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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ooGiHeon 원문보기 글쓴이: BOSS
大 朴 庄 記
吾累世先塋自金城公以下分處金城楮谷釜谷及此朴巨谷而惟朴巨谷守護之位比金.楮.釜. 三所爲尤多後孫支宗之所祔葬亦於此爲多舊嘗有齋宮爲春秋齋沐之所圯在四十年前今所謂佛堂谷者卽其址也 自余幼少時見再從曾祖府君與吾王父府君同老一堂每有改創之意未果遽先後棄世時不肖孤且弱門事惟門父老是仰三從祖府君欲如先父兄志歲庚辰辦數緡銅拮据八九年未就公又下世族父上舍公以爲祖父與伯父之遺志不可替又十年丁酉改卜于佛堂谷之東崖子坐之地以是年十月初始役役數月以凍沍輟越明年孟春斷手告落房室兩頭各一間中間廳事二間西廚一間東邊因地形而樓之橫二間俾山下人守之以待春秋齋沐飮福之所董役之日諸族迭相往來而終始幹之惟族叔通賢氏與上舍公而山下人名金順才者給供饋備使今頗有功錢略費三百緡零云菴旣成上舍公謂余曰是菴旣朴又在大洞之朴谷蓋名之以大朴乎 余曰唯因屋之制地之名扁之固當雖然余於是有感焉 吾家以質實二字世相傳今雖後孫不克遵守乃其所自期則在是焉噫叔季歸來淳風漸邈文貌勝而本質滅外華露而眞實沒卒之文勝者其弊浮華露者其流虛竝與其文貌外華而俱喪焉然則梔蠟之飾孰若本質之完全邊幅之華爭似本地之縞素此吾家相傳之法而亦今日名齋之意也昔李德裕平泉之庄奢華壯麗甲於一時戒子孫以一石一木無失於人曾未幾時竟爲人所奪以取識者之譏吾知是庄之大朴其不爲平泉之墜失者可庶幾也而況是庄卽祭先會族之所也夫子曰禮與其奢也寧儉儉朴之實也使吾族之居是庄者祭先以誠敬而無過於文敍族以眞實而不飾以文然後庶無墜吾家之法而合是庄顧名之義也公曰君之言誠朴矣而眞得吾名菴之義也雖然徒知朴之爲貴而不以文濟之則其如朴之過而貿貿何哉今將使吾門之子弟於祭先會族之餘講讀於斯述作於斯琢磨成就有文質彬彬之效則何如余乃歛紝而言曰若爾則尤幸矣吾家之朴其將無質勝之弊矣敢略敍經始之由及名菴之義用示雲仍於無窮云
嗣孫 前假監役 樹仁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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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朴 庄 記
吾累世先塋 自金城公以下 分處金城楮谷釜谷 及此朴巨谷而
오누세선영 자금성공이하 분처금성저곡부곡 급차박거곡이
우리는 여러代에 걸쳐 선조의 묘소가 金城公으로부터 그 아래로는, 금성과 딱실 그리고 가마실 및 박거곡에 나누어져 있으나,
惟朴巨谷 守護之位 比金楮釜三所爲尤多 後孫支宗之所 祔
유박거곡 수호지위 비금저부삼소위우다 후손지종지소 부
葬 亦於此爲多
장 역어차위다
오직 박거골에서 수호하는 묘소가 금성, 딱실, 가마실 세곳보다 더욱 많은것은 후손들이 之次집이나 종갓집 할것없이 모두 이곳에 장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舊嘗有齋宮 爲春秋齋沐之所 圯在四十年前 今所謂佛堂谷者
구상유재궁 위춘추재목지소 이재사십년전 금소위불당곡자
卽其址也
즉기지야
옛날에는 일찍이 이곳에 재실이 있어 봄과 가을에 제계하며 묘소를 돌보던 곳으로 삼았으나 40년 전에 허물어 졌으니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불당곡이 바로 그 자리이다.
