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임숙녀 전교사님이 쓰신 자서전 <조신부님과 임회장님>입니다. 두 분께서 마지막 봉사를 하셨던 게쎄마니 피정의 집을 지나면서 두 분이 생각났습니다. 두 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피정의 집에서 많은 추억을 떠올렸었지요.
2007년 1월 7일에 작고하신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생전에 이 글들을 제 홈페이지에 실어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서석성당 친구들 카페에도 소개합니다.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자신의 글이 자신을 돋보이려는 자랑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을까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 글에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 있다면, 그런 취지를 헤아려주시면서 믿음 외의 목적으로 활용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임숙녀 전교사님께서 집필하셨으며, 조 필립보 신부님의 한국전쟁 회상기 '기나긴 겨울'에도 일부 인용된 바 있습니다. 저는 네이버 오픈 백과에 조 필립보 신부님이나 임 숙녀 전교사님 또는 서석천주교회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임숙녀 전교사님의 이 글을 토대로 하여 쓴 것입니다.
제가 네이버에 올린 글들이 여러 블로그나 카페 등에 옮겨진 것으로 보아서, 하느님께 평생을 봉헌한 두 분의 삶에 대해 감동을 느끼는 분이 많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옮겨간 것에 대해, 저로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 (이 글을 바탕으로 하여 쓴 저의 글과, 제 글을 옮겨 간 다른 게시판의 글 포함)에 대한 모든 권리는 임숙녀 전교사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목연생각'은 원문에는 없는 글로 제가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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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신자들과의 화합
나는 1970년 2월 10일에 경기도 포천군 신읍리에 위치한 포천본당으로 전근되었다. 포천본당은 원래 서울교구에 속해 있었는데 1969년 12월에 춘천교구로 넘어오면서 홍천본당의 조필립보 신부님께서 초대신부님으로 부임하셨다. 나도 신부님을 모시고 전교사로 가게 된 것이다.
전임 본당 신부님을 보필하시던 전교사는 70대의 노인으로 식복사를 겸하고 계셨다. 당시 본당에서는 지역을 여섯 반으로 나누어 관리했는데 반장님들은 대개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내가 부임한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였다. 여섯 반의 반장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한다.
"전교사가 너무 젊어서 우리와 호흡을 맞추기 어렵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야 존경을 받고, 뜻을 같이 할 것이 아닌가?"
회의의 주제가 그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내 나이가 40세였지만 나이에 비해 젊게 보여서 30대 중반 정도로 보여서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거의 매일같이 6명의 반장님들과 성가대 지휘자, 사목회장님 등 8분이 모여서 전교사를 바꿀 논의를 했다고 한다. 그 분들 중 반수는 반대를 하여서 뜻이 일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모임을 갖는 반장님 댁 사랑방에 세 들어 살던 진소령(군인) 사모님이 내게 와서 알려주었다. 그 분은 반장님들의 생각이 옳지 않기 때문에 내게 귀띔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는 학생과 어린이의 교육까지 맡아야 할 전교사이니 젊을수록 좋다고 본다는 것이다.
포천은 배타심이 강한 지역이라고 들었다. 그런 곳에 갑자기 외지 사람이 전교사로 들어오니 여러 모로 못마땅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를 필요로 하는 강원도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부님께 말씀드렸다.
"신부님, 저를 강원도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곳은 제가 필요한 곳이 아닌 듯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놀라서 그 까닭을 물으셨다. 나는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소령 사모님께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진소령 사모님은 특별한 이유는 없고 회장님이 너무 젊으니 곤란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는 6명의 반장님들을 부르셔서 말씀하셨다.
"지금은 중등부나 초등부 교리반이 없지만 앞으로 주일학교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어린 세대를 교육시키려면 노인보다는 젊은이가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임보나 전교사의 나이가 마흔입니다. 가장 일하기 좋은 때가 아닙니까?
전교사도 신부와 마찬가지로 주교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본신부(과거에는 신부님들이 자신을 지칭할 때 이런 용어를 썼음)는 외국인이므로 전교사가 없으면 사목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전교사가 가야 한다면 본신부도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씀을 마친 뒤에 사제관으로 들어가셨다. 당황한 반장님들은 서로 의논을 나눈 뒤에 신부님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그해 봄에 신부님께서는 단합을 위해서 반장님들과 사목회장님, 성가대 지휘자와 함께 설악산 관광을 다녀오셨다. 신부님 차로 2박 3일간의 일정이었다. 당시는 교통이 좋지 않던 때라 포천에서 설악산까지의 관광은 꿈도 꾸지 못하던 때다. 그분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신부님께 감사를 드렸다. 돌아온 뒤에는 각자의 의무를 수행하며 본당활성화에 힘썼다.
