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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최민자
전북 전주 출생 서울대학교 가정대학 졸업 수필공원(현 에세이문학 전신) 가을호에 「닭털붓」으로 등단 제21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흰 꽃 향기』 『꼬리를 꿈꾸다』 출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기획위원, 국제 펜클럽 회원
│대표 작품│
서해 예찬 외 4편
최 민 자
가을 바다는 쓸쓸하다. 가을 오후의 서해바다는 더 쓸쓸하다. 찢어진 텐트, 빈 페트병, 분홍색 슬리퍼 한 짝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소나무 아래 모래언덕을 지나 이윽고 수평선을 마주하고 앉는다. 흐린 물빛, 느린 물살, 낮게 웅얼대는 해조음이 편안하다. 아직도 볼을 붉히고 밤을 맞을 줄 아는, 서녘 하늘의 부끄러움도 정답다. 지친 강물을 한 몸으로 품어 안는 해거름의 서해는 아늑해 보인다.
서해와 가을은 닮은꼴이다. 쓸쓸한 것, 고즈넉한 것, 시간이 빗장을 걸어 잠그기 전, 혼신을 다해 사르는 붉은빛까지도.
서해에서 사람들은 겸허해진다. 꽃 한 송이 피워올리지 못하는 개펄에 엎드려, 무릎을 꺾고 고개를 수그린다. 자연이 주는 것들을 공으로 얻으려면 최소한 그만큼은 허리를 굽혀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사람들은 안다. 바지락죽과 박속낙지, 어리굴젓 같은 서해안의 먹거리들은 모두 그렇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허리를 굽힌 사람들이 뻘밭에 엎드려 건져 올린 것들이다. 물과 뭍을 매몰차게 가르지 않고 질펀하게 품어 안는 너그러운 바다. 평화로운 안식과 소금기 어린 일상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이 바다의 넉넉한 이중성이 좋다.
젊은 날에는 동해도 좋았다.
삽상한 바람, 불끈 솟는 햇덩이, 가파른 물살, 바슬거리는 모래의 감촉이 좋았다. 서슬 푸른 동해의 파도 앞에 서면 나처럼 우유부단한 사람도 안으로 단단히 옹심이 박혀 흔들리지 않게 다져질 것 같았다. ‘희망의 나라’나 ‘고래 사냥’을 흥얼거려 본 것도 동해에서였다.
사람들은 동해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돋쳐 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굽은 등을 펴고 처진 어깨를 바로 세운다. 수평선 너머 솟는 해를 우러르며 경건하게 손을 모으거나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한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바다. 그 바다의 광활한 기상이 좋았다.
동해가 남성적이면 서해는 여성적이다. 동해가 철학적이면 서해는 문학적이다. 기운 잃은 아이를 무동 태우고 걷는 아버지 같은 바다가 동해라 치면, 칭얼대는 아이를 치마폭에 감싸 안고 다독거리며 재우는 어머니 같은 바다를 서해라 할 것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때 나는 문득 바다를 생각한다.
피보다 붉은 변산의 낙조, 풀어진 세숫비누처럼 구름 사이로 숨어들던 간월도의 달. 만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채 모래밭에 엎드려 녹이 슬어 가고 있던 왜목리의 낚싯배, 체념과 희망을 동시에 품으며 물때를 기다리던 꽃지 바닷가의 따개비가 생각난다. 바다가 주는 위안이 언제부터인지 동해보다는 서해의 기억과 잇닿아 있다. 내 안의 시계바늘이 하오의 시간들을 바장이고 있어서일까.
바람 부는 가을날엔 바다로 떠나 보라. 덜 핀 억새들이 쨍한 햇살에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 방조제 옆을 지나, 흐린 물살 일렁이는 서해로 가 보시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아득한 수평선 저 끝에서, 가느다란 물뱀 한 마리가 은빛의 광휘로 떨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해가 떨어져 버리면, 쓸려 나간 바다가 집 나간 아낙처럼 주춤주춤 당신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내 유년의 그윽한 해우소
소꿉장난 짝지였던 한 살 아래 경록이가 어느 날 내게 가만히 말했다.
“너 곱돌 만드는 법 가르쳐 줄까?”
벽이나 땅바닥에 대고 그으면 분필처럼 하얗게 자국을 남기는 활석을 그때 우리는 곱돌이라 불렀다. 어디서 구했는지 그 애는 늘 곱돌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흙벽이며 땅바닥에 낙서를 해 댔다. 분필도 크레용도 귀하던 시절, 나는 그것이 갖고 싶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하얗고 맨송맨송한 차돌 하나를 꺼내 든 경록이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걸 땅에 묻어 두고 오줌을 백 번 누면 곱돌이 된다.”
“정말?”
차돌같이 야문 여섯 살짜리 경록이와 어떤 거래로 그것을 얻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건 나는 그것을 받아 왔다. 그리고는, 누설해서는 안 될 중대한 비밀을 간직한 비장함으로 장독대 뒤 담장 아래에 곱돌 씨앗을 심었다.
잘 닦인 항아리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던 우리 집 장독대는 어머니의 자랑거리였다. 키가 크고 우람한 장 항아리는 맨 뒷줄에, 그다음이 된장과 소금 항아리, 이어 고추장 단지, 새우젓을 담는 길쭉한 독과 온갖 옹배기와 자배기, 켜켜이 엎어 둔 오모가리들까지, 키를 맞추어 늘어서 있는 모양이 대형 합창단을 방불케 하였다. 어머니는 기분이 좀 심란하다 싶을 때면 커다란 바가지로 물을 좍좍 끼얹으며 장독 청소부터 하셨다. 식성 까다로운 아버지 흉이며 시집살이 신세 한탄까지, 시원스런 물세례로 씻어 내렸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말갛게 닦인 항아리들을 바라보며 찬물 한 사발을 들이켜는 시간이 바쁜 어머니에게 유일한 망중한이었을지 모른다.
담장과 장독대 사이에는 어른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작은 틈새가 나 있었는데, 그곳은 일찍부터 내 비밀 장소였다. 차돌을 묻어 두기 전에도 나는 가끔 작은 볼일을 볼 때면 뒷마당 으슥한 곳에 있는 ‘변소’까지 가지 않고 그쯤에서 일을 해결하곤 하였다. 장독 청소를 할 때에나 담장 밖을 내다볼 때 어머니가 가끔 서성거릴 뿐, 늘 그늘진 그곳은 뾰루지 하나 없는 여인의 피부처럼 곱고 윤습한 흙으로 덮여 있었다. 담장 밑으로는 장독나물이나 꽃다지, 벼룩이자리 같은 풀들이 새파랗게 돋아나곤 하였는데, 내가 해우(解憂)를 하는 대왕항아리 뒤에도 애기똥풀 두어 포기가 더펄더펄 자라났다.
경록이가 길섶에서 괭이밥이며 토끼풀 같은 것을 뜯어 오면 벽돌 가루를 빨갛게 빻아 김치를 버무려내는 건 내 일이었다. 내가 양식 타령을 하면 경록이는 금세 모래를 파 왔고 내가 그릇 타령을 하면 경록이는 또 어디에선가 ‘福’자가 선명한 사금파리 조각을 주워 들고 달려오곤 하였다. 꽃 그림이 잔잔한 얇은 접시 조각을 찾아낸 날에는 밥상 차리기가 더 신이 났다. 그런 날의 경록이는 자전거 짐칸에 새 항아리를 싣고 오던 아버지처럼 기분이 썩 좋아 보였다.