自余幼少時 見再從曾祖府君 與吾王父府君 同老一堂
자여유소시 견재종증조부군 여오왕부부군 동노일당
내가 어렸을때부터 보아왔는데, 제종조부님과 우리 할아버지는 한집에서 늙으시면서,
每有 改創之意 未果 遽先後棄世時 不肖 孤且弱
매유 개창지의 미과 거선후기세시 불초 고차약
매양 다시 재실을 지어야 한다는 뜻을 가지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때 나는 외롭고도 약한 존재라
門事惟門父老 是仰三從祖府君 欲如先父兄志
문사유문부노 시앙삼종조부군 욕여선부형지
문중의 일은 원로이신 삼종 조부님께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형님들의 뜻을 우르러 받들어서
歲庚辰 辨數緡銅 拮据八九年 未就 公又下世
세경진 변수민동 길거팔구년 미취 공우하세
경진년에 집 지을 자금을 준비하고, 팔구년에 걸쳐 부지런히 노력하시다가 일을 성취하지 못한채 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族父上舍公 以爲祖父 與伯父之遺志 不可替 又十年丁酉 改
족부상사공 이위조부 여백부지유지 불가채 우십년정유개
卜于佛堂谷之東崖 子坐之地 以是年十月初 始役
복우불당곡지동애 자좌지지 이시년십월초 시역
族叔되시는 上舍公께서는 할아버지와 백부님의 남기신 뜻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다시 10년이 지난 정유년에 불당곡 동쪽 언덕 子坐 지점에 다시 재실을 세우기로 하고, 이해 10월 초순에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役數月以凍冱輟 越明年孟春 斷手告落 房室兩頭各一間 中
역수월이동호철 월명년맹춘 단수고락 방실양두각일간 중
間廳事二間 西廚一間 東邊因地形 而樓之橫二間 俾山下人
간청사이간 서주일간 동변인지형 이루지횡이간 비산하인
守之 以待春秋齋沐飮福之所
수지 이대춘추재목음복지소
몇 달 동안은 겨울철이라 얼어붙어서 공사를 철회하였다가 그 다음해 봄에야 준공을 하니, 방은 두 개로 머리맡에 각 한칸씩을 두고, 동쪽에는 지형을 이용하여 가로로 樓를 두칸 두어 산지기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봄과 가을에 제계하며 묘소를 돌보기도 하고, 음복하는 장소로 사용토록 하였다.
董役之日 諸族迭相往來 而終始幹之 惟族叔通賢氏 與
동역지일 제족질상왕래 이종시간지 유족숙통현씨 여
上舍公而 山下人名金順才者 給供饋備 使令頗有切錢 略費
상사공이 산하인명금순재자 급공궤비 사령파유절전 약비
三百緡零云
준공하는 날에는 여러 일가친척이 차례대로 서로 왕래하여, 마치고 시작함에 일을 맡아서 하였으나, 다만 족숙되시는 동현씨와 상사공과 산 지키는 김순재씨가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나니, 비용이 자못 삼백만원 정도 소비되고, 자금이 거의 다 떨어진 실정이라고 말하였다.
菴旣成 上舍公謂余曰 是菴旣朴 又在大洞之朴谷 蓋名之以
암기성 상사공위여왈 시암기박 우재대동지박곡 개명지이
大朴乎?
대박호?
재실이 이미 완성됨에 상사공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재실은 이미 질박하고 또한 大洞의 박골(朴谷)에 위치하고 있으니, 어찌 이름을 대박(大朴)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시거늘, 나도 “그렇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余曰 唯因屋之制 地之名 扁之固當
여왈 유인옥지제 지지명 편지고당
이 집의 규모와 지명으로 인한 현판 이름이 진실로 당연하도다.
雖然 余於是有感焉
수연 여어시유감언
비록 그렇다지만, 나는 여기서 느낀바가 있다.
吾家以質實二字 世相傳 今雖後孫不克遵守 乃其所自期
오가이질실이자 세상전 금수후손불극준수 내기소자기
則在是焉
칙재시언
우리 집안은 질박하고, 성실하다는 質과實 두 글자를 대대로 지금까지 전해왔으니, 후손들이 능히 지켜오진 못했으나, 이에 스스로 지키겠다고 기약함은 여기에 있으리라.
噫 叔季歸來 淳風漸邈 文猊勝而本質滅 外華露而眞實沒
희 숙계귀래 순풍점막 문모승이본질멸 외화로이진실몰
卒之文勝者 其弊浮華露者 其流虛竝與其文猊 外華而俱喪焉
졸지문승자 기폐부화로자 기류허병여기문모 외화이구상언
아! 옛 사람들은 돌아가시고, 순수한 풍조가 점점 멀어지고, 문체만 성대해지니 본질은 없어지고, 화려함만 드러나며, 진실됨은 없어지고, 마침내는 문체가 그 본질을 이기게 되나니, 폐단이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미게되어 그 흐름이 허영과 함께 문체만으로 겉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하므로 그 진실을 모두 잃어버렸도다.
