 지나가고 있었다. 생선의 뼈를 발기듯 파이프만 남기고 바닥이 나오도록 깨끗이 들어냈다. 바닥은 물기에 많이 젖어 있었다. 파낸 바닥의 배수 파이프는 싱크대에서 나오는 물과 보일러실 배수관이 만나서 나가는 삼거리 길이었다. 아주머니께 싱크대에 물을 내려 보라고 했다. 그 교차하는 지점에는 티(T) 자로 갈라지는 부속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참 동안 물을 내리자 부속과 파이프의 연결 부위에 물방울이 맺혔다. 나는 원인을 아주머니께 설명했다. 이럴 땐 내 목소리가 좀 커지기도 한다.
예전에 큰 바위를 깨는 것을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홈을 판다. 파진 홈에 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놓으면 물먹은 나무는 몸집이 불어나고 바위는 그 힘에 금이 간다. 또 이런 경우는 누구나 많이 보았으리라. 주택의 처마 밑을 보면 녹슨 철근 한두 가락이 보이는 집이 많이 있다. 처음엔 철근이 콘크리트 속에 들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며 깊이 묻히지 못한 철근은 부식되어 부피가 늘어나면서 콘크리트를 떨어뜨리게 된다.
이처럼 난방 파이프가 부식되면서 피브이시(PVC) 배수관에 압력이 가해진 것이다. 그 부분이 부속의 연결 부위가 아닌 지나가는 파이프였다면 누구나 작은 통증은 견디며 살아가듯 배수관은 조금 변형된 상태로 그 힘을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 배관 사이에 낀 연결 부분은 배관이 부식되면서 부풀어나는 힘에 미세한 틈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이 다 떨어지고 그치는 데도 많은 날이 지나갔다. 아주머니는 비로소 나를 보고 명의라고 했다. 이 일을 한 지도 이제 삼십여 년이 넘어간다. 어쩌면 박사란 소리를 못 듣는 게 오히려 이상하리라. 그러나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럼으로 해서 값진 경험도 쌓을 수 있었다.
무릇 명의란 그 마음을 헤아려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해서 나는 감히 말하리라. 약주가 과한 이튿날 아침 그 속을 다스려 주기 위해 해장국을 끓이는 아내도, 아내의 가려운 마음을 긁어 줄 수 있는 남편도 명의라고 말하고 싶다.
먼 길
관리실장은 창고에서 몇 켤레의 안전화를 끄집어냈다. 총각은 신발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창고에는 주인 없는 신발이 많았다. 주인 없는 신발이 많이 있다는 것은 신발 숫자만큼이나 사람들이 들어오고 떠나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할 때 신는 안전화이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서 신고 온 신발로 갈아 신고 간다. 총각은 발에 맞는 것이 없는지 아니면 남이 신던 신발이라서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강 씨 아저씨가 딱 맞는 것보다 좀 크다 싶은 게 낫다고 하며 그중에서 한 켤레를 골라 주었다.
총각은 오늘 처음으로 일을 나왔다. 실장은 총각의 주민등록증을 복사해서 인명부에 첨부하고 연락처와 다른 몇 가지를 적었다. 총각은 얼마 전에 군 복무를 마쳤고 내년에 복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건축 현장의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도 있을 텐데 현장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현장의 일을 사람들은 막노동이라고 하지만 이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먼저 이 일로 시작해서 길이 뚫리고 집이 서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안전화를 매는 손길에 눈이 갔다. 실장은 작업 중 지켜야할 안전 수칙을 일러 주었다. 총각은 패기 있게 네 알겠습니다로 대답했다.
나도 그랬었다. 근 삼십여 년 전 군 복무를 마치고 처음 건설 현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당시에는 큰돈을 벌기 위해 국내 현장보다는 해외 현장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건축배관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놓고 회사로부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침 그해 가을 면접시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었다. 해외 취업 경험이 없던 나는 서류에 적혀 있는 준비물을 모두 갖추어서 서울로 갔다. 올라가서 보니 시험장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손으로 와 있었다. 나는 쌀 한말 무게도 더 되는 공구들을 쌀자루에 담아 가지고 가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해외 한두 번 갔다 온 사람들은 시험 과제물을 만들지 않고 면접만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빈손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많은 사람들 틈에 초보자로 서 있었다.
