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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주일 1부 예배 _ 사도행전 2:22-32 (사도신경 강해 4)
- 나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포피린 또는 프로피우스라는 사람이 쓴 <신탁의 철학>이라는 책에 보면 어떤 말이 나오느냐? 기독교를 믿는 아내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재난을 가져오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인을 어떻게 달래서 신들의 노여움을 풀어야 합니까? 라고 어떤 남자가 아폴로 신전에 신탁을 요청했습니다. 아폴로 신이 어떻게 대답하느냐면 그가 믿는 신은 공정한 로마의 재판관에 의해서 사형 판결을 받은 수치스러운 자로 누가 보더라도 그 죽음은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예수라는 말은 인용하지 않았지만 공정한 재판에 의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수치스러운 죽음이라고 말하고 유대인들이 믿는 신이 훨씬 이 아녀자가 믿는 신보다 낫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약 3세기 로마의 지성인들이 기독교를 한참 박해할 때 로마의 철학자들, 지성인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입니다. 약 250년경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 오리겐이라는 교부가 살았는데 이 교부가 쓴 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래 우리는 무식쟁이 여자 어린이 노예들의 동아리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성 노예 떠돌이 사회하층민들이 기독교를 믿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비난하니까요. 그리고 나서 오리겐이 말합니다. 머잖아 100년도 못 되어 이 노예들이 믿는 하나님이 로마의 귀족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세계의 종교사에서 이렇게 엉뚱하게 시작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종교는 이성이 수긍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동족에게 버림받은 사나이가 인류가 구원하는 구세주가 된다는 믿음은 만일 구약성경을 모른다면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가 됩니다. 오늘날 이성이 밝고 세상의 원리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공로주의 구원관, 열심히 일한 사람 머리 좋은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모든 행복을 독식할 수 있다고 믿는, 경쟁체제에 익숙한, 이걸 율법주의 구원관이라고 합니다. 율법주의 구원관은 율법을 지키면서 점수를 따서 구원을 얻는 건데, 공부 잘 하는 엘리트는 율법주의 구원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내가 좋은 수능점수 받아서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 갖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율법주의 구원관입니다. 오늘날 세속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극복하려고 한 율법주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공부해서 서울대학교 가고 좋은 대학에 간 사람들은 복지 정책에 대해서 굉장히 비난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국가가 공짜로 혜택을 준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쌍심지를 키면서, 쌍심지라는 것은 분노에 가득 찬 눈을 가리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쌍심지를 키면서 막 비난을 합니다. 그 사람들이 전부 다 새누리당 지지자입니다. 왜냐하면 공로주의 구원관은 철두철미하게 약자를 배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적당하고 정당한 경쟁이 있었다면 그래도 잔혹하지만 괜찮다, 그런데 이 세상은 처음부터 불합리할 정도로 불공평하기 때문에 이 원천적 불공평은 공로주의 구원관을 가지고 해결이 안 된다, 그건 공로를 뛰어넘은 자비가 필요하다, 이렇게 믿으면 구약성경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가향교회가 됩니다. 세상에서 공부 못하기를 노력해서 공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9등급이 되도록 40일 금식기도를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어느 새 9등급이 돼 있는 겁니다. 9등급도 개근해서 9등급 받는 겁니다. 공부 못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 읽고 동아전과 읽고 학원도 다 갑니다. 그래도 안 되는 게 9등급입니다. 실제로 머리가 나빠서 안 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나쁘다는 말은 미안합니다. 머리가 한국교육제도와 궁합이 안 맞아서, 50분에 어떻게 미분방정식을 그렇게 급하게 풀어요? 에디슨은 못 풉니다. 아인슈타인은 한국 수능시험을 보면 5등급 이상이 안 됩니다. 그렇게 빨리 문제를 푸는 사람은 비교적 독특한 머리를 가진 사람, 비교적 저 같은 사람이 유리한 제도입니다. 제 아내 같은 사람은 엄청 불리합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저 사람이 머리가 좋은 게 있는데 한국교육 제도로 말하면 제가 유리합니다. 빨리 대답하고 빨리 풀고, 그래서 원천적으로 정의로운 경쟁이라면 정의의 경쟁에서 약간 면류관을 갖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대부분은 이미 결정돼 있는 겁니다.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 시험에 수행평가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건 시험의 30%를 좌우합니다. 수행평가는 맞벌이 부부는 할 수 없는 겁니다. 완전히 엄마 아빠가 도와줘야만 풀 수 있는 것이 수행평가인데, 제가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왕숙천에 자라는 물고기 종류를 조사하고 그림을 그려오는 겁니다. 