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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사찰) & 혜화동 성당
'길상사'
"길상사 창건 당시 길상사가 가난한 절 되기를 바랍니다."
초불키고 보세요.
어두움 속에서도 삶의 기쁨과 환희를 읽을 수 있었다.
법정(法頂)스님(속명 박재철) 세수 78세, 법랍 54세.
법정(法頂)스님 (1932년 10월 8일~2010년 3월 11일.전남 해남 출생)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했다.1954년에 승려인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지어 지냈으며 2010년 3월11일에 서울 성북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세수 79세,법랍 56세로 입적(入寂) 하셨다.
종교간 화합
1997년 12월14일에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성직자인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이에 답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 주었다.
길상사 산기슭 7.000평의 부지 위에 극락전과 일주문을 비롯하여 40여동의 사찰 건물있으며 이곳이 196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그 유명하던 요정 대원각이다.서울 장안의 3대 요정으로 손꼽혔던 우이동의 선운각과 삼청동의 삼청각 성북동의 대원각,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한 채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성북동 대원각 만은 요정 주인 김연한 길상화(법명 길상화)가 무소유의 청빈함으로 존경받는 법정 스님에게 재산 전부을 시주해 버린 뒤에 길상사(吉詳寺) 사찰로 다시 태어난 길상사(吉祥寺)
길상사(吉詳寺)입구에 다달으면 기와담장 위로 하얀 위로 하얀 바탕에 까만 글씨로 쓴 작은 현판 하나 수줍은 듯 고개 올려다 봅니다.
아~ 법정스님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송광사 수련원장 등 종단 소임을 몇 차례 맏았을 뿐이며, 수행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으며. 1994~2003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회주와 1996~2003년 서울 성북구 길상사 회주를 지냈다.
스님은 1975년 10월부터는 17년간은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았으며 불일암 시절 초반인 1976년 4월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따라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스님은 1992년부터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잘하지 않았지만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길상사를 개원한 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들려줬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진리의 말씀(法句經)', '불타 석가모니', '숫타니파타', 因緣이야기', '신역 화엄경',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스승을 찾아서' 등이 있다.
특히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압축한다.
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 있고, 헝가리 원광사, 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 있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당시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로 시작하는 창건 법문도 이러한 무소유 정신과 맞물려 널리 회자됐다.그런가 하면 말년인 지난 2008년 낸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마지막 모습까지 귀감이 되기도 했다
출입문으로 들어와서 돌계단을 밟고 서면 옛 요정 본체가 "ㄷ 자형"으로 앉았는데 사찰이 아닌 일반 양반집 풍체를 지녔으니 다가서도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극락전 사찰에 올려퍼지는 불경소리 대신 바람소리.새소리만 귓가에 와 닿는 길상사
경내에는 "길상선원" 묵언수행 중이라 고요하기에 안돈 시켜주는 길상사
이 요정은 군사독재정치 제 3공화국 시절 밀실정치의 본거지이며 중요 국가정책이 결정되는 청와대 별관이었다. 주지육림의 바다이고,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7000 여평 요정 대원각 드넓은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던 요정. 벗어버리려 하는 야룻한 회한 속에서 대원각의 여주인 길상화의 넋을 잠시 생각하게 되는데 길상사 법당 앞에 서면 돈도 재물도 부귀영화 권세도 다 공(空) 이었다는 생각을 아니 가질 수 있겠는가?
법정스님과 김영한씨가 LA에서 첫 만남
국내 최대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보살 1987년 김영한 보살는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 이 자리에서 김영한 보살은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간 기이한 실랑이.
결국, 김영한 보살이 10년 만에 두 손을 들며 실랑이는 끝났다.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를 이전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 여기에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가 태어났다.
지리산 자락 거림 도장골 입구에 하계 휴양소..길상사.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 그 흔한 조명없는 사찰이라서 "길상선원" 느티나무에 학도 숨죽이며 침묵속에 앉아 있으니 자연 숨소리를 죽이게 하는군아.