면접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당락을 알 수 있었다. 현장에서 면접과 동시에 당락을 결정했기에 희비가 엇갈리는 한마당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면접관 앞으로 갔다. 면접관은 내가 가져간 쌀자루에 담긴 공구들을 보고 나를 한참이나 봤다. 그리고 면접관은 나가서 열심히 하세요라고 했다. 나도 그때 정말 큰소리로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었다.
해외 취업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나의 젊은 시절은 무척 암울했었다. 그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빈손으로 면접을 보러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면접관은 내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직업훈련원에서 건축배관 자격증만 취득했지 현장 경험은 전혀 없을 때였다. 만약 내가 빈손으로 갔더라면 현장 경험이 없어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고 암울한 삶의 고리를 끊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면접관은 내가 가져간 무거운 공구들을 보며 나가서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한두 번 해외 다녀온 근로자보다 시급을 더 높게 책정해 주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원칙을 지킴으로 해서 내 삶에 변화를 가져다준 그때의 기억은 늘 새롭게 나를 깨운다. 오늘 우리가 땅속에 배관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터널 공사를 하듯,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선진 공법으로 땅속 터널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때 나는 상하수도를 세대에서 터널로 연결하는 작업을 했었다. 상수도는 압력 시험인 수압 검사를 통과하면 되었지만 하수도는 늘 조심스럽고 진땀이 났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배수되는 물이 빠르게 잘 흘러가면 불합격이다. 감독관은 변기가 연결될 파이프 속에 테니스 공을 넣고는 한 말의 물을 붓는다. 그리고는 터널과 세대와 연결 지점인 맨홀에서 테니스 공이 떠내려오는 시간과 흘러나온 물의 양을 잰다. 그때 우리 팀은 일주일 동안 한 공사가 불합격되어 재시공한 적이 있었다. 테니스 공이 너무 빨리 떠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감독관은 배관의 구배, 경사도가 크면 물만 먼저 흘러가고 찌꺼기는 가다가 중간에 가라앉게 된다고 했다.
오늘 온 총각은 무거운 거푸집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바쁘게 날랐다. 아저씨는 총각보고 하나씩 나르라고 하며 앞으로 하루 이틀 하고 그만둘 일도 아닌데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총각은 몸놀림만큼 마음도 바빠 보였다. 일요일도 일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일은 일요일도 있지만 나는 일주일 정도 해 보고 몸에 익숙해지면 하라고 했다. 아저씨는 혼잣말로 그릇 채우기가 그리 급한가 하며 새참으로 나온 빵을 총각에게 주었다.
강 씨 아저씨는 칠십대이다. 전에는 광산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동안 땅속생활을 하며 골목마다 연탄재가 사라질 때까지는 따뜻하게 살았다고 했다. 아저씨는 자기의 그릇이 너무 커졌다며 다 채울 수 없었기에 아직도 배가 부르지 않다고 했다. 아저씨는 한때 잡기에 빠져 적지 않은 재물을 탕진하고 좋은 시절 그릇 지키기를 잘못해서 자꾸만 커졌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릇 하나씩 가지고 있으리라. 살아가면서 그 그릇의 크기는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가 싶다. 지금 나의 그릇 크기는 알맞은 걸까.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자꾸만 커지려는 그릇을 나는 불평 없이 잘 채워 가고 있는 것일까.
요란한 기계 소리를 내던 장비들도 흙무더기 너머 붉은 노을에 취해 일시에 죽은 듯 고요하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반 시간 남짓한 거리에서 총각은 소금 먹은 배추가 되어 코를 박고 졸고 있었다. 그때 내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해외 현장을 택했듯이 총각도 힘든 현장으로 나선 것은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저씨가 그릇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내일 숟가락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인생은 식탁 위의 숟가락과도 같은 것이라고, 뜨거운 곳도 차가운 곳도 마다 않고 몸을 담그는 숟가락과도 같아야 된다고 말해 주리라. 또 천천히 흘러가는 하수도의 물길과도 같아야 한다고, 부서지지 않고 완만하게 흐르는 물길처럼 몸과 마음을 싣고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고 말하리라.
