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다섯 시 반,
남편은 농업기술센터에서 충남 홍성으로 견학을 떠났다.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또 잠이 들었다.
항상 아련한 기억으로 꿈에서 깨어난다. 매일 두세 차례 꾸는 꿈이지만 얼마 전 꽃사슴이 내 품에 안겼다 다른 사람한테 도망가는 꿈을 꾼 이후로 개꿈도 매일 꾸다보면 언젠가는 사슴꿈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꿈해몽을 찾아보니 사슴에 대한 해석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꿈을 잘 꾸는 편이다. 낮에 잠시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꿈에 잘 나온다. 똥꿈도 잘 꾼다. 근데 결국에 똥을 깨끗히 치운다. 로또복권 당첨이 매번 날라가는 꿈이다.
아침 여덟시
남편이 이불을 잘 덮고 자는지 한번 깨고, 아침에 일찍 나서야 하는 남편이 일어났나 또 한번 일어나 확인하고, 알람소리에 또 눈을 뜨고, 비가 오나 창밖을 한번 내다보느라고 한번 깨고... 하루에도 서너 번씩 깨어나는 '나'라는 인간은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 얕은 잠에는 엄나무 베개가 좋다고 작년 봄에 나무를 베어왔는데, 별다른 효능이 없다는 사실을 아랫집 송옥댁 어른과도 맞장구를 쳤다.
일어나 제일 먼저 화목보일러에 불이 붙어 있는지 살펴보고, 하우스의 고추모종들과 인사를 한다. 두 달여를 하우스에서 노니다가 4월 말이나 5월초에 바깥구경을 하는 얘들은 아직 새끼손가락만한 게 그래도 잎을 6개나 달고 지낸다. 얼마전에 뿌려놓은 열무씨도 종종 줄맞춰 가지런히 나왔다. 내가 좋아하기 보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좋아하셔서 하우스 자리에 여유가 있는 우리집에 씨를 뿌렸다. 된장찌개에 보리밥, 그리고 여린 열무를 잘라 넣고 비벼먹는 입맛은 이곳에 와서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고추장을 꼭 넣는데 이곳 분들은 나물비빔밥은 고추장을 넣지 않는다. 담백함을 그대로 느끼는 이유인가
아침 아홉시
늦은 아침을 혼자 먹고 농한기 때 즐겨보면 "다 줄거야" 아침 드라마를 시청했다. 그 전에 천안함 침몰에 대한 뉴스기사를 잠깐 보고..
MB정권 들어서 참 죽는 사람도 많아졌다.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별 기사가 다 돌아다닌다. 개인적인 생각은 배가 제 스스로 암초에 부딪혀 부러졌지 않았나 계속 의심스럽다. 이건 순전히 내 직감이다. 배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두고 사고원인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다 줄거야"라는 아침드라마를 보기 전에 "르뽀 아름다운 귀촌"이라는 프로도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들에 비하면 나는 초짜.. 거의 5년 이상 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정착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현장감이 있고 조금은 현실적으로 보인다.
"다 줄거야"는 잠깐 안 본 사이에 많은 진전이 있고 내일이 마지막회인 듯 싶다. 막장에 가까운 드라마는, 욕하면서도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드라마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딱 두 사람 나온다.
아침 열시
송대댁 어른이 참나무를 구하러 오셨다. 표고버섯 종균을 얼마전에 참나무에 냈는데 나무가 몇 개 남아서 드렸다. 우리집이 귀농하는데 도움을 주신 송대댁 어른이시지만 한편으로 선비같으면서도 한편으로 꽤 보수적이시다. 아들이 최고다 라는 점에서!
그리고 남편을 항상 칭찬한다. 자주 듣는 칭찬도 자주 들으면 듣기 싫듯이 정말 도를 넘었다. 왜 내 칭찬은 하지 않는 거지? 흥!
마을 한복판이 시끄러우니 아주머니들이 한 두분씩 우리집 마당에 모이신다. 무릉댁, 송옥댁, 송대댁, 대호댁, 미동댁...
나중에 부녀회장인 화평댁까지.
평상에 앉아있자니 춥기도 하고 안으로 모셨다. 날씨가 쌀쌀하니 하우스문을 닫으라고 하신다. 내가 보기에 오늘 날씨는 시원한데 고추모종은 안 그런가 보다. 내 몸과 아직 일체가 되지 못했나.
사람들이 모이면 유자차나 모과차, 오미자차를 드리고 야콘과 마를 깎아드린다. 굉장히 좋아하신다. 특히 야콘맛에 좋다고 하신다.
나는 대화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많고 들어도 별로 정보가 없어 한 귀로 흘리기 일쑤다.