감나무 밑 바윗돌 위에 한 상 떡 벌어지게 챙겨 놓고 앉아 맛나게 먹는 시늉을 하다가도 경록이는 가끔 우물가 토란 밭 쪽으로 달음박질을 치곤 했다. 길가에 서서 토란 이파리 위에 시원하게 오줌 줄기를 내지르는 경록이를 나는 언제나 멀찌가니 서서 바라보곤 했다. 우산처럼 널따란 이파리 위에 알른알른한 수정 구슬을 둥글리다가 휘청 쏟아내 버리는 경록이가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차돌을 묻어 둔 날부터 나는 더 자주 장독 뒤를 들락거렸다. 밖에서 놀다가도 일이 급해지면 서둘러 대문 안으로 달려들곤 하였다. 누군가 마루에 나와 앉아 있으면 장독대 옆 꽃밭에서 슬그머니 딴전을 부리는 체하거나, 샛노란 애기똥풀꽃 모가지를 한두 줄기 분질러 나오면 그뿐이었다. 졸지에 목이 부러진 꽃들은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듯, 노랗고 진한 눈물 같은 즙액을 종아리며 치맛자락에 뚝뚝 떨어뜨리곤 하였다.
백 번을 다 채울 때까지는 절대로 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록이가 여러 번 주의를 주었다. 그러겠다고 대답이야 했지만 내 인내심은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씨감자를 묻어 놓고 싹 트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아낙처럼,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겨우 일곱 살이던 내가 숫자를 제대로 셀 줄이나 알았을까. 더러 빼먹기는 하였겠지만 쉰 몇 번까지는 세었던 것도 같다.
장독대 옆 화단 가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서 나는 조심스레 흙을 헤집었다. 조금만 아주 잠깐만, 얼른 보고 얼른 덮을 생각이었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괜히 가슴이 뛰었다.
빠끔 얼굴을 내민 차돌은 처음보다 조금 누레진 것 같았다. 냉큼 꺼내어 흙을 털고 마른 바닥에 금도 그어 보고 싶었지만 다시 덮어 두고 말았다. 그러고도 금세 후회했다. 이제 곱돌이 되지 않는다 해서 경록이를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깨어진 금기는 금기가 아닌 법. 며칠 후 나는 또 나뭇가지 끝으로 축축해진 흙을 후벼 보고 있었다. 쌀뜨물을 부으면 더 빨리 곱돌이 된다는 말을 듣고 엄마 몰래 쌀뜨물을 퍼다 부은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이제 정말 곱돌이 되었을까. 애기똥풀 노란 꽃이 저 혼자 흔들거렸다.
그날, 나무 꼬챙이 끝에 걸려 나온 것은 하얗고 야무진 곱돌이 아니었다. 허옇고 퉁퉁한 지렁이 한 마리가 흙 속에서 꿈틀, 몸을 틀다가, 놀라 내팽개친 막대기와 함께 허공에서 한차례 곤두박질을 쳤다. 헉,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마당 귀 꽃밭 쪽으로 달려 나온 나는 그날 밤 꿈결에 이불을 적셨다. 축축한 그놈의 살갗이 내 살에 닿은 듯, 꿈속에서도 진저리를 쳤던 것이다.
망할 놈의 지렁이. 그때 그놈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곱돌과 경록이와 애기똥풀의 기억은 조금 더 이어질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나는 그렇게 커다랗고 징그러운 지렁이 놈은 만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놈은 성소를 오염시킨 무엄함을 벌주려고 흉물스러운 지룡(地龍)으로 현신하여 나타난 우리 집 장독 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꽃밭 가장이 맨드라미 옆에 엉거주춤 얼어붙어 서 있던 그날,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밝았다. 맨드라미꽃은 크고도 붉었다. 바람도 잠든 늦여름 오후, 내 유년의 해우소는 그날 그렇게 빗장을 닫아걸었다. 내 빛나는 일곱 살도 막을 내렸다.
달빛과 나비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에서는 달빛 냄새가 난다. 청아한 그의 가야금 연주는 댓잎에 듣는 빗방울이었다가, 빠르게 일어나는 구름이었다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였다가, 이윽고는 고요한 달빛이 되어 천지간에 흐뭇이 내려앉는다. 잦아지는가 싶다가 사뿐 살아나는 산조의 선율은 천상의 궁궐에 사는 요정이 서둘러 은하수를 건너가는 작고 날랜 걸음새도 같고, 그 요정의 옷자락에 묻어 있는 열사흘 달빛 같기도 하다.
흰 명주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고 무대 위에 앉아 있던 선생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조용한 카리스마라고 할까. 옷고름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개키고 정좌를 하고 앉은 모습에서 긴 세월 한길을 걸어온 사람의 기품이 넉넉하게 배어나는 듯하였다. 그가 악기를 받드는 손길은 첫날밤 새신랑이 신부의 저고리 앞섶을 풀 듯, 조심스럽고도 경건하였다. 어떤 무대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대가다운 풍모라 할까.
선생의 가야금 소리에서 나는 노을 속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만나고, 결 고운 비단치마가 풀숲을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이른 봄, 꽃들이 벙글어 터지는 소리와 늦가을 들녘의 바람 소리를 만난다.
명기(名器)도 명기(名技)를 만나야 빛을 발하는 법. 좋은 연주가를 만나지 못한 악기란 나무토막에 불과할 뿐이다. 벙어리 나무통에 혼을 불어넣어 감추어진 소리를 길어 올리는 일이 훌륭한 연주가의 몫인 것이다. 그가 아껴 연주하는 가야금은 자고동(自枯桐)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자고동이란 바위틈 같은 데서 자라다 스스로 말라 죽은 오동나무를 일컫는데, 악기 중에서도 가야금은 자고동으로 만든 것을 최상으로 친다. 밭둑에서 쉽게 자란 오동은 소리가 잘 나지 않고 힘들게 자란 오동일수록 좋은 소리가 난다 하니, 맑고 야무진 소리를 내는 대금이 쌍골죽과 같은, 돌연변이성 병죽(病竹)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시련과 좌절을 겪은 사람만이 인생의 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듯이, 한이 한없이 안으로 잦아들어 죽을 고비에 이르러야만 심금을 뒤흔드는 절창의 가락을 쏟아 놓게 되는 것일까.
선생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이 없고 유려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잠든 가야금을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뜯고 퉁기고 누르고 흔드는 손놀림이 성애를 알지 못하는 신부의 관능을 지극한 사랑으로 일깨워 가는 남정네의 손길만큼이나 정성스러워 보였다.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를 거쳐 휘모리로 풀어내는 산조 가락의 흥취는 켜켜이 쌓인 여인의 정한이 주춤주춤 불씨를 머금다 마침내는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아 휘황한 불꽃으로 산화해 버리는, 한바탕 육체의 향연과도 같았다. 즐거우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은[樂而不流 哀而不悲], 선계의 가락이 달빛처럼 충만하다. 나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첫새벽 호숫가. 이제 막 번데기에서 깨어난 나비가 달빛에 젖은 날개를 턴다. 조금씩, 조금씩 푸드덕거리며 서툰 날갯짓을 시작한다. 나비가 푸르르, 달빛 사이로 날아오른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노랑 바탕에 까만 무늬가 찍힌 호랑나비, 보랏빛 작은 날개를 가진 부전나비, 모시나비, 제비나비, 배추흰나비, 꼬리명주나비… 하늘은 오색 날개로 눈부시고, 날갯짓 소리로 세상이 현란하다. 연주가와 악기가 혼연일체로 어우러지는 신비스런 법열의 춤사위. 도도한 악흥이 빛의 꽃가루가 되어 칠흑의 세상 위에 쏟아져 내린다.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나비들이 하나 둘 내려앉는다. 술렁이는 축제도 막을 내리고 호수에는 달빛만 교교하다. 제의를 치르듯 숙연하게 줄을 뜯던 선생의 손길도 멈추어 있다. 지악무성(至樂無聲)- 소리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고즈넉한 정적이 깃든다. 밝은 달무리를 삼킨 것처럼 비로소 가슴이 환하게 트여 온다.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
사람의 신체에서 눈과 손처럼 돈독한 사이도 없다. 그림을 그리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물건을 고르고 과일을 깎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눈과 손은 함께 일한다. 눈이 손을 이끄는 건지 손이 눈을 거드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일 궂은일을 함께 도모하며 먼 듯 가까운 듯 일생을 살아낸다.