인력시장
사무실에 나온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작업 나갈 곳은 많은데 사람이 모자란다. 전날 미리 약속된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사람을 맞추어서 나가야 한다. 관리실장은 명부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 나오다가 며칠씩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했다. 젊은 사람들은 가끔 과음하면 다음 날 늦잠 자기 일쑤다. 그래서 실장은 전화를 걸어 깨우기도 한다.
멀리 있는 현장으로 갈 사람들은 팀을 만들어서 몇 팀의 사람들이 먼저 떠났다. 우리는 늘 가던 아파트 신축 현장이다. 전화를 받고 몇 사람이 더 나왔지만 그래도 인원이 모자라는지 실장은 다른 인력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몇 군데 전화를 하던 실장이 어느 한곳에서 다섯 명을 지원받게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쉬며 모두 출발하자고 했다. 인력이 모자라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애태우는 것을 보면서 이곳의 경기가 좋은 것을 새삼 느끼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한때는 내가 살던 곳도 경기가 좋아 무척 바빴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일손이 모자라면 인력시장에서 사람을 많이 구해서 썼었다. 지금은 용역이란 이름으로 사무실을 차려서 인력을 공급하지만 그 당시에는 시내의 몇몇 군데의 로터리에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모였었다. 노상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필요한 사람을 물건 고르듯 뽑아서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옆에 차를 세우고 땅파기 할 사람 두 명 타시오 했더니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서로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차는 멀리 세워 놓고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 가서 힘깨나 쓸 만한 사람의 손을 잡고 슬쩍 당기면 그 사람들은 알고 따라 나왔었다.
며칠 전 신문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그 로터리의 인력시장이 기사화되어 나왔다. 꽁꽁 얼어붙은 경기에 하루 벌어 생활하는 노동자들이 새벽같이 나왔다가 일감이 없어서 발길을 돌리는 기사였다. 활활 타던 장작불도 해가 뜰 때쯤이면, 그 불길도 서성대던 사람들도 기가 죽고, 그때까지도 팔려 가지 못한 사람들이 빈 걸음으로 돌아가는 무거운 뒷모습과 함께 실려 있었다.
그와 반대로 이곳은 일손이 모자라서 애를 태우는 것을 보면서 그곳과 이곳의 차이가 한방 안에서 윗목과 아랫목에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대부분 보일러로 난방을 해서 윗목과 아랫목이 없을지 모르지만 서민의 생활은 언제나 윗목과 아랫목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거리는 가로등에 기대어 있고 네거리의 파란 신호등이 바쁜 걸음으로 가라고 유난히도 선명하다. 인생에도 신호등이 있다면 파란 불이 더 많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곳을 지날 때, 바다 위에는 둥근 해가 먼저 나와서 앉아 있었는데 해도 잠이 길어졌는지 아직도 기척이 없다. 파도만이 쉴 새 없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삶도 저 파도와 같아야만 하는 것인가.
차는 네거리를 지나서 세웠다. 다른 사무실에서 나온 다섯 명을 태웠다. 승합차는 빈 의자 없이 가득 찼다. 지원받은 인력 다섯 분은 연세가 많이 들어 보였다. 오십대인 내가 보기에도 할아버지였다. 건축 현장에서는 연세 든 분들이 많지만 웬만하면 아저씨라고 해야 한다. 함께 일하며 할아버지라고 한다면 어쩐지 더 슬플 것 같기 때문이다. 다섯 분 가운데 두 분은 보통 체구였고 세 분은 몸이 약해 보였다. 함께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오늘 할 일은 해체해 놓은 거푸집을 정리하는 일이다. 거푸집은 벽을 만드는 조립식인 크고 작은 폼과 철 파이프와 각목과 천장을 지지해 주는 서포트와 합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콘크리트가 굳고 나면 해체한 이 자재들을 들어내야 한다. 해체해 놓은 현장은 마치 폭격 맞은 것처럼 자재들이 뒤엉켜져 있다. 개미가 흙을 물어다 내며 굴을 파들어 가듯 하나하나 순서대로 빼내어야 한다. 조립식이지만 폼의 무게는 큰 것은 쌀 한 말 무게도 더 나간다. 또 육 미터나 되는 팔뚝 굵기의 철 파이프는 현장의 장애물을 피해 가면서 옮기기란 쉽지 않다. 그런 것을 하루 종일 들어 만지고 옮겨야 한다.