서울 조명 천국에 계곡.숲.나무. 어둠 삶의 흰구름의 길을 안내해 주는군아. 길상사 경내을 돌며 삶의 잔잔한 향기를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계곡 옆 고사목에 걸려있는 팻말에 새겨진 "행복이란 구하거나 노력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없애고 욕심을 절제함으로 얻을 수 있다."역시 사람은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치게 하는 글 귀이다.
느티나무 고목과 앉아 쉴 수 있는 의자가 유난히 많은 길상사 뜨락 대원각 여주인의 조건없는 이 엄청난 시주가 낼는 보시가 아닐까?
김영한(법명 길상화)는 누구?
1916년생 금광을 하는 친척에 거금을 빌려주고 떼이는 통에 집안은 파산했고,결혼을 하였으나 남편은 자살을 하고 그녀은 끼니를 위해 기생이 된다.
타고난 미모에,노래와 춤에 능했으며,글재주 또한 남달아서 작품이 문예지에 실리기도 했다.. 신문에 호을 자야라고 하고 글도 기고하고 40넘어 중앙대학을 나오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면서 젊은 날의 사랑하던 이를 일생동안 마음에 안고 살았다..
함흥 여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있던 시인 백석을 만나는데.그것은 흡사 전생에서 맺었던 인연을 현생에서 다시 만난 것 같은 운명적 조우였다.둘은 서울과 함흥 사이를 오가며 사랑을 익혔고,기생며느리를 볼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가 오히려 정념에 불을 질렀다.
백석은 집에서 3번이나 결혼을 시켰지만.결혼과 도주를 반복했다.백석은 그녀의 가명을 부르지 않고 자야 라 불렀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고 3.8선이 그어졌다.둘은 서로 오갈 수 없게돼어 자야는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을 경영했다.
대원각은 그때 시가로 1.000억원을 보시하여 길상사가 되고, 일생동안 사랑하던 북한시인 백석을 기념하는 문학상 제정을 위해 2억원을 내 놓고. 남은 재산은 과학도를 위해 써달라는 유언장을 남기고..평가액은 122억원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애절하고 뜨거운 사랑이야기 시인 백석과 김영한 (법명 길상화)
(백석의 여인 -자야의 사랑)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있어 '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 어디서? 한국에서?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기자왈)
계곡 물이 얼어서 물 흐르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숲을 지나온 바람과 묵언의 긴 그림자 속에서 경내를 돌아본다.
경내 곳곳에 넉넉히 놓인 의자에 앉아 대원각의 추억이 길상사로 이어지는 그 흠모의 연(戀)은 절절하구나 클래식 선율이 아름답게 흐르는 곳 길상사
길상사길를 조금 비켜서면 "학의 바다길"."꿩의 바다길" 같은 샛길 이름이 여기 저기에 붙어 있으니.. 아마도 넑은 깨달음을 뜻하나 보다..
특히 수련생들은 끼니때 먹기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독송한다.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만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자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길상사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의 사찰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도 유명하다.또한 불도체험.수련회 등의 프로그램과 고사리손의 미술대회 및 대중가수의 콘서트까지 개최하는 등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길상사 건너편에 아담한 가계가 그냥 가기에는 정겹다..
서울시는 화려한 조명등과 분수 등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관리비용이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공원 시설 설치를 최대한 억제 해야 하지 않을까?
(읽고 난후에 훈훈함을 느끼실 것입니다.꼭 읽어주시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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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성당'
사랑, 자비, 포용, 인내, 참회
"혜화동 성당"
성 베네딕또가 혜화동에서 철수하던 1927년 10월 7일.제 8대 서울교구장 뮈뗄 민 대주교는 중현 본당으로 부터 혜화동 일리대를 분리하여 새 본당을신설하니,혜화동 본당은 약현 본당(1893년 창설) 중현 본당 (1898년 창설)에 이어 서울의 세번째 본당으로 탄생이렇게 본당수가 적을 때였으므로 신설 혜화동 본당의 관할구역은 매우 넓었다.