낮 열두 시
장마비가 오듯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아침에 기분만 좋았다면 영덕이나 주산지에 사진기를 들고 나가려 했으나 곧 포기했다. 버스는 8시, 13시, 18시 하루 세 대를 놓치면 외출은 끝이다. 자전거를 탈 수도 있지만 언덕 두 개를 넘어야 하는 고충이 있고 비가 오기 때문에 우산들고 나갈 수도 없다. 내가 아는 영월의 한 귀농여성자는 귀농해서 우울증에 걸릴 뻔했다고 한다. 주변에 말동무도 별로 없고 버스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으니 외출을 못해 그럴 수도 있겠다싶었다. 그래서 운전면허를 먼저 배웠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 친구만나러 나갈 일이 없으니 여간 심심하지 않다. 시골에서의 외출은 서울에서의 해외여행이나 다름없다.
낮 두 시
귀농하면서 원두커피는 꼭 먹게해달라고 남편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인스턴트 일회용도 마시지만 원두커피는 시간이 날 때 여유를 갖고 마신다. 천천히, 음악을 듣거나 신문을 보거나.. 순전히 그냥 한모금에 홀짝 마시는 일회용과는 다르다. 비싸더라도 일회용커피는 쉽게 마실 수 있으므로 더 마시게 된다. 그러니 값으로 따지면 가끔씩 마시는 원두커피가 훨씬 돈을 절약할 수 있다. 마을 아주머니 두 분이 원두커피에 반하셨다. 하지만 여럿이 오셨을 때는 일회용 커피만 대접한다.
히말라야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다가 요새는 전광수 커피를 마신다. 생각같아서 공정무역 커피에 점수를 주고 싶지만 입맛은 또 다르다. 대학다닐 때 미제를 반대하면서 콜라와 커피의 맛을 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드립커피의 향이 코를 자극하면서, 귀농하지 않았다면 바리스타가 되고팠던 아주 잠시잠깐의 꿈을 기억해낸다.
낮 세 시
소리바다에 들어가 음악을 다운받다가 김현식이 생각이 났다. 며칠 전 신문에서 김현식씨가 죽은 지 20년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대학교 1학년 때 학술부 엠티를 보령으로 가서 바닷가 민박집에서 기타를 치며 친구들과 "내사랑내곁에"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 때가 김현식이 죽었을 그 당시 6집 앨범이 히트를 쳤던 시기인 것 같다. 가녹음했다던 김현식의 그 목소리는 막걸리를 걸죽하게 마시며 부르는 듯한 탁한 목소리였지만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목소리였던 것이다.
노래를 쭉 듣다보니, "사랑 사랑 사랑"노래는 정말 신이 나는 노래다. 헤이~ 하면서 부르는 그 노래가 김현식 노래 중 가장 즐거운 노래인 것 같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브라더스 영화에서 황정민이 쪼잔하게 나와 드럼 치며 부르는 그 노래.
개인적으로는 "어둠 그 별빛"과 "넋두리"를 좋아한다.
낮 다섯 시
송옥댁 아주머니가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하신다. 송옥댁 아주머니는 60세, 송옥댁 아저씨는 66세. 아저씨 아줌마는 나와 남편에게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 같은 분이다. 가까이 지내다보니 우리를 전적으로 믿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잘 살펴주시는 분이다. 우리도 아줌마 아저씨를 좋아한다. 가끔은 너무 잘 챙겨주셔서 왕 부담을 느끼지만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보다 더 우리를 잘 챙겨주신다. 아마 두 분이 돌아가시면 부모님 돌아가신 것 만큼이나 슬퍼하고 힘들어 할 것이다. 우리 또한 아주머니가 안 계시면 아저씨 식사도 챙겨드리고, 도움이 필요하시면 남편은 언제든지 달려간다. 아저씨는 불의를 못 참는 분이지지만 한 때, 농한기 때만 되면 바깥으로 많이 나다니셨다고 하는데 요새는 두 분이 토닥토닥 싸우시면서 웃으면서 싸움이 끝난다. 참 귀여우신 분들이다.
두 분은 연세가 있으신데도 농사를 많이 지으신다. 농한기에는 얼굴에 살도 좀 붙으셨더니만 요 며칠 밭일 하시더니 얼굴이 퀭해지셨다. 건강하게 우리랑 오랫동안 사셨으면 좋겠다.
오늘의 두번 째 수다시간.. 저녁 아홉시까지 계속되었다. 마을을 남우세스럽게 한다는 두 집안에 대해 흉보는 일. 나도 겪어봐서 알지만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싫어하는 두 집안이 있다. 두 집안의 비리와 오만가지 잘잘못들이 밝혀지는데 소문은 항상 살이 붙어 50%의 잘못도 100%로 늘어나기 마련. 또 나쁜 소문은 더 빨리 퍼진다. 이 두 집안을 흉보는 일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올까.
오후 아홉시
남편이 올 때를 기다리며. 월요일에 또 비가 온다는 뉴스를 듣고 또 절망.
아, 올해 감자농사 망했다.
첫댓글 4월 1일 만우절은 장국영이 죽은지 7년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