우리 팀에도 할아버지 두 분이 오셨다. 여섯 명이 길게 늘어서서 전달하는 식으로 자재를 들어내어야 한다. 예전에 모내기할 때 못줄을 따라 늘어서서 모를 심어 가듯 서로 손발이 잘 맞아야 힘들지 않고 할 수 있다. 자기 거리만 먼저 심었다고 혼자 허리 펴서는 안 되듯이 이것도 서로가 고무줄처럼 탄력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할아버지 두 분을 가운데 두고 우리가 좀 더 부지런히 하기로 생각하며 일을 시작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생각 외로 할아버지들의 자재 만지는 솜씨가 익숙해 보였다. 우리는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고 걸음은 자꾸만 느려지는데, 할아버지 두 분은 땀도 흘리지 않았다. 우리가 할아버지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두 분이 한두 발자국씩 더 내딛는 것이었다.
점심 먹고 잠시 쉬는 동안에 할아버지가 이야기했다. 함께 온 분들은 모두 한경로당에 나오는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있다 세상을 떠난 한 친구를 위해서 일한다고 했다. 모자란 치료비를 돌려서 대고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모두 나섰다고 했다. 힘이 부쳐서 일을 계속하지는 못하지만 일주일에 이삼 일씩 해 온 지가 몇 달이 지났다고 하며 그럭저럭 정리가 다 되어 간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건강하게 생활하라고 하며 바람이 새는 잇몸을 감추었다.
인생이란 길 앞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도 부끄러운 하루였다. 장작불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지만, 나는 오늘 품삯을 받아 집으로 가야 한다. 나는 가족을 위해 주변을 맴도는 시냇물이라면 할아버지는 유유히 흘러 바다로 가는 강물이었다.
일을 마친 할아버지는 다 함께 경로당에 들렀다가 간다며 몸을 깨끗이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깡마른 할아버지의 몸이 보였다. 할아버지의 등에 군데군데 붙은 파스도 주름져 있었다.
보리밭
고향엔 아직도 밭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여름내 푸른 잎을 꽃처럼 벙근 콩이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학교 운동장만 한 그 밭은 너무 커서 위쪽은 산과 붙어 있습니다. 산에 단풍이 지면 밭에는 파란 보리가 올라왔습니다.
그해 봄도 큰 밭에는 보리가 바람에 출렁거릴 만큼 자랐을 때였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전 초등학교 삼 학년이었습니다. 당시의 마을 앞 도로는 비포장이었고 학교까지 가다 보면 도로를 가로질러 흐르는 크고 작은 개울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두세 개지만 비가 오고 나면 며칠 동안은 도랑도 늘어났습니다. 동네가 끝이 나고 시작되는 첫 개울에서 형들은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나도 길가로 밀려난 돌을 주워 보탰습니다. 돌무더기는 엎드려 돌을 쌓는 형보다 더 크게 보였습니다. 형들은 이제 됐다고 하며 어제 차도 안 태워 주고 오늘 식겁해 봐라 하며 책보를 멨습니다.
형들은 어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버스가 태워 주기를 바랐으나 거절당한 모양입니다. 고학년인 형들은 수업을 마치고도 학교에서 일을 했습니다. 새로 지은 교실 앞은 논바닥 그대로였습니다. 형들은 가마니에 막대기를 끼워 흙을 담아 나르고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가 몇 시간씩 땅고르기를 했습니다. 저학년인 우리도 한두 시간 수업을 마치고 책보자기를 들고 오리 가까이 가야 나오는 강가에서 자갈을 주워 오곤 했습니다.
