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나라의 경제가 어려원 모두가 허덕일때 우리는 결혼을 하였다 아내는 사범 졸업하고 옥봉으로 발령나 고생하다 군산으로 전입되어 중앙에 있을때다 그도 역시 가정이 어려워 결혼후에 우리집으로 친정의 외상 쌀값을 받으러 와 제촉으로 받아야 헸고 나도 결혼 준비에 보테고저 단돈 100만원을 은행에서 신용으로 꾸우려 헸으나 내 직장(선관위)에 대한 인지도 가 약헤 국민은행(영동 파출소 건너 앞 소재)으로 부터 유력인사의 보증 요청으로 법원 군산지원장 윤종섭 (인천 분)을 은행까지 모시고 가 보증능증을 서게 하고 꾸어 썼다
결혼식장은 군산 동화예식장이다. 식장엔 내 "소녀의 기도"를 좋아헤서 식전에 공보계의 내 후임 장석우(옥구출신)로하여금 내가 좋아하는 소녀의 기도"를 태이프에 녹음케 하여 장내 방송이 되게 부탁하여 분위기를 띠웠고 주례는 군산시장 金三柱가 섰다
그 때의 축이금은 직자에서 회람을 돌려 금액을 기재케하고 월급 날 회게계에서 공제 하여 받을 때여서 내빈들은 축의금 외에 특히 은행 여직원들이 차잔 셋트를 들고 왔는데 난 눈인사만 건넸을 뿐 지금도 누군지 모른다 아네에게 물으니 모른단다 어쩌면 우리 청 여직과 은행(지금 이름은 기억 나지 않지만 군산경찰서에서 한국은행으로 가는 중간 오른쪽의 은행)여직원 과의 모임의 결과 아니었을까? 식이 끝나고 신혼부부는 서병숙?괴 그 일행의 인사를 받으며 시보레 택시를 타고 떠났던 기억이 나고 또 처가에서 교장이 노래를 부르라 하여 우리 부부는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을 불렀던일도 생각난다
우리는 신혼 여행이랍시고 장항선을 타고 온양으로 가 무작정 온양여관으로 찾아들었는데 새벽이되니 버스 앤진소리가 시끄러워
잠도 설치고 알아보니 여관 뒤가 버스 주차장인듯하여 실소헸던 기억이 난다.[중략]
2013.6.8 결혼 50주년 날이다 서양사람들은 금혼식란다
나는 우리가 큰 난관없이 건강하게 살아아온 오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마침 금값도 내린다고하여 금반지 5돈짜리 두개 장만하여 하나씩 기념하려한다 하며 아이들에게 말은 말라 헸는데 며칠 지나 생각이 바뀐듯 금반지는 필요 없고 돈을 500만원 달란다. 나도 존 염출에 자신이 없어 금반지도 하나만 주문헤 둔 상테인데 순발력 이 약한 나는 많이 당황됬다 차라리 금혼식 말 꺼내지도 말걸 하고 후회헸다 식사는 내 상우회 회식하는 경북궁 사당점에서 먹기로 헸다.
화제는 유쾌하지 못하고 균이 씀씀이 지원 문제로 이견만 노출되어 평행을 달렸다 더구나 아이를 하나 더 낳으라고 그렇게 간청헸건만 교육 잘시키기 위헤서도 하나만 낳는다고 고집하여 왔으니 하나는 스스로 책임지고 가르쳐야 맞는 예기다 .
나는 소신이 수입네 지출을 워칙으로하고 사교욱도 남이 한다 헤서 따르려 하지말고 감당할수있을만큼만 시키되 더 큰 성취를 꿈 꾼다면 스스로 절약하거나 부업을하여 비용을 창출하거나를 강조한다 아내는 무리헤서라도 지원하는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이고 경혜 자기도 하나만 키운다고 동병상련으로 그에 동조한다 아버지의 생각보다 저들 생각애 더 중요하리라 인정한다 하지만 너희는 눈앞에 네 자식만 보이고 세상의 자식들을 볼 겨룰이 없겠지만 이 아버지는 손녀도 보지만 조상도 보아야 하고 세상의 남의 자식들도 본단다 어제 신문 봤지 이혼한 엄마는 아들을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고 그 아버지는 아들을 버렸는데도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공부하여 하바드를 전학년 장학금으로 합격했단다. 부모로 부터 버려진 이 아이의 성공을 뭐라 설명하여야 하겠니?
그리고 아내는 유언도 남겼다 연금 240 받는데 3형제가 똑 같이 받으라고 말이다 들으며 생각한것은 내연금도 그와 비슷한데
나도 경쟁하듯 내 죽으면 3형제가 똑 같이 나누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참았다. 그 유언의 말이 옳을려면 자기 연금 만으로 살림이 가능하여야 하는데 현실은 돈이 부족하다니까 말이다. 나도 죽어 엄머 처럼 내연금을 다 너희들에게 주어 버리면 네 엄마는 자기 염금만으로 살림을 살아야 할 터인데 그게 불가능할것 같아 . 제발 부탁은 내 연금까지 엄마가 다 받아 쓰되 빚이나 지지 말고 살았으면 하는게 지금 부터 내 걱정이요.내 희망이란다
나는 세상의 아비와 아들을 본단다
균이나 진이랑 같이 근무하는 비슷한 처지의 아들들이 다 자동차를 갖고 다니는것이 아니라 자동차 없이 버스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는것이다. 그러면 내 아들들도 그 들처럼 적어도 반만 차를 갖고 다니고 반은 차를 아비에게 양보하여 버스타고
다녔으면 하는 것이고
세상의 아버지들중 1급 지위의 연을 받는 사람들은 다 차를 그것도 큰 새차를 갖고 다닌다는 것이다. 하다 못헤 4급 대우나 받는 초등학교 교장출신들도 차 몰고 골프치고 다니는데 내 병원 갔다 오느라 관악점 건너까지 그 긴 횡단로를 건너 허술한 노인 한둘 아주머니 와 젊은이들과 함께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내 처지를 보면 승용차를 타야 할 나는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야할 아들은 승용차를 타니 내 늙어 가는 내 말년이 처량하고 짐에 돌아와 통증이 심한 무릅에 쑥찜을 하며 세마을 지도자나 계몽운동가가 된양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