왕숙천은 구리 수택동 근처를 지나는 2급수인데, 왕숙천에 무슨 물고기가 있는지 조사하고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일단 왕숙천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멉니다. 그걸 맞벌이 부부들은 못합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곳은 학군이 굉장히 나빠집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육제도로 시작한 경쟁이 행복과 불행을 영구적으로 나누는 것은 이성으로도 수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이런 겁니다. 누군가가 잘못 살아버린 인생을 진짜 순종한 사람이 그 잘못 살아버린 인생의 파산 난 과정을 회복시켜주는 것, 기업을 물려주는 것, 어떤 사람이 마이너스 1만원의 불행을 가지고 있으면 플러스 2만원의 행복을 가진 사람이 나눠주는 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상호보합, 많이 가진 사람이 궁핍케 되고 덜 가진 사람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일종의 제로섬게임, 신적평형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무진장한 가치를 가진 순종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바친 순종의 무게는 아담 인류가 바친 모든 불순종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순종입니다. 아담인류가 진 부채보다 그리스도 예수가 가진 자산, 독생자가 바친 순종의 양은 아담인류가 잘못 살아버린 부채보다 크고도 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드렸던 순종은 빌립보서 2장 6-11절이 말하듯이 극단적인 순종,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을 보고 아담인류가 지었던 모든 불순종을 덮어쓰게 해 줄 가치를 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복종하는 복종과 순종은 아담 인류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등지고 살면서 행패와 패역과 반역적인 삶 전체가 하나님께 준 damage 실망감 좌절감 분노, 그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할 만큼 기가 막힌 순종이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이 1500년 동안 이 세상에서 부분적인 실험을 했고 그 실험의 완성에 나사렛 예수의 순종이 있다는 겁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예수님은 미리 정하신 원칙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까? 구약성경 전체의 논리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만민이 야훼 빛으로 돌아오고 이사야 52장 53장에 의하면 이 고난 받는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듯이 치명적인 손상과 상처를 입고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여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방식으로 세계만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미리 정하신 바대로 십자가의 죽음, 수치스러운 죽음에 내어주었던 이스라엘 운명을 압축적으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예수, 이스라엘이 세계만민을 하나님께 끌고 가기 위해서 고난 받는 종이었습니다. 이사야 42장, 49장 53장에 보면요. 이스라엘 민족 집단에게 위탁된 사명을 예수의 인격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해서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위탁된 사명이 수행된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관계를 모르면 예수님의 이 행위가 왜 세계만민의 죄를 대속하는지 알 수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세계만민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약속이 이미 있었고, 그 아브라함 후손의 절정에 이스라엘 백성과 그 이스라엘 백성의 절정에 예수님이 있었다, 이렇게 해야만 십자가의 원리는 드디어 이해가 됩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구약성경 안에서 우리 하나님이 나타내신 시종일관 그 방법 그대로입니다. 그게 뭡니까? 반역으로 심판의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은 한 번도 불순종하지 않는 놋뱀 되시는 그리스도의 상처 때문에 죄를 대신 용서받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는 나를 위해서 독생성자, 희생하시고 우리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 지고 가는 독생자를 주신 사건이 가장 큰 증거이고, 또 내 주변에 예수님 닮은 부모를 배치해두신 것, 내 주변에 예수님 닮은 선배를 배치해 두신 것, 내 주변에 주님을 닮은 친구들과 동료들의 동아리를 허락해 준 것,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통하여, 내 부모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가 바친 순종은 천문학적 자산 가치를 가진 순종이기 때문에 아담인류 안에 모든 인간이 지은 죄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순종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 인류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보증이 되기 위하여 죄와 벌 죽음 이런 악순환을 기어코 극복하고자 하는 뜻 때문에, 죄 때문에 벌 받은 예수가 인류를 부활시켜서 죄 사함의 은혜로 초청한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예수를 부활시켰습니다. 