형들은 피곤한 몸으로 구세주 같은 버스를 기다렸으나 버스는 실망만 안기고 간 모양입니다. 아마 그날 저녁 버스는 초만원이었지 싶습니다. 우리가 책보를 메고 몇 걸음도 가지 않아서 버스의 경적 소리가 들렸습니다. 버스는 그 큰 머리를 마을 모퉁이를 돌아 내밀었습니다. 형들은 도로를 따라 뛰어갔습니다. 버스는 마을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큰 소리로 힘을 썼습니다. 버스는 경적을 울리며 멈추는 소리가 나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돌을 치우며 뭐라고 했습니다. 도로를 따라 달리던 우리 가까이로 버스는 곧 따라왔습니다. 버스가 멈추는 소리에 형들은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흩어졌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 조수는 우리 쪽으로 뛰어왔습니다. 나는 그 언덕배기 위의 보리밭으로 뛰어갔습니다.
보리는 내 무릎만큼 자라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던 보리는 내 발에 밟혀 힘없이 넘어갔습니다. 나는 곧 다리에 힘이 빠지고 바지는 이슬에 젖어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습니다. 조수 아저씨는 내게로 와서 가자고 했습니다. 학교까지 태워 주겠다고 하며 내 손을 잡고 끌었지만 나는 울상이 되어 엉덩이를 뒤로 뺐습니다. 아저씨는 망설이다 나를 안아서 어깨에다 메었습니다. 나는 겁에 질려 울면서도 아저씨의 어깨가 따뜻하고 편안했습니다. 몇 해 전 어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간 아버지의 등처럼 느껴졌습니다.
삼거리에서 차가 섰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만 태우고 나는 내려 주지 않고 차는 삼거리에서 읍내 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창 너머로 학교 담장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었기에 울려고 하는데 운전수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돌을 쌓은 형들의 이름을 말하면 차에서 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열 명 가까이 되는 형들의 이름을 다 대고 내 이름도 말했습니다.
내 발아래서 맥없이 넘어가던 사월의 보리 같았던 나는 반 넋이 나간 상태로 학교 문 앞으로 갔습니다. 삼거리에서 우리 동네 쪽으로 바라보니 형들이 도로를 메우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형들의 이름을 다 말했기에 걱정이 되어 서 있는데 친구가 불렀습니다. 흥부야 뭐 하노. 빨리 가자.하고 불렀습니다.
국어책에는 흥부전이 나오고 그때가 막 흥부전을 배울 때였습니다. 흥부전은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놀부는 서로 안 하겠다고 했고 흥부는 서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흥부 아내는 서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나에게 흥부 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국어 시간에는 괜히 얼굴이 붉어지곤 했습니다. 흥부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돌아오는 오월 어머니날 행사 때 우리 반은 흥부전을 하자고 했습니다. 배역을 맡은 우리는 전교생이 자갈을 주우러 갈 때도 남아서 흥부전을 읽고 외웠습니다. 나는 책을 받고 한 달 전부터 여러 번을 읽었기 때문에 친구들보다 머뭇거림 없이 잘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를 보고 흥부라 불렀습니다.
친구는 어제 딴 구슬을 보여 주며 자랑을 했습니다. 내가 몇 개 달라고 하면 얻을 수 있겠지만 친구를 따라 그냥 교실로 갔습니다. 수업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젖은 바지 같았습니다. 한 시간 수업을 마치고 복도에 나가 보니 교무실 앞에 형들이 벌을 서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버스를 많이 타게 되었습니다. 큰어머니와 며칠째 읍내의 의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개울에 돌을 쌓았던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학교에 가기 위해 큰길로 나오니 어제 그 개울에서 형들은 또 무엇을 하며 한참을 어정대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학교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삽이나 괭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괭이는 돌에 부딪힐 때마다 아픈 듯 쇳소리를 내며 형들을 따라갔습니다. 형들이 떠나고 난 뒤 개울가로 갔습니다. 징검다리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물은 많이 흐르지 않지만 차가 다니는 길에는 차바퀴에 땅이 파여 제법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언뜻 보니 흙탕물이 고여 있어 형들이 무얼 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위에서 새 물이 들어오고 흙탕물은 자꾸 밀려갔습니다. 그래도 한 곳에는 흙탕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형들은 구덩이를 파 놓았던 것입니다.