그해 가을에 나는 반장님들과 1박 2일로 청산면 개울가로 캠프를 다녀왔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반장님들과 마음을 터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탄절이 다가왔다. 축제 준비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때까지도 본당에는 청년회도 학생회도 없고 주일학교도 없었다. 본당신자도 7∼80명 정도였다. 그래서 가족같은 분위기 속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축제를 준비했다. 할머니들은 어린이 복장으로 무용 연습을 하게 했고, 반장님들은 외국의 여러나라 의상을 입고 그 나라의 고유 무용을 익히게 했다. 젊은 어머니들에게는 복음 성극을 준비시켰다. 어떤 아줌마는 연습을 하면서 너무너무 웃다가 소변을 보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완전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즐거운 시간이었다.
"웃어야 엔돌핀이라는 액이 퍼져서 젊어집니다. 많이들 웃으세요."
나는 그들의 분위기를 돋궈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재미있고 재능 있는 전교사를 알아보지 못한 자기들이 눈이 멀었다는 고백을 했다.
한해가 지나니 성모회원이 사십 명으로 늘어났다. 다음해 가을에는 미니 운동회를 계획했다. 장소는 인근의 작은 비행장(폐쇄되어 사용하지 않았음)으로 정했다. 성모회원들은 청백 양팀으로 나뉘어 옛날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껏 즐겼다. 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되도록 노력했다.
마침 면장님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가 우리를 봤다. 그 분은 비행장에서 놀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려고 오셨다가 부인들이 너무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 한참 동안 구경을 하셨다.
"부인들이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좋은 행사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면장님은 칭찬을 하시며 음료수까지 사다주고 가셨다.
기도만 하는 성당이 아니라 다양한 레크리에이션을 통해 인생을 즐겁게 보내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했다. 확실히 융화 단합이 잘 되고 젊어지는 교회가 되었다. 천주교가 재미있는 교회라는 소문이 나면서 전교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름 교리 학교
1970년 포천 본당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당시 포천 본당에 속한 공소는 일동, 이동, 송우리, 해룡, 백의리, 가산, 운천(전교사 계심) 등 7곳이었다. 본당의 신심 단체는성모회 하나뿐이었으며, 본당은 여섯 반으로 되어 있었다. 교리 교육 기관은 전혀 없었고, 예비신자도 없었다.
나는 본당에서 시작하여 공소 순으로 가정방문을 하면서 견진 대상자가 많고, 교리를 배워야 할 초등학생도 상당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970년 여름 방학을 맞았을 때, 본당 안에다 여름 교리 학교를 개설했다.
본당과 공소의 초등학생을 소집하니 130여명이 모였다. 저학년(1∼3학년)은 운천 전교사님이 맡았으며, 고학년(4∼6학년)은 전세권 학사님이 담임하시고, 나는 첫영성체 준비반(4∼6학년)을 담당했다.
"사람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려면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라. 그러면 나이가 들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잠언 22:6)"라는 말씀처럼 어린 시절에 하느님께서 가르치는 길을 가도록 깨우쳐 주면, 어른이 되어서도 훌륭한 삶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성서에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어린이 신앙 교육은 중요한 것이다.
부모님들의 협조로 130명의 어린 자녀들이 본당에서 합숙을 하면서 4박 5일간의 공부를 한 것은 보람있는 일이었다.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지금까지 부족했던 주일학교 교육을 보충하기 위하여 개설한 여름 교리 학교는 영신적인 훈련을 쌓는 좋은 기회였다. 어린이들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성경이야기를 배우면서 신앙과 생활을 연결시키는 공부를 했다.
4박 5일간의 여름 교리 학교를 마친 뒤에 다음날 어린이들을 귀가시켰지만, 첫영성체반 준비반 45명은2주간 더 공부를 했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차츰 철이 들면서 예수님을 알게되었고, 이런 공부를 통해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졌다. 첫 고백성사를 받아 깨끗하고 고운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신 뒤 부모님들의 축복을 받으며 잔치상 앞에 앉은 어린이들의 행복한 미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조신부님을 모시고 1970년 2월 19일부터 1977년 6월 30일까지 포천본당에서 일하는 동안 운천공소가 본당(70. 11. 20)이 되었고, 일동공소가 본당(71. 11. 7)이 되면서 이동공소가 일동본당에 속하게 되었고, 신평공소(76. 4월)가 창립되었다.
여러 세대의 개종
1972년 포천 본당에서의 일이다.
신읍1리의 구자신(당시 59세), 김순희(당시 55세) 부부는 슬하에 3남매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계셨다. 이 댁은 그야말로 명예복, 자녀복, 재물복을 골고루 갖춘 다복한 가정이었다. 종교는 불교였지만, 무당집도 드나들고 산신에게 치성까지 드리고 있었다.
포천농협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셨던 가장인 구자신님은 그 무렵에 몸이 불편하셔서 사퇴하시고 신병을 치료 중이었다. 나는 성모회장(방 마리아)의 소개로 구씨 가족과 만남이 시작되었다. 문병과 선교를 위해 자주 방문하는 사이에 사모님인 김순희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사모님은 의지가 굳고 예의바르며, 인정과 교양이 있는 분이었다.