눈을 최고사령부의 파수병이라 치면 손은 변방의 행동대원이다. 위치로 보나 생김으로 보나 가까운 촌수는 아닐 성싶은데 무슨 연고로 의기투합하여 상부상조를 하게 된 것일까. 둘 다 말단이니 상명하복이 통할 리 없고,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으로 소관 부처마저 다른데 말이다. 어쨌거나 무관한 듯 유관한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역학구조에는 미심쩍으면서도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사령부의 끗발을 등에 업은 안(眼) 하사가 우직한 손[手] 상병을 간교하게 부리는 듯한, 모종의 혐의를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눈은 상좌에 틀어박혀 앉아 좋네 나쁘네 시시비비는 잘 가린다. 물건을 보고 먼저 혹하는 것도 눈이요, 맘에 안 든다고 먼저 외면하는 것도 눈이다. 간사하다 싶을 만치 변덕도 심하여 어제 좋아하던 것을 오늘 시들해 하는가 하면, 멋스럽다 치켜세우던 것을 촌스럽다 몰아세우기도 한다.
눈이 꾀 많은 막내동서라면 손은 무던한 큰형님 격이다. 욕심 많고 겁 많은 눈과는 달리 손은 묵묵하게 일거리를 해치운다. 손이 양파를 까고 고추를 다듬는 동안 눈은 맵다고 엄살이나 부리고, 손이 산더미 같은 일감에 지쳐 버리기도 전에 먼저 힘이 풀려 버린 눈은 저 혼자 피곤한 듯 꺼풀을 내려쓰고 염치없이 졸고 앉아 있기 일쑤다. 운 나쁜 손이 고약한 주인을 만나면 눈의 허물까지 뒤집어쓰고 고생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하는데, 눈이 점찍어 놓은 것을 손이 잘못 거들어 쇠고랑을 차는 경우가 그것이다. 먼저 욕심을 부린 것은 눈인데 죗값을 치르는 것은 손인 셈이다. 저 때문에 쇠고랑을 찬 손을 번연히 내려다보면서도 눈은 오불관언, 모르쇠로 일관한다.
일은 함께 해도 칭찬이나 핀잔은 함께 듣지 않는 것이 눈과 손이다. 일을 잘하면 손끝이 야물다 하고 물건을 잘 고르면 안목이 높다고 한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눈과 손의 화합은 특히 중요한데, 눈은 높은데 손이 안 따라 주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없고, 손재주는 괜찮은데 보는 눈이 낮으면 유치한 장인(匠人)으로 주저앉고 만다. 안목은 출중한데 재주가 약함을 빗대어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을 하는데, 손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일 노릇이다. 높은 자리에 좌정하여 세상만사를 기웃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은 눈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손이 아닌가 말이다. 바로잡건대 인간의 품위를 지켜 주는 일등 공신은 분별없고 허영심 많은 눈이 아니라 비루하고 겸손한 손이라야 마땅하다. 손이 없다면 은 쟁반에 스테이크를 담아 놓고도 돼지나 소처럼 입을 대고 핥아야 할 것 아닌가. 타고난 제 분수를 탓하지 않고 불평 없이 살아내는 손들이 있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련할 만치 너그러운 손도 그렇다고 평생 눈 치다꺼리나 하는 것은 아니다. 손도 때로는 독립 만세를 부른다. 막다른 상황에서 소통의 방편이 되기도 하고, 저희끼리 맞잡고 따스한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것도 손 아니던가. 안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감각을 분별하고 음미하는 기쁨은 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악보를 보지 않고 건반을 능숙하게 짚어내는 기억력처럼,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어디 두고 왔을 때 제일 먼저 허전해 하는 것도 손이다. 손이 어디에 떨구는지 눈은 낱낱이 지켜보았으련만, 제 일이 아니라는 듯 일러 주지 아니한다.
불리하다 싶으면 질끈 감아 버리고 시치미를 떼는 눈과는 달리 손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반갑고 기쁜 일엔 활짝 펼쳐 환희작약 하지만, 분노가 치밀면 불끈 거머쥐어 매운맛을 단단히 보여 주기도 하는 손. 승산 없는 전투에서는 번쩍 치켜 올려 패배를 인정하고, 잘못이라 판단되면 먼저 비벼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용기도 빼놓을 수 없는 손의 덕목이다. 죄짓고 붙들려 온 주인의 신분까지 백일하에 드러내 놓고 마는 고지식한 결벽성마저 타고난 숙명임을 어찌하겠는가.
부자나 가난한 자가 똑같이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일은 고마운 일이다. 돈이 없는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망망대해나 만산홍엽 앞에서 공평하게 안복(眼福)을 누린다. 주머니가 비어 있는 사람이 상점의 현란한 진열대 앞에 서서 잠시 동안 꿈에 젖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똑같이 두개의 손을 갖고 태어나도 부자와 가난뱅이, 남자와 여자, 정치가와 노동자의 손이 누리는 분복은 다르다. 악수하고 도장이나 찍는 손이 있는가 하면, 곡식을 거두고 연장을 다루는 손도 있다. 재주 없는 주인을 따라 설거지통이나 들락거리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대느라 야밤에도 쉬지 못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사대육신 중에 주인의 팔자를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 주는 것이 그 사람의 손인 성싶은 것이다.
손을 잡는다는 것.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다. 모든 일은 거기까지가 어렵다. 손만 잡으면 만사가 순탄하다. 평생 셀 수 없는 사람과 눈빛을 스치며 살아가지만 누구하고나 손을 맞잡을 수는 없다. 두 손을 맞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에 기쁨과 위안이 되는 순간도 흔하지 않다. 흔들리는 눈빛이 아니라 굳센 손아귀를 마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한세상 함께 사는 진짜 동지일 것이다.
알밤
‘밤을 깐다’라고 썼다가 ‘밤 껍질을 벗긴다’라고 고친다. ‘깐다’라는 말이 주는 동물적 어감이 낯설어서다. 이 쓸데없는 까탈. 요즘의 나는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는, 소소한 것들에 민감해 있다. 생체 리듬이 저조해졌는지 행동은 게을러지고 생각은 과민해졌다. 내밀한 침묵으로 골똘하게 돌아앉은 바가지 안의 저 밤톨들처럼.
복숭아나 사과 같은 과일은 향기와 빛깔로 사람을 유혹하고 상큼한 속살을 베어 먹히면서까지 씨를 퍼뜨리는 전략을 쓴다. 알밤은 아니다. 열매이면서 씨앗인 그들은 먹혔다 하면 끝장이어서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내어 줄 여지가 없다. 그 절박함이 자기보호 의지 같은, 견고한 고독을 강요하는가. 야물고 또랑또랑한 이 결실들은 헤프게 농익어 향기를 발산하지도, 풍만한 살빛으로 식탐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밤뿐 아니라 호두나 잣, 은행 같은 견과들이 다 그렇다. 바늘 같은 가시로 제 몸을 에워싸 애써 고립을 자초하거나 고약한 냄새를 풍겨 스스로 기피 대상이 되도록 한다. 소심하고 비사교적인 데다 나름의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내향적인 친구 같다고 할까. 매끈한 가죽옷 차림으로 제각기 데굴거리는 밤톨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귀에 익은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나는 소중하니까요.”