버스는 마을 모퉁이서부터 경적을 울렸습니다. 어제처럼 마을 앞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개울 가까이 와서 쥐 우는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였습니다. 나는 개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서 있었습니다. 물속에 파여 있는 것을 알 수 없을 텐데 하면서도 조바심이 났습니다. 버스는 스스럼없이 미끄러져 개울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버스는 한쪽으로 기우뚱하며 물장구를 크게 치며 용을 썼습니다. 그러나 버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꽁무니에 한 무더기의 연기를 달고 내 옆을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는 버스를 그냥 바라만 보았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버스가 지나갈 때 조금이라도 뛰어서 따라갔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빨리 갈 수 있고 집에 올 때도 빨리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고 몸에 땀도 났습니다.
오늘도 국어 시간에는 흥부전을 하며 아내와 몇 덩이째 박을 탔습니다. 기와집이 나오고 금은보화가 나와도 재미있고 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슴만 답답했습니다. 나와 달리 아내는 신이 났습니다. 나는 흥부전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놀부나 마당쇠를 하는 친구가 대사를 잊어 머뭇거릴 때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오늘 흥부 아내가 대사를 잊고 난처하게 나를 보고 있는데도 나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없이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는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도 없었습니다. 외양간에 소도 없고 어제 널어 말린 나락 가마니도 없는 걸로 봐서 솔머리 물레방앗간에 간 모양이었습니다. 부엌으로 가 솥뚜껑을 열어 보니 무국과 양재기에 반 정도의 밥이 있었습니다. 솥뚜껑을 닫고 물동이에서 한 바가지의 물만 마시고 마루에 앉았습니다.
해는 처마 밑으로 내려와 따뜻했습니다. 마루의 기둥이 서 있는 처마 안쪽엔 작년에 큰아버지가 반달같이 만들어 제비 집 밑에 받쳐 놓은 양철 조각이 보였습니다. 며칠 전 흥부전을 할 때 선생님이 강남 간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했지만 제비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작년에 간 제비가 다시 찾아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큰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큰어머니는 내 머리에 손을 대어 보고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버스로 읍내 의원에 갔습니다. 큰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의사 선생님은 싸늘한 청진기를 가슴에 대 보고 내 윗옷을 벗기고 여기저기 만져 보았습니다. 큰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뭐라고 했지만 나는 가슴만 답답하고 추웠습니다.
읍내에서 돌아와 학교 앞 삼거리에 내렸을 때는 수업을 마친 친구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큰어머니는 선생님을 만나러 가고, 나는 친구에게 읍내까지는 버스를 한 시간 타고 가야 된다는 이야기와 주사는 맞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나온 큰어머니는 친구와 나에게 며칠 전 버스에 실려 간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안타까운 얼굴로 큰어머니는 나를 나무라다가 한참 동안 학교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또 읍내 의원에 갔습니다. 진찰을 하고 약을 받아 버스 정류소로 갔습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으라 하고 큰어머니는 정류소 사무실로 갔습니다. 조금 있다 입술을 물고 상기된 얼굴로 큰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 나를 데리고 정류소 옆에 있는 가게로 갔습니다. 가게 아주머니와는 잘 아는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마친 큰어머니와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아닌 다른 차를 탔습니다. 큰어머니와 내가 간 곳은 한약국이었습니다. 수염이 긴 할아버지는 내 배를 눌러 보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약을 받아 읍내에서 집으로 가는 저녁 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저녁이었습니다. 그때 그 운전수 아저씨가 보따리를 들고 왔습니다. 보따리 안에는 과자가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약을 먹고 과자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차츰 기운이 든 나는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맞추어 큰길가에 있는 비석 앞에서 햇볕을 쬐곤 했습니다. 그날도 돌 거북 위에 앉아 비석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큰 못을 안고 있는 산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언덕 위의 보리도 고개 숙이고 마른 바람을 맞고 있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학교에 가도 된다고 큰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두 달이 지나갔습니다. 친구 집 살구나무의 파란 잎 사이로 살구가 노랗게 익어 갔습니다. 길 따라 늘어진 외가닥 전봇줄에서 제비가 곡예를 하듯 놀고 있었습니다. 학예회도 지나가고 흥부전도 끝이 났습니다.
큰어머니의 심부름을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친구들을 기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