이건 일종의 드라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은 드라마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죄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은 그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예수가 영광스럽게 부활해야만 죄를 대신 지고 갔으며 죄 용서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가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었다는 것은 다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는 사실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 알 수 있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만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 사건은 입증되지 못한 난제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던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으로 승인된 사건이지만 과학적으로 실증적으로 입증되지 못합니다. 예수가 만일 부활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를 원했다면 예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해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려는 그 의도보다는 부활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믿어주는 과학적 증거에 추동되어서 믿어버리는 이런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길 것을 예상해서 예수는 사랑 때문에 믿는 사람만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육하원칙의 법칙대로 부활의 동선을 촬영하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신출귀몰 했습니다. 신처럼 나타났다가 귀신처럼 사라지는 게 신출귀몰 아닙니까? 그렇잖아도 복음서에 예수님이 귀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령 유령 하면서, 예수님을 보고 한 말이 유령입니다. 성경은 무서울 정도로 사실주의 문학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쳤다는 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첫 제자에게 얼마나 경악스러운 사건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한 번 보세요. 꼭 닫힌 밤에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이 옹기종기 참새처럼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노크도 안 하시고 방에 딱 나타나십니다. 얼마나 두렵습니까? 예수님께서 머리를 푸시고 갈릴리 바닷가를 왔다 갔다 하시는데 진짜 무서운 겁니다. 우리가 상상컨대 바다가 무서운 게 아니라 예수님이 더 무서운 겁니다. 예수님은 진짜 유령이라는 비난을 받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다운 데가 있습니다. ‘야 이 자식들 못 믿네, 유령과 나의 차이점은 하면서 생선을 잡아 생선 먹기 실시, 유령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칼슘을 섭취하고 소화할 수 있는 뼈가 있느니라’, 하면서 생선까지 기어코 잡수셨습니다. 이 사건은 굉장히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끝까지 믿지 못하니까 생선을 친히 드심으로, 부활한 후에도 우리가 먹는 존재임을 시범보인 거죠. 예수님은 얼굴이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부활한다 하더라도 얼굴이 완전히 바뀌지 않을 것을, 자아동일성, 옛날 내 모습과 부활한 내 모습이 거의 같을 것, 그러면서 아무도 성형수술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영광스럽게 바뀌어 있을 것을, 지금 내 모습에서 훨씬 더 업그레이드 돼 있는 모습이 부활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약간 미학적 outline은 바뀔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알았다는 걸 볼 때 약간 외모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어떤 대항적 성격이 있느냐? 예수님과 같은 분을 십자가에 처단하여 죽여도 소용없다는 대항명제가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상 내 죽음을 당신들은 좌우할 수 없다, 너 죽여 버릴 거야, 이렇게 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력을 비신앙화시키는 말이 부활신앙입니다. 죽음을 담보로 협박과 공갈과 압제를 하는 모든 악마적 권력의 최후의 무기인 죽음을 비신앙화하고 무효화하는 게 부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적 권력자들의 협박과 공갈과 무서운 압제행위를 끝장내는 것이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런 뜻을 알고 우리가 믿으면 우리 한국기독교우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자본주의 체제와 돈의 위력과 권력의 위력 앞에 무시무시한 대항위력이 될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부들, AD313년까지는 진짜 그렇게 믿었습니다. 나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라고 하고 나서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습니다. 그 진리 하나를 위해서요. 우리가 생물학적 목숨을 길게 많이 연장하는 게 영생이 아닙니다. 가장 빛나는 순간에 생명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생물화학적 목숨을 끝까지 유예하는 것은 매연이 엄청나게 많이 나는 자동차를 유지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우리 생물학적 목숨을 계속 부단히 유지하는 것은 후쿠시마 원자력 1기 4기, 방사능을 수십 톤씩 유출하는 핵발전소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의 목숨 자체가 영구적으로 유지해야 할 신성한 가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그 목숨만이 연장되고 영생까지 보장되어야 하지, 죄악의 하수구로 바뀐 인간의 입과 몸은 즉시 존재를 중단시키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후쿠시마 원자력 1기 4기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그 자체가 치명성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말 안에는 나는 영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 나는 죽었다가도 살려내실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신봉합니다, 나는 불멸의 삶에 내 인생을 걸었습니다, 나는 죽음 너머까지 이어질 영생에 내 목숨을 걸었습니다, 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구성된 이 세대의 삶에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얼굴에는 새 세계의 햇빛 동이 터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 삶 안에는 어떤 성스러운 새벽의 빛이 오느냐? 