然則梔蠟之飾 孰若本質之完全 邊幅之華 爭似本地之縞素
연칙치랍지식 숙약본질지완전 변폭지화 쟁사본지지호소
此吾家相傳之法 而亦今日名齋之意也
차오가상전지법 이역금일명재지의야
그렇다면 칠하고 땜질하여 장식한 것을 뉘라서 본질의 완전함과 같다고 할 것이며, 변두리의 화려함이 본바탕의 흰 비단과 비슷하다고 다투겠는가? 이것은 우리 집안에서 전해오는 법이요, 또한 오늘날의 재실 이름을 지은 뜻이다.
昔李德裕 平泉之庄 奢華壯麗 甲於一時 戒子孫以一石一
석이덕유 평천지장 사화장려 갑어일시 계자손이일석일
木 無失於人 曾未幾時 竟爲人所奪
목 무실어인 증미기시 경위인소탈
옛날 이덕유가 평천재실이 사치스럽고, 장엄하고 화려함이 한때의 최고라고 하여, 자손에게 훈계하기를 “돌 한 개, 나무 한 그루라도 잃지 말라.”고 말한 뒤에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지 않아 남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으니,
以取識者之譏 吾知是庄之大朴 其不爲平泉之墜失者 可庶
이취식자지기 오지시장지대박 기불위평천지추실자 가서
幾也 而況是庄卽祭先會族之所也
기야 이황시장즉제선회족지소야
이것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이 재실이 크게 소박하다고 비방을 한다면, 그것은 평천의 실추한 재실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 재실은 조상의 재사를 지내고, 친척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夫子曰 禮與其奢也 寧儉 儉朴之實也 使吾族之居是庄者
부자왈 예여기사야 령검 검박지실야 사오족지거시장자
祭先以誠敬 而無過於文 敍族以眞實 而不飾以文 然後 庶無
제선이성경 이무과어문 서족이진실 이불식이문 연후 서무
墜吾家之法 而合是庄顧名之義也.
추오가지법 이합시장고명지의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禮는 사치스러움 보다는 차라리 검소함 이다..”고 말씀 하셨으니, 검소하고 소박함이란 참되고 거짓이 없는 것이다.. “우리 친척들이 이 재실에 거처하며 조상께 제사를 모실 때는 정성과 공경함을 우선하여 겉 모습인 문체를 지나치게 함이 없도록하고, 진실을 베풀고, 문체를 꾸미지 않은 연후에 우리 집안의 법도가 떨어지지 않게 하므로써 이 재실의 이름을 붙인 뜻에 부합되리라” 고 말을 하니,
公曰 君之言誠朴矣 而眞得吾各菴之義也 雖然 徒知朴之爲
공왈 군지언성박의 이진득오각암지의야 수연 도지박지위
貴 而不以文濟之 則其如朴知過而貿貿何哉
귀 이불이문제지 칙기여박지과이무무하재
公께서도 말씀하시길 “그대의 말이 진실로 질박하고도 참으로 우리 재실 이름의 뜻을 얻었도다.”라고 하셨다. 비록 그러나 한갓 질박함만이 귀한줄로만 알고, 겉모습을 빛낼줄 모른다면, 질박함이 지나쳐서 교양이 없어 보이면 어쩌리오.
今將使吾門之子弟 於祭先會族之餘 講讀於斯 述作於斯
금장사오문지자제 어제선회족지여 강독어사 술작어사
琢磨成就 有文質彬彬之效則何如
탁마성취 유문질빈빈지효칙하여
앞으로는 우리문중의 자제들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친척들이 모이고 한 나머지, 여기에서 글을 읽고, 여기에서 글 지으며, 학문과 덕행을 닦아 성취해서, 겉 모습인 문체와 안속의 질박함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는 보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余乃歛袵而言曰 若爾則尤幸矣 吾家之朴 其將無質勝之獘矣
여내렴임이언왈 약이칙우행의 오가지박 기장무질승지폐의
나는 이에 옷깃을 여미며 말하노니 만약그렇게만 된다면 더욱 다행 하리라. 우리집안의 소박함이 앞으로도 겉모습인 문체가 안속의 질박함을 이기는 폐단은 없어야 하리라.
