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농민전쟁 (獨逸農民戰爭 Deutscher Bauernkrieg)
종교개혁기 독일의 대농민봉기 (1524-25). 규모, 지역적 확산, 전투의 치열함 등으로 보아 농민전쟁이라 한다.
[원인]
13세기부터 장원제도가 무너지자 독일농민의 자립화가 진행되었다.
부역은 현물이나 금납지대(金納地代)로 바뀌고 농민의 인두세·상속세·결혼세 등도 저액의 현물 또는 금납 공조(貢租)로 되어 봉건적 지배권이 흔들렸다.
이에 대해 영주계급 특히 영방(領邦)국가는 15세기 후반에 들어와 농민을 억압하기 시작하여 부역 부활, 현물·금납지대 증액, 농노제 부활, 촌락공유지 용익제한, 촌락자치 제한 등의 정책을 취했다. 이것이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봉기]
농민전쟁의 전사(前史)는 1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다.
1476년 뷔르츠부르크 부근 니클라스하우젠에서 목부(牧夫) 한스 베하임이 갑자기 영감을 받아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는 설교를 하자 남독일 전역에서 수만 명의 순례자가 찾아오는 사건이 일어났다.
93년에는 알자스 슐레트슈타트에서 분트슈 봉기가 발각되었다. 분트슈란 긴 가죽끈이 달린 농민화인데 봉기의 상징으로 깃발에 그려졌다. 1502년 슈파이어 주교관구 운터그롬바흐에서 농노 요스 프리츠가 분트슈 봉기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이 발각된 뒤 그는 13년 프라이부르크 근방 렌에서, 17년 오베르라인 각지에서 분트슈 봉기를 조직했다. 이 때 루터의 종교개혁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과정]
농민전쟁은 1524년 6월 23일 남서독일 슈바르츠발트 슈튈링겐백작령의 봉기로 시작된다. 무력이 없는 영주측이 교섭에 응했기 때문에 10월에 봉기는 일시 해산했으나 겨울 동안에 조직이 강화되어 25년 봄에는 남서독 전역으로 퍼졌다.
우선 2월 중순 오버슈바벤에 바르트링겐·알고이·보덴 호반의 세 농민단이 결성되고 3월 초순 <그리스도교인 형제단>을 결성했다.
그 공동강령이 메밍겐시(市)의 피혁공 제바스티안 로처가 기초한 <12개 조항>이다.
로처는 해박한 성서지식을 근거로 목사선임의 자유, 농노제와 1/10 세금 폐지, 부역·지대·조세 경감, 공유지 해방 등의 요구를 제시하였는데, 이 강령은 전독일 농민의 공통강령이 되었다. 3월 중순에는 각 지역의 여러 농민단이 결성되어 많은 수도원·성채를 태웠다. 그러나 영주들이 반격에 나서, 북독일에서는 작센공(公)이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튀링겐 농민군을 격파하고, 남독일에서는 봉건영주연합군이 4월 4일 라이프하임 전투의 대승을 시발로 각지의 농민단을 격파함으로써 6월 중순에는 전역에서 봉기가 진압되었다.
[결과]
농민 희생자는 10만에 달하고 전후에 중한 벌금이 부과되어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중·소영주와 제국도시의 세력은 실추되었으나 영방국가만은 그 체제를 확립하고 그 주도권하에 종교개혁이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