김회권과 가향 사람들의 삶을 보니까 이 세상의 욕망을 초탈하는 새로운 태양을 기다리고, 새로운 날들의 동터 오름을 기대하는 서광이 비쳐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우리를 볼 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는 희망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욕망,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의 욕망과 똑같은 욕망에 부단히 속박돼 있으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의 신들은 인간 욕망의 투사물에 불과하고 신은 인간욕망이 만들어낸 날조된 심리적 가공물에 불과하다, 이런 하나님의 모든 존재를 인간의 소망의 산물로 격하하는 포이에르바하의 환원주의적 공격에 속수무책입니다. 오늘날 그래서 자기의 열등한 욕망을 초월하지 못한 조용기 같은 사람은 초월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일부행위는 신앙의 행위가 있지만 그 사람의 전체행위를 볼 때 그 사람은 정녕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재산을 남용해서 온갖 보통 사람보다 훨씬 악행을 일삼으면서 끝까지 교회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창에 빠뜨리는 악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악행에 빠진 사람들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가 말한 것처럼 거짓된 경제체제와 정치체제를 뒷받침하는 상부구조 중의 상부구조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은 죽음을 담보로 우리의 목숨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들을 깨끗이 극복하는 대담한 대항위력입니다. 신앙고백 한 번 할 때마다 돈의 위력에서 해방되고 권력의 위력에서 해방되고 부당한 방법으로 편하게 살고자 하는 유혹에서 해방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편하게 살고 정당한 방법으로도 지도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도무지 그런 것들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무지 그리스도인들은 공직에 나갈 생각은 하지 말고 전부 다 9급공무원 이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한 방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그 지점이 내가 갈 수 있는 출세지점입니다. 공정성과 기독교적 신앙원칙을 훼손하고 진출하는 고위직은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공정한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돈이 하나님 선물로서의 내 재산입니다. 그런데 내가 기독교 신앙의 일부를 훼손하고 거머쥘 수 있는 부 권력은 우상숭배고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의 이정표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을 믿고, 내 죄를 대속하는 죽음을 믿고 그의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죽음을 무기로 악마적 지배권력자와 돈과 권력과 이 세상의 같잖은 것들이 우리 양심을 더럽히려고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고립주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자는 고립주의자가 될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당분간은 아니 적어도 4,50년간 일생 내내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공직도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믿고 부활을 믿다가 따돌림 당하는 그 사람은 새롭게 동 터오는 하나님나라의 지도자가 되고 리더십을 발휘하기 때문에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두려워하느냐? 내가 오늘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다가 따돌림 당하면 이 세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교회 안에서도 인정을 못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죠. 그러나 그렇지 않죠. 나쁜 교회에서 인정을 못 받습니다. 진정한 교회 교우들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동아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절대로 굶어죽지 않습니다. 신앙양심으로 살다가 직장에서 잘렸다? 절대로 굶어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그 사람에게 구제헌금을 안 갖다 줘도 하나님은 다 먹이시고 살리십니다. 과장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다가 따돌림을 당하고 고립주의자가 되고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는 비참한 경지를 항상 할 거다? 하나님은 항상 돌봐주지 않는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경지를 가 본 사람은 완전히 돌봐 주시고 새롭게 돌봐 주시고 하나님이 놀라운 방식으로 권고해주십니다. 우리가 최후심판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지상에서 이미 신원이 상당히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초보적인 정의감을 행사하다가 비영구적으로 회사에서 왕따 당할 수 있고, 사소하게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더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슨 영웅적인 신앙고백도 못하고 그냥 내가 고집이 세서 이런 거 아닌가? 