아무렴. 하늘 아래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 있을라고. 사람도 밤톨도 하루살이도 목숨은 제각각 하나뿐인걸.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인간이건, 인간에게 먹히는 밤톨이건, 밤톨을 갉아 먹는 애벌레건 간에, 알고 보면 등가(等價)의 목숨붙이다. 조금 더 덩치가 크고 더 오래 햇살 아래 머물다 간다 하여, 사막과 바다와 무지개를 알고 더 멀리 건너다니며 살아 본다 하여, 목숨 줄이 두 개인 건 아니라는 말이다. 물려받은 불씨를 소중히 지켜 대대로 전해야 하는 가문의 아녀자처럼, 생명의 기를 꺼뜨리지 않고 후대에 물려야 하는 엄숙한 책무 앞에서, 저나 나나 공평한 유전자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도끼 앞이라고 나무마다 다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듯, 칼날 앞이라고 열매들이 쉬 맨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무쇠칼 앞에서는 배통만한 수박보다 손톱만한 쥐밤의 의지가 더 단호해 보인다. 쇠망치로 얻어맞아 으스러지고 깨져도 함부로 속옷을 벗지 않는 호두나, 뜨거운 불판 위에서 살갗이 타 들어가야 푸르게 멍든 몸을 마지못해 보시하는 은행알만큼이나 알밤 또한 당차고 결연한 데가 있다. 만만히 얕잡아 보고 달려들었다가는 손가락을 다치거나 앞니가 부러져 나갈지도 모른다.
밤톨 한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깎아 놓은 알밤 같다’는 말이 있지만 깎아 놓지 않아도 알밤은 예쁘다. 밤 까는 도구 같은 것을 달리 예비해 놓았을 리 없는 엉터리 살림꾼의 주방 서랍에서 최고참 격인 맥가이버 주머니칼을 조심스럽게 뽑아 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지언정 쉽게 굴복하지 않는 것들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거든 머리통부터 한 대 쥐어박아야 한다. 왼손 장지를 받침대 삼아 엄지와 검지로 단단하게 결박한 뒤 정수리쯤 되는 곳에 칼끝을 슬쩍 들이대었다가 날렵하게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바슬바슬한 두피에 칼끝이 꽂힐 때 손마디에 걸리는 미미한 쾌감. 그러고 보니 나는 사과 껍질을 돌려 벗길 때에도 일단 탁! 하고 어깨 먼저 내려치는 습성이 있다. 공격의 강도를 미리 암시하여 기부터 꺾어 놓으려는 계산은 아니어도 가학적인 데가 있기는 하다. 수렵 시대 집단 무의식의 원형적 발현인가. 아무튼 나는 순정하게 앵돌아진 저것들의 옷을 단번에 벗기지는 않을 작정이다. 칼끝에서 전해 오는 긴장감을 즐기며 겉옷부터 찬찬히 끌어내릴 터이다.
말쑥한 방수복 아래 드러나는 거칠거칠한 비늘옷. 이름하여 보늬다. 귀에는 설어도 아름다운 이 말의 어원이 본의(本衣)에서 왔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부드럽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어느 사이 속살에 눌어붙어 일체가 되어 버린 자존의 속싸개, 그 속옷이이야말로 본의 즉 ‘진짜 옷’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옷인지 살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내 안에도 비슷한 꺼풀이 있다. 한 껍질만 벗고 다가앉으면 살가운 온기를 나눌 수 있으련만 마지막 한 켜를 벗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옹송그리며 산다.
내복 바람의 밤톨들이 양푼 안에 오소롯이 모여 앉아 있다. 다 같은 속내의 차림이라도 그다지 다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긴, 가시궁전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던 한 울안 형제들끼리조차 그리 돈독해 보이지는 않았다. 세속의 연(緣)에 정붙이지 말자고,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라고, 다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둥지 밖 하늘을 꿈꾸는 새끼 제비들처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튕겨져 나갈 날만 은밀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인정머리 없는 제조상궁이 어린 나인의 옷을 벗기듯, 칼자루를 바투 쥔 나는 속곳 차림의 밤톨들을 앞뒤 좌우로 돌려세우며 마지막 자존심마저 깨끗하게 벗겨낸다. 보늬를 벗고 각을 세운 알밤들의 상앗빛 살결이 단아하다. 조금 있으면 뜨거운 열탕지옥으로 가차 없이 내던져야 할 알몸뚱이들을 주먹 가득 집어 올려 본다. 물푸레나무 이파리에 어룽거리던 햇살과, 어둠을 헹가래 치던 개울물 소리와, 때죽나무 꽃그늘에 쉬어 가던 어린 박새의 노래는 다 어디에 스며 있는가.
희고 단단한 쇄신사리들이 맨몸으로 뒹굴며 털어놓는 마지막 말을 나는 이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줄의 절명시처럼 스쳐 버린 별똥별과, 은죽(銀竹)으로 내려 꽂히던 여름 한낮의 소낙비와, 갓 깨어난 거위벌레가 졸참나무 이파리를 사각사각 재단하는 숲 속의 소리들이 다 어디에 숨어들었는지를.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여린 속살을 뚫고 들어가 알알이 응결되고 흩어져 도는, 흘러 버린 시간의 비밀스런 거처를. 시간과 정면으로 마주 선 목숨만이 켜켜이 그러안은 그리운 기억들로 향기로운 알집파일을 공글린다는 것을.
생밤 한 알을 오도독 깨문다. 고소하고 다달하다. 고독한 실존은 온데간데없고 소리조차 맛있다.
│최민자 작품론│
현미경과 프리즘의 수사학
안 성 수
(문학평론가, 제주대 교수)
1. 우주의 협곡에 들다
우주에는 천억 개 이상의 별들로 구성된 천억 개 이상의 은하계가 존재한다. 세상의 작가들은 그 우주의 협곡에 자신의 별을 띄우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기의 별들이 역사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우주의 사업에 동참하기를 갈망한다.
최민자는 한국 현대 수필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별 중의 하나이다. 그의 작품들은 98년 등단 이후 독특하고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흰 꽃 향기』(2002)와 『꼬리를 꿈꾸다』(2006)는 그가 쏘아 올린 행성들의 이름이다. 그 행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100여 기의 위성들은 이 시대의 독자들과 분주히 교신하면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다.
그는 정치한 현미경과 프리즘의 수사학을 앞세워 이 시대의 독자층을 빠른 속도로 감염시키고 있는 작가이다. 이 글은 문제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그의 수사(修辭) 원리와 작법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를 통해서 그의 수필 세계를 조망하는 데 목표를 둔다. 이러한 비평적 진단은 그의 전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편의상 다섯 편에 국한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들은 작가가 엄선한 것이기에 그의 수필 세계를 조명하는 거울로서의 몫을 감당하리라 믿는다.
2. 다섯 개의 위성
작가가 건네준 텍스트는 「서해 예찬」, 「내 유년의 그윽한 해우소」, 「달빛과 나비」,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 「알밤」 다섯 편이다. 이 작품들은 작가의 문학적 특성들을 골고루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석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서해 예찬」은 서해의 쓸쓸한 일몰 풍경을 도입 액자로 설정하고, 동해와 서해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내화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것은 인상주의 기풍의 강렬한 색채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서정수필로서, 인생의 청춘과 노년의 두 시기와 동해와 서해의 대립적 이미지를 비유적 관점에서 성찰한다.