敢略叙經始之由 及名菴之義 用示雲仍於無窮云
감약서경시지유 급명암지의 용시운잉여무궁운
감히 지나온 내력과 재실 이름의 뜻을 적어서 자손에게 보이고 무궁하기를 바란다.
嗣孫 前假監役 樹仁 謹記
사손 전에 도감을 맡았던 사람 樹 仁 삼가 씀
大 朴 庄 記
吾累世先塋自金城公以下分處金城楮谷釜谷及此朴巨谷而惟朴巨谷守護之位比金.楮.釜. 三所爲尤多後孫支宗之所?葬亦於此爲多舊嘗有齋宮爲春秋齋沐之所?在四十年前今所謂佛堂谷者卽其址也 自余幼少時見再從曾祖府君與吾王父府君同老一堂每有改創之意未果遽先後棄世時不肖孤且弱門事惟門父老是仰三從祖府君欲如先父兄志歲庚辰辦數緡銅拮据八九年未就公又下世族父上舍公以爲祖父與伯父之遺志不可替又十年丁酉改卜于佛堂谷之東崖子坐之地以是年十月初始役役數月以凍?輟越明年孟春斷手告落房室兩頭各一間中間廳事二間西廚一間東邊因地形而樓之橫二間?山下人守之以待春秋齋沐飮福之所董役之日諸族迭相往來而終始幹之惟族叔通賢氏與上舍公而山下人名金順才者給供饋備使今頗有功錢略費三百緡零云菴旣成上舍公謂余曰是菴旣朴又在大洞之朴谷蓋名之以大朴乎 余曰唯因屋之制地之名扁之固當雖然余於是有感焉 吾家以質實二字世相傳今雖後孫不克遵守乃其所自期則在是焉噫叔季歸來淳風漸邈文貌勝而本質滅外華露而眞實沒卒之文勝者其弊浮華露者其流虛竝與其文貌外華而俱喪焉然則梔蠟之飾孰若本質之完全邊幅之華爭似本地之縞素此吾家相傳之法而亦今日名齋之意也昔李德裕平泉之庄奢華壯麗甲於一時戒子孫以一石一木無失於人曾未幾時竟爲人所奪以取識者之譏吾知是庄之大朴其不爲平泉之墜失者可庶幾也而況是庄卽祭先會族之所也夫子曰禮與其奢也寧儉儉朴之實也使吾族之居是庄者祭先以誠敬而無過於文敍族以眞實而不飾以文然後庶無墜吾家之法而合是庄顧名之義也公曰君之言誠朴矣而眞得吾名菴之義也雖然徒知朴之爲貴而不以文濟之則其如朴之過而貿貿何哉今將使吾門之子弟於祭先會族之餘講讀於斯述作於斯琢磨成就有文質彬彬之效則何如余乃??而言曰若爾則尤幸矣吾家之朴其將無質勝之弊矣敢略敍經始之由及名菴之義用示雲仍於無窮云
嗣孫 前假監役 樹仁 謹記
대박장기(大朴庄記)
우리집 여러 대의 선영이, 금성공 이하, 금성, 닥실, 가마실과, 이 곳 한골의 세곳에 나뉘어 있는데, 오직 이 한골의 수로 위수가 위의 세곳 보다 많고, 종가와 자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부장도 역시 여기가 많다. 그래서 일찍이 재사가 있어 춘추로 재계하여 제사를 받드는 곳이었으나, 사십 년 전에 퇴락하고 말았으니, 곧 지금의 소위 불당공이란 곳에 그 옛터가 있다..
