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회질 식수
이번에는, 비가 너무 자주 와서 가뭄이 없는 나라, 벨기에의 식수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 초 제가 회사에 입사했을 때, 여기 imec 에서 Post Doc 과정을 마치고 우리 회사에 입사한 어느 분이 말씀 하시기를, “세상에 벨기에에서는 물도 사 먹어야 하고, 물 값이 휘발유 값과 비슷하더라” 하시면서 유럽 사람들의 생활을 재미나게 얘기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물을 사 먹는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봉이 김선달 얘기를 하는가 할 시절이었지요. 아무튼 벨기에를 포함한 유럽 대륙의 물은 밥하는 물도 수퍼에서 산 생수를 써야 할 만큼 석회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 강물은 투명하지만, 여기 강물을 보면 석회질 때문에 불투명한 뿌연 색을 띕니다.
얼마나 석회질이 많은가 생활 속에서 예를 들어 보면, 수돗물을 냄비에 끓인 후 식히면 냄비 바닥에 흰 가루가 꽤나 두껍게 한 층 쌓인 것을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그냥 수돗물로 밥을 지으면 밥 색깔이 흰 색이 아니라 푸른색으로 되고, 미역국을 끓이면 미역 줄기가 부드럽지 못하고 빳빳합니다. 세탁기 배수구, 샤워실 배수구, 세면대 배수구도 주기적으로 흰 석회질 가루를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세탁을 할 때 세제 이외에도 석회질을 분해 또는 제거하는 세제를 추가로 넣어야 하고, 안 그러면 석회질이 끼여 세탁기의 수명이 짧아진다고 합니다. 실제 여기에서 산 저희 집 세탁기를 보면 세제 넣는 구멍 이외에 석회질 제거용 세제를 넣는 구멍이 나란히 하나 더 있습니다. 매일 볼 수 있는 TV 선전 중의 하나가 석회질 제거하는 세제 선전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세수를 한 후에 아무 것도 얼굴에 바르지 않습니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 몇 달 동안은 세수를 한 후 얼굴이 너무 당겨서 평생 안 바르던 로션을 발랐던 기억도 납니다 (물론 제 버릇 못 고친다고 요즘은 여기 물에 적응이 되어 아무 것도 바르지 않습니다).
피부가 부드러운 우리 두 아이들은 아직도 여기 물에 적응이 안 되어 고생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하고 피부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피부에 반점이 생겨 가려움증으로 고생을 합니다. 5년 전쯤에 주벨기에 한국 대사관에 파견된 직원 중에 아이가 여기 석회질 물에 너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서 결국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다른 대륙으로 부임해 갔다는 믿지 못할 전설도 있습니다. 당시 그 분은 아이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피부과를 찾아갔는데, 의사 처방이 환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일반 수돗물로 샤워를 시키지 말고 생수를 사서 샤워와 세수를 시키라는 처방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심각한 물인데도, 막상 여기 사람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치 탄광촌의 아이들이 시냇물 색깔이 원래 검은색인 줄 알듯이, 여기 사람들은 강물이 탁한 색을 띄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imec 화장실 세면대에서 Philips assignee와 나란히 손을 닦은 적이 있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두 손으로 세면대 수돗물을 받아서 맛있게 여러 번 마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석회질이 그렇게 많이 포함된 물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 하는 말이 더 재미났습니다. 자기들 조상 대대로 맛있게 먹은 물인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오히려 저한테 반문을 했습니다. 하기야 옛날에는 청수기도 없었을 테고, 그렇다고 물을 안 먹지는 않았을 테니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온 후 약 2달 동안은, 물 값도 물 값이지만 밥하고 국 끓이는 물까지 수퍼에서 사다 나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서 마시는 용도로만 생수를 사용하고 나머지 주방용은 수돗물을 끓여서 바닥에 석회질을 침전 시킨 후 사용했습니다 (생수 값보다 전기료가 더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한 번만 끓여서 석회질을 침전 시킨 후 그 물로 밥을 하면 밥 색깔이 거짓말처럼 하얗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주 유용한 간이 정수기가 하나 생겼습니다. 1년 동안 루벵 대학에 안식년 연구차 오셨다가 귀국하는 원광대 어느 교수님 가족을 공항까지 모셔 드리고 전리품(?)으로 간이 정수기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용기 부피가 겨우 2 리터 정도로 주전자처럼 한 손으로 들 수 있고, 2리터를 정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3분 정도면 끝나는 simple 한 정수기입니다.
과연 그 허름한 정수기가 물 속에 미세한 입자로 포함된, 어쩌면 용액(solution) 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석회질을 얼마나 정수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는데, 2분만 투자해서 수돗물을 정수하면 놀랍게도 밥 색깔도 흰색이고, 미역국의 미역 줄기도 빳빳하지 않고, 맹물을 끓여도 냄비 바닥에 석회질 가루가 남지 않습니다.
그 이후 집사람이 더 이상 물을 끓이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간이 정수기를 잘 사용하고 있는데, 필터를 교체할 시기를 아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어느날 밥 색깔이 점점 푸른색을 띄기 시작하면 정수기 필터를 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2002. 03.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