동해가 젊은 날을 상징한다면, 서해는 인생의 하오에 어울린다. 전자가 봄의 역동적인 시공간이라면, 후자는 가을의 겸허한 관용과 안식의 시공간이다. 작가는 화성악 같은 대위법을 동원하여 동해에서 떠서 서해로 지는 태양의 움직임과 계절의 흐름, 그리고 인생의 무상함을 동시적으로 응시한다. 따라서 서해 예찬의 어조는 감상적이고 허무주의적인데, 이는 해가 떠서 지듯이 인생 또한 소멸의 아픔과 비애를 거역할 수 없는 탓이리라. 그 아픔을 포근하게 받아 주는 곳이 바로 어머니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서해이다.
「내 유년의 그윽한 해우소」는 동화수필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어린 시절 엘렉트라 콤플렉스기를 살며 통과의례의 삶의 구조를 통해 현실을 배우는 이야기이다. 이니시에이션 스토리답게 만남―시련―자각의 구조를 보이는데,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변화의 문턱을 넘으면서 겪게 되는 성장통을 주제로 한 이야기이다.
한 살 아래인 사내아이가 차돌로 곱돌을 만드는 비방을 알려 주었으나, 어린 주 인물이 호기심과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금기를 파괴하는 바람에 꿈을 잃게 된다. 이러한 신화적 모티프는 좁게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어떻게 총체성을 상실하게 되는가를 보여 주고, 넓게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좌절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성을 상징한다. 특히, 어린이는 현실과 환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해 오다가, 어떤 결정적 사건을 계기로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삶의 법칙으로 배우게 됨을 보여 준다.
「달빛과 나비」는 예술가 수필의 한 전형이다. 예술가 수필은 구조적으로 작품 창조의 과정과 함께 작가의 예술관과 미의식 등을 주제로 담아낸다. 이 작품 또한 예술적 진리의 정체와 그 체험 과정, 그리고 카타르시스의 향수 과정 등을 환상적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창조한 수작이다. 이문열이 「금시조」의 결말부에서 예술적 진리 체험의 상황을 허구와 상상의 힘을 빌려 보여 주었다면, 이 작가는 실제 체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구별된다. 이러한 고백은 예술적 진리의 체험 방식과 작가의 예술관에 대한 천명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빼어난 비유의 문장들을 풍성하게 담고 있어서 수사학의 텍스트로도 삼을 만하다. 특히, 카타르시스의 체험 상황을 지악무성의 정적 속에서 “밝은 달무리를 삼킨 것처럼 비로소 가슴이 환하게 트여 온다.” 식으로 묘사한 장면에서는 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개성 있는 수사력을 실감케 한다.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은 해학적 풍자수필이나 몸 담론수필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인간의 두 기관인 눈과 손의 속성과 기능을 대비의 관점에서 유머러스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예컨대, 작가에게 눈은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반면, 손은 헌신적이고 솔직하며 용기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마도 작가는 눈과 손의 형이하학적 관계를 보조관념으로 하여, 공정하지 못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계의 실상을 고발하기 위한 상징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눈과 손의 관계처럼 부부나 형제자매 등의 뗄 수 없는 인간관계의 허실을 해학적으로 꼬집고 있는 것이리라. 작가는 이러한 왜곡된 인간관계의 진실을 메아리처럼 울려 주기 위해 이야기의 겉층에 눈과 손의 형이하학적 위상에 대해서만 진술할 뿐, 속층은 울림통의 형태로 비워 두는 기법을 쓴다.
「알밤」은 말맛의 진수를 보여 준 작가의 자화상이다. 이 작품은 표층에는 밤톨의 이야기를 배열하고, 속층에는 작가의 이야기를 숨겨 놓는 구조를 보인다. 전자에 비해 후자에 대한 서술 분량은 미미하지만, 오히려 자화상의 이미지를 보일 듯 말 듯 감춘 것이 더 큰 매력을 발휘한다. 특히, 두 이야기를 병렬 구조로 교착(交錯)시켜 나가다가 결말에 이르러, 알밤의 이야기로 슬쩍 돌려놓는 순발력은 재미와 격조를 높이는 데 일조한다.
작품 구석구석에 깔려 있는 예리한 관찰력과 감성과 지성으로 교직한 지적인 수사의 힘, 그리고 소재의 특성에 대한 정교한 분석력 등도 이 작품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밤톨에 현미경을 들이댄 듯한 외양 묘사와 견고한 두 겹의 껍질을 벗기면서, 그 속성에 대한 프리즘적 분석력을 보여 준 지적 묘사문의 말맛은 일품이다. ‘까탈스러움, 내밀한 침묵, 절박한 자기보호 의지, 소심하고 비사교적인,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당차고 결연한, 고집불통, 자존의 속싸개’등으로 표현된 밤톨의 특성들은 작가의 개성과 인간적 특성을 은유한다. 결말에서 보인 자연합일 사상과 실존적 시간관 및 인간관은 이 작품이 관념과 현상의 양면성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읽히게 한다. “생밤 한 알을 오도독 깨문다. 고소하고 다달하다. 고독한 실존은 온데간데없고 소리조차 맛있다.”고 묘파한 마지막 문도 리얼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3. 작품 창조의 비밀
최민자의 수필 세계와 수필 미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작가의 미의식과 문학 사상이 용의주도하게 숨겨져 있는 데다 아직까지 완결된 수필 미학을 보여 주지 않는데도 원인이 있다. 이 난해한 작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 창조의 비밀을 치밀하게 탐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여기서 검토하게 될 의미 있는 기법으로는 이중 구조의 은폐술과 카리스마의 수사학, 현미경과 프리즘의 언어, 허무에 브레이크 걸기, 다양성과 실험성 등이다.
1) 이중구조의 은폐술
작가가 소재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비유적으로 담아서 보여 줄 객관적 상관물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 때 겉 이야기로 제공되는 소재는 단지 그 자체의 현상적 이미지와 속성만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그 겉 이야기 속에 속 이야기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거나, 상징적인 이정표를 세워 둔다.
최민자는 이러한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데 두 가지 전략을 쓴다. 하나는 현상만 보여 주고 본질은 숨겨 버리는 은폐 구조의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보여 주는 총체 구조의 방식이다. 전자는 「서해 예찬」, 「내 유년의 그윽한 해우소」, 「눈과 손의 형이하학적 위상에 관한 고찰」 등이 해당된다. 이 방식은 소재에 대한 현상적 느낌과 인상을 분석적으로 꼼꼼하게 묘사하여 풍성한 이미지를 제공하고, 독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작가의 진의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이 경우에, 내포작가는 보조관념으로 도입된 현상의 배후에 숨어서 화자로 하여금, 그것을 작동시키는 근원 세계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은폐함으로써, 독자들이 원관념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후자는 「달빛과 나비」, 「알밤」이 예가 된다. 이것은 소재에 대한 현상적 이미지와 작가의 체험적 인상을 치밀하게 묘사하여 보여 주는 동시에, 인과적으로 생성된 본질 세계를 총체적으로 암시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본질 암시는 작가가 관조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는지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문장을 통해서 인식하게 한다. 이런 방식은 루카치의 말처럼 현상과 본질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기법으로서, 독자들이 대상 세계의 양면성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독자가 은폐 구조를 통해서 본질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숨기고 있는 견고한 현상계를 뚫고 들어가서 언급되지 않은 원관념을 파악하는 예리한 심미안과 감수성이 요청된다. 반면에 총체 구조에서는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드러내 놓고 서술함으로써, 통합적 구조가 내는 역동적인 울림과 의미 작용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2) 카리스마의 수사학
최민자의 언어는 정교하고 신선하며 의미의 정곡을 찔러 그러쥐는 힘이 강하다. 이러한 어법의 힘은 어휘와 문장, 수사법 등에서 고루 발견되는데, 타인들이 흉내 내기조차 힘든 독자성과 카리스마를 함유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압도한다. 「알밤」에 나오는 첫 단락은 그의 다채로운 수사적 기교의 활용법과 어법의 수준을 축소판처럼 내보인다.