남으로는 동대문밖,서쪽으로는광희문 밖,북쪽으ㄹ로는 종로 3가를 경계로 동서문에 거쳐 그 이북 지방 관할하는 실로 광대한 지역이었다.서울을 벗어나서는 경기도 광주군을 비롯하여 양주군,고양군의 3분의 1,용인군 일부가 혜화동 본당 구역에 속했다.
백동(혜화동)의 유래 조선 태종조 공신 조은이 이 인근에 잣나무를 많이 심어서 유래가 되었다.
(헤화동 본당)이었지만 (백동(柏洞)으로도 많이 불리었다. 현재도 연로한 성직자들이나 교우들이 혜화동 본당보다는 백동 본당으로 즐겨 호칭하리만큼(백동 본당)란 속칭은 일종의 애칭으로 오랫동안 전해오고 있다.
혜화초등학교 시절에 가끔 이주 가끔 이곳에 들어갈 때가 있었다. 산앙이라기 보다는 방학때에 친구따라....오늘은 늦은 시간이라 안에 들어가서 찍사를 못하고 오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내부전경을 반추해 보면 다른 성당에 비하여 조금 독특한 분위기 다음에 길상사와 혜화동성당 찍사를 해 볼까 한다.
혜화동 성당
혜화동 성당은 대학로 로터리에서 동성고등학교 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혜화동 성당은 1892년에 설립된 중림동 성당과 1898년 설립된 명동 성당에 이어 1927년 세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다. 혜화동 성당은 ‘믿음의 고향’이요, 한국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붉은 벽돌로 쌓은 종탑의 대비를 통한 균형미와 비대칭의 구성 등은 당시 고딕양식의 가톨릭 성당 건축의 정형화된 틀을 깬 양식으로, 이후 근대적 성당 건축의 모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리틀 필리핀- 혜화동 성당에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지시로 지난 1996년부터 매주 일요일에 필리핀 사람들만을 위한 미사가 열리고 있다. 영어와 필리핀의 고유어인 타갈로그어로 동시에 진행되는 일요일 미사에는 4000여 명의 필리핀인들이 참석하는데, 혜화동 성당은 수도권의 주한 필리핀인들에게 미사만 보는 단순한 성당 이상의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
1922년 음력 윤 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세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김 추기경은 5년제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입학 "황국 시민으로서 소감을쓰라"는 시험문제에 "나는 황국 시민이 아님"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간을 맞았다.일본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을 명령을 받고 1941년 4월도쿄 조치대학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2차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던 김 추기경은 해방 이후인 1947년 혜화동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으로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
1968년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을탄합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큰 버팀목으로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시국담화문등을 통해 앞장서기도..70-80년대를 지난는 동안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1996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 우선적으로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수녀들이 있을 것이오..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김수환 추기경이 종료를 넘어 이 땅의 버팀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더 낮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한 없이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왜 자화상에 "바보야"라고 쓰셨나"라고 질문하자 머뭇거리다가 "바보 같지 않나요" 하면서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알머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그리고 보면 내가 제일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라고 .... “나는 그동안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며 사세요.”
신(神)을 죽여도, 고통은 남는다! -故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가르침
길상사와 혜화동성당에서는 바람소리 새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어둠이 불빛으로 내 마음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명을 보면서 포장이 좋다고 내용이 다 좋은 것은 아닌데......구체역으로 온나라가 날리인데.....(시청.광화문광장.청계천 전력 소모가 너무 낭비가 아닐까?)
혜화동성당 김 추기경 끝..
나는 종교인도 무엇도 아닌 그냥 평범하게 산에 다니는 사람이... 길상사와 혜화동성당에 다녀와서..
chong hoon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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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정 스님에 관한 귀중한 자료 올려 주시어 너무 고맙습니다.교간의 화합이 않일까 저는 생각 합니다.
법정 스님의 행적중 가장 귀하게 느껴지는것은
hoon님 고마워요.
글속에 모든것이 포함된것이고 성인들의 발자취에 우리가 존경 하는 바이며 배우며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