내가 성격이 잘 못 됐는가? 우리 아버지도 예수 안 믿고 저랬는데, 자기가 자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 이게 성질 때문인지 십자가 때문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남들한테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내가 성격이 더러워서인지, 아니면 신앙원칙 때문인지 분별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굉장히 온유한 사람이 급진적인 말을 할 때에는 신적 격동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평소에 입이 험하고 비판을 잘하는 사람은 성령이 거의 격동을 안 해주십니다. 굉장히 온유한 사람이 급진적인 말을 할 때에는 신적 아우라가 발생합니다. 진짜 비판 잘 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뭐든지 쉽게 남을 정죄하고 뭐든지 쉽게 남에게 경솔한 판단을 일삼으면 그 사람은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이 고백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습니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로마서 6장 3-5절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믿는 거거든요. 둘째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내가 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부단한 성화를 추구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셋째 내가 십자가와 부활을 고백하다가 외톨이가 되고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 우주적 공교회에서 나를 영접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때 우주적 공교회를 믿는 겁니다. 잘못하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실컷 가다가 완전히 버림받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내가 속한 지역교회에서는 분명히 내가 버림받고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 된 우주적 공교회에서는 나를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반드시 돌봄 받습니다. 교회는 우리 가운데 누가 십자가를 지다가 삶이 거덜 났고 직장이 위태로운가 잘 봐줘야 합니다. 그런 것이 영적 감독입니다. 그게 목사입니다.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성도가 십자가의 원리와 부활의 원리를 믿다가 곤경을 자초했는가를 보다가 그를 도와주고 교회의 서포트, 교회의 물적 영적 지원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이게 영적 성직자들의 리더십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십자가를 져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를 지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자기 저주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토록 집착하는 이 생명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내 생명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야 합니다. 창조한 원래 내 모습은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부터 시작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김회권의 창조된 그 모습은 옛 자아 김회권이 못 박힐 때만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는 나의 더럽고 탐욕적인 욕심에 의해서 일그러진 부풀려진 겉사람 속에 숨죽이고 있는 옛 자아를 참된 그리스도의 생명앞에 내어놓는 행위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지만 아직도 세상과의 젖을 떼지 못하고 몰래 몰래 짓는 죄와 비기독교적 쾌락과 이런 것들을 끊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있어야만 비약적 성화가 일어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신앙성장이 일어나지 않은 대부분은 몰래 몰래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아젠다가 반드시 있는 사람입니다. 그걸 십자가에 못 박기 전까지는 영적 감수성이 자라지 않습니다. 말씀 보고 싶은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는 나의 모든 문화생활에 대한 과도한 탐닉, 소비생활에 대한 탐닉들, 난잡한 인간관계에 대한 정리,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갑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어찌하지 못해서 대중 속에 가서 파묻히는 것도 굉장히 나쁜 습관이거든요. 그래서 종로5가를 걸을 때는 샬롬이 임하는데 서재에 가서 기도하려고 하면 우주적인 절망이 몰려오고 귀신이 나올 것 같으면 굉장히 문제가 됩니다. 홀로 시간 있는 시간을 경영하지 못하고 군중과 소란 속에 있을 때 평안을 느낀다면 굉장히 타락한 거거든요. 마지막, 내가 우주적 공교회와 소속감, 다시 말해서 내가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더불어 고착돼 있고 결착돼 있고 유착돼 있는 우주적 공교회인 실체를 만끽하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 성화되지 못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찰싹 붙어 있는 사람에게 은사와 재능이 일어나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점점 옛 자아가 죽고 새 자아가 격려를 받습니다. 격려와 지지의 소공동체에 접목된 사람만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겁니다. 