‘밤을 깐다’라고 썼다가 ‘밤 껍질을 벗긴다’라고 고친다. ‘깐다’라는 말이 주는 동물적 어감이 낯설어서다. 이 쓸데없는 까탈. 요즘의 나는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는, 소소한 것들에 민감해 있다. 생체 리듬이 저조해졌는지 행동은 게을러지고 생각은 과민해졌다. 내밀한 침묵으로 골똘하게 돌아앉은 바가지 안의 저 밤톨들처럼.
첫째, ‘깐다’라는 단어의 동물스러움이 싫어서 ‘벗긴다’로 고쳐 쓰는 장면은 평소 미세한 어감의 차이도 예민하게 인식하는 작가의 어휘 선택의 습성과 기질을 보여 준다. 둘째, 작가의 그런 글쓰기 취향을 ‘쓸데없는 까탈’로 고백한 문장에서는 그가 능숙한 심리언어의 구사자임을 감지하게 한다. 셋째, “요즘 소소한 것들에 민감해져 있다”는 표현에서는 간결한 문장에 자신의 행동 양식을 내포시켜 묶어내는 함축의 테크닉을 실감케 한다. 넷째, 요즘의 자신의 행동 양태를 ‘바가지 안의 밤톨’에 직유 한 부분에서는 그의 세련된 비유 능력을 예견케 한다. 다섯째, 이 짧은 단락에서 발견되는 시각, 청각, 촉각, 운동감각 등은 그가 감각적 이미지를 폭넓게 활용하는 작가임을 내보인다. 여섯째, 과민해진 어휘 선택 방식에 대한 분석적 설명에서는 그가 논리적이고 지적인 문장의 소유자임을 짐작하게 한다. 일곱째, “내밀한 침묵으로 골똘하게 돌아앉은 바가지 안의 밤톨들처럼”에서는 잘 어울리는 맞춤복 같은 심미적 수사를 밀도 있게 활용하는 작가임을 보여 준다.
최민자의 문장과 문체는 이처럼 유창하고 세련된 지적 어휘로 대상의 의미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힘이 강하다. 그러한 문장의 힘은 독자의 상상력을 단숨에 빨아들여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장악력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지성과 감성의 문채(figure)를 입혀 설명하고 묘사하는 순발력과 꼼꼼함도 남다르다. 그의 문장들은 대체로 정치한 의미 작용과 서정적 격조를 함유하고 있어서 그의 문체에 강한 개성을 실어 준다.
3) 현미경과 프리즘의 언어
최민자의 작품 속에는 늘 최상의 언어 찾기라는 과제와 싸운 흔적이 널려 있다. 그것은 핀셋으로 뽑아낸 듯한 적확한 어휘력과 개성 있는 수사력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장 특성을 통해서 확인된다. 첫째는 고밀도의 의미 수렴 전략이다. 이 작가는 적격의 어휘나 절묘한 비유어를 끌어 오는 외에도, 밀도 높은 문장을 에워싸듯 열거하여 최상의 의미를 모은다. 둘째는 소재의 속성을 그려내는 비유어를 중층적으로 배열하여 대상에 관한 묘사의 객관적 정밀성과 밀도를 높인다. 이러한 문장 특성은 인식 불가능한 관념 세계보다는 오관으로 확인 가능한 현실 세계로부터 존재의 진실을 묘파하려는 작가의 신념과도 연결된 듯하다. 셋째는 리얼리즘의 분석적인 묘사 방법을 동원하여 현상 세계를 논리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전략을 쓴다. 이러한 논리는 객관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만이 사실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진실할 수 있다는 작가의 문장 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최민자는 자신의 문장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현상의 묘사에 고성능의 현미경과 프리즘을 들이댄다. 현미경은 작은 대상물을 확대하여 섬세하게 보여 주는 광학기기라면, 프리즘은 강렬한 햇빛을 분광시켜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이다. 이 작가는 치밀한 현상의 관찰과 묘사에 이 두 기구를 즐겨 활용하는 반면, 멀고 심원한 거리에 있는 피사체를 클로즈업시켜 주는 망원경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완벽한 인식과 표현이 불가능한 관념세계보다는, 실존적 주체가 사실적으로 인식한 현상 세계에 대한 묘사적 진술 속에서 개연적인 진실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듯하다.
4)허무에 브레이크 걸기
최민자의 수필 속엔 독특한 사상이 내재해 있다. 그러한 사상적 특성은 소재와 현상의 사실 묘사에 집착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인류의 학문과 예술이 현상과 본질의 총체성 찾기에 모아져 왔음을 알면서도, 그의 작품이 현상 세계인 소재의 현실 묘사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작가의 두 가지 철학적 인식 논리가 잠재해 있다. 첫째는 생명의 소멸성에서 오는 허무에의 저항이요, 둘째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불신이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소멸함으로써 작가에게 덧없음과 허망감을 안겨 주고 절망에 빠뜨린다. 작가의 수필 쓰기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숙명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실존적 저항의 몸부림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불연속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속절없이 스러져 가는 존재 현상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 안타까운 반항의 몸부림이 현상 묘사에 대한 특유의 집중력과 애착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최민자의 수필 쓰기는 사라져 가는 것들과 머물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실존적 브레이크 걸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곧 쓸쓸하게 소멸하는 존재들과 허둥대며 대화를 나누면서, 부조리한 허무 의식에 대항하는 이 작가의 삶의 방식과도 동일시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잔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은 덧없는 과거의 기억과 ‘지금 여기’의 현실이 더 중요한 삶의 가치이자 진실이 된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영원한 본질 세계에서 나와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 순환론적 운명을 따른다. 그러나 이 작가는 그런 보이지 않는 관념 세계인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을 신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라리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상징주의자들은 현상이란 곧 본질의 상징임을 내세우고 있으나, 그에게 현상은 소멸해 가는 존재의 안타까운 진실일 뿐이다. 그러니까, 최민자에게 현상은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 조건이자, 덧없이 스러져 가는 영혼과 소통하는 가장 현실적인 문이 된다.
5)다양성과 실험성
최민자의 작품은 늘 다양성을 지향한다. 이는 수필이 자유로운 형식 탐구의 문학이라는 관점에서도 바람직한 것이다. 수필의 고유한 장르적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다양한 유형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작가에게 부여된 사명이기도 하다. 어떤 문학 장르도 시대와 역사의 변화에 둔감하거나 대중들의 미적 욕구를 적절히 수용하지 못할 경우, 쇠퇴와 소멸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실험은 가치가 있다.
텍스트로 제시된 다섯 편의 수필은 각기 다양한 유형적 특성을 보인다. 「서해 예찬」은 대상에 대한 서정적 이미지와 인상을 인간의 대립적 정서구조와 연결시켜 형상화한 서정수필이다. 「내 유년의 그윽한 해우소」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성장 심리와 통과의례의 신화 구조를 통합하여, 입사시기 유소년의 세계 인식 논리를 형상화한 서사수필이다. 「달빛과 나비」는 한 가야금 장인의 신묘한 연주 광경에 대한 스케치를 통해서 예술작품의 미적 체험 과정과 예술적 진리의 체험 상황을 보여 준 탐미수필이다.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은 왜곡된 인간사회에 대한 관계 구조를 폭로한 해학적 풍자수필에 가깝다. 「알밤」은 작가의 성격과 기질, 삶의 자세 등을 비유의 구조로 형상화한 자화상 수필로 유형화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적 실험은 넓게는 수필의 미적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이른바, 수필의 정체성 찾기의 도정이기도 하고, 좁게는 작가의 다양한 수필 쓰기를 통한 언어의 한계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이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 시학과 미학이 조롱을 당하고, 장르의 정체성이 왜곡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형식 실험은 의미 있는 일이다.
