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몫에 태인 십자가”(눅 9:23-27) 2012. 4.29.
오늘 본문 23절에 나오는“제 십자가”를 본문주제로 삼으면서, 설교제목으로는 그 의미를 새롭게 하고자 찬송가 339장 가사에 나오는“내 몫에 태인 십자가”로 바꿔보았습니다. 특별히 본문 첫 절인 23절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입니다.
왜 또 갑자기 무거운 설교를 하려나 생각하실 분이 혹 있을지 모릅니다만, 우리의 부활신앙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신앙이듯이 십자가신앙 역시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신앙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선 오늘의 본문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 특별한 사명자에게만 부여된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니까 좀 믿음이 든든해졌다고 판단되는, 복음전파 후기의 12제자들에게나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한 번은 복음전파 초기이고(마10:38-39) 다른 한 번은 후기에(마16:24-25) 나옵니다. 이같은 고통과 희생과 사명감을 고취하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숨기시지 않으시고 복음 전파 초기부터 시종일관되게 말씀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유사한 말씀입니다만 마7:13-14절에도“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처음부터 숨기지 않고 단호하게 우리에게‘좁은 길 좁은 문’을 제시하셨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새로 예수 믿기로 결단하고 나오는 초신자에게도, 아니 아직 결단도 못한 일반인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이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말씀을 하신 셈이지요. 오늘의 본문만 보아도 이 말씀을 직계 12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님이 분명합니다.“무리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였거든요. 마가복음의 병행구를 보면(막8: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즉“무리와 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 말씀은 특별한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일반 무리들에게 주신 보편적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정예 제자들을 뽑으시려는 목적으로, 많은 무리들 중에서 자원하여 지원하라고 하신 말씀도 물론 아닙니다. 같은 병행구인 마태복음 10:38-39절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또 오늘 본문24절에도“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내게 합당하지 않다’,‘제 목숨을 잃는다’는 말씀은 우리가 일반으로 얻는 구원과도 연결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당사자 예수님은 십자가 없이 가시면서 우리보고만 자기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심이 결코 아니지요. 후에 몸소 보이셨습니다만 분명 십자가 뒤에는 영광의 부활이 있기에, 아니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기에, 우리 모두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단호하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감언이설로 속이지 않으시고 단호히 좁은 길인 십자가의 길을 밝히 제시하신 것입니다.
첫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자기 십자가’즉‘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턱대고 내게 힘들고 어려우면 모두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각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또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십자가 일 수 있어도 저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사람마다 주어진 몫의 십자가의 내용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란 하나같이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어려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1:24절에서 이를“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면서“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밝히셨듯이,“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믿지 않은 어느 지방의 종가집에 시집간 그리스도인 자매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그 십자가를 끝까지 인내하며 짊어지고 갈 뿐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감내함으로 그 집안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이후에 도래하는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마태복음5:10-12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여기서 중요한 점은“나로 말미암아”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짊어지는‘십자가’라는 점이지요. 괜한 자신의 죄로 인해 당하는 십자가는‘내 몫에 태인 십자가’일 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는, 비록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며 그렇다고 내가 특별하게 잘못한 것 같지도 않는데 애매하게 억울하게 받게되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므로 인내하며 감내하며 산다고 한다면 이 역시‘내 몫에 태인 십자가’로서 마침내 영광의 부활로 승리케 하시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19-21절에“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내 몫에 태인 십자가’란 신앙생활중 어느 한때 통과의례처럼 한번 치루고나면 되는 일과성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절)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십자가는 무덤에 버리는 것이지 중간에 버릴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바울 사도의 경우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지요. 고린도후서12장에 나옵니다만 사도 바울은‘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하면서 이를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해결은 고사하고 도리혀 평생 지고 살아야 할‘내 몫에 태인 십자가’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응답하시기를“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시자, 바울은“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12:7,10)고 오히려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하였고,“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고 하였고,“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0-11,14)고 고백하고 있음이 바로‘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는 삶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십자가 이후에 다가올 부활의 영광을 믿었기에 기꺼히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하-18)고도 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늘 반복하여 생각합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젊은 부자 관원의 실패 사례를 또 여기서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역시 분명한 영생의 소망을 지닌채 올바른 목적을 갖고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만“자기를 부인하는”일에서부터 실패하였으니 십자가는 고사하고 주님도 결국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엘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영국)는 말하기를,‘새에게는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하여 나간다. 신자는 그 십자가가 짐이 되나 그것으로 천국으로 향하여 전진하게 된다’고 한 것은 아주 적절한 말인 줄 압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할당된 십자가가 있으니 이를 내려 놓으려 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죽하여야 빌립보서1:29절에도“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을까요? 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자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나, 어머니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올라간다는 겁니다. 이유인즉 어머니는‘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내하며 오직 희생과 헌신으로 일관하여 살기에 고귀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성경 히브리서에는‘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우리 앞에 당한 경주’로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같은 말씀인줄 압니다. 히12:1-3절입니다.“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찌 나만 고난을 당하며 내게만 이같은 십자가를 주셨냐고 하지 말라십니다. 마귀는 우리로 늘 불평 불만케 하여 신앙에 실족케 하려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같이 우리를 성렬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7-10)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