구자신님은 차츰 병세가 악화되면서 통증이 심해졌다. 나는 그 분의 괴로움을 함께 하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해드렸다. 그리고 환자와 그분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절에서 스님이 오셨다. 나는 그 날 문병을 가서 구자신님의 방에 있었다. 스님은 아마 천주교 전교사가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듯하다. 사모님은 마당에 나가서 스님을 맞으며 말씀하셨다.
"죄송합니다. 우리들의 인연은 여기서 끝냈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찾지 말아 주십시오."
스님은 마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다가 돌아가셨다.
그 후 무당을 만난 사모님은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지난날의 미신 행위를 완전히 끊고 하느님 아버지께 귀의하셨다.
수십 년 동안 모셔왔던 집안의 대장군신을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고 여러 신들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모님은 남편의 병간호를 하면서 여러 생각 끝에 깨달음을 얻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야말로 의지가 굳은 분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군인 구자신님은 겸손한 분이었다. 그 분은 아픔을 참아내면서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여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분은 진정으로 참회하고 믿음을 고백하신 뒤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으셨다. 죄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신 그 분은,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고마워했다.
대세를 받은 지 며칠 후에 구자신 바오로님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하느님의 나라로 떠나셨다.
구씨 집안은 천주교회 식대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셨다. 신자들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기도와 예식을 함께 했다. 고인의 집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하려고 할 때 스님이 찾아오셨다. 옛정을 생각해서 불공을 드려주겠다는 것이다. 사모님은 이 때도 거절하셨고, 스님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본당의 조신부님께서는 묘지까지 함께 가셔서 하관예절을 해주시는 등 고인을 정중하게 전송했다.
고 구베드로(자신)님의 장남인 구본유(당시 38세)님은 약사로서 포천 시내에서 약국(구생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포천 시내에는 구씨 친척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례식을 마친 뒤 가족회의에서 구본유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옳은 종교를 택하셔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들도 아버님 신앙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나갑시다."
그로 인해 구본유님네 가족 5명과 친척 6세대가 입교를 결정했다. 7세대 중에는 젊은 2세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집에 귀신을 두 가지 이상 모시고 있었다.
며칠 뒤 김순희(고인의 처) 사모님이 오셔서 집에 있는 신들을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성모회장과 함께 신부님을 모시고, 마귀 소탕 작전에 나섰다. 우선 사모님 댁에 먼저 갔다.
광속에 쌀이 5되 가랑 들어 있는 항아리가 여러 개가 있었다. 이것을 엄합이라고 하는데 항아리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신이라는 것이다. 장독대 옆에도 쌀 항아리가 있는데 이것은 터줏대감이고, 대청마루 뒤 구석에 돈이 들어있는 작은북이 있는데 이것은 대장군귀신이라고 했다.
신부님은 성수를 뿌리면서 기도를 드린 뒤 항아리 쌀은 자루에다 붓고, 항아리는 멀리 내다가 깨뜨려버렸다. 북 속에 있는 돈은 내게 주시면서이 돈으로 십자고상과 성모 동고상을 사서 각 집에 들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북은 태워버렸다.
나는 신부님 말씀대로 성상 등을 사기 위해 돈을 갖고 왔다. 성모회장님은 떡을 해서 동네 잔치를 하겠다며 쌀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신부님은 기꺼이 드렸다. 일곱 세대에서 나온 쌀과 돈이 상당히 많았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물론 꿈은 평소에도 자주 꾼다. 하지만 대개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흐릿하거나, 기억이 나더라도 무시해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의 꿈은 생시같이 또렷했고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꿈속의 그 날은 주일이었다. 주일 미사 준비를 위해 제대를 차려 놓은 나는 미사 5분전쯤 오르간 옆에 앉았다. 오르간은 옆으로 놓여 있기 때문에 출입구를 통해 성당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성당 문이 열리면서 흰 광목으로 지은 바지저고리를 입은 키 큰 남자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누구를 찾는지 두리번거리던 그는 나를 보자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목을 누르면서 고함을 질렀다.
"내 돈 왜 가져갔어? 내 돈 내놔!"
어찌나 세게 누르는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성당 문으로 하늘색 허리띠를 두른 고상하게 생긴 여인이 들어오셨다. 그 분은 내게로 다가오더니 나의 목을 누르고 있는 그 남자의 손위에 자신의 고운 손을 올려놓으며 말씀하셨다.
"나하고 얘기하자."
그러자 내 목을 조르던 손이 힘없이 풀렸다. 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그여인의 앞에 서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 남자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나를 구해주신 고상하신 여인은 누구일까? 허리에 푸른 띠를 두른 것으로 보아 성모님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모님이 꿈속에서까지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그 무렵 개종한 구씨 집안 7세대는교리 공부를 열심히 했고, 1∼2년 사이에 모두 세례를 받으셨다. 당시 입교한 고 구베드로님과 김루시아님 가족의 7세대 25명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