이런 것이 기초가 된 사람이 우주적 공교회에 붙어서 신적인 격려와 지지를 받는 그 사람이 직장에 가서 공적 질서에서 내 직업의 영역에 가서까지도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를 믿고 준행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세 가지가 안 된 사람은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를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대한민국은 돈과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좋은 이유는 나의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충족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 숭배는 자아의 욕망숭배입니다. 욕망이 필요 없는 사람은 돈이 필요 없습니다. 부시맨은 돈이 필요 없습니다. 부시맨에게 아무리 콜라 광고 회사에서 돈을 줘도 돈을 집어던졌습니다. 그 부시맨들은 달러가 필요 없는 겁니다. 욕망이 적은 사람은 돈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욕망이 큰 사람만이 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리가 풍요롭고 엄청나게 기름지게 살 생각만 줄이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좀 줄이면, 영구적으로 줄이지 않아도요. 공적질서에서 우리에게 돈을 줄 테니까, 또는 돈을 안 줄 테니까 또는 너를 거꾸러뜨릴 테니까 하면서 우리 양심을 훼손하는 협박과 공갈들, 직업적인 몰염치적인 것들, 이것도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를 믿으면 주님의 권고를 받고 반전을 반드시 경험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부활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발적으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신적 반전, 신원하심입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내가 모종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못이 박혀 매장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은 머지않아 나에게 신적 대반전을 주셔서 신원시켜 주십니다. 직장 내에서 있을 수 있고 직장 바깥에서 직장을 잃고 나서 나중에 더 큰 신원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대반전은 십자가를 지는 자의 고독안에서만 가능한 기대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묵묵히 따르는 고독이 축적된 사람에게만 이런 반전이 기대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대 반전이 없습니다. 헌금도 십자가입니다. 내가 가난하지만 나의 가난한 상태를 위태롭게 할 만큼 도와달라는 손이 올 때 드려지는 겁니다. 그때 텅 비었네, 내 창고가, 할 때 반전이 오는 겁니다. 이거 도와주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하면서 무정하게 내몬다면, 이런 재정의 사용, 시간의 사용, 내 물질의 사용 모든 면에서 현기증이 날만큼 옆구리에 물과 피를 쏟을 만큼 이런 사랑의 급진적 실험을 한 사람에게 부활이라는 반전이 옵니다. 신적 신원, 너는 옳았다, 너는 하나님의 우주적 몸에 붙어 있다, 이런 것이 옵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활의 반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반전이 없는 사람들은 우주적 공교회와 접목 됐다는 확신도 없는 겁니다. 자기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구원도 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우주적 공교회의 몸에 붙어 있지 않으면 자기가 구원 받았다는 것도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리가 없거든요.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세요. 그리고 나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나면 그 suspense와 긴장감과 몰락했다는 내가 손해 봤다는 느낌을 동반한 채 몇 주 지나가셨다가 갑자기 신적인 반전과 예기치 않은 우발성을 가지고 날 놀라게 해주시고 주님을 더 깊게 믿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돈을 써서 사랑을 실천할 일도 없고 시간을 바칠 일도 업고 재능을 바칠 일도 없고 평균적인 욕심으로 그대로 살면 교회 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종교적 활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실상 구원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영 안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십자가의 짐이 나타납니다. 주님의 영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설계한 agenda 이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극이면 비극이고 희극이면 희극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 사는지, 믿음의 대장부인지 테스트해야 합니다. 꼭 하셔야 합니다. 복음서를 읽으시든가, 여러분이 구원 받았는가 리트머스 시험지를 어디에 넣어봅니까? 복음서, 마가복음 8-16장까지를 10번 반복해서 읽어 보면 내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는 말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로마서 6장 8장 여러분께서 내일 공부합니다. 여러분께서 오셔서 자기가 구원 받았는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진짜 자기 죄를 사함 받았는지,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은 신유인력의 힘에 끌려갑니다. 죄를 사함 받자마자 만유인력 아닙니다. 신이 끌어당기는 힘,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이것을 느끼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일상생활 안에서 내게 억울한 일도 나타나게 하시고, 내가 십자가의 원리를 터득하여 부활 반전을 기대하면서 생매장 당했던 느낌과 몰락 당했다는 느낌과 영락했던 느낌까지도 쓰라린 감정을 느끼면서 터벅터벅 걸어갈 때 예기치 않는 반전이 나타나서 내가 의로운 자요, 내가 하나님 은총 속에 사는 자요, 내가 우주적 공교회 안에 사는 자임을 확신시켜줘요. 자가 점검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시대에 삽니다. 