내 어렸을 때 재종증조부님이 나의 할아버님과 함께 집안 여러 노인 분들과 매양 중건할 뜻을 의논함을 보았으나. 이루지 못한 채, 갑자기 전후하여 세상을 떠나시니. 그때 불초 저는 어렸기에 문중 일은 오직 문중의 부로이신 삼종조 할아버님께서 선부형의 뜻을 따르고자 하여 경진년에 얼마간의 기금을 모으느라 팔구년 동안 애쓰셨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신 채 또한 돌아가시매, 족부이신 상사공 할아버님과 백부님의 유지는 바꿀 수 없는 일이매, 이어 받들어, 다시 십년이 지난 정유년에, ‘불당골’ 동편 언덕 정남향의 옛터에 재건의 역사를 시월초에 착공하리라 정하고, 일을 시작한지 수개월에 엄동이 끝나고 이듬해 초봄에 낙성하니, 두간 대청 양끝이 방이요, 서쪽에 부엌 한 간이 딸리고, 동쪽은 지형에 따라 다락 두간이 ㄱ자 형으로 꺾여 있다. 산 아랫 사람으로 하여 수호하게 하여, 춘추로 자손들이 재계하여 제사 받들고 음복하는 곳으로 삼았다.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족친들이 서로 갈아들어 시종 할 일을 맡아하는 한편, 오직 족숙 통현씨는 상사공과 함께 산 아래 사는 김순재란 사람을 시켜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여, 공사비를 약 삼백만이나 절약하였다 한다. 건물이 이미 이루어짐에, 상사공이 내게 이르시기를 ‘이 재실이 질박하게 이루어지고, 또한 대동의 박곡에 위치해 있으니, 어찌 ’대박‘이라 이름하지 않으리요“ 하신다. 내 이르기를, 건물의 제도나, 땅이름으로도 그렇게 이름지음이 진실로 당연하나. 이에서 느껴지는 나의 소감이 또 있으나. 우리집이 지켜오는 ’질실‘ 두 자는 대대로 이어오는 가법이라, 오늘날 후손들이 비록 이름 능히 지키지 못함이 있다 할지라도, 스스로 마음기약으로는 언제나 이 ’대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라.
슬프다! 말세가 되니 순박한 풍속은 점점 멀어지고, 형식적인 예의만 승해짐에 따라, 참다운 예의는 사라지고, 외모의 화려함이 드러나면 참된 실상은 숨어버리는 법이라. 사치하는 백성은, 그 폐단이 부화함에 있고, 부화함이 들어나면 그 유허함이, 형식적인 예의와 아울러 외화와 함께 죽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러하다면 치자나무 가지에 밀랍을 칠하여 황금채찍인 양 가장하는 일이, 어찌 본질의 완전함화 같으며, 가장자리의 화려함이, 어찌 본바탕의 휜 비단과 같다 하리요? 이야말로 우리집 대대로 전해오는 가법이자. 또한 재소 이름을 정하는 의미라 할 것이다.
옛날 이덕유란 사람이 평천 땅에 장려한 장원을 지어놓고 한때의 사치를 누리면서,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 ‘돌하나 나무 하나라도 남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건만, 얼마 되지 않아 필경 남의 소유가 되고 말았으매, 식자들의 기롱거리가 되었거니와 , 나는 알괘라! 이 재사의 대박은, 저 평천의 실추는 하지 않으리라 단정하며, 또 그렇게 소망하는 바이며, 하물며 또한 이 제사는 조선에 제사하는 족친들의 모이는 곳임에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란 사치함보다는 차라리 검박할진저! 하셨으니 '검박’은 진실이라, 우리 족친으로 이 제사에 앉는 사람은, 먼저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제사하되, 형식적 예의에 치우치지 말고, 족친끼리 담화함에 진실하여 문식하여 꾸미지 아니함으로써, 우리집 법도를 실추함이 없고 보면, 이 진정 재사이름의 뜻하는 바에 부합되리라 하니.상사공이 이르시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소박하여, 진정 우리 재명의 뜻에 부합하기는 하나. 그러나 다만, ’박‘의 귀함만을 알고, 문으로 이를 제화하지 아니한다면, ’박‘의 지나침으로 말미암아, 교양 없고 무지하게 되어간다면, 그 어찌하리요? 이제 장차 우리문중의 자제들로 하여금 제사를 마친 뒤나. 족친의 모임 끝에는 , 여기서 학문을 강독하고, 여기서 저술하며, 갈고 닦아 인격을 성취하여. 외모며, 본바탕이 아름답게 빛남에 이른다면 그 영광스러움이 어떠하다 하리요!“
하신다. 내 옷깃을 여미며, “그러하다면 더욱 다행이로소이다!”하고, ‘우리집 박이 장차 질박함에 치우치는 폐단이 없게 되리로다“. 하며, 감히 중건의 전말과 건물이름을 짓게 된 의의를 적어 무궁한 후손들에게 보이는 바이다.
사손 전 가감역 수인 삼가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