4. 작가에게 길을 묻다
지금까지 최민자의 수필 세계와 작법에 관한 몇 가지 논리를 검토하였으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을 살펴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작가가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데다가, 불과 다섯 편의 작품으로 그의 수필 세계와 수필 철학의 전모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의 한국 수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점을 함께 궁리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새로운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첫째, 밀어(密語) 찾기. 이것은 부처가 제자들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방편을 사용하여 가르친 언어를 뜻한다. 작가 또한 독자를 감동과 진실의 경지로 이끌기 위한 언어와의 싸움은 필연적이다. 작가가 장인 정신을 불태우며 적절한 어휘를 탐구하고 다양한 수사법과 서술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설보다 짧으면서도 소설과는 다른 글맛을 보여 주고, 시보다 길면서도 난해하지 않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특한 수사법의 개발은 모든 수필가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이를테면, 수필의 참맛을 보여 주는 문장 사용법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는 말이다. 수필의 언어는 소설이나 산문시의 그것과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써야 수필의 미학과 시학을 차별성 있게 드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연구가 시급하다. 수필 언어의 독특한 미감과 품격을 살릴 수 있는 언어란 존재할 수 없는가. 이러한 언어의 존재 가능성은 소설식의 묘사가 수필에서는 맛을 내지 못하고, 시의 함축이나 내포 기법이 수필에서는 격조를 잃는 것으로도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그런 점에서도 수필 문장의 함축성과 간결성, 평이성, 품격성, 리듬성 등은 수필 언어의 고유성으로 불릴 만하다. 수필을 맛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언어, 그리고 대상의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시켜 줄 수 있는 문장, 숙명적인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강을 건네줄 수 있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서술 방식을 찾는 작업이야말로 이 시대의 작가들에게 주어진 언어 연금술의 목표이다.
둘째, 품격미. 품격이란 작품이 함유하고 있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격조를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격조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구축해 놓은 미적 세계와 작가가 보여 주는 인간과 자연, 우주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수준 등에 의해 종합적으로 평가된다. 격조와 품격미는 수필 장르에서만 요구하는 미덕이자 교훈성이나 단순한 윤리성과도 구별되는 고도의 미의식을 내포한다.
이러한 품격미는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 주는 몇 가지 조건에 의해 생성되고 평가된다. 즉,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인간관, 세계관, 자연관, 우주관 등에 대한 사유와 관조의 깊이, 예술적 감성과 미의식의 높이, 언어와 수사 활용 능력의 독창성과 세련성 등이 그 예가 된다. 품격미는 수필이 가장 자유롭고 인간적인 문학인 동시에, 우주적 차원의 높은 인격성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매우 고상한 미덕이다. 이런 점에서 영성의 탐구는 작가들의 품격미와 인격성을 우주적으로 끌어올리는 길이 될 것이다.
셋째, 미적 울림. 여기서 울림이란 어떤 문학작품이 독자들에게 미적 감동을 안겨 주는 힘으로서, 예술성의 강도나 효용성을 이르는 말이다. 울림은 감동을 낳고, 감동은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독자를 정화시키는 힘으로 전이된다. 수필에서 이러한 울림의 힘은 유기적 통일성이 창조하는 종합적인 미적 효과로 볼 수 있는데, 이야기의 절묘한 구조와 형상화 과정, 주제의 깊이와 참신성, 인물의 행동과 사건의 격조성, 독자의 감정을 사로잡는 적격의 수사 등에 의해서도 생성된다.
이러한 미적 울림은 자연스럽고, 유기적이며 다양성 속에서 창조될 때 가장 예술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문제는 현대의 수필가들이 이런 울림의 구조와 미적 장치에 대한 유기적인 고려 대신, 단지 소재의 특이성이나 문장의 수사 효과에만 기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독자의 영혼을 흔드는 미적 울림은 현상 세계를 작동시키는 심원한 본질 세계와의 소통에서 나온다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하다.
넷째, 상상력. 쉽게 말해서 수필가가 소설처럼 묘사와 설명에 많은 비중을 둘 경우, 독자의 상상력은 도리어 위축되거나 억압당하게 된다. 작가의 설명과 묘사는 독자가 작가의 창작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촉구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효율적이다. 작가의 대상에 대한 서술이 너무 많거나 현란할 경우, 오히려 이야기의 담백한 맛과 격조가 떨어지는 것은 수필 문장의 묘미이자 특성이다.
수필에서 설명과 묘사는 자칫 독자의 상상력을 누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묘약이다. 수필의 묘사와 설명은 가급적 평이성과 간결성, 품격성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함축적 탄력을 보여 줄 때 제 맛을 낸다. 독자의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수필의 언어와 문장은 작품의 말맛과 말멋도 풍성하게 함유한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연구 대상이다.
다섯째, 이야기의 미적 구조. 한국 현대 수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의 하나는 이야기의 구조에 대한 무관심이다. 단순한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들려주는가의 문제야말로 작가에게 주어진 최대의 난제이다. 어떤 이야기든 소재의 발생 순서대로 배열해서는 큰 감동을 줄 수가 없다. 그리고 소재에 작가의 의미심장한 미적 의도를 내포시켜 들려주려면, 특별한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가 필요한 법이다.
이를테면, 달팽이의 이야기에서는 달팽이의 형식을, 등나무 이야기에서는 등나무의 형식을 이야기의 틀로 모방하는 것은 거의 황금률에 속한다. 등나무의 존재론적 특성과 형태론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등나무의 형식과 구조라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최민자가 자신의 자화상을 ‘알밤’의 형식에서 취하여 구조화한 것은 탁견이다.
여섯째, 경계 미학. 경계란 작가의 인간과 자연, 우주, 예술, 언어 등에 대한 미적인 인식 수준을 일컫는 말로서 작가의 정신적 깊이를 보여 주는 개념이다. 작가가 보여 주는 체험의 깊이와 높이라는 것도 기실은 그가 보여 주는 경계 미학의 수준에서 나온다. 최민자가 잘 다루는 경계 범주는 언어 경계와 감각 경계이다. 전자는 지적인 비유와 분석적인 묘사의 힘이 만들어 내는 다채로운 언어의 맛과 정교한 의미 작용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작가가 즐겨 쓰는 수사법이 이미 어떤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후자는 대상의 의미를 포착하는 작가의 감수성이 예리하고 섬세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수준 높은 독자들은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작가의 삶의 깊이를 보여 주는 인생 경계와 우주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깊이를 안겨 주는 본질 경계에 대한 미적 체험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도 살펴 주었으면 좋겠다. 그 길은 곧 수필철학이 가벼움의 조롱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5. 협곡에서 나오다
이제 최민자가 쏘아 올린 위성들의 협곡에서 나오려고 한다. 그리고 한라산이나 태백산의 어디쯤엔가에 고성능의 허블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그들이 내뿜는 찬란한 별빛을 지켜보고 싶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 작가의 행성과 위성들은 제각기 자신의 궤도를 돌며 독자들과 뜨겁게 교신하고 있다.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지성과 감성의 촉수로 현상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현란한 심리 언어의 활용 능력 앞에 독자들은 숨을 멈추곤 한다. 특히, 치밀한 분석력이 돋보이는 현미경과 프리즘의 어법은 작품마다 독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좋은 작가는 텍스트를 통해서 독자들의 잠자는 언어와 상상력을 깨우는 법이다. 독자들은 그런 작가와의 감각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대화를 통해서 더 깊고 진실한 세계와 조우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작가의 상상력과 철학적 비전의 날개를 타고 광활한 언어의 우주로 날아오르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최민자의 「달빛과 나비」나 「알밤」이 보여 준 것처럼, 독자들은 그 신비의 시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영원한 빛살에 뜨겁게 감염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 밤도 뜨거운 장인 정신으로 언어의 우주에 위성을 띄워 올리고, 그곳에 인류의 영토를 마련하기 위해 혈전을 벌이고 있을 작가에게 위로를 보낸다. 나는 이 작가가 21세기 한국 수필을 이끄는 큰 별이 되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갖고 있다.