우리는 가톨릭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가톨릭은 신부가 다 알아서 해줍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때는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으로, 솔라 피데 오로지 믿음으로 솔라 그라티아 오직 은총으로, 자기가 각자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번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신약성경 일독을 하거나 시간이 없으면 마가복음 8-16장을 읽거나 로마서 1-16장을 10번씩만 읽으십시오. 10번 읽어야 합니다. 10번 읽는데 4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4시간 노트에 적어가면서 읽으시고, 첫 번째 읽을 때 깨달았던 구절과 10번 읽을 때 깨달았던 구절을 노트에 필기하십시오. 그러면 엄청 깨달아집니다. 그리고 시간 바쳐야 합니다. 성경 공부하는 시간의 성소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시간의 성소라고 합니다. 4시간 동안 시간의 포로에 잡혀 있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4시간 3시간 동안 붙들린 시간 자체가 없는 것이 문명생활의 죄에 참여하는 겁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잠을 줄여서라도 성경 읽어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몫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지침을 들었습니다. 이번 종교개혁주일날 죄사함의 복음의 진수를 만나고 성령이 종횡무진하면서 내 인생을 주장해주도록 우리 마음 문을 여서서 주님을 진짜 영접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정식으로 초대교회처럼 신앙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세례를 남발하고 직분을 남발했기 때문에 진짜 누가 성령 안에 사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가치를 안다면 죽여버린다는 위협적 악마적 권력자들의 말에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교회에 다니면서 내가 존재감도 없고 내가 직장에서 쫓겨났다면 얼마나 창피할 것인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신앙의 양심은 선반실에 놓고 가져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음으로 반드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 내 일상생활에 세상이 놀랄만한 반전이 일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언약 속에 산다는 확신과 반전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우리의 수치스러운 심판의 자리에 대신 오셔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해주시고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3일 만에 부활해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사는 법을 이제 알았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면서 가했던 숱한 거짓말들, 죽을래? 죽여버릴 거야, 돈이 없으면 끝난 거야, 이런 거짓된 말들을 믿지 않고 주님의 영에 사로잡혀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가난하지만 항상 천국을 지향하며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시민공동체, 대한민국의 타락한 자본주의와 완전히 대조되는 공동체, 돈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공동체, 우리의 재능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공동체,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공동체, 공산당도 놀라게 만드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를 한국교회에 허락해주시고 가향이 그 우주적 공교회의 일원이 되게 도와주소서. 주님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존재감이 위축돼 있는 아들딸들,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그 시간도 여전히 주님 안에서 풍요롭게 보내게 도와주시고 의미 있게 보내게 하시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그 기간도 주님의 또 다른 은총임을 기억하게 해 주옵소서. 이미 직장에 들어가서 고진감래 하면서 온갖 굴욕을 경험하는 아들딸들이 십자가 부활의 원리를 믿고 진리의 좁은 길을 선택하게 도와주소서. 우리 양심을 순식간에 오염시키는 거래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시고, 거래를 배척할 수 있도록 용기 주시옵소서. 이 헌물이 주님께 쓰임받길 원합니다. 주님의 교회 안팎 가난한 백성 살리는데 아낌없이 낭비되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교우들 가운데 환우들 지켜주시기 원합니다. 몸이 아파서 교회 오지 못하는 환우들과 육아에 종사하느라 심신이 고단한 우리 형제자매들을 지켜주시길 원합니다. 또한 해외 나가 있거나 군무에 있거나 출장 중이거나 장기간 교회를 나오지 못한 교우들을 안보해주시고 어디 있든지 우주적 공교회 일원으로 강력한 언약적 결속감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직장에서 현저한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 있습니다. 주님이여 이들이 주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며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믿음이 크지 않지만 이 세상에 잘못된 것은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 풍요롭게 의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신앙생활이 얼마나 몰입된 삶인가 매혹적인 삶인가를 시범보이는 저희 되게 도와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며 대항적인 신앙고백으로 이 세상의 모든 요구들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담력 갖길 희망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