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새 단장 작업을 해 오던 당고개성지가 6월5일 새로운 첫미사와 함께 문을 열었다.
당고개성지를 관할하시는 권철호 다니엘신부님(삼각지본당)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성당’, ‘엄마품에 안기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 성당’을 짓고자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런 구상은 심순화 가타리나 자매님(화가)의 손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다.
성지는 크게 아래의 성당과 한옥이 있는 지상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색감과 잘 어울리는 아늑한 주황색 계열의 색상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질팍한 재료로 마무리되어서 성당 내부와 주변 설비들은 그윽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나의 아담한 동산과 같은 모습이기도 하면서 성지가 모두 한 덩어리의 큰 예술작품인 듯하다.
큰 것에서 부터 하다못해 화장실 표지판 등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임신부님과 심순화 가타리나자매님의 영성과 예술적 영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느낌이다.
<입구>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 모성을 형상화한 심볼 마크>
<현관에서 내다본 풍경>
당고개(堂峴, 원효로 2가의 문배산 자리)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2가 만초천(蔓草川)변의 옛 이름이며
용산 전자상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작은 언덕에 조성된 신계역사공원에 인접해 있다.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지금은 주위가 고층 아파트로 에워싸여져 있어 외적 환경 측면에서는
그날의 슬픔을 되살리기에는 다소 거리를 느끼게 한다.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 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전국에서 200여 명이 순교하였는데,
이곳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참수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무렵 그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장사를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외진 한강 방향으로 나와 처형장으로 정한 것이 바로 이 당고개이다.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의
마지막을 장식한 거룩한 곳이다.
이때 처형된 10분의 신앙선조 중 9분은 성인품에 올랐지만 1분은 아직 오르지 못하고 있다.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한 분은 바로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인데,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시복·시성 대상자에 올라 있다.
왜냐하면 한 번 배교했기 때문인데 그 사정을 들어보면 정말 눈물겹고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성례 마리아- 심순화 가타리나 화가 제작>
여기서 우리는 이성례 마리아의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와 눈물겨운 모성애를 기억해 보자.
이성례 마리아는 교회 창립 초기에 내포지방의 사도였던 이존창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하였으며
18세에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박해를 피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안양 수리한 교우촌에서 남편과 4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포졸둘에게 끌려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본래 부모와 어린이를 함께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으나 이 집은 어머니와 다섯아들, 열다섯 살에 세살까지의
아이들이 함께 갇혔다.
또한 국법에도 없다하여 아이에게는 밥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어쩌다 밥 한 덩어리가 생기면 아이들에게 주고
굶었지만 아이들이 더러운 감방에서 축 늘어져 누워있는 것은 마리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자식들을 다 죽일 것 같아서 배교한다고 말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그후 아이들과 문전 걸식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던 중에 큰 아들 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유학 간 것이 알려져서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다.
막내인 스더왕만 데리고 옥에서 지내다가 모친 고초로 유도가 끊겨 어린 아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한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고문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밖에서 문전걸식을 하는 아들들 중에서 가장 큰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다니다가
어머니가 갇혀 있는 옥에 찾아와 창살을 붙들고 어머니를 목메어 불렀다.
그러나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마음이 변할까 돌아앉았다.
일찍 철이난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거지로 떠돌아 다니던 네 형제는 어느날 부잣집에서준 인절미를 가슴에 품고 옥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넣어 주었다.
어린 아들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는 그 떡을 어떻게 목이 메어 넘겼을까?
하루는 아들 야고보가 찾아오자 이성례 마리아는 아들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보호하고 친척집에 데려다 두고 지내면
마카오에 가 있는 네 큰형이 나오면 자연히 안배할 것이니 그때까지 잘 참고 지내거라,
그리고 며칠 있으면 엄마가 치명 당할 날이 닥칠 것인즉 그날은 오지를 마라”고 당부하며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어린 야고보는 가슴이 막히고 슬프기 그지 없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휘광이를 찾아갔다.
한푼 두푼 동냥한 돈과 쌀자루를 휘광이게 다 주면서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이러이러하니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청하니 휘광이도 감동하여 밤새 칼을 갈아 이튿날 당고개에서 약속을 지켰다.
먼 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본 네 형제는 슬프기 그지 없으면서도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보고
웃저고리를 벗어 하늘로 던지면서 “우리엄마 천당갔네, 우리 엄마 천당갔네”하며 울었다.
이성례 마리아는 39세로 순교하였지만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인간적인 모성애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성례 마리아와 그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함께 하루빨리 성인품에 오르도록 많은 기도를 올려야겠다.
<성당 내부-십자가는 심순화 가타리나 제작>
<성체조배실- 심순화 가타리나 제작>
<성인초상화 전시관 입구- 심순화 가타리나 제작>
첫댓글 성지 개발이 되고 있다고만 듣고 있었는데 정말 훌륭한 성지가 완성되었군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파트가 보이는 건 안타깝지만 번화한 곳에 있다 보니.. 조만간 찾아봐야겠어요.. 훌륭하신 신앙 선조들의 얼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주신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슴이 다 벅찹니다. 저도 감사드려요. 이런날 저도 불러주시지... 축일 같은 사람끼리 이러기예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