│문학적 자전│
덧없음에 대항하는 덧없는 부적
최 민 자
전업 주부도 전업 작가도 아닌 채, 수필 언저리를 서성거린 세월이 어느새 십 년이다. 백수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이 과로사라는 우스갯말처럼, 생색 없는 치다꺼리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상의 한 귀퉁이에 내 몫의 삶을 따로 챙겨 넣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투리 시간이 더러 나긴 하지만 강력한 자장으로 유혹하는 도시살이의 원심력과, 때 없이 울려 대는 전화벨소리를 외면하는 일도 곤혹스럽다. 모처럼 여가를 장만해 집을 떠나 보기도 한다. 냄새와 색깔이 비슷한 무리 사이에 나를 끼워 넣고 물들기를 기다려보기도 한다. 그렇다 해서 마음속 공허가 다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숙제를 미루어 두고 놀러 나온 아이처럼, 세례를 받고도 예배를 멀리하는 냉담자처럼, 가슴속 어디쯤이 무지근하게 켕겨 온다. 왜일까. 왜 나는 초조와 번잡 속에 허위단심 허둥거리며 살아가는 걸까.
마음 자락 한 끄트머리를 수필이라는 고삐에 매어 두고 난 뒤부터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단순함의 즐거움과 느리게 사는 여유로움을 잃어버렸다. 책을 읽어도 영양가를 먼저 따지게 되고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도 순간에의 몰입보다 인상적인 기억 하나를 건져 올리려 애쓴다. 너그럽게 이해하기보다는 분석하고 해부하는 버릇도 생겨났다. 철 지난 옷과 양말짝들이 서랍마다 뒤죽박죽 섞여 넘쳐도, 글 한 줄 쓰지 않고 모니터 앞에 앉아 이런 저런 검색창을 뒤지기도 한다. 대낮의 저잣거리를 지치도록 쏘다니다가 야심한 밤에야 책상 앞에 앉는 바람에 대하소설 쓰느냐는 핀잔도 듣는다. 시간이 간다고 누에처럼 줄줄이 비단실을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맴을 돌다가 애꿎은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았다 한다.
천재란 노력할 수 있는 능력 자체라고 말한 사람이 베토벤이었던가?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끼 없이는, 신의 가호 없이는, 자신도 남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예술이요 문학일 터이다. 젊음의 푸르른 모퉁이를 무기력하게 돌아 나와 때늦은 열정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매달려 있는 나는 벼려지지 않은 통찰력과 무딘 감수성이 슬프고 부끄럽다. “직관이란 기억이 떨어져 버린 열쇠를 집어내는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말대로, 인식과 경험 이전의 선험적 영성만이 감동과 에스프리를 창출할 수 있으리라는 추측도 자주 나를 우울하게 한다. 그래, 이쯤 해서 손을 털고 빠져나가자. 흐르기를 포기한 물처럼 느긋하고 평화롭게 일렁거리며 살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무엇이 아쉬운지 선뜻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질끈 눈을 감고 돌아 나왔다가는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 같은 불온한 예감이 핑계처럼 나를 주춤거리게 한다. 돈도 아니 되고 명예도 아니 되는 문단의 불가촉천민 자리가 무에 그리 탐나고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 망설이고 또 머뭇거리는가. 왜 쓰는가. 왜 나는 쓰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자 해서, 허명이라도 얻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추는 시간의 춤이어서, 허무에 대항하는 내 삶의 양식이어서다. 쓴다는 것은 시간과 짝을 지어 떠내려가는 것들,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건져 올리는 행위이다. 음습하고 눅눅하게 시들어 가는 영혼을 몸 밖으로 불러내어 위무하고 소통시키는 일이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를 매다는 푸나무만도 못한 인간의 영혼, 그 쓸쓸함을 편드는 일이다.
어린 날 나는 빨래하는 엄마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와 송사리 떼들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작은 몸통과 날렵한 꼬리지느러미를 쉬지 않고 흔들어 대던 은빛 물고기들은 투명한 햇살이 비껴 드는 강바닥 모래 위에 제 몸보다 커다란 그림자를 얼비치며 춤을 추듯 어른거리곤 했다. 춤은 그들에게 생명의 약동, 살아 있음의 언어였다. 살아 있는 것들은 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몸 안의 기를 몸 밖으로 투사해 낸다.
방망이 소리가 잦아들고 앉아 있기가 무료해지면 물속에 손을 넣고 물살을 천천히 갈퀴질하며 놀기도 했다. 손가락 사이로 만만찮은 물의 저항이 느껴졌다. 송사리 떼들이 잽싸게 여울목 쪽으로 도망쳤다. 왜 이놈들은 물을 따라 내려가지 않는 것일까. 흐르는 물살 따라 떠내려가면 힘이 훨씬 덜 들 텐데, 왜 구태여 상류 쪽으로 고개를 디밀고 춤추는 것일까.
죽은 물고기만이 물과 함께 떠내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하긴 물고기들이 다 물살을 따라 바다로 바다로 떠내려갔다가는 세상의 강물마다 물고기의 씨가 진즉 말라붙고 말았을 것이다. 거슬러 오르기. 그것이 한갓 부질없는 반항의 몸짓일 뿐이어도, 살아 있는 것들은 거슬러 오른다. 봄풀은 중력을 거슬러 허공에 꽃대를 밀어 올리고, 바람은 수면을 거슬러 바다 위에 파도를 일으켜 세운다. 신세대는 구세대를 거스르고 진보는 보수를 거스르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거스른다. 살기를 포기한 물고기만이 허옇게 배를 뒤집고 물살 위로 편안하게 떠내려간다.
흐름에 대한 저항. 막무가내로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기슭의 풀뿌리라도 붙잡아 보려는 안간힘, 그것이 내 수필 쓰기이다. 머물지 못하는 순간에 대하여, 살아 있음의 덧없음과 허망함에 대하여, 나는 지금 어설프기 짝이 없는 언어라는 지렛대를 붙들고 언감생심 맞짱을 뜨고 있는 것이다. 덧없음에 대항하는 덧없는 시도. 무모한 도전이다. 백전백패다.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연거푸 바윗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패배를 예견하면서도 맞서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생명 있는 것들의 소명일 터이다. 내게 있어서 수필은 아득한 허적의 꼭대기를 향해 끝없이 밀어 올려야 할, 그러나 끝내 다시 굴러 떨어지고야 말, 무거운 바윗돌일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또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릴지라도, 아직은 투항하지 않으려 한다.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를 산꼭대기가 아닌 산기슭에 남겨 두기로 하였으므로. 시시한 내 변방의 언어가 떨림도 울림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세상과 나를 소통시키는 자기 구제의 방편조차 되지 못한다 하여도, 아직은 무릎 꿇지 않으려 한다. 수필이야말로 내 삶의 날숨, 내 영혼의 봉창일 터이므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정체 모를 허무를 분연히